성모님 관련 상식

아끼다의 성모님

아끼다의 성모님

사사가와 수녀가 만난 수호 천사

일본의 아키타시의 근교인 유자와다이 언덕에 자리잡은 재속수도회인 성체봉사회의 수도원에선 아녜스 사사가와 수녀가 그녀의 수호 천사로부터 방문을 받았으며 나무로 조각된 성모상으로부터 3번에 걸쳐 인류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아키타는 일본 가톨릭 역사에서 1624년에 순교자를 낳은 역사적 땅이었다. 이는 사사가와 수녀의 수호천사가 그녀에게 "성모님께서 이 땅 아키타를 선택하시어 말씀을 보내셨는데..." 라고 알려줌으로써 그 역사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청각의 상실

1973 년 1월 말경부터 사사가와 수녀는 두 귀의 청력이 둔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성당 일이 바빠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3월 16일 금요일 아침, 성체봉사회 본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돌연 청력을 잃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벨이 울리는 소리는 들었으나 수화기를 드는 순간, 상대방의 소리나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병원에서의 진찰 결과 왼쪽 귀는 전혀 듣지 못하는 전농(全聾)상태이고 오른쪽 귀도 80데시벨이라는 상태로서 분명히 진해성 난청이며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진단했다. 소리의 세계로부터 차단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성모상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받기 위한 시련의 준비가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한편 사사가와 수녀에겐 기나긴 고난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사회복귀 훈련의 하나로 상대방의 입술을 보며 말을 이해하는 독순술(讀脣術)을 배워야 했다.

신비의 빛

1973 년 6월 12일 화요일 사사가와 수녀는 성당에서 기도하던 중에 감실에서 신비스러운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날 있었던 신비한 경험에 대해 그녀는 사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토 주교에게 나중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감실문을 열려고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는데 돌연 감실에서 눈부신 빛이 나타나 그 광채에 쏘인 순간 정신없이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물론 감실을 열 용기도 없었습니다. 어림잡아 한 시간 가량 그러고 있었을까요. 그 무슨 위력에 얻어 맞은 것처럼 그 빛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두려움과 떨림으로 머리를 들 수 없었습니다.
후에 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면서 죄 많은 저를 비추고자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빛으로써 당신 자신을 시현해 주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제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몹시 당황했습니다.

전 에 묘요꼬오 순회 성당에 교리교사로 근무할 때 몇 번이고 감실문을 열고 성체조배를 드린 적이 있었지만 이와 같은 경험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만큼 제 머리가 이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돼 다시 한 번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려보았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난생 처음 겪는 너무나 이상한 체험인지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품고 그날 밤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틀 후인 6월 14일에 같은 경험을 하게 되어 그것이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엔 감실에서 나온 빛을 둘러싸 듯이 옆에 있는 빨간 성체 등불이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고 맨 윗부분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며칠 후인 6월 28일, 예수성심축일 전날인 목요일의 성체조배 시간에 일어난 일을 사사가와 수녀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잠시 있으려니 전에 세 차례나 본 것과 똑같은 눈부신 빛이 성체에서 방사되어 그 번쩍이는 빛살을 감싸는 듯한 안개와 연기 같은 것이 제단 둘레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로 무수한 천사와 같은 모습들이 나타나서 일제히 성체 쪽을 향해 조배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 그 놀라운 광경에 빨려들어 무릎을 꿇고 그 빛을 향해 조배 드렸습니다. 그리고 혹시 누가 밖에서 불을 피워 연기가 제단에 반사된 것이 아닐까 해서 뒷편 유리창문을 힐끔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별로 그러한 것 같지도 않았고 그저 제단만이 이상한 빛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체에서 나오는 광채는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의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체조배의 시간이 끝났어도 그대로 엎드린 채 있었으므로 수녀들이 성당 밖으로 나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천사의 방문

이튿날인 예수성심축일인 6월 29일엔 사사가와수녀의 수호천사가 그녀를 방문하였다. 그 천사는 그녀가 4년 전에 묘오꼬오 성당에서 교리교사를 할 때 심한 감기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서 의식불명이 되었을 때 방문했었다.

당시에 그녀가 나흘 동안 의식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낯선 부인이 그녀의 침상 곁에 나타나 로사리오 기도를 같이 하였으며 로사리오 기도의 각 단 끝에 다음과 같은 기도말을 덧붙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예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구하시되 특히 주님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그 기도말은 1917년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세 어린이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으로 당시엔 아직도 일본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때의 그 천사가 다시 4년 후에 방문한 것이다. 그 상황을 사사가와 수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묵주를 쥐고 기도를 시작하려는 순간 하나의 형체가 바로 내 오른편에 나타났습니다. .. 저의 오른편에 나타난 형체란 것은 틀림없이 4년 전 바로 그때의 그분이었습니다. 저는 무의식 중에 묵주를 꼭 쥐고 한 알 한 알 묵주알을 굴리면서 그분에게 맞춰 천천히 기도를 했습니다. ... 그 후 묵상으로 들어가 조금 지났을 때 어제와 똑같이 성체에서 발하는 매우 강한 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엎드려 조배 드리고 눈을 떠보니 또 다시 안개인지 연기인지 부드러운 광선이 제단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수많은 천사들이 나타나 빛나는 성체를 향하여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라고 찬미하는 드높고 맑은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제 귀에 울려왔습니다. 그 소리가 끝나자 동시에 제 오른편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주교님이 지으신 '성체봉사회의 기도'였기 때문에 저도 그 소리에 이끌리어 무릎 꿇고 그에 맞춰 기도했습니다. 이어서 '모든 백성의 어머니'의 기도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전술한 그 부인의 것이었는데 이러한 기도 소리는 앞서 '각 단의 끝에 바치세요.'라고 지시한 때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깨끗해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울려 퍼지며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에 맞춰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문득 앞에 장궤하고 계시는 주교님의 옷 등에 문장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저까지 모두 7,8명이 주교님 제의 양옆에 내려진 붉은 끈을 함께 잡고 있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환상같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자 그러한 광경은 사라졌습니다. 그 후 얼마 동안이나 장궤한 채로 기도하고 있었는지 한 수녀가 어깨를 두드릴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함께 루르드의 성가를 부르며 조배를 끝냈던 것입니다.
이때의 일도 '별다른 일이 있거든 보고하라'하신 주교님 말씀에 따라 모두 설명해 올렸습니다. 그때 주교님 제의 등에 문장을 다셨느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그런 것 달고 있지 않다는 대답에 'M자 위에 성작과 성체가 있는 모양으로..'라고 설명하자 그것은 내 문장이라고 놀라셨습니다. 7,8명의 수녀님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제의 끈에 매달려 있음을 설명해 드렸더니 주교님은 무엇엔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성모님의 첫 발현

7월 6일 새벽 3시경에 손에 나타난 성흔의 격통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이루고 있을 때 어디서인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이전에 사사가와 수녀와 함께 기도했던 그 수호천사의 목소리였으며 성모님의 손의 상처는 더욱 커서 깊이 앓고 계시다며 가서 보기를 독촉하였다. 그녀가 찾아본 성모상은 신비하고 눈부신 빛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너무 놀라운 나머지 그녀는 엉겁결에 무릎을 꿇어 성모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날 사사가와 수녀는 성모님과 함께 성체 봉사회의 기도를 하던 중에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성심이여, ...'를 성성모님께서 '성체 안에 참으로 계시는 예수의 성심이여...'라고 하시고 당황해 하는 수녀에게 '이제부터는 참으로라는 말을 덧붙여라' 하시며 그 말에 힘을 주셨다고 했다.(이토 주교가 기초한 성체봉사회의 기도문에는 '참으로' 라는 말이 없었음)

그 후로 두 번의 발현이 더 있었으며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발현은 1973년 10월 13일에 있었다.

그리고 악마의 방해

1973 년 8월 4일, 당시의 전례력으로 성 도미니꼬의 축일에 사사가와 수녀는 저녁의 성무로 성당에 들어가다가 별안간 등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강하게 잡아채는 데 놀랐다. 불러 세우는 행동치고는 너무 격렬하고 난폭하였기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웬 검은 그림자가 덮치고 있었다.

황급히 손을 올려 어깨 언저리를 떨쳐버리려 했으나 바위와 같은 힘으로 꽉 눌러 쥐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몸서리치면서 이내 '아베 마리아! 수호천사여, 도와 주세요!'하고 소리쳤다. 그때 전의 수호천사가 모습을 나타내 그녀를 성당으로 인도하듯이 앞장서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어깨를 짓누르던 힘은 사라졌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성수를 손끝에 찍어 십자성호를 긋고 입당하여 자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의 일이지만 인위적인 영역을 초월한 이상하고 무시무시한 습격이었다.

그 후에도 똑같은 일이 같은 장소에서 다시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주여, 도와주소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여 즉석에서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악마의 공격임을 본인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는 마음의 감미로움과 심오한 평안을 남기는데 반하여 이와 같은 경험은 참으로 기분 나쁜 뒷맛과 공포를 남기기 때문이었다.

성지 전문 여행사 사람과 여행

메주고예(Medugorje)의 성모님

메주고예(Medugorje)의 성모님

1981년부터 유고슬라비아(지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조그마한 산골마을인 메주고예의 6 어린이에게 목격되기 시작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 날 오후 늦게 메주교예의 포드브르산에서 전방 2,3백 야드쯤 되는 지점에 밝게 빛나는 사람의 모습을 산책하던 『미르야나 드래지세빅』(16세)과 『이빈가 이반코빅』이 보았으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실리 만무하다는 농담을 하며 마을로 내려왔다.

하지만 다음날 『이빈가』 『미르야나』 『마리야 파블로빅』 『비카 이반코빅』 『이반 드래지세빅』과 『야코브콜로』 등 6명의 청소년들이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유고슬라비아 정부 당국의 비상한 관심속에 감시를 받고 있으면서도 사방으로 널리 알려져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틀림없는 성모님의 발현이라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제관, 그리제바코산의 십자가 곁, 야고보 성당등 자리를 옮겨가며 발현하시는 성모 마리아는, 『기도와 단식』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하시며, 자연법칙을 중지시킬 수도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계신다.

메 주고예의 여섯 어린이들은 그들이 목격하기 시작한 발현이 15년이 넘도록 지속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현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또 매일 이루어져 횟수로도 벌써 5000회가 넘게 이루어지고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메주고예에서의 발현.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인류를 향한 회개와 평화의 메시지, 앞으로 있을 경고와 기적의 표징을 포함하는 비밀의 중대성 때문에 1981년 이후부터 세계 각지에서 이천오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순례를 하고 있다. 인류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하느님의 징벌을 피하기 어렵다는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는 인류가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메주고예의 초자연적 현상

메 주고예는 현재 진행 중인 성모 발현의 장소이다. 그곳에선 그 규모는 작지만 여러 기적이라든지 초자연적 현상이 수 없이 일어나고 목격되었다. 그곳을 다녀 온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공기는 웬일인지 범상치 못한 야릇한 느낌을 준다고 하였다. 그들의 느낌이 선입감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러한지는 다녀 온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여러 신비스러운 사건의 보고들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를 주었다.

메주고예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았던 신비 현상 중의 하나가 태양과 관련된 것이다. 일반적인 그리고 비교적 쉽게 관측되는 태양과 관련된 초자연적 현상은 태양이 평소와는 다르게 그 빛을 잃어 창백하게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메주고예에서 뿐만 아니라 파티마, 가라반달, 베타니아등 성모 발현이 일어난 곳에서는 수 없이 목격자들에 의해 보고되어지는 사건이다. 메주고예에서 역시 많은 현장 방문자가 이를 목격하고 보고들을 하고 있었다.

(사진; 신비로운 빛의 현상)

메주고예에 관한 글을 써서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던 웨인이 메주고예에 도착한 날 그는 이 희한한 태양의 변화를 그의 일행들과 함께 목격하여 그 내용의 일부를 7번째 기고문에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조금 구체적으로 그 사건을 살펴보면 그들이 유고슬라비아에 도착하여 메주고예에서 약 5km 떨어진 시트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버스를 타려고 할 때 기가막힌 태양의 변화를 목격한 것이었다. 이때 시간은 오후 6시 30분으로 발현이 일어나는 시간대이었다.

한 여자가 우연히 태양을 쳐다보고서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모두가 머리를 돌려 이를 보았고 석양 무렵의 태양은 그 주위에 코로나가 있었다. 그리고 일식 때처럼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없이 태양을 쳐다볼 수 있었다. 더구나 태양 가운데에는 흰 원반같은 것이 있었다. (발현의 기록들에선 태양이 그 빛을 잃을 때 창백해지며 흰 원반처럼 된다고 표현들을 하였는데 웨인 일행은 태양 변화의 진전을 처음부터 보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묘사를 하였다.) 더구나 흰 원반 뒤의 태양이 빙글빙글 돌며 코로나를 통해 여러 가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고 그는 그가 쓴 책에 기록하였다.

보다 진전된 태양과 관련된 기적 현상으로 태양의 춤을 들 수 있다. 1917년 파티마에선 태양의 기적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태양의 향연이 벌어졌었다. 벌써 80여년 전이지만 사람들은 기록과 이야기를 통하여 그 규모와 그 당시 현장에서 느꼈던 사람들의 감정을 알고 있다.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메주고예에서도 그와 유사한 태양이 춤추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150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를 목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메주고예에서의 태양의 기적은 발현 초기인 1981년 8월 2일에도 일어났다. 석양 무렵에 태양은 그 중심 축을 따라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또 사람들이 맨눈으로도 태양을 직접 바라 볼 수 있을 정도로 태양 빛이 창백하게 약해진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태양이 사람들을 향해 내려 오는 것이었다. 또한 내려 오는 태양 뒷편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은 갖가지였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우는 사람도 있었고 무서워서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흡사 파티마에서 7만여 명의 사람들이 세상 종말이 온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죄를 뉘우치며 통곡하였듯이.

잠 시 후 태양은 제 자리로 돌아갔고 이 기적이 끝날 쯤에는 흰 구름이 발현 장소에 나타나서 회전하는 태양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현상은 15분간 지속되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여러 색깔로 된 구체들이 태양 주변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모 성심, 많은 천사들이 트럼펫을 들고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목격한 또 다른 초자연적 현상으로 크리제박 산에있는 15톤이 넘는 십자가와 관련된 초자연적 현상이다.

메 주고예 주민들은 1933년 530m 높이의 크리제박 산 정상에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그만한 무게의 자재들을 일일이 손으로 들어 날랐다. 이들의 신앙심은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이 십자가 상이 1981년 발현 이후부턴 종종 밝은 빛을 내는 형태로 보이는 기적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십자가의 수평 부분과 그 아래 부분만 밝게 T자 형태로 보이는가 하면 어린이들이 묘사하는 것과 유사한 성모님을 닮은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크리제박에서 약간 떨어진 시트룩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였고 순례자들에게도 보였었다.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상이 통째로 사라진 기막힌 장면도 목격하였다. 메주고예를 방문했던 웨인도 그 기적의 사건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멋진 기회를 가졌었다.

메 주고예를 떠나던 날 그는 경이로움에 싸여 있는 메주고예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크리제박 산을 우연히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그런데 크리제박 정상은 보였지만 그 곳에 있어야 할 십자가 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러번 눈을 떴다 감았다 해보았지만 정말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눈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하여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그가 서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그들 일행에게 물어보자 그들도 그 사실을 보아서 알고 있다고 하였다. 10여분간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던 십자가 상은 그들이 버스를 타고 마을을 떠날 때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곳에는 또한 흥미 있고 기쁜 이야기들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신부가 평상복을 입고 순례자들 사이에 끼여서 메주고예를 방문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신부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심각한 일이 신변에 일어났는지 영성체나 기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단지 멀리 떨어져서 되어가는 일들만 물끄러미 보고 관찰할 뿐이었다. 하지만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그는 비카를 만나 보려고 비카에게 찾아갔다.

여러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준 다음 비카는 병자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하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밀어닥쳐서 손을 잡고서 축복을 받고자 하였다. 그 신부는 아들이 살인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어느 아주머니 옆에 서게 되었다. 비카는 그녀의 왼손을 그 아주머니의 머리에 또 오른손은 신부의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들을 축복해 달라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기도를 하였다.

이 들 두 순례자의 일신적인 슬픔을 알 수 없는 비카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성모께 부탁한 후 그 신부에게 "안녕히 가세요. 신부님!" 하였다. 그 신부의 가슴이 쿵쿵거린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비카가 신부의 정체를 알 수 있었을까? 성모님의 다정다감함이 그의 가슴 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부는 아름다운 사제의 길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후 그 신부는 신부복을 입고서 메주고예를 다시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고해 성사를 주었다.

메 주고예 발현 초기에 있었던 여러 치유의 기적 중 어린 다니엘의 이야기는 놀랍기만 하였다. 1978년 9월 21일에 John과 Snda Sekta 라는 부부 사이에 태어난 다니엘은 태어날 때만 해도 건강하고 정상적인 어린이였다. 불행히도 생후 4일 만에 패혈증에 걸려 다니엘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굳어져서 경련을 일으켰다. 부모들이 다니엘을 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을 시켰지만 별 효과가 없었고 그의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독일의 병원까지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생후 2년 6개월이 된 때에 그의 부모는 메주고예에서 일어나는 발현 소식을 들었고 이제는 하늘에 간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다니엘을 데리고 발현 장소로 가서 어린이들을 통해 성모께 간청하였다. 어린이들은 여러 번 성모께 부탁드렸으며 다니엘의 부모에게 다음 날 또 오겠다고 말하였다. 성모 발현 6일째인 1981년 6월 29일에 어린이들은 성모께 다니엘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성모께선 다니엘의 부모가 낫는다는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다니엘 가족은 어느 식당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다니엘은 여전히 말도 못하고 머리는 항상 오른 쪽으로 기울어져서 한 두 발자국을 걷고는 넘어지곤 하였다. 그런 다니엘이 식당의 식탁을 손으로 두둘기며 "마실 것좀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는 말하는 것이 늘기 시작하였고 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다니엘은 계단도 오르고 달리기까지 하게 되었다.

발현 초기의 이러한 다니엘과 같은 치유 효과는 보고된 것만도 50 - 60건에 이르며 그 이후로는 셀 수 없는 치유와 회개가 일어났다고 한다.

성지 전문 여행사 사람과 여행

루르드(Lourdes)의 성모님 발현

루르드(Lourdes)의 성모님 발현

루르드는 오트 피레네도의 타르브 평야에서 그치는 산맥의 마지막 기복과 라브당 산의 일곱 계곡의 물이 흐르는 하구에 위치한다. 루르드의 성채는 피레네의 요새였고, 18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곳에서 성모 마리아는 1858년 2월부터 7월까지 18회에 걸쳐 벨라뎃다 수비루(14세)에게 발현 하셨다. 연약한 양치기 소녀 벨라뎃다가 친구및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들로 나가 개울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을 때였다. 아주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 저만치 서 계시는 것이었다. 별 말씀 없이 부인은 아기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결함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을 지닌 채 푸른 띠를 나부끼며 정성스레 합장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리고 계셨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벨라뎃다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의 발현때 '나는 원죄없는 잉태'라 하심으로써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선포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교의를 확인하신 마리아는 기적의 샘을 솟게 하셨다.

즉 벨라뎃다로 하여금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이 귀한 그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에 샘을 파게하시고, 그 물로 불치의 병자들을 속속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동정 마리아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 공인되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원죄없는 잉태'의 성모상이 1864년 최대의 성황리에 안치되었다.

벨 라뎃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하여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양육할 형편도 못되었다. 소유하고 있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방앗간마저 빚 때문에 저당 잡혀서 그야말로 끼니도 잇기 어려울 정도의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서 벨라뎃다는 이웃 마을의 아기를 잃은 집에 얹혀서 15개월이나 살다가 온 적도 있었다. 벨라뎃다는 그런 집의 맏딸이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벨라뎃다는 그녀의 일생 동안 고통을 주었던 천식을 앓고 있었다. 워낙 가난한 집이라서 겨울철이면 제대로 난방이 안되어 그녀는 보다 난방이 잘되는 이모 집에서 겨울을 나기도 하였다.

발현 첫날의 상황은 그녀가 발현 전체를 기술하도록 요청하여 이를 꼼꼼히 잘 기록했던 에스뜨라드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 재의 수요일 전 주의 목요일(1858년 2월 11일을 말함)이었는데 날씨가 대단히 추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께서 저희들에게 집에는 더 이상 땔나무가 없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동생 뜨와네뜨와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강가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잘못하면 가브 강에 빠질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웃 친구인 잔느 아바디가 우리 집에 남동생을 찾으러 왔는데 우리와 같이 가겠다며, 남동생을 집에 데려다 두고 다시 와서 우리와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망설이셨지만 세 명이니까 가도 좋다고 하셨지요.

우리 는 처음엔 잔 나뭇가지들이 종종 발견되던 공동묘지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날 따라 그 곳에선 아무것도 발견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브 강 근처까지 가는 옆길로 갔고 뷔예 다리에 도착해서는 강을 따라 올라 가는 것이 나을지 내려 가는 것이 나을지 고심했습니다. 우리는 일단 내려 가기로 마음먹고 산길을 따라 메라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사비 방앗간 옆의 무쉐 드 라 피트의 농지로 들어 갔습니다. 이 농지의 끝은 마사비엘 동굴 맞은 편인데요, 우리가 도착하자 마자 방앗간 수로가 있어서 우리는 멈추어야 했습니다.

수로의 물살이 방아를 돌릴 정도로 세지는 않았지만 물이 너무 차가워서 저는 들어가기가 두려웠습니다. 잔느와 제 동생은 저보다는 덜 소심해서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물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건너 편에 가서는 물이 차갑다고 소리지르며 허리 숙여 손으로 문질러 발을 녹였습니다. 모든 것이 겁만 더 주게 되어 제가 물 속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천식이 재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덩치도 크고 힘이 센 잔느에게 업어서 건네 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그녀는 "싫어! 못 오겠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동굴 밑에서 나무 조각 몇 개를 집어 들고는 가브강을 따라 사라져 버렸습니다. 혼자 있게 되자 징검다리를 만들고자 돌멩이를 물 속에 몇 개 던져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잔느와 여동생이 했던 것처럼 물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기로 했습니다.

양말을 막 벗으려는 순간 갑자기 폭풍우 같은 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오른쪽, 왼쪽 그리고 강가의 나무 밑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였죠. 계속하여 양말과 신발을 벗을 때 첫 번째와 같은 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놀라서 꼿꼿하게 서 버렸습니다. 동굴 쪽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마치 센 바람이 불듯이, 동굴 입구의 덤불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생각하고 말할 기력도 잃어 버렸습니다.

거의 동시에 동굴 안에서 금빛 구름이 나왔고 잠시 후 젊고 아름다운,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적이 없는, 정말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서 입구의 장미 덤불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저를 보고서는 미소를 짓고 가까이 오라 하였습니다. 마치 저의 어머니처럼.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눈을 비비면서 떴다 감았다 해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계속 미소를 지으며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생 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로사리오를 꺼내 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여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승락의 표시를 했고 그 분도 오른 팔에 걸치고 있던 로사리오를 손에 들었습니다. 로사리오 기도를 하려고 손을 이마에 대려고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께서 성호를 긋고 나서야 저도 같이 따라서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께선 제가 혼자 기도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분은 손가락 사이에서 로사리오를 만지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단이 끝날 때마다 저와 함께 영광송을 했죠.

로 사리오가 끝났을 때 그 여인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금빛 구름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 여인은 16세에서 17세 정도의 젊은 아가씨였으며 흰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 부분에 겉옷 밑단까지 흘러 내리는 푸른 색 띠를 매고 있었습니다. 흰 색 면사포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면사포 안에는 허리 뒤까지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이 엿보였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는데 발까지 내려 온 겉옷이 발을 덮고 있었으며 겉옷이 겹쳐진 단에는 노란 색 장미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발에 꾸며진 장미의 빛깔처럼 금색 고리로 연결된 흰 로사리오를 오른팔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사라지자 마자 잔느와 여동생이 동굴로 돌아와서는 제가 그들이 떠난 장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녀들이 저를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돌아갈 것인지 아닌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물을 건너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물이 마치 설거지 할 때의 것처럼 따뜻했습니다. 발을 말리면서 잔느와 여동생 마리에게 '그렇게 떠들 필요 없어. 너희들 생각처럼 물이 차갑지가 않아.'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차갑지 않다니 다행이구나. 얼마나 차가웠는데.' 하는 것이었지요.

잔 느와 마리에게 혹시 동굴에서 이상한 것을 못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니.' 했지요. '왜 그러는데?' 하고 물어 왔지만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잔느와 마리에게 비밀로 해 달라며 동굴에서 생긴 이상한 일을 이야기하고 말았습니다.

온 종일 그 여인의 모습이 머리 속에 맴돌았습니다. 저녁에 기도하면서 걱정이 되어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이유를 물어 보셨고 마리가 대신 대답했고 저도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선, '환영이야. 그런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고 이제는 마사비엘에는 가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침대에 들어 가서도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 여인의 얼굴은 너무 멋있고 인자하셔서 줄곧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헛것을 보았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첫 날 발현의 이야기를 벨라뎃다는 위와 같이 시간에 따라 상세히 묘사를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금요일과 토요일은 동굴에 가지 않았지만 동굴로 가서 자기가 본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아름다운 여인을 또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갈수록 강하여졌다.

일요일이 되어 벨라뎃다는 잔느와 마리가 같이 가니 보내 달라고 어머니께 사정하였다. 처음엔 완강히 반대하던 어머니도 승낙을 하였고 셋은 떠나면서 작은 병에 성수를 담아 가기로 하였다. 어른들의 생각처럼 악마의 소행이라면 성수를 뿌려서 막아낼 작정이었다.

벨라뎃다는 그간 집 밖에선 입을 다물었지만 동생 마리가 호들갑을 떨며 소문을 내버리는 통에 친구들이 자기들도 따라 가겠다며 나섰다. 친구들이 새 옷으로 갈아 입는 동안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잔느와 마리는 뒤에 오기로 했고 벨라뎃다가 가장 먼저 동굴 앞에 도착했으며 곧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 "저기에 계셔! 저기에!" 라고 소리 지르며 친구들을 불렀다. 그녀의 친구들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살폈지만 별 다른 것이 없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그 여자에게 뿌려!"
친구들이 본 벨라뎃다는 성수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들고서 땅에 붓는 것이었다. 여인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벨라뎃다는 친구들에게 그 여인이 성수 뿌리는 것에 대해 즐거워 한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는 무아경에 빠져 버리고 한 지점만 계속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가득 찼으며 그 표정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날의 발현에선 돌발적인 작은 사건이 믿을 수 없는 발현 현상을 믿게 해주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늦게 도착한 잔느의 장난 때문이었다. 친구들을 놀려 주려고 동굴 위에서 돌멩이를 굴린 것이었다. 친구들이 이를 피하려고 도망을 가면서 벨라뎃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친구들은 그녀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울고불고 소리쳤다. 이들의 고함 소리에 사비 방앗간의 니콜로 아주머니와 그 여동생이 달려왔다. 두 사람도 이미 소문으로 사건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필시 무슨 일이 생겼구나 생각하고 달려 온 것이었다. 벨라뎃다를 움직이고 눈을 감기고 해보았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니콜로 부인은 방앗간으로 다시 달려가서 28살의 아들인 안또니를 불러왔다. 안또니는 불려 오면서 어린이들이 장난하는 줄 알고 있었다. 동굴 앞의 벨라뎃다를 본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자신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 그 어린이의 몸에 손 댈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나중에 안또니는 너무 아름다운 벨라뎃다의 표정을 본 당시의 충격을 이야기 하였다.

그들은 겨우 벨라뎃다를 방앗간으로 옮겨 올 수 있었다. 옮기는 동안에도 무아경에 빠져 있던 벨라뎃다는 방앗간에 도착해서야 얼굴 표정이 이전의 평범한 방앗간 집 딸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니콜로 부부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벨라뎃다는 그 여인과 로사리오 기도를 같이 했으며 그 여인은 영광송만 했으며 기도가 끝나자 사라졌다고 답하였다.

이윽고 벨라뎃다의 어머니가 급히 들어 왔다. 그리고 딸이 죽은 줄 알고 마구 울었다. 벨라뎃다가 앉아서 어머니에게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자 그녀의 어머니는 화가 치밀어서 소리쳤다. "넌 우리 가족을 웃음거리로 만드는구나. 그래, 성모이야기, 은총, 위선적인 꼴, 다 가져라!"

벨라뎃다는 두들겨 맞기 시작했고 엉엉 울었다. 니콜로 부인이 이를 말리며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벨라뎃다를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니까? 이 애는 천사입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온 천사를 자식으로 데리고 있는 것 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난 동굴에서 보았던 이 아이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벨라뎃다의 어머니는 좌절감과 감정이 북바쳐서 또 한 번 울어 버렸다. 그리고 어린 딸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벨라뎃다는 가끔 뒤를 돌아보곤 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16일까지 모두 18번의 발현이 계속되었다. 발현 후 50년동안 4,000건이상의 난치병 치유 사실이 보고되었고, 신앙의 기쁨을 찾은 이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1872년부터는 순례자가 더욱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그 수는 연간 200만명을 넘는다.

실로암(요한 9:10)과 베짜타연못 (요한 5:4)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치유능력을 마리아는 오늘도 루르드의 샘을 통해 드러내고 계신다.
벨라뎃다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수녀가 되었으며, 35세를 일기로 1879년 선종하였고 1933년 시성되었다.

성지 전문 여행사 사람과 여행

바뇌(Banneux)의 성모님 발현

바뇌(Banneux)의 성모님 발현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 사이에 성모 마리아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로 바뇌에 사는 마리에트(12세)에게 8번 나타나셨다. 가난을 내세우시는 성모님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물질 위주의 사상에서 하느님의 신앙을 져버리고 있는 위기를 일깨워 주셨다. 당신을 철저히 신뢰할것을 바라시며 루르드처럼 샘터를 지적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치유와 회개의 기적을 일으키는 루베네의 아르덴 고원의 바뇌도 1949년 성지로 공식 발표되었다.

파 티마나 루르드의 성모 발현을 본 어린이들은 모두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바뇌의 성모님을 뵈온 마리에뜨는 결혼하여 가정 주부가 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마리에뜨는 어느 가정보다도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는 가정주부라는 점에 있어서 오늘의 시대적인 특징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마리에뜨는 지금도 바뇌의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을 위해서 그 곳 한 식당에서 헌신적으로 봉사 생활을 하고 있다.

바뇌라는 시골마을

바뇌는 벨기에의 고원지대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바뇌의 주민들은 지금도 가난하지만 옛날에도 가난하였다. 산림지대이기도 한 이 산골 촌락이 1차대전 이후부터 '우리의 모후 바뇌'라고 불리어 졌다. 바뇌 근처 저지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전쟁이 터지자 산으로 피난하였고, 이 산골에서 전쟁 중 살아 남는다면 이 마을을 '우리의 모후 바뇌(Notre-Dame Banneux)'라고 부르겠다는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바뇌에서 2km 밖에 되지 않는 이웃 마을 루베네는 군인들에 의해 젯더미가 되었지만 이 마을만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1933년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발현 당시 바뇌의 주민은 325명 뿐이었다. 그들은 평화롭고 부지런한 산골 생활을 하였는데 한 마디로 전형적인 시골 생활이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19세기에 건축된 아담한 성당이 있었고, 성당 중심으로 가난한 집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었다. 그 성당에서 약 1km 내려와 전나무로 무성한 숲이 있었는데, 그 숲 왼쪽에 베코베지몽씨의 초라한 집이 있었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 뜰이 있고 주위가 자연 그대로 펼쳐있는 산골 집이었다. 단도직입적인 말투와 투박한 성격을 가진 가장은 늘 가난한 살림을 꾸려 나갔고, 신문이나 종교 문제나 더더욱 오락에까지도 관심이 없었다. 한가정을 이끌어나가는 성실과 정직과 용기만 있을 뿐 초라한 촌부에 불과했다. 부드럽거나 친절한 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지만 겸손한 면은 있었다.

마리에뜨

베코씨 자녀들 중 장녀인 마리에뜨(Mariette)는 1921년 3월 25일에 태어났다. 이 날은 그해의 전례상 성 금요일이었고 동시에 성모영보 축일이었다. 마리에뜨는 종교적 의식이나 사회적인 인습이 없는 황량한 숲 주위에서 자라났다. 야생화처럼 자라난 마리에뜨는 육체적으로 건강하였지만 마음의 양식은 부족하였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살아왔으므로 마음은 단순하고 겸손하였다. 마리에뜨의 일과는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책이나 신문도 읽지않았고 오락도 즐길줄 몰랐다. 한가하고 조용한 때는 집 밖으로 뛰어나가 대자연을 만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겉꾸밈이나 남의 눈에 두드러짐이 없는 순진하고 솔직 담백한 마리에뜨였다. 학교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기 동생들의 놀이에 응하여 주는 유순한 성격을 가졌다. 두뇌 발달은 다른 아이와 뒤떨어졌지만 침착하고 사리를 분별하는 것은 부모에게 배웠다. 성당의 교리반에 나가면서도 결석하기를 잘 하였고 주일 미사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교리 지식은 거의 없었고 첫영성채를 하지 못할 줄 알았지만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에뜨에게 너무나 귀하시고 놀라운 분이 찾아 왔던 것이다.

바뇌의 성모발현

첫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15일 주일

주 위가 깜깜하고 추웠던 밤 7시경, 마리에뜨는 남동생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창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갑자기 광채가 나타나더니 정원에 아름다운 부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갸우뚱하면서 합장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너무 멋진 부인이 나타났다고 어머니께 말했지만 어머니는 허튼소리 말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무 감격한 마리에뜨는 성모 마리아이심을 느기고는 모든 행동이 급작스럽게 변했다. 교리반에도 열심히 나갔다. 오로지 성모님 마음에 들기를 원하였다.
첫번째 나타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마리에뜨에게 미소만 지으셨다.

두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18일 수요일

저녁 7시경이었다. 영하 12도가 되는 강추위에서도 마리에드는 집 근처 큰 길 옆, 3일 전에 성모님을 보았다고 하던 그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성 모님께서 하늘 저 멀리에서 점점 가까이 오시면서 전나무 사이를 통하여 내려오셨다. 마리에뜨 앞 약 1m50cm 정면에 서 계셨다. 마리에뜨는 미소짓는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뒷걸을질로 가시는 성모님을 따라가다가 성모님께서 멈추시자 무릎을 꿇었다.
작은 샘이 있는 길 옆에 서신 성모님께서는 마리에뜨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

"네 손을 물에 담가라"
"이 샘은 나를 위하여 보존되어 왔단다."
성모님께서는 떠나시면서 마리에뜨에게 말씀하셨다.
"잘 있거라. 다시 볼 때까지"

세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19일 목요일

저녁 7시쯤에 매우 나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에뜨는 로사리오 기도를 하였다.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 마리에뜨가 '아름다운 부인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여쭈었다.

"나는 가나난 이들의 동정녀이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밝히셨다. 마리에뜨가 묻는 말에 성모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샘물은 모든 백성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보존되어 왔단다."

성모님께서 떠나시면서 마리에뜨에게 말씀하셨다.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잘 있거라. 다시 볼 때까지"

네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20일 금요일

마리에뜨는 피곤한 몸은 일으켜 저녁 7시 45분경에 정원으로 나갔다.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성모님께서 또 오셨다.

무엇을 원하시느냐고 여쭙는 마리에뜨에게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작은 성당을 하나 원한단다"

다섯번째 나타나심-1933년 2월 11일 토요일

이 날은 성교회가 성모님께서 루르드에 발현하신지 75주년 기념하는 행사를 거행하였지만 산골 소녀 마리에뜨는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밤7시경 마리에뜨는 밖에 나가 로사리오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성모님께서는 마리에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다."
"다시 볼 때까지 안녕"

여섯번째 나타나심-1933년 2월 15일 수요일

저녁 7시에 마리에뜨는 다른 때와 같이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본당 신부가 증거를 요청한다고 말씀 드리니까 성모님께서는 아무 말씀 하시지 않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는 떠나셨다.

"나를 믿어라. 나도 너희를 믿겠다."
"기도 많이 하여라. 다시 볼 때까지 안녕"

일곱번째 나타나심-1933년 2월 20일 월요일

이날 밤에는 눈바람이 불었다. 마리에뜨는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기도 많이 하여라. 다시 볼 때까지 안녕"

마지막 나타나심-1933년 3월 2일 목요일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마리에뜨에게 슬픈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천주의 모친이며, 구세주의 어머니이다."
"기도 많이 하여라"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잘 있거라(Adieu)"하시면서 마리에뜨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성호를 그어 축복을 하신 다음 떠나가셨다.

성지 전문 여행사 사람과 여행

파티마의 성모님 - 루치아나의 보고서

파티마의 성모님 - 루치아나의 보고서
첫번째 발현

 1917년 5월 13일, 나는 꼬바 다 이리아의 비탈에서 희야친따와 프란치스꼬와 함께 금작화 숲 주위에서 작은 돌담을 쌓으며 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번개와 같은 섬광을 보았다.
"번갯불이 이는구나. 소낙비가 올지도 모르니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니?"하고 내가 사촌들에게 말하자 그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양떼를 몰고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큰 참나무가 있는 비탈길을 접어들자 또다시 번개가 번쩍였다. 그때 우리는 우리 가까이 몇 발짝 앞에 있는 작은 떡갈나무 위에 흰옷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은 태양보다도 더 찬란했고 눈부신 빛을 내고 계셨다.
우 리는 놀라서 그 앞에 우뚝 서버렸다. 우리는 불과 1m정도의 아주 가까운 거리의 부인에게서 나오는 그 광채 안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자 그 부인이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들을 해롭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니란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내가 여쭈어 보았다.
"나는 하늘에서 왔단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는 너희들이 여섯 달 동안 계속해서 매달 13일 이 시간에 여기로 나와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 왔단다. 내가 누구이며 또 무엇을 원하는지는 나중에 말해주마."
"그러면 저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래 너는 천국에 갈 것이다."
"희야친따는요?"
"희야친따도 갈 것이다."
"그럼 프란치스꼬는요?"
"그도 역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꼬는 먼저 묵주기도를 좀더 많이 해야 한단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죽은 두 소녀의 소식을 여쭈어 보았다. 이 두 친구는 때때로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큰언니와 함께 뜨개질을 배우곤 했었다. "마리아 다스 네베스도 천국에 있습니까?"
"그래, 천국에 있단다." (그녀는 죽을 당시 16세쯤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멜리아는요?"
"그녀는 세상 끝날 때까지 연옥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18세 내지 20세쯤 되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린 죄의 보속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시고자 하는 고통을 기꺼이 참아 받겠느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가거라. 너희는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위로해주실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위로해주실 것이다."는 이 마지막 말씀을 하시면서 처음으로 당신 손을 펴 보이셨다.

두번째 발현

 1917 년 6월 13일, 희야친따와 프란치스꼬 그리고 내가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다 바치고 나자 성모님께서 5월에 오셨던 그 작은 참나무 위에 서 계셨다. 그리고 우리는 번개라고 부른 그 빛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하고 내가 물었다.
"다음달 13일에도 여기 올 것과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읽는 법도 배워라. 내가 원하는 바는 다음에 말해주겠다."
그때 나는 한 병자를 고쳐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녀가 자기 생활을 고치면 올해 안에 낫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를 천국에 데려가 주세요."
" 그래, 희야친따와 프란치스코는 곧 데려가겠다. 그러나 너는 좀더 오래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알려지고 사랑 받도록 너를 사용하고자 하신다. 그분은 세상에 내 성심에 대한 신심을 세우기를 원하고 계신다."
"저 혼자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하고 나는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다, 아가야. 그것이 너를 괴롭게 만드느냐?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 티없는 성심이 너의 안식처가 되고, 너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어 줄 것이다."

성모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 양손을 펼쳐 전과 같은 그 굉장한 빛을 우리에게로 비춰주셨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잠겨 있음을 알았다.
희야친따와 프란치스꼬는 하늘로 뻗는 빛 속에, 그러나 나는 지상으로 부어지는 빛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성모님의 오른쪽 손바닥 앞에는 가시에 둘러싸여 찔리고 있는 심장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인류의 죄로 인해 상처 입고 보상을 원하시는 티없으신 성심임을 직감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6월에 우리에게 말씀하신 비밀이다.
그때 성모님께서는 이것을 비밀로 지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으나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세번째 발현

 1917년 7월 13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꼬바 다 이리아의 떡갈나무 가까이에서 또 다시 광선이 번쩍였고 조금 후 그 떡갈나무 위에 성모님이 나타나셨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하고 내가 물었다.
"다음달 13일에도 여기 와주고 전쟁이 끝나 세상에 평화가 오도록 매일 묵주 기도를 계속 바쳐라. 그분만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구신지 저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저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매달 계속해서 여기에 오너라. 10월에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주겠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믿도록 기적을 행하겠다."
이때 나는 몇 가지 부탁을 드렸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묵주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성모님은 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죄인들을 위해 너희 자신을 희생으로 바쳐라. 그리고 자주, 특히 어떤 희생을 바칠 때마다 이 기도를 바치도록 해라.
"오 예수님, 이 선물 드림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함이며, 티없으신 성모님의 마음을 상해드린 보속이며, 죄인의 회개를 위함이나이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먼저와 같이 당신 손을 펼치셨는데, 그 손에서 나온 빛은 땅을 꿰뚫는 것 같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불의 바다를 보았다.
그 불 가운데에는 사람의 형상을 갖춘 흑색 또는 청동색의 숯덩이와 같은 인간 모양을 한 영혼들과 악마들이 화염과 연기 속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 들은 큰 화재 때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과 사방에서 불똥이 튀는 구름 같은 연기에 싸여 체중도 균형도 없이 실망과 통곡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실로 그 광경은 우리를 공포로 전율케 만들었다.(다른 사람들이 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광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악마들의 모습도 서로 구별할 수 있었는데, 불타고 있는 투명한 석탄과 같이 흉측스러운 이상한 동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도 겁에 질려 그들의 구원을 애원하는 눈초리로 성모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친절하면서도 슬픈 어조로 말씀하셨다.
" 너희는 불쌍한 죄인들이 가는 지옥을 보았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내 티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이 세상에 세우고자 하신다. 내가 말하는 것을 너희가 실천하면 많은 영혼들이 구원될 것이요,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다. 그리고 전쟁도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린다면, 비오 11세 교황 때에 또 다른 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원인 모를 빛에 의해 밤이 밝혀지거든, 하느님께서 전쟁과 기아 그리고 교회와 교황에 대한 박해로써 세상의 모든 죄악을 벌하시려는 표지로 알아라.
이 재앙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내 성심에 봉헌하고 매달 첫 토요일마다 보속의 영성체를 실천하라고 부탁하러 다시 오겠다. 내 요청이 채워지면 러시아는 회개하고 평화가 올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는 자기 오류를 온 세상에 퍼뜨리고 전쟁을 유발하며 교회에 박해를 가할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순교를 당하고 교황은 더 큰 고통을 받을 것이며, 여러 나라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내 티없는 성심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교황은 나에게 러시아를 봉헌할 것이고, 러시아는 회개할 것이며, 세상에 평화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포르투갈에서는 언제나 신앙이 보존될 것이다.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라. 프란치스꼬에게는 해도 좋다. 그리고 묵주기도를 바칠 때 매 신비가 끝난 다음에 이 기도를 바쳐라.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들을 구하시되 제일 버림받은 영혼들을 구하소서."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내가 다시 물었다.
"제게 더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다. 오늘은 없다."
그리고 나서 지난번의 발현에서와 같이 성모님은 동쪽 하늘로 올라가시더니 모습을 감추셨다.

네번째 발현

 1917년 8월 15일, 이날 일어난 것은 이미 다 보고하였지만, 발현은 15일 오후에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날짜를 계산할 줄 몰랐기 때문에 틀렸을 수도 있지만 빌라 노바 데우로렘에서 돌아온 그날인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발리노스라는 곳에서 프란치스꼬와 그의 형인 요한과 함께 양떼를 먹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초자연적인 기운이 우리를 감싸오고 있음을 느꼈다.
성모님께서 오시는 것같아 희야친따가 그분을 뵙지 못할까 봐 요한한테 데려오라고 부탁했다.
그가 가기 싫어하여 내가 동전 두 닢을 건네주자 그는 달려갔다. 그 동안 프란치스꼬와 나는 우리가 번개라 부르던 섬광을 보았다. 희야친따가 도착한 조금 뒤, 떡갈나무 위에 나타나신 성모님을 보았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계속하여 13일에 꼬바 다 이리아에 다시 와 주고, 매일 계속해서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원한다. 마지막 달에는 모든 사람이 믿도록 기적을 보여주겠다."
"사람들이 꼬바 다 이리아에 가져다 놓은 돈은 어떻게 할까요?"
" 그것을 가지고 두 개의 들 것을 사도록 하여라. 하나는 너와 희야친따 그리고 흰옷 입은 두 소녀가 들게 될 것이고, 또 하나는 프란치스꼬와 다른 세 소년이 들게 될 것이다. 그 돈은 묵주기도 축일 준비에 쓰고 나머지는 성당 건축에 사용하여라."
"몇몇 병자들을 고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올해 안에 고쳐주겠다."
그리고 나서 성모님은 매우 슬픈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많이 희생하여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해주는 사람이 없어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이 많단다."
그런 뒤 성모님은 여느 때와 같이 동쪽 하늘로 사라지셨다.

다섯번째 발현

 1917 년 9월 13일, 성모님의 발현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희야친따와 프란치스꼬를 데리고 꼬바 다 이리아로 떠났다. 그러나 주위에 몰려드는 군중 때문에 쉽게 나아가지 못했다. 길은 사람들로 붐볐고 군중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려고 아우성이었다. 인간적인 존경이나 존중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사나 숙녀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우리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 서로 밀치고 있었고, 자기들의 소원을 부탁드려 달라고 우리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하였다.
우리에게 가까이 올 수 없는 사람들은 멀리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구인 내 아들을 고쳐주시길 성모님께 구하여 달라"고 소리쳤다.
" 눈먼 내 아들을...", "귀머거리인 내 아들을...", "내 남편과 아들이 전쟁에서 돌아올 수 있길..." 하면서 모두들 아우성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성모님께서 죄인인 나를 회개시켜주시도록...", "내 결핵을..." 하는 등의 말을 전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치 모든 병자들이 거기 다 모인 것 같았다.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하여 나무 위로 오르는 사람도 있었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대답해주려 했고, 먼지 바닥 위에 무릎 꿇은 사람들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앞에 서서 군중을 뚫고 길을 열어준 어느 신사 덕분이었다.
알주스트렐, 파티마의 꼬바 다 이리아의 좁은 길을 보면서, 주님께서 거리를 지나가실 때 환호하던 군중들이 그분의 길을 가득 메웠던 광경을 그려보았다
. 그리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고 착한 포르투갈 국민들의 신앙을 바쳤다. 그들이 초라한 우리 세 아이들에게 그토록 자신들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얘기할 수 있는 우리의 은혜를 인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리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펜이 제멋대로 움직인 결과의 객담이다. 그러나 노트를 아끼기 위해 찢지는 않겠다.

우리는 그러한 군중을 헤치고 겨우 꼬바 다 이리아에 도착하였다.
떡갈나무 가까이에 도착하자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조금 후 우리는 섬광을 보았고 그 떡갈나무 위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
" 전쟁이 끝나도록 계속해서 묵주기도를 바쳐라. 10월에는 주님께서도 오실 것이고, 통고의 성모와 가르멜의 성모도 함께 올 것이다. 요셉 성인도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아기 예수와 함께 나타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들의 희생에 대단히 만족해 하신다. 그러나 잠자리에서까지 그 끈을 매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좋아하지 안으신다. 낮 동안만 매고 있도록 해라." 그때 우리들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희생으로 굵은 밧줄을 맨살에 묶고 있었다
. "귀머거리, 벙어리 등 병자들을 치유시키도록 부탁 받았습니다."
"그래, 고쳐주겠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이는 고쳐줄 수 없단다. 10월에는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보여주겠다."
그리고는 전과 다름없이 성모님은 자태를 감추셨다.

(유즈넷 에서 홍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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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나 보고서.
(루치아는 이날의 발현에 대한 보고서를 3인칭으로 썼다.)

1925년 12월 10일,
지 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분 옆으로 빛나는 구름 위에 아기 예수님이 계셨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한쪽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으시면서 다른 손에 들고 계신, 가시로 둘러싸인 심장을 그녀에게 보여주셨다. 바로 그때 아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시로 덮인 지극히 거룩하신 네 어머니의 성심을 위로해 드려라. 배은망덕한 사람들은 순간마다 그 가시로 어머니의 성심을 찌르는데, 그 가시들을 빼드리기 위해 보상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런 다음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서 말씀하셨다.
" 내 딸아, 가시에 둘러싸여 찔리고 있는 내 심장을 보아라. 은혜를 모르는 인류가 모욕과 망은으로 매순간 마다 찌르고 있구나. 적어도 너만이라도 나를 위로하여라. 그리고 연이어지는 다섯 번의 첫 토요일에, 내 성심을 거스른 죄를 보상하기 위한 지향으로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며, 묵주 기도 5단과 15분 동안 묵주기도의 열 다섯 가지의 신비를 묵상하는 자에게는 죽음의 순간에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총으로 돕겠다고 말하여라."

1926년 2월 15일,
아기 예수님께서 다시 그녀에게 나타나셨다.
예 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께 대한 신심을 전파했느냐고 물으셨다. 그녀는 고해신부의 어려움에 대해 말씀 드리고, 또 원장 수녀는 그것을 보급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만 고해신부가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음을 말씀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의 장상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내 은총으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그녀가 예수님께 어떤 사람들은 첫 토요일에 고해성사를 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나서 처음 8일 중에 아무 때나 고해하러 가도 괜찮으냐고 여쭈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렇다. 그들이 나를 받아 모실 때 은총 상태에 있고, 또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께 보속하려는 지향만 갖고 있다면 좀더 지나서 고해해도 괜찮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여쭈었다.
"예수님, 그 지향을 세우기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먼젓번 기회 때의 효력이 다음 고해 때로 물려져서 그들은 다음 고해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1929년 6월 13일,
나는 장상들과 고해 신부님께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밤 11시에서 12시까지 성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청해서 승낙을 받았다.
어느 날 밤 나는 홀로 성당 중앙에 있는 제단 난간 가까이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천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좀 피곤함을 느껴 일어서서 팔을 십자형으로 벌리고 기도를 계속했다. 빛이라고는 성체 등의 불빛밖에 없었다.

그 런데 갑자기 성당 전체가 어떤 초자연적인 빛으로 밝아지더니 제단 위의 천정까지 뻗친 빛의 십자가가 나타났다. 십자가의 위쪽 좀더 밝은 빛 속에서 한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몸은 허리 부분까지 볼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빛의 비둘기가 있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다른 사람의 몸이었다. 허리 조금 아래로 성작과 공중에 떠 있는 큰 성체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위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얼굴과 그분의 옆구리의 상처로부터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 핏방울들은 성체로 흘러내려 성작 안으로 떨어졌다. 십자가의 오른쪽 팔 밑에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손에 들고 계셨다. (칼이나 장미가 아니라 가시와 불꽃으로 둘러싸인 티없는 성심을 왼손에 들고 계신 파티마의 성모님이셨다.) 십자가의 왼쪽 팔 아래에는 마치 제단 위로 흘러내리는 수정같이 맑은 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커다란 글자들이 "은총과 자비" 라는 글자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신비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밝히라는 허락을 받지 못한 이 신비에 대한 빛을 받았다.

그때 성모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하느님께서 이 방법으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교황에게 전 세계 모든 주교들과의 일치 안에서 러시아를 나의 티없는 성심에 봉헌할 것을 요구하시는 때가 왔다. 나를 거슬러 범한 죄로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받는 영혼들이 매우 많다. 그래서 나는 보상을 요청하러 온 것이다. 이 지향으로 네 자신을 희생하고 기도하여라."
이것을 고해 신부님께 말씀 드렸더니 신부님께서는 나에게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적으라고 명하셨다.

후에 친밀한 내적 친교 중에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나에게 불만을 호소하셨다.
" 사람들은 나의 요청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왕처럼 그들은 결국 후회하고서야 그것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으리라. 러시아는 이미 자기의 오류를 전 세계에 퍼뜨렸을 것이며, 전쟁을 일으키고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더욱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후기; 1984년 3월 25일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련을 비롯한 전 세계를 성모마리아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하였다.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성모님께 대한 토요일의 신심

성모님께 대한 토요일의 신심
1987년 교황청이 인준한 『성모미사독서』에는 성모 축일이 46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회칙은 아울러 토요일 성모 신심 미사를 통하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자주 기념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전례에 있어서 토요일을 성모께 봉헌한 것은 9세기경부터 서방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발상은 아일랜드 출신 분도회원 알쿠인(Alcuin, 735~804년)에게서 나왔다.
금요일은 거룩한 십자가를 묵상하고,
토요일은 성모 마리아를 묵상하려는 데서 시작되었다. 콘스탄자의 베르놀도(Bernoldo di Costanza, 1054~1100년)는 당시 그러한 신심이 명령이 아니었는데도 신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962년 미사경본에는 마지막으로 성모 신심 미사가 수록되어 있었으며, 이는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첫 부분은 주간 요일을 주님의 신비나 천사 혹은 성인들을 지향으로 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월요일은 삼위일체께,
화요일은 천사들에게,
수요일은 성 요셉에게, 혹은 베드로와 바울로 혹은 12사도들에게,
목요일은 성령께, 혹은 성체성사나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금요일은 성 십자가나 혹은 주님의 수난, 또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께,
그리고 토요일은 성모 마리아께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전례시기에 따라 4가지 양식을 제시하고 있다. 두번째 부분은 매우 다양한 29가지 신심 미사가 소개되고 있다.
목요일은 예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금요일은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과 관련이 있지만, 토요일과 마리아의 관련성은 특별한 근거가 없다. 나중에 그 의미를 찾아 내었는데,
첫째로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 2,3)는 것과 마리아께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축복 받으시고 거룩하게 되셨다는 것을 연결시키고 있다.
둘째로 휴식하는 날인 안식일과 마리아 안에서의 휴식을 연결시킨다. 집회 24,8을 인용한다(70역이 마소라본(本)과는 다르지만 마리아 안에서의 휴식을 연상시킬 수 있다).
셋째로 토요일은 무엇보다 주님을 기념하는 주일을 준비하는 날이기에,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좋은 날로 간주하였다.
넷째로 주님께서 성 토요일에 무덤에 계시고, 오직 그날에는 성모님만이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 남아 계셨음과 연결시키고 있다.
다 섯째로 부활의 주일에 앞서 토요일에 마리아께서 시므온이 예언한 고통의 신비를 겪으신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또 파티마의 성모 발현이 처음 다섯 번이나 토요일에 있었던 것과도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토요일 미사를 성모 신심 미사로 봉헌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조규만,『마리아, 은총의 어머니』, 가톨릭대학교출판부, 428-430 인용

개신교 형제가 보는 가톨릭의 성모님 공경

개신교 형제가 보는 가톨릭의 성모님 공경
아래 글은 어느 개신교신자가 우리 가톨릭신자들의 성모님 심신에 비판을 가한 글입니다. 물론 본인으로서도 이 글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밝힙니다.
우 리들이 믿는 첫째 계명은 분명 하느님을 만유 위에 높이 섬기고 하느님이 아닌 어떤것도 섬기지 말라고 가르치고있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들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그들의 눈에 하느님께 드리는것과 동일하게 또, 오히려 그 이상으로 보는것에 대해 그들을 탓하거나 논쟁을 하기보다 그들의 주장을 겸허하게 듣고, 반성하고 또 묵상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을것 같아서 이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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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으로서 바라보는 가톨릭 형제들의 성모님 공경에 대해 몇마디 적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나 비신자들은 가톨릭을 성모님을 숭배하는 종교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 제로는 가톨릭도 세계의 모든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하느님만을 흠숭하는 종교인데도 말입니다. 이토록 가톨릭이 많은 사람들에게 본질이 오해되고 있는 것은 비신자와 개신교인들의 무지함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가톨릭 교우 여러분들의 태도에 1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가톨릭 정통신학에서는 흠숭지례와 공경지례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으며 성모님께 드리는 공경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토론장에서나 근처 가톨릭 교회를 방문해 보아도 많은 분들이(제가 보기엔) 공경의 도가 지나쳐 거의 흠숭의 지경에 이른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서 성모님이 계시하신 구절을 입에 꿰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에게 직접 아뢰기보단 성모님의 전구(중보기도)에 더 매어달리는 모습도 봅니다.
또 한 구원의 전권은 하느님께 속한 것인데도 성모님께 구원을 청하기도 하고 더더구나 놀라운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우리의 모든 재능과 일생과 열정을 봉헌해야 할터인데 성모님께 우리 생을 봉헌하자는 표현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막시밀리앙 콜베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놀라운 헌신과 사랑에 참 놀랐으며 제가 다니는 개신교회에서도 그분의 일생을 성극으로 꾸며 공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전기를 보며 참으로 가슴 아팠던 것은 소위 말하는 '성모신심'때문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성모님의 기사가 되어 성모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고 싶었다는 표현이 여러번 나오던데요.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더군요.
과연 그런 헌신을 성모님 본인은 기뻐하실까요?
피조물들이 주님께 돌릴 영광을 오히려 한낱 같은 피조물인 자신에게 바치는 것을 보면 성모님은 주님 앞에서 얼마나 민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열정과 신심의 전부는 창조주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인성녀들에게는 깊은 존경과 경모의 맘을 드릴수는 있습니다만 그분들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거나 그분께 우리 삶을 봉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나이드신 할머니나 지각이 부족한 분들이 성모님 숭상에 앞장서는 것은 이해가 되나 합리적이며 신학적인 교육과 사고를 할수 있는 젊은 가톨릭 형제들이 여기에 분별없이 행동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가톨릭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인 개신교인은 아닙니다.
전 가톨릭을 세계교회의 모체로 존중하며 2차 바티칸 공의회때 교황성하께서 모든 개신교인들에게 화해의 손을 먼저 내민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사는 곳에도 정기적으로 가톨릭 형제들을 만나며 같이 기도하고 있으며 어떻게 교회의 일치를 이룰까 모색하는 젊은이입니다.
예민한 문제가 될수 있기에 다른 가톨릭 신자들과 만날때에도 차이보단 공유하는 것들만 얘기를 해 왔으나, 그동안 덮어두었던 차이에 관해 얘기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혹시 저의 글로 인해 혹 맘이 상하신 분은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저 또한 간혹 성인 프란치스꼬나 성모님께 한 두마디 아뢰기도 하는 사람이니 여러분을 완전히 이해 못하는 부류도 아닙니다.
다만 정도가 지나치지 않나 염려가 되어서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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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평생 동정은 어디에 근거 한것입니까?

가톨릭 형제들은 교회의 오랜 전승에서 그리 믿어 왔으므로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라고 주장을 하시는데 이론의 역사가 길다는 것이 그 이론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라고는 볼수 없다고 봅니다.
가령 한국인은 고시대에 곰과 사람이 혼음한 결과로 태어난 민족이다라는 이야기가 오래 동안 민족의 설화와 전승으로 구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성모님이 평생동정이 아니다!!! 라고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인할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른다' 라고 해야 하느님 앞에 겸손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바른 자세라고 여겨집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공경한다고 하셨는데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면 요셉은 하느님의 아버지이고 다윗은 하느님의 고조에 고조에 고조....할아버지쯤 될터이니 그분들이 다 똑같은 숭상을 받아야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분을 공경하단기 보단 마리아를 공경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공경해야겠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극존칭을 붙인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리아 공경에 있어서 저희 개신교인들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은 현세기에 있어 공포된 마리아에 관한 교리입니다.

이전에도 마리아 공경은 계속 있었으나 도그마의 형태로 자리잡진 않았으며 20세기 중반에 마리아에 관한 도그마가 등장하였습니다.
교황께서 마리아의 원죄없으심, 승천에 관한 전승을 교리로 선포하자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개신교 학자들은 크게 낙담하였고 교회 일치는 몇발짜욱 더 떨어졌다고 개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마리아께서 원죄도 없으시고 죄없이 사으셨으며 하느님에 의해 승천되었으므로 그분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공경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라 여러분이 하는 공경의 결과로 성립된 이론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실상 그 도그마들이 이론으로 정립되기 이전에도 이미 성모님을 공경해 왔지 않습니까?

그리고 과연 무슨 근거로 그런한 전승과 설화들을 신앙의 명제인 도그마로 정립할 생각을 하였는지 도대체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저도 최근 마리아의 발현이나 나주의 기적같은 것을 읽어보고 접해 보았습니다.저는 비록 개신교인이지만 파티마의 성모님과 나주의 기적등을 상당히 사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태도에 있어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계시 메시지의 핵심은 하느님을 더욱 흠숭하라는 것이라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아서는 마리아에 대한 존경과 경배심만 더 늘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리아 본인께서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심행위의 전부를 바쳐야할 주님께 우리는 '오 주님, 전 당신에게보단 당신의 어머니에게 내 신심을 우선적으로 바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겸손하니까요...' 라고 한다면 하느님이나 성모님의 마음또한 어떠하실까요?
저도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통공(개신교에서는 교통이라 합니다.)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구를 요청할 필요성도 있다고 봅니다.

천상에 있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세상에서 고통하고 방황하는 저희를 위해 크게 빌고 계심을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가톨릭이 그 정도가 많이 지나치다고 보이며 그리스도교인지 마리아교인지 때로는 착각할 정도로 그 열의가 강하다고 봅니다.

전구를 청원하는것보다 그리스도께 직접 아뢰는 맘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친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기울여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게 해달라는 기도가 교만한 기도라면 너희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사도의 충고도 교만한 충고입니까?

하느님이 우리의 계부가 아니며 신경질적인 재판관이 아니며 우리의 친아버지인 이상 우리는 직접 아뢸수 있으며 전구에 대한 요청보단 직접 아뢰는 것에 더 열심을 가져야 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마직막으로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라 표현하신 것만큼은 성모님에게나 하느님에게나 옳지 않은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가령 제가 대천사 미카엘을 공경하거나 혹은 사도 베드로를 공경하는 것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같다고 억지를 부린다면 여러분은 동의할수가 있습니까?
피조물인 인간을 존경하는 것과 창조주를 공경하는 것과는 차원이 분명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럭저럭 두서없이 저의 생각을 써 보았습니다. 저의 글과 이러한 토론의 진행이 많은 가톨릭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맘에 성가시게 여겨진다면 글을 올리지 말라고 하시면 글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혹 저의 글로 인하여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커지거나 제 의문제시 자체가 성교회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겨진다면 그냥 무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다른데로 또 같다고 합니다.
가 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의 통로로서의 절대적 지위를 2차 바티칸 공의회때 스스로 포기하는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정교회와의 상호파문을 취하하고 개신교를 이단종파라는 개념에서, 분리되어 있는 형제라는 개념으로 수정하는등 교황께서도 서로의 길을 인정하신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한 다양성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만큼은 개신교인인 제가 오히려 참 부러워 하는 입장이며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제 의사 개진도 이러한 교회의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한 젊은이의 의문과 반론일 뿐이며 여러분이나 저 또한 모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하신 한 형제임을 전 분명히 믿습니다.

성모님과 관련있는 역사

성모님과 관련있는 역사

30년/ 50년 사도들의 설교(사도2,14-21, 3,12 13,15이하)들은 마리아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또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 대한 내용도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마리아는 팔레스티나의 모든 신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2) 예수의 생애에 끼친 마리아의 주요 임무는 이미 탄생과 유년 시절부터 끝났다. (3) 일반적으로 유대 여인의 역할은 항상 과소평가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인 특성이 사도들의 설교에서 마리아와 예수의 지상생활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54년/ 57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적 설교 가운데에서 마리아를 처음으로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갈라4,4).
65년 성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를 묘사한다(3,31 이하, 6,3).

70년/ 80년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 성서의 예언 말씀에 따라(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포함하여) 예수께서 탄생하셨음을 말하면서 마리아를 소개하고,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는 마리아임을 설명한다(1,16-23;2,11).

70년/ 80년 복음사가 루가는 주님의 종, 시온의 딸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가장 충실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마리아를 묘사한다(1,38,48;2,19,51,11;28).

90년/ 100년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삶과(2,1-11) 죽음에서(19,25) 일치되어 있는 마리아, 그리고 당신의 제자에게 맡겨드린 마리아를 묘사한다(19,26-27).
90 년/ 100년 묵시록은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이미지를 그녀의 굳은 신뢰심, 깊은 믿음, 교회적 임무, 그리고 특별한 은총에 집중하여 묘사하고 있다. 마리아는 어느 누구도 받지 못한 은혜를 받았고, 예수를 낳은 위대한 종이다(12,1-17).

100년/ 200년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에서 발굴된 어느 묘비명에는 죽은 사람의 중재자와 보호자로서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110년/ 115년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는 마리아를 동정녀이자 어머니라고 다섯 차례나 언급하였다.

120년 솔로몬의 송시(訟詩)는 아기를 낳은 동정녀를 언급하고 있다.

145년 아테네의 아리스떼네스는 마리아를 신경(信經) 형태로 인용한다.

150년/ 200년 히에로폴리스의 주교 아베르치오의 비문에는 마리아의 동정, 성성 그리고 성체와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150년 순교자 성 유스티노는 사상 처음으로 마리아께 대한 글을 썼다. 그는 하와와 마리아를 비교하는 예표론(豫表論)을 사용하였다.

150년 야고보의 원복음서는 마리아께만 독자적인 관심을 보이는 첫 번째 과업이다. 이것이 소위 "마리아의 복음서"라고 불린다.

150년/ 202년 리요의 성이레네오는 마리아가 구원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기록하였다.

162년 시빌의 예언은 마리아를 격찬하며 언급한다.

200년 이전 처음으로 그린 마리아 성화가 등장했다. 이 성화는 까따꼼바에 그려져 있었다.

200년/ 300년 기록된 마리아 기도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SUB TUUM PRAESIDIUM)가 사용되었다.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를 강조한다.

200년/ 300년 희랍, 히브리, 아라마이어,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이나 언어로 발견된 묘비명을 보면 마리아 신심이 그 당시에 이미 실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00년 "동정녀의 죽음"이란 책이 나왔다. 이것은 마리아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내용으로서 시리아어로 기록되었다.

217년 뜨라스떼베레의 산따 마리아 성당이 로마에 세워졌다.

250년 카르타고의 성 치쁘리아노는 신자들이 마리아께 대해 가져야 할 신뢰심을 역설하고, 마리아의 동정을 찬양하였다.

300년 "아카티스토스 찬미가"가 동방 교회 안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350년/ 400년 콘스탄티노블에서 가발라의 세베리아노 주교가 마리아께 기도하라는 공식 서한을 발표하였다.

350년/ 370년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가 성모송의 원형이 되는 마리아 기도를 중동 전역에 전파시켰다. 또한 그는 성 그레고리오 기적 행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성모의 첫 번째 발현기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350년/ 370년 성 에프렘은 마리아의 중재자적인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간구하라고 하였다.

350년 성녀 유스띠나가 성모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최초의 기도문으로 기도하였고, 훗날 이 내용을 성 요한 크리소스ㄸ이 기록에 남겼다.

352년/ 366년 산따 마리아 마죠레 성당이 교황 리베리오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370년 최초의 마리아 전례가 시리아에서 완성되었다.

370년 성 암브로시오는 마리아를 여성의 모델이요 교회의 원형이라는 신학 이론을 정립하였다.

392년 교황 성 시리치오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옹호하였고, 이를 아니시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역설하였다.

394년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지 않았음을 선언했고, 동정녀이자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신분을 찬양하였다.

400년/ 500년 프랑스의 소와쏭에 있던 이시스 신전이(에집트의 여신을 모시던 곳) 복되신 동정 성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400년/ 500년 동정 성 마리아 기념 축일이 유럽의 여러 지방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400년/ 500년 성모 영보 축일이 콘스탄티노블에서 거행되었다.

400년/ 500년 그리스도와 시메온의 만남(히빠빤떼) 축일이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400년 "마리아의 죽음"(TRANSITUS)에 대한 최초의 책이 기록되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께 "천주의 모친"(테오토코스, THEOTOKOS) 칭호를 드렸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의 공로가 컸었다.

432년 로마의 산따 마리아 마죠레 성당을 복구하면서 더 크게 확장하여, 교황 식스또 3세가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440 년/ 461년 마리아가 미사 경본 속에 도입되었다. 레오 예식서에 보면 성 레오 교황이 미사 전문 부분에 마리아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천주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를 모시고 공경해야 한다..."

451년 칼체돈 공의회는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호칭하였다.

451년 비쟌시움의 황녀 뿔케리아는 마리아의 유품을 수집토록 하였다.

470년 살로니카 대성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500년/ 600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파르테논 신전이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500년/ 600년 로마의 산따 마리아 안띠그마 성당이 봉헌되었다.

520년/ 556년 시리아 시인 성 로마노 멜로디스타가 마리아 찬미가 4개를 지었다.

534년 요한 2세 교황은 콘스탄티노블 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마리아는 "참으로 좋으신 모친"이시다고 선언하였다.

543년 예루살렘의 성 마리아 성당이 봉헌되었다.

550년/ 600년 리비아스의 주교 테오테크노스가 마리아 몽소승천에 대한 믿음을 역설했다.

550년 성모 성탄, 에수 봉헌 그리고 성모님의 서거 축일을 비쟌시움에서 거행하였다.

550년 희랍 철학자 에쿠메니우스(UECUMENIUS)가 묵시록 12장을 마리아적으로 주석한 최초의 인물이다.

553년 콘스탄티노블 제2차 공의회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 교의를 재삼 확인하고,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역설하였다.

600년/ 800년 위 마태오 복음서가 서방에 출현하엿다.

600년/ 700년 마리아적인 응송인 "아베 마리스 스텔라"(AVE MARIS STELLA, 바다의 별이여)가 등장했다.

600년/ 650년 봉헌 축일(2월 2일)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는데, 마리아적인 성격보다는 그리스도적인 축일로 지냈다.

600년/ 636년 서방 교회의 마지막 교부인 세빌레의 성 이시도로가 마리아에 대한 것을 세밀히 기록하였다.

610년 비쟌틴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마리아 성화상을 자기 함대의 상갑판 큰 돗대 아래에 모셨다.

649년 라떼란 회의(만국 공의회가 아님)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선언하였다.

650년/ 675년 성모 영보 축일(3월 25일) 이 로마에서 거행되었으나, 마리아적인 성격보다는 그리스도적인 축일로 지냈다.

650년 성모 몽소 승천 축일(8월 15일)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이때부터 마리아적인 주요 축일로 변화되었다.

675년/ 700년 성모 성탄 축일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다(이 축일은 5세기 이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모 성탄 성전 봉헌에서 유래한다).

680년/ 681년 콘스탄티노블 제3차 공의회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재확인하였다.

700년/ 749년 동방교회의 마지막 교부인 성 요한 다마스체노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당대 최고의 가르침으로 역설하였다.

700년/ 740년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는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 간구하였다.

700년/ 733년 오세르의 성 제르마노는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을 찾는다"(SEEK GOD THROUGH MARY)는 사상을 확립하였다.

705년/ 707년 교황 요한 7세는 "천주의 모친의 종"이라고 불렸다.

750년 "테오필로의 전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는 마리아 성화상에 드리는 공경을 인가하였다.

800년/ 900년 성녀 안나의 잉태 축일이 비쟌시움에서 제정되었다.

800년/ 900년 마리아의 잉태 축일이 서방 교회 안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800년 성모 성탄 복음서가 출현하였다.

804년 이전 베네딕또회 수도자인 알퀸이 토요일에 성모 미사를 드렸고, 875년에 미사 경본의 일부로 수록되었다.

845년/ 860년 성 빠스카시오 라드베르또는 동정 출산, 승천(영혼만) 그리고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지지하였다.

851년 이전 "마리아의 탄생 이야기"가 나왔는데, 성 빠스카시오 라드 베르또의 공로인 듯 하다.

869년/ 870년 콘스탄티노블 제4차 공의회는 "마리아 성화상에 드리는 공경" 승인을 재확인하였다.

876년 까를르 볼드가 마리아의 성의로 믿어지는 옷을 획득하였다.

900년/ 1000년 응송 "레지나 첼리"(천상의 모후여, REGINA CAELI)가 나왔다.

900년/ 1000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소성무일과"가 나왔다.

900년/ 1000년 마리아께서 이 세상을 지나 승천하셨다는 내용의 책인 "뜨란시뚜스"(TRANSITUS, 통과 혹은 죽음이란 뜻)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945년 "자비의 어머니"란 호칭이 서방 교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살레르노의 요한이 "오도의 생애" 속에 언급한 이후부터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975년 토요일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976년 몽세라 대수도원이 스페인에 건설되었는데, 이곳이 차츰차츰 유명한 마리아 경당으로 변모하였다.

1000년/ 1100년 마리아의 공동 수난 축일(MARY'S COMPASSION)이 도입되었다.

1000년/ 1100년 "아베 레지나"(AVE REGINA, 하늘의 영원한 여왕)가 나왔다. 이 찬미가는 중세 신자들의 마리아 신심을 가장 올바르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000년/ 1100년 노틀담 드 ㅅ트르 대성당이 착공되었다.

1000년 베네딕또회 수녀인 간데르샤임의 흐르스비다가 "테오필로의 전설과 야고보 복음서"에 대한 시를 썼는데, 그녀는 마리아를 하늘의 강력한 여왕으로 묘사하였다.

1050년/ 1150년 응송 "알마 레뎀또리스 마뗄"(ALMA REDEMPTORIS MATER,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이 나왔다. 헤르만 불구자의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1050년/ 1093년 켄터버리의 성 안셀모가 성목게 관한 감동적인 글을 썼는데, 이 책속에는 유명한 기도문이 세 개 들어 있었다. 이 책은 중세 시대의 크리스챤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050년/ 1072년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미사 성제와 마리아의 합일점을 모색하였고, 소성무일과를 만들었다.

1080년/ 1124년 에아드밀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를 저술했는데, 교리의 구성이 당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1100년/ 1200년 "마리아의 생애"가 서방으로 퍼져나갔다.

1000년/ 1200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호칭 기도(LITANY)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100년/ 1150년 성모송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제2부(천주의 성모 마리아여...)는 15세기에 추가되었다.

1100년/ 1150년 가장 큰 마리아 모자이크가 이탈리아의 또르첼로 대성당에서 제작하였다.

1100년/ 1135년 독일의 베네딕토 회원인 루페르또가 아기를 성모 마리아께 적용시켜 해석한 첫 번째 인물이다.

1120년/ 1130년 에버샴의 도미니꼬는 "복되신 동정녀의 기적"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1120년 안셀모(젊은)는 마리아께 대한 기적 이야기들을 집대성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적"이란 대중적인 책을 펴냈다.

1130년 잉글랜드의 월싱햄에 성모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1140년 베네딕또회 역사가인 윌리암 말메스부르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적"이란 책을 저술했다.

1150년/ 1164년 쇼나우의 성녀 엘리사벳은 마리아께서 임종하는 장면이기 보다는 하늘로 올라가는 환시를 보았다. 그 이후 중세의 화가들은 성모 승천을 힘차게 그려내었다.

1150년 서방 최초의 성모 승천 그림이 프랑스의 상리스 대성당에 걸렸다.

1150년 마리아를 기리는 라 마르또라나 성당이 팔레르모에 세워졌고, 아름다운 성모 승천 그림을 전시하였다.

1160년/ 1205년 리옹의 노틀담 성당에 세워졌다.

1163년/ 1235년 빠리의 노틀담 성당이 세워졌다.

1194년/ 1220년 샬트르 성당이 세워졌다.

1200년/ 1250년 꾸탕스 성당이 세워졌다.

1200년 망트이 노틀담 성당이 세워졌다.

1215년 라떼란 제4차 공의회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과 동정모성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알비파 이단과 기타 다른 이단들을 대항하여 가톨릭 신앙을 재확인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1920년 아미앙의 노틀담 성당이 세워졌다.

1223년/ 1224년 하이스텔바하의 체살은 "기적들의 대화"속에서 말하기를 마리아께서 당신의 망토로 씨토 수도자들을 보호하신다고 주장했다.

1230년/ 1280년 성 알베르또(대)는 마리아께 관한 놀라운 책을 펴내고, "교회의 어머니"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1250년/ 1300년 익명의 책인 "마리알레 수미쑤스 에스트"는 마리아의 영적, 현세적 선물에 대하여 엉뚱한 주장을 하고 나섰다.

1250년/ 1274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마리아께 대한 신학적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과장되고 조잡스런 모든 내용들을 제거하였다.

1250년/ 1274년 성 보나벤뚜라가 마리아께 드리는 공경을 상경지례(히뻬르둘리아)란 단어로 표현한 첫 번째 인물이다.

1251년 성 시몬 스톡크가 마리아로부터 스칼폴라를 받았다.

1260년/ 1306년 야꼬뽀네 다 또디가 마리아적인 가르침이 풍부한 찬미가를 썼고, 특히 스타발 마뗄(STABAT MATER, 십자가길의 성모) 찬가를 노래햇다.

1260년 샬트르의 노틀담이 봉헌되었다.

1260년 치마부에가 플로렌스이 산따 뜨리니따를 위해 마돈나를 그렸다.

1265년/ 1308년 복자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확립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첫 번째 인물이다.

1269년 안젤루스(삼종기도)가 대중적인 신심으로 널리 퍼졌다.

1274년 리용 제2차 공의회는 천주 성자가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셨다고 선언하였다.

1278년/ 1350년 플로렌스의 산따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 세워졌다.

1280년/ 1300년 5월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관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7세기-9세기에 있었던 동방 교회의 관습이었다.

1296년 "거룩한 집"(마리아의 생가)이 로레또에서 발견되었다.

1296년 플로렌스의 산따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이 착공되었다.

1300년/ 1400년 마리아의 봉헌 축일이 제정되었다.

1300년 마리아의 띠에 대한 전설이 서방에 퍼졌다.

1314년/ 1321년 단떼는 자신의 신곡에서 마리아 신학을 노래했는데, 특히 그는 성모님께 특별한 영예와 영광을 드렸다. 그는 과연 "마리아의 최고 시인"이었다.

1326년 오리엘 대학이 옥스포드에 세워지고,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1340년/ 1373년 스웨덴의 성녀 브리짓다는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다. 이 사건은 그 당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55년 누렘부르그의 산따 마리아 성당이 건립되었다.

1372년 봉헌 축일이 서방에서도 제정되었다.

1376년/ 1383년 마리아의 스카폴라 축일이 제정되었다.

1379년 산타 마리아 대학이 옥스포드에 세워졌다.

1384년 5세기 내지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님의 성화상이 폴란드의 체스토코바에 안치되었다.

1389년 성모 방문 축일이 승인되었다.

1400년/ 1500년 메모라레(MEMORARE) 기도문이 작성되었다.

1400년/ 1450년 요한네스 헤롤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적"을 썼다.

1409년/ 1411년 요한 리드게이트가 "성모의 생애"를 저술하였다.

1410년/ 1444년 토마스 아 켐피스는 "준주성범"에서 강조하기를, 영성생활에서 마리아께 의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썼다.

1420년/ 1447년 꼬르비의 성녀 꼴레뜨가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다.

1423년 마리아의 통고 축일이 제정되었다.

1438년/ 1445년 플로렌스 회의는 천주 성자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사람이 되셨음을 굳게 믿는다고 선언하였다.

1439년 바젤 공의회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정의했다(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이 공의회를 거부한 뒤부터는 다만 암시적인 의미만 있었다).

1440년 마리아께 봉헌된 이튼 대학이 세워졌다.

1457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소성무일과"가 인쇄되었다.

1470년/ 1471년 마르띠노 숑가우어가 마리아의 일생을 조각하였다.

470년 도미니꼬회원인 알란 루포는 "마리아 시편 기도서"를 펴냈는데, 마리아께 드리는 로사리오의 힘을 지지하였다.

1475년 첫 번째 로사리오회가 창설되었다.

1492년 신세계의 신자들, 곧 콜럼부스와 산 살바돌호의 승무원들이 맨 처음으로 기도드린 것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여왕이시며)이다.

1495년 로사리오 기도가 교황 알렉산델 6세로부터 승인되었다.

1496년/ 1501년 미켈란젤로가 최고의 걸작 삐에타를 완성하였다. 임종하신 아들 예수를 당신 팔로 안고 계시는 어머니 마리아는 모든 고통의 상징이었다.

1500년/ 1510년 알브렉트 듀러가 그리스도의 일생 목판화를 제작하였다.

1507년 로레또 경당의 순례가 승인되었다.

1518년 띠시아노가 베니스의 프라리에서 성모 승천을 그렸다.

1531년 복되신 동정녀가 과달루페에서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셨다.

1538년 월싱헴의 성모 경당이 파괴되었다.

1543년 마르틴 루터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긍정하였다.

1547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마리아와 관련되는 교리를 재확인하였다. 특히 마리아는 본죄까지 없다고 하였다.

1550년/ 1617년 프란치스코 수아레스가 마리아론을 최초로 체계화시켰으며, 자신의 전집(OPERA OMNIA) 9권에 수록하였다.

1555년 바오로 4세 교황은 당신의 사도적 헌장 "꿈 궈룸담"에서 마리아의 동정은 그리스도 탄생 전, 후에도 계속되었음을 선언했다.

1558년 로레또의 성모 호칭기도(LITANY)가 발간되었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마리아의 성화상 공경 허가를 재확인하였다.

1563년 성모송이 성무일과에 도입되었다.

1567년 교황 성 비오 5세는 마리아의 무죄하심을 확인하였다.

1573년 동정녀의 대망 축일, 승리의 모후 축일, 그리고 로사리오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577년 성 베드로 가니시오가 "비길 데 없으신 동정 마리아"를 저술했는데, 소위 말하는 종교 개혁 이후에 나온 최초의 마리아론적 작업이다.

1600년/ 1700년 통고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600년/ 1629년 "프랑스 영성 학원"의 창설자 피에르 드 베률이 마리아 신심을 일신시켰다.

1601년 복되신 동정녀의 호칭기도를 전 교회가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은 교황 클레멘스 8세의 공로이다.

1630년/ 1657년 슐피스회의 창설자 요한 쟈크 올리엘은 마리아적인 개념을 표현하는데 신비적인 언어를 사용하였다.

1644년 마리아의 티없이 깨끗한 성심 축일이 제정되었다.

1670년 마리아 데 아그레다가 쓴 "하느님의 신비스런 나라"가 그녀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1680년 성 요한 에우데스가 마리아 성심에 관한 장문의 책을 처음으로 발간했는데, 그 제목은 "훌륭한 마리아 성심"이다.

1683년 성모 성명 축일이 보편 교회로 전파되었다.

1690년 교황 알렉산델 8세가 마리아의 완전한 무죄를 옹호하였다.

1716년 로사리오 축일이 전 교회로 확산되었다.

1716년 알렉산델 드 루비이유가 준주성범을 본떠서 "마리아를 본 받아서"를 간행하였다.

1726년 가르멜산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750년 성 알퐁소 리구오리가 "마리아의 영광"을 간행했는데, 이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1754년 과달루페의 성모가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언되었다.

1815년 "신자들의 도움"이란 호칭이 성모 호칭 기도에 추가되었다.

1815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824년 가타리나 에머릭크가 에페소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에 대한 환시를 보았다.

1830년 성모님께서 성녀 가타리나 라부르에게 발현하시고, 기적의 메달을 제작하라고 하셨다.

1836년 요한 끌로드 꼴랭이 마리아 신심회를 세웠다.

1842년 루도비꼬 마리아 그리니옹 드 몽포르가 쓴 "참된 신심"이 발견되었다.

1845년 뉴만 추기경이 마리아의 올바른 신심을 옹호하였으나 다소 지나친 데가 있었다.

1846년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가 미국의 수호자로 선언되었다.

1846년 성모님이 라 살레뜨에서 발현하셨다.

1849년 비오 9세께서 마리아에 관한 최초의 교서 "우빕브리몸"을 반포하시고,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를 강조하였다.

1854년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교리가 성대하게 선포되었다. 이때 교황 비오 9세는 "이네파빌리스 데우스"를 반포하였다.

1858년 성모님이 루르드에서 성녀 베르나뎃따에게 발현하셨다.

1871년 성모님이 퐁멩

1875년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이 금지되었다.

1879년 카나다 케이프의 성모 경당이 세워졌다.

1879년 성모님이 아일랜드이 녹크에서 발현하셨다.

1883년/ 1902년 "로사리오의 교황" 레오 13세께서 로사리오와 마리아께 대한 교서를 11개나 반포하셨다. 이때 표현된 마리아의 주요 호칭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 "구원받은 자들의 어머니" "신앙의 수호자"등이다.

1883년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여"란 호칭 기도가 성모 호칭 기도에 첨가되었다.

1890년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을 표현하였다.

1900년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선언되었다.

1904년 교황 성 비오 10세는 교서 "ㅇ 디엠 일루드"를 반포하시고, 은총의 중재자이신 마리아 신학의 기초를 계발하였다.

1907년 루르드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913년 워싱톤 D.C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경당의 주춧돌을 놓았다

1917년 성모님이 파티마의 세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다.

1918년 교령 "순트 궈"에서 성청은 마리아를 "공동-구속자"로 부르는 관습을 옹호하였다.

1918년 사도적 서한 "인뗄 소달리치아"에서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그리스도의 구원적인 희생에서 수행한 마리아의 역할을 역설하였다.

1921년 레지오 마리애가 더블린에서 창설되었다.

1923년 사도적 서한 "엑스플로라따 레스"에서 교황 비오 11세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역할을 확인하였다.

1927년 "사제이신 마리아" 신심이 금지되었다.

1931년 성모의 신적 모성 축일이 제정되었다.

1932년/ 1933년 성모님이 벨지움의 보렝에서 발현하셨다.

1933년/ 1934년 비오 11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공헌을 언급하였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뿐만 아니라 갈바리아에서도 천주의 모친으로서 모성을 수행하였다고 강조하였다.

1937년 성모님이 벨지움의 바뇌에서 발현하셨다.

1941년 아무런 의무감없이 메달을 지니고 은혜받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비난받았다.

1942년 비오 12세는 파티마에서 말씀하신 성모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온 세상을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다.

1943년 "미스띠치 꼬르뽀리스" 칙서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인간 구원에서 드러난 마리아의 역할을 설명하고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모후되심을 설파하셨다.

1944년 티없이 깨끗한 성모 성심 축일이 제정되었다.

1946년 교황 비오 12세가 교서 "데이파래 비르지니스 마리애"를 반포하여 승천을 설명하였다.

1947년 교사 "메디아똘 데이"에서 비오 12세 교황은 전례상의 마리아를 설명하였다.

1950년 마리아해(年)가 선포되었다.

1950년 성모 승천 교리가 선포되었다. 이때 비오 12세는 "무니피첸디시무스 데우스"를 반포하셨다.

1950년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 호칭이 성모 호칭 기도에 추가되었다.

1951년 비오 12세는 교서 "인그루엔시움 말로룸"을 반포하고, 로사리오의 영적 힘을 역설하였다.

1953년 시실리 시라쿠제의 무염 성모 석고상이 눈물을 흘렸다.

1954년 교서 "풀젠스 꼬로나"에서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무염시태 확장 백주년을 기념하는 성모의 해(年)을 선포하셨다.

1954년 교서 "앗 첼리 레지남"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여왕이신 마리아"를 선포하고, 축일을 제정하였다(8월 22일).

1957년 교서 "펠레리나제 데 루르드"로 비오 12세 교황은 루르드의 성모 발현 백주년을 기념토록 하였다.

1959년 교사 "그라시아 레꼬르다띠"에서 요한 23세는 마리아를 "전 인류를 위한 구원의 원인"이라고 불렀다.

1964년 바티칸 제2차 공의회는 교회 헌장 제8장에서 처음으로 마리아에 관한 공의회적인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제시하였다. 공의회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가운데 계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였다.

1965년 교서 "멘세 마요"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5월에 성모성월을 충실히 지낼 것을 권고하셨다.

1967년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 50주년을 즈음하여 바오로 6세 교황은 사도적 권고 "시늄 마늄"을 반포하시고, 마리아 신심의 의미와 목적을 재강조하셨다.

1969년 바오로 6세의 로마 미사 경본이 간행될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가운데 담당하는 마리아의 역할에 근거하여 마리아 관계 축일이 조정되었다.

1970년 시과경이 간행될 때에도 마리아 관계 축일이나 기타 기도문들이 조정되었으나, 마니피캇, 마리아적인 응송, 찬미가 그리고 독서들은 오히려 늘어났다.

1973년 미국 주교회의는 사목 교서 "당신의 어머니를 보시오"를 발표하여, 마리아의 위치를 재확인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친께 대한 전통적인 애정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197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사도적 헌장 "마리알리스 꿀뚜스"를 반포하시고, 전례적인 마리아 신심, 대중적인 마리아 신심 등을 재확인하셨다.

1975년 로마 미사경본 개정판 속에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모 성명" 미사가 기원 미사로 포함되었다.

1978년 크라코우의 대주교 카롤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라 칭하고, 당신의 교황 재위 기간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교황은 모토는 "오 마리아여, 모두 당신의 것 입니다"이다.

1980년 "천주의 모친"이란 호칭이 성모 호칭 기도에 추가되었다.

1981년 경신성성이 성모님의 새로운 호칭 기도를 반포하였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파티마를 방문하고, 온 세상을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다.

198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구세주의 모친"을 발표하고, 성모 성년을 반포하였다

세계의 성모님 발현지

세계의 성모님 발현지
교회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379회(1984년 현제)의 성모님 발현의 대부분이 18세기(1830년~1984년)이전의 것이며 1984년 이후에도 발현 보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교회는 그 진실성 여부를 가리는데 매우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다.
지금도 성모님의 발현은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1975 년 일본 아끼다의 성체봉사 수녀회에 모셔진 목각 성모상을 통해서, 1985년 우리나라 나주의 한 가정에 모셔진 조그만 성모상을 통해서도 심오한 기적의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지만, 지난 150년동안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모님의 발현지로 인정된 곳은 극히 적은 숫자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모님의 발현은 그 외적 상황이 각기 다르더라도 내적인 메세지는 심오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죄악과 절망으로 상처난 인류를 치유하시려는 주님의 어머니시며,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요한 19, 23-29)의 의도를 명백히 밝히고 계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발현때 마다 강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일생을 묵상할 수 있는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실행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할 일 일것이다.
교회가 성모님 발현의 사적 계시에 대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는 이유도 그 의미를 왜곡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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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리

◈ 성모설지전 (聖母雪地殿)(Beauraing)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인, 로마의 성 마리아(Santa Maria Maggiore) 대성전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있다.
콘 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352년 8월 5일, 로마에 요한이라는 독실한 귀족 신자 부부와 교황 리메리오(352 ~366)의 꿈에 동시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위한 성전을 세울 것을 요청하고 그 징표로 8월 한 더위에, 에스퀄리노 언덕에 하얀 눈을 내리셨고 눈의 성마리아 대성전이 세워 진것이다.
역대 교황들은 이 성전을 개축하고, 성모의 일생을 담은 성화로 실내를 장식, 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체워 로마의 4대 성당의 하나로 만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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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티키아리와 폰타넬레(Montichiari Fontanelle)
이 탈리아 북부 브레시아에서 20km 떨어진 조그만 마을 몬티키아리의 간호원 피에리나 질리는 1947년 12월 8일부터 7차례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보았다. 흰베일에 보라빛 옷을 입으신 성모 마리아는 가슴을 큰칼 셋에 찔려 우시는 모습 또는 흰색, 붉은색, 황금색의 장미가 달린 흰옷을 입으신 모습으로 오시어 '신비로운 장미'의 호칭으로 공경받기 바란다고 하셨다. 그리고 세자루의 칼은 대죄 중에 있는 자, 성소를 버릴 뿐만 아니라 교회와 적이 되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상징이며, 세 송이의 장미는 기도와 보속과 희생 정신을 의미한다는 설명도 해주셨다.
1966년 2월 성모의 발현을 다시 예고받은 피에레나는 몬티키아리의 한 지역인 폰타넬레에서 4월 17일 정오에 마리아를 뵙고, 그곳에 있는 우물에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다. 1968년 부터 1973년까지 '신비로운 장미'이신 마리아는 믿음과 감사, 사랑과 청원의 기도, 보속을 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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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 과달루페 (Guadalupe)
과 달루페의 성모님 발현은 시대적으로 450년이나 앞선 것이다. 1531년 12월 9일 부터 12일까지 동정성모 마리아는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얼마되지 않은 한 맥시코 원주민후안 디에고에게 발현 하셨다. 아즈텍 인디언 후안이 집에서 약 40리 떨어진 틀라데롤코의 프란치스코의 수도원으로 미사를 드리러 가다가 맥시코시의 북서 테베작 산에 이르렀을 때 태양 같은 옷을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 한 임무를 맡기셨다.
"나의 자녀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아들아. 나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며 모든 것의 주님이시고, 만사가 그분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참하느님의 어머니, 완전하고 영원한 동정 마리아다. 나는 이곳에서 나의 사랑, 자비, 도움과 사람들을 위한 나의 보호를 드러낼 것이며, 여기에 성전이 세워지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다. 나는 너의 자비스런 어머니, 이 땅에 결합되어 사는 모든 이의 어머니, 온 인류의 어머니, 나를 신뢰하고 나에게 도움을 청하며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어머니다. 나는 여기서 그들의 울부짖음과 슬픔을 들을 것이며, 그들을 치료하고 고통을 완화시키겟다. 나의 의향을 수마라가 주교에게 전하라."
후 안이 전하는 귀부인의 원의를 믿기 위한 징표를 청하는 주교에게 성모 마리아는 카스틸라 장미 한 다발을 보냈다. 한 겨울 테체작산 꼭대기에 피어난 장미를 후안은 틸마(망토) 앞자락에 고이 담아 주교와 둘러선 사람들 앞에 펼첬다. 그러자 더욱 확실한 표징이 나타났다. 꽃들이 흘러 내린 틸마에는 발현하신 귀부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과달루페의 영원한 동정 마리아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신 귀부인의 말씀에 따라 테베직 언덕에는 과달루페의 성모 성전이 건립되었다. 인디언語로 과달루페는 "돌 뱀을 쳐부수다"라는 뜻이다. 멕시코에 국경이 없고.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지 39년 밖에 안 된 시절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로 말미암아 8년 만에 원주민 800만 명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쟁 포로들의 심장을 파내어 전쟁의 신에게 바치던 풍습과 해마다 2만명 이상의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피의 재물로 바치던 우상, 곧 "돌뱀"이 사졌다. 새 하와인 마리아, 뱀의 머리를 짓 밟은 여인(창세, 3.15; 묵시 12.)은 멕시코 및 남북 아메리카의 수호자가 되었고, 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싼 것이다.

【바티칸=외신종합】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1년 12월 18일 시성에 필요한 기적을 공식 인정 받은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 신부와 파드레 비오 신부, 후안 디에고 등 세 명을 시성하기로 했다고 공식발표했다.
교 황청 시성성 장관 호세 사라비아 마르틴 추기경은 "에스크리바 신부(1902~1975)는 오푸스 데이(Opus Dei)의 창설자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평신도의 거룩함을 증진했고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사회에 복음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추 기경은 또 파드레 비오 신부(1887~1968)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아들로 겸손한 카푸친회 수사이며 기도와 고해성사에 평생을 헌신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로 성흔을 보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후안 디에고는 1931년 12월 멕시코에서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을 목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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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 파리 (Paris)
1830 년 7월 18일 파리의 위드박 (Rue de Bac)에 있는 성 빈첸시오의 애덕자매회의 가타리나 라블레는 잠을 청하던 차에 한 소년의 부름을 들었다. "빨리 성당으로 오세요, 동정 마리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망서리던 가타리나가 성당으로 갔을 때 제대위의 초가 모두 켜저 있었고, 잠시 후 비단 옷 끌리던 소리가 나더니,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나 사제의 의자 위메 좌정하였다. 부인은 가타리나에게 가까이다가오도록 하시고는 말씀 하셨다.
"필요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에 이리로 오너라. (왼손으로 감실을 가리키시며) 저곳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단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너는 고통을 당하겠지만 그것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이다......프랑스에 위기가 닥치고 있구나. 왕권은 무너질 것이고...... 그때 너는 이 제대로 오너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제대 앞에서 모두들 위로와 힘과 은총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 어느 한 순간 위기는 극에 달할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여길 때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동정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시며 계속하셨다. "십자가는 내동댕이쳐지고 멸시받을 터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다시 여는 것과 같다. 거리는 온통 피바다가 될 것이고,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예언대로 파리는 7월 혁명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성 빈첸시오 애덕자매회 본원은 그러한 소요에서 보호되었다. 그 해 11월 27일 오후 5시 30분경 기도하던 가타리나는 소성당 오른편에서 다시 마리아를 뵈었다. 빛나는 흰옷에 베일을 쓰,시고, 작은 지구의를 손에 들고, 뱀에 감긴 지구를 발로 밟고 계신 마리아는, 보석 반지들을 낀 손가락을 통하여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빛을 발하고 계셨다. 모든 시선을 손에 집중하고 있는 가타리나에게 마리아는, "이 빛에는 나에게 간구하는 이들에게 내려줄 은총의 상징이 있다"고 하셨다. 순간적으로 이 환시를 이해하게 된 가타리나는 동시에 마리아를 둘러싼 타원형의 빛 가운데, "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달아드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를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모습대로 메달을 주조하라. 이 메달은 은총의 메달로서 이것을 지니는 사람은 누구나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또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이들에게도 은총을 충만히 내릴 것이다."하고 외쳤다. 예수 성심과 성모성심으로 된 메달의 뒷면도 나타났다.
한편, 평소 가타리나를 지도하던 알라델 신부는 전에도 성 빈첸시오의 심장에 대한 환시를 보았다고 말한 바 있는 가타리나를 의심하여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12월 말 다시 발현하신 동정 마리아의 의향을 간절히 전하는 가타리나의 태도에서 진정 성모님의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신부는, 수도회 총장신부와 주교의 허락하에 메달 주조에 착수하였다. 1832년 6월 30일에 나온 최초의 메달은 이단에 빠진 어느 주교를 임종석에서 회개시키는 기적을 선두로 갖가지 치유를 일으켰다. '기적의 패'는 놀라운 속도로 퍼져 나갔고, 복된 수녀로서 일생을 마친 가타리나 라블레는 194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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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살레트(La Salette)
성 모 마리아는 고원 목장도 찾아가셨다. 그레노블교구 라 살레트에 있는 해발 1800m의 목장에서 1846년 9월 19일 멜라니 갈바(14세)와 막시민 지로드(11세)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공 모양의 물체에서 나와 우물 가의 돌 위에 앉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비통히 우시며 들일을 하면서 주일을 지키지 않은 죄, 거룩한 이름을 불러 함부로 저주하며 대소재를 지키지 않은 죄 때문에 수확이 결딴나고 대기근이 들 것이라 하셨다. 또 7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부모의 품에서 중병으로 죽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보속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며, 아이들에게 각각 한 가지의 비밀도 말씀하셨다. 또한 사람들이 회개하면 돌과 바위들이 곡식 더미로 화할 것이고 풍성한 감자 수확을 거두리라는 희망도 아울러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발현은 그후 프랑스 정체가 제3공화정이 되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직자들의 저지 등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단, 그레노블 주교는 1851년 이 발현이 사실임을 인정하였고, 교황 레오 13세(1878~1903)가 기념 성당을 세웠다. 도시와는 다른 산의 정기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을 위하여 상설 고백소도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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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르드(Lourdes)
루 르드는 오트 피레네도의 타르브 평야에서 그치는 산맥의 마지막 기복과 라브당 산의 일곱 계곡의 물이 흐르는 하구에 위치한다. 루르드의 성채는 피레네의 요새였고, 18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는 1858년 2월부터 7월까지 18회에 걸쳐 벨라뎃다 수비루(14세)에게 발현 하셨다. 연약한 양치기 소녀 벨라뎃다가 친구및 동생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들로 나가 개울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을 때였다. 아주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 저만치 서 계시는 것이었다. 별 말씀 없이 부인은 아기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결함 그리고 모성의 부드러움을 지닌 채 푸른 띠를 나부끼며 정성스레 합장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리고 계셨다.
당시 프랑스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멀리하고 있었던 터라 발현에 대해 말하는 벨라뎃다는 정부 당국과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발현 장소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의 발현때 '나는 원죄없는 잉태'라 하심으로써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선포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교의를 확인하신 마리아는 기적의 샘을 솟게 하셨다. 즉 벨라뎃다로 하여금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이 귀한 그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에 샘을 파게하시고, 그 물로 불치의 병자들을 속속 치유하기 시작하셨다. 동정 마리아의 루르드 발현은 1862년 공인되었고, 잡목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동굴 속에 '원죄없는 잉태'의 성모상이 1864년 최대의 성황리에 안치되었다. 발현 후 50년 동안 4,000건 이상의 난치병 치유 사실이 보고되었고, 신앙의 기쁨을 찾은 이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1872년부터는 순례자가 더욱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그 수는 연간 200만명을 넘는다. 실로암(요한 9:10)과 베짜타연못 (요한 5:4)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치유능력을 마리아는 오늘도 루르드의 샘을 통해 드러내고 계신다. 벨라뎃다는 1866년 루르드를 떠나 수녀가 되었으며, 35세를 일기로 1879년 선종하였고 1933년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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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맹(Pont-main)
1871 년 1월 17일 저녁 날씨가 어떤가 보려고 창고에서 문 밖에 내다보던 바베데트(12세)는 위가 넓은관을 쓰고 5각형의 금별들이 수놓인 푸른 옷차림의 부인을 보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임박으로 프랑스 서부 전체가 공포에 떨 때 성모님은 브르타 마엔 북쪽 풍맹에서 외젠을 비롯한 일곱 어린이들에게만 자신을 보여 주시며, "내 자녀들아, 기도해라. 그러면 단시일 내에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실 것이고, 나의 거룩한 아들이 그 마음을 움직이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한자한자 찍어내어 아이들로 하여금 군중을 위하여 읽게 하셨다. 발현한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배로 커지면서 글자가 나타난다는 말을 듣고 모였던 6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발현이 계속되는 동안 삼각별 셋만을 볼 수 있었다.
다음날 밤 독일군의 진군은 중단되었고, 11일 후인 1월 28일에는 휴전이 조인되었다. 성모님의 보호를 구하며 징집되었던 39명의 풍맹 청년들은 무사히 귀가했다. "항상 기도하라"라는 복음 말씀외에는 한마디도 더 첨부하지 않은 마리아의 메세지가 전해지자, 하루에도 수천 명씩 교회로 몰려왔다. 이 성모 성지는 1872년에 공인되었고, 1900년 성당이 축성되었으며, 성모상이 세워졌다. 그것은 진한 남빛 바탕에 금별이 수놓인 옷차림의 마리아가 슬픔에 잠겨 피범벅의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를 두 손으로 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금 내미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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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

◈ 녹(Knok>
1845~6 년의 기근으로 2백만 명 이상이 죽어가던 아일랜드는, 1879년 또 한 차례의 기근으로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 해 8월 21일 녹 마을의 두소녀와 성당의 가정부는 저녁 7시경 성당 서쪽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입상셋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15명이 모여들었더니, 흰옷을 입은 성모님이 미사를 드리는 사제처럼 손을 든 채 가운데 계시고, 오른편에 손을 합장하고 기도드리는 성 요셉, 왼편에 책을 들고 강론하는 자세의 주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왼쪽에는 소박한 제대 위에 커다란 십자가와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놓여 있으며, 그 주위를 광선과 별들, 공중에 떠 있는 천사들의 무리가 에워싼 것을 9시 넘어까지 볼 수 있었다. 이 짧은 발현의 핵심은 주교를 통해 제대와 결합된 마리아, 희생되신 은총의 중재자 어린 양과 함께 곤경에서 보호하시는 아일랜드의 모후 마리아에게 있다. 성모 마리아는 녹에서 특별히 공경받으시며 은혜를 내리고 계신 것이다.

다음은 현지 교민이 보내온 사연을 수정없이 그대로 싣습니다.  1999.12.10
아 릴랜드 서부해얀 지역인 마요(영어: 애란어: County Mayo Contae Maigheo)군에 있는 녹 성모 성지 이야기를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마요군민인데 자주 그 성모성징에 순례갔습니다. 실수 하나 있는데 영어로 녹은 Knock이라고 습니다. 이는 그 마을의 애란어 이름 Cnoc의 영어화입니다. Cnoc이란 언덕이란 뜻입니다.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후에 그 곳의 애란어 이름은 Cnoc Mhuire라고 합니다. 뜻은 마리아의 언덕. 그래서 여러분이 쓰신 Knok이란 말 틀립니다.
함께 나타난 주교는 복음사가 성 요한이었는데 그분의 왼손에 복음서 또는 성서를 들고 있고 왼손은 설교하는듯 올려 있습니다.
무언의 발현이었는데 상징적으로 말한 것은 묵시록과 관련된 메시지입니다.
어 린양의 신부인 교회의 견본이 되시는 마리아와 천상에 영광 안에서 그분과 그분의 외아드님을 관상하고 있는 성인들은 아일랜드인들에게 현세의 고생을 무릅쓰고 마침네 성모님의 기도와 미사 때에 재현되는 어린 양의 수난과 부활 승리의 공로 덕분에 승리하겠다고 약속한다는 메시지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평화와 선 Siochain agus maitheas
황진혁 베르나르디노 형제 An Brathair Bearnairdin O Mo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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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

◈ 파티마(Fatima)
파 티마의 성모 발현은 이제까지의 모든 발현보다 세계사와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의미심장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와중이던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서유럽의 역사에 개입하였고, 동유럽에서는 12월 7일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2의 이데올로기 세력을 계획하여 전세계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한편 바티칸에서는 몬시뇰 파젤리(교황비오 12세)의 주교 서품식을 5월13일 거행하고, 그를 독일 대사로 파견하여 평화를 위한 중재를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평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즈음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성 베드로 광장 에서 『사탄이 바티칸을 지배해야 한다. 교황은 사탄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는 깃발과 루치페르가 미카엘 대천사를 내동댕이치는 그림을 나부끼며 창림 200주년 기념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겨한 까닭에 당시 신학생이었던, 1982년 시성된 M.콜베는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군주정치에서 셰계 혁명을 거쳐 민주정치로 발돋음하던 역사적 전환기 1917년의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성모 마리아는 6번 에 걸쳐 발현하여 세계 평화를 위한 참으로 중요한 메시지들을 남기셨다. 어린 목동들 루치아(10세), 프란치스코(9세)와 히야친타(7세)가 점심을 먹고 묵주의 기도를 끝내려 할때 번개가 번쩍 하였다. 폭풍우가 닥칠까 무서워 급히 양떼를 몰고 내려오던 어린 목동들은 좀더 강한 번개가 다시 치는 것을 본 순간 너도밤나무 위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여인이 서 계시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천국에서 왔으니 무서워하지 말라는 부인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매달 13일 그 발현 장소에 오면 10월에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세계 평화와 전쟁 종식을 위하여 매일 묵주의 기도를 바칠 것을 당부하신 부인은 세번째 발현때 『사람들이 나의 요청을 실천한다면 러시아는 회개하고 평화가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전세계에 악을 행하고 전쟁과 교회에 대한 박해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나의 티없는 성심이 승리라리라. 교황은 러시아를 나에게 봉헌할 것이며, 얼마 동안 세계에는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날 지옥에 대한 환시를 본 세목동들은 전율하였다.
10월 13일 마지막 발현 때 성모님은 기념 성당을 지을 것과 죄인의 회개및 용서를 위해 보속할 것을 당부하고 두팔을 펼치고 하늘로 오르셨다. 그 발현을 지켜보려고 모였던 7만 명의 군중은 퍼붓던 비가 그치고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태양이 활활 타는 수레바퀴처럼 돌며 색색의 빛줄기를 뿜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는가 했더니, 멈춘 다음 그들을 향하여 떨어지려는 광경에 접하였다. 모두들 겁에 질려 " 주 예수여, 저희들이 여기서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부르짖자 태양이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난' 하늘의 큰 표징(묵시12장)으로 종말론적 성격을 띠는 이러한 파티마의 발현을 통하여 평화의 모후는 악의 세력과 부단히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일깨우신 것이다. 세 어린이에게 주신 세 가지 비밀 중 한 가지는 아직 공개되어 있지 않다. 파티마의 성모 메시지는 후세 사람들이 언제나 시대의 조류와 함께 검증하고 돌아볼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를 다시 한번 평화의 모후께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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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

◈ 보랭(Beauraing)
파 티마의 성모 메시지가 느리게 전파되는 동안 성모 마리아는 벨기에에서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내셨다. 1932년 11월 29일부터 1933년 1월 3일까지 보랭의 다섯 어린이들에게 잠깐씩 여러 차례 발현하시고는 '원죄없이 잉태된 동정녀, 하느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인 당신의 성심을 사랑하고 더욱 착한 사람이 될 것, 주님을 위하여 항상 희생을 바치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마지막 발현 때 모여 있던 군중들에게 어둠에 싸인 정원에 불 같은 공을 하늘로 떠올려 찬란한 불꽃으로 폭발하며 쏟아지는 기적을 보이셨다. 그날 저녁부터 보랭은 은총을 내리시는 마리아의 새로운 성지가 되었다. 1943년 2월 19일 관할 주교 안드레아 샤르는 이 발현을 사실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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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뇌(Banneux)
1933 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 사이에 성모 마리아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로 반뇌에 사는 마리에트(12세)에게 8번 나타나셨다. 당신을 철저히 신뢰할것을 바라시며 루르드처럼 샘터를 지적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치유와 회개의 기적을 일으키는 루베네의 아르덴 고원의 반뇌도 1949년 성지로 공식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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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 가라반달(Garabandal)
1961 년 6월 18일 스페인의 산골마을 산 세바스티안 데 가라반달에 성 미카엘 대천사가 나타나 남의 사과를 몰래 따먹고 놀던 콘치타(12세),롤리(12세),히야친타(12세)와 마리쿠르스(11세)에게 7월 12일 '가르멜산의 성모'가 발현하리라는 예고를 했다. 과연 7월 12일이 되자 흰옷과 파란 망토에 왕관을 쓰고, 오른판에 스카풀라를 두른 귀부인이 처음 천사가 나타났던 카예하에 나타나셨다. 그후 1965년 11월 3일까지 몇 차례 더 발현하여 사람들이 아이들을 통해 드린 물건에 친구하고 돌려 주시기도 하며, 때로는 갓난아기 예수를 안고 오시어 아이들의 팔에 안겨 주시기도 했다. 어느날 롤리와 히야친타가 사람들이 성모님의 목소리나마 듣고 싶어하므로 말씀하시기를 청하고 사람들이 녹음을 시도하자, 성모님은 "아니, 나는 말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하셨는데, 그것을 많은 사람이 듣고는 깊은 감명을 받아 진실성을 믿었다. 그러나 곧 녹음을 다시 틀었을 때에는 그 음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심사 계류중인 이 발현지에서 탈혼 또는 부르심의 무아경 속에서 목격자들이 행진을 하기도 하고, 지상의 어느 감실로부터 미카엘 대천사가 날라온 성체가 아이들의 혀 위에 나타나는 것이 비데오 카메라에 담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발현에 따른 메세지 중 1965년 6월 18일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미카엘 대천사가 전한 것은 아래와 같다.
" 전에는 잔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넘치고 있다. 많은 추기경, 주교, 사제들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또한 많은 영혼들을 그리로 데려가고 있다. 성체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너희는 너희 자신들의 노력으로 하느님께서 분노를 거두시게 해야한다....너희는 지금 마지막 경고를 받고 있다.....보다 많은 희생을 바치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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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고슬라비아

◈ 메주고예(Medugorje)
1981 년 6월 24일부터 시작된 이 발현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날 오후 늦게 메주교예의 포드브르산에서 전방 2,3백 야드쯤 되는 지점에 밝게 빛나는 사람의 모습을 산책하던 미르야나 드래지세빅(16세)과 이빈가 이반코빅이 보았으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실리 만무하다는 농담을 하며 마을로 내려왔다. 하지만 다음날 이빈가, 미르야나, 마리야 파블로빅, 비카 이반코빅, 이반 드래지세빅과 야코브콜로 등 6명의 청소년들이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유고슬라비아 정부 당국의 비상한 관심속에 감시를 받고 있으면서도 사방으로 널리 알려져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틀림없는 성모님의 발현이라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제관, 그리제바코산의 십자가 곁, 야고보 성당등 자리를 옮겨가며 발현하시는 성모 마리아는, '기도와 단식'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하시며, 자연법칙을 중지시킬 수도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계신다.

(동아출판사刊 성서의세계 참조)

종교 개혁자들의 성모 마리아관

종교 개혁자들의 성모 마리아관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 95개조 논제
이 논제는 개신교 형제분이라면 누구나 다 아실 겁니다. 루터의 95개조 논제 중, 제75조를 먼저 소개합니다.
"교황의 면죄증에도 굉장한 능력이 있어--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빠진 생각이다."
또, 루터는 그의 95개조 논제 해설집에서 이 제75조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추가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의견들을 견지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로부터 용서를 간구해야할 것이다."(Ibid., 231p.)
이처럼 루터는 성모 마리아를 명백하게 하나님의 어머니, 거룩한 동정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마리아의 찬가(The Magnificat) 논문
루터가 이 논문을 완성시킨 것은 1521년 3월 10일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파문당한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보다 더 루터의 성모관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볼수 있습니다.
루터는 마리아의 찬가 속에서 성모 마리아를 시종일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동정녀 마리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마리아의 찬가 서문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중보의 기도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성모께서 몸소 저에게 지혜의 영을 주셔서 당신의 찬가를 유익하 고도 철저하게 해설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와 함께... . 아멘."(루터 선집 제 3권. 274-275p)
그리고 루터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진지한 공경심을 알 수 있는 문장을 몇 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어머니는 그 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들과 그 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에 관해 말한다."(루터 선집 제 3권, 321p.)
" 그래서 그들은 누가 복음 6:21의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는 하나님의 어머니의 위로의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Ibid., 322p.)
"우리에게 굶주림과 가난을 기꺼이 참을 수 있게 해주는 큰 위안의말 중에 하나님의 어머니가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주린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리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Ibid., 325p.)
루터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올바른 공경심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마리아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과 헌신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어떻게 기원을 드려야할 것인가? 아래의 구절을... 이 하나님을 찾으셨으므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당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비나이다."(Ibid., 297--298p.)
"동정녀 마리아는 이 구절을 단순히 그녀에 대한 찬양이 한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그녀가 찬양받지 못하는 시대가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라는 표현에서 보여 주었는데, 다시 말한다면 그녀에 대한 찬미가 그 때부터 시작되어서 모든 세대에 걸쳐 자손의 자손에 이르도록 계속될 것임을 뜻한다."(Ibid., 299p.)
루터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마리아도 역시 아낌없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헤로 돌렸으며 자신의 공적으로 보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녀는 죄가 없었지만, 여하튼 ... 어떤 3류 작가들은 마리아의 이러한 어머니로서의 합당성에 대하여 법석을 떨겠지만 나는 그들보다는 오히려 마리아를 믿기를택한다."(루터 선집 제 3권, 302p.)
루터는 성모 마리아가 죄없는 이였다고 위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21년6월8일에 쓰여진 루터의 다른 작품인 "라토머스를 반박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설사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누구에겐가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도록(성모 마리아에게 하셨다고 우리가 믿는 것처럼) 많은 은혜를 주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Ibid., 400p.)
루터는 성모 마리아에게 우리가 중보의 기도를 청할 것을 권고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 주시고 이루어 주시기를 기원하지 않으면 안된다."(루터 선집 제3권, 303p.)
성모 마리아를 진실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공경하는 루터는 그의 마리아의 찬가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재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애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위해서 이러한 은총을 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 아멘."(루터 선집 제3권, 322p.)
그리고 번역이 생략된 루터의 문장을 하나 소개합니다.
"죽음에서... 그녀는 당신이 그녀 자신에게 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는 것을 원한다."
그 는 또 다른 논문에서 창세기 22:18을 해설하면서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의 어머니는 순수한 동정녀임이 증명되고 있다."라고 하고 있으며 그는 여러 교회 회의(니케아, 칼케돈, 에페소 등)의 천주의 성모성 확인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으로 살펴 본 바와 같이 루터는 성모 마리아를 대단히 진지하고 정당하고 경건하게 공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종종 성모께 기도를 중재해 주시길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모가 죄없는 분이라는 주장도 했습니다. 이런 루터의 성모 마리아관은 가톨릭의 그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2. 츠빙글리(Ulrich Zqingli)
츠빙글리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진지하고 경건한 공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많은 저작을 남겼습니다만, 그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논문은 9개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은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그 중 An Exposition of the Faith라는 논문이 부분적으로 번역된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개혁 주의 교회의 창시자인 츠빙글리는 이 논문에서 성모 마리아에대한 자신의 태도와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 우리가 ... 우리는 하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의 영예를 빼앗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창조주의 졸업과 권능을 그녀에게 돌리려고 노력한다면 그녀 자신은 그러한 경배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가 다른 모든 피조물을 위해 더욱 더 높게 찬양받고 그녀가 하나님이신 그녀의 아들에게 더욱더 경건하게 전념한다면.... ."
"그리고 그녀는 ... 동정녀가 데오토코스, 즉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려져야만 하는 것이 내 판단으로는 정당하다는 이유이다."
"축복받은 동정녀와 아브라함과 바울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하늘 나라의 그것은 무슨 종류인 삶인가?"
"당신은 두 사람의 아담을 보게 될 것이다. 구속받은 자(아담)와 구속한 자(예수님), ... 이사야와 그가 예언한 하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
이 처럼 츠빙글리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모님을 축복받은 동정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그의 67개조에서 가톨릭의 많은 교리와 신조를 비판하고 있지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나 신조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공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보아 개혁주의의 창시자 츠빙글리도 성모님을 진지하게 공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존 캘빈(John Calvin)
개혁주의 신학의 완성자이자 장로교의 창시자인캘빈은 루터나 츠빙글리 만큼은 아니었지만 성모 마리아를 진지한 태도로 공경했습니다.
캘빈은 마태복음13: 53--58과 마가복음 6: 1--6의 성구를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 우리가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형제들이라는 그 단어는 어떤 친척 관계라도 나타내기 위하여 히브리어 풍에 일치하여 사용된다. 따라서 헬비디우스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때때로 (성경에서) 언급되었기 때문데 마리아가 많은 아들들을 가졌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엄청난 무식함을 드러내었다."(Harmony of the EvangelistsVol. 2, 215p.)
캘빈은 요한복음7:1-8의 주석에서 다시 고대 히브리언들의 언어 습관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라는 그 단어 아래 친척 관계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히브리인들은 모든 사촌 형제들과 다른 친척들을 포함시켰다."(Harmon-y of the Evangelists Vol. 2, 89p.)
이외에도 많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캘빈은 방대한 자신의 기독교 강요 속에서 시종 일관 가톨릭의 교리신조 등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으나 이상하리만치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 히려 캘빈은 "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를 본받아 곤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이런 일이 있겠느냐고 묻는 것을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기독교 강요 하권, 479p. 생명의 말씀사) 라고 하며 성모님을 거룩한 동정녀라 부릅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캘빈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성모(the holy mother of Chris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392p.)
캘빈은 에페소(431년), 칼케돈(451년) 교회 호의를 거룩한 교회회의들이라면서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의들은 앞서 말했듯이 모두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로천명한 회의입니다. 제가 알기로 캘빈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능숙했고 교부들의 저서나 기독교사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캘빈이 그 내용을 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러나 저는 그 당시 가톨릭 신자들의 성모님에 대한 미신적인 숭배는 솔직히 시인하는 바입니다. 또한 현재도 그런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친 바가 아니고 또 권면하는 바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신자들을 잘 이끌지 못한 책임만은 면하기 어렵다는 것은 시인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천리안 가톨릭 동우회 자료실 번호:291/291

마리아에 대한 오해

마리아에 대한 오해
가톨릭 과 개신교 의 차이점 1순위는?
학자들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마리아를 공경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그 1순위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는 교회론과 성사론적인 관점, 교계 구성에 이르기 까지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대체로 "마리아"하나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해 낸다.
그만큼 마리아 공경은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 생활 양식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주위의 개신교인 이나 타종교인이 마리아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의 문제를 놓고 난감해 하는 경우가 많다.

◑ 실타래 처럼 얽혀 있는 마리아에 대한 오해들을 하나씩 풀어본다.

◈ 가톨릭은 마리아교?
과거 교리에는 흠숭지례(欽崇之禮), 상경지례(上敬之禮), 공경지례 (恭敬之禮)라는 말로 그리스도와 마리아, 그리고 일반 성인에 대한 예 (禮)를 구분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공경과 단순히 "은총이 가득한 이" (루가 1,28)로서의 마리아에 대한 공경, 그리고 성인에 대한 공경을 "흠숭" "상경" "공경"으로 명확히 구분한 것이다.
상경과 공경은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는 구별된다.
하느님이 육화의 도구로 택한 어머니 마리아가 신자들로 부터 "드높여 공경"(상경)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결국 가톨릭은 마리아교가 아니며 마리아는 일반 성인(聖人)중 가장 뛰어난 분으로서 신자들에 의해 공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모 마리 아가 예수를 낳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따라서 우리가 마리아 를 존경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 가톨릭 신자들은 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마리아를 전지 전능한 신으로 생각한다는 오해가 생겨났다.
이러한 오해는 요한 복음서 2,1-11까지를 읽으면 쉽게 해결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요청을 받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행 한다.
이점에서 성모님의 전구는 다른 그 어떤 성인의 전구보다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자주 외는 성모송에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때에 저희 죄인을 위 하여 빌어주소서"라고 되어있다.
결국 마리아에 대한 기도는 "대도"(代禱)다.

◈ 마리아는 동정녀가 아니다?
성서에 예수에게 형제들이 여럿 있었다는 기록을 두고 마리아가 적어도 예수 출산 이후에는 동정녀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성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사촌 형제들까지 모두 형제로 호칭했으며 심지어 같은 동네에 사는 또래들까 지 형제로 칭하기도 했다.
하느님이 이 땅에 올때 원죄없는 동정녀의 몸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모든 성인과 천사를 능가하는 지위를 받은 마리아는 동정녀이며 또한 원죄 에 물듦이 없다는 것이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다.

천주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교회인가?

천주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믿는 교회인가?
천주교회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천주교회를 가톨릭교회라고도 하는데 가톨릭이란 '보편적'이란 뜻입니다. 천주교회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러면 왜 신자들이 성모님을 공경할까요?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의 모범이십니다. 성모님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따르신 분은 없습니다.

먼저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공경한 분이신데 신자들이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존경하는 사람의 사진이나 동상을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9, 26-27>

1. 성서 안의 마리아

우리가 마리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마리아 자신 때문이라기 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그분의 아들이 세상 모든 것을 바꿔 놓으시기 때문이다. 신약성서가 마리아에 관해서 길게 말하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마리아의 위치에 관한 기본적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관심은 그분의 수난, 죽음, 부활에 있었으나 점차 예수의 생애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도 커져 갔다. 마리아에 관한 가장 충분한 언급은 신약성서 중에서도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온다. 루가 복음의 앞 머리에 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는 마리아가 중심인물이다. 또한 우리는 사도행전의 첫 머리에서 마리아가 이층방에서 사도들과 계속 기도하시는 것을 본다. 성 요한도 예수님의 공생활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마리아가 아주 뚜렷이 드러나시는 두 장면, 즉 가나와 골고타의 장면으로 꾸민다(요한 2,1-12; 19,25-27).

성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모세의 전통과 약속에 비추어 사색하면서,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채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성 마태오의 메시지 요점은, 인간 어머니에게서 나신 예수님이 구원의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을 백성들에게 가져온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이다.

성 루가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지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좀더 깊이 보게 한다. 그의 신학적 목표는 예수님을 신적 메시아와 주님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루가 1,26-38)는 성모에 관한 중심 계시이다.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혹 '총애를 받은 이'라고 불리운 것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마리아의 역할이 특유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결과로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고 루가는 알려준다. 주님이 마리아 안에 계시고, 마리아가 총애를 받으시므로, 마리아는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다"(루가 1,42). 성전에서 한 시므온의 예언은 마리아를 메시아의 수난과 이어 주고 있다(루가 2,25-35).

요한 복음은 마리아에 관해서 단지 두 번만, 한 번은 주님의 공생활 시초에, 또 한 번은 십자가 밑에서 말하지만 신앙이 두터운 이 여인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우선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요한 2,4)에서 당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면서 또 갈바리아의 십자가 위에서도(요한 19,26) 사용하신 '여인'이란 호칭은 예수님의 구속 사명과 마리아의 역할이 독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복음은 마리아가 제일 처음으로 기적을 요청하였다고 하는 사실(요한 2,1-11)로 보아, 마리아의 신앙이 예수님의 측근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갈바리아의 장면에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하신 말씀은 마리아가 모든 신자의 영성적 어머니이심을 상징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2.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마리아에 대한 성서 기록에 맞추어, 사도시대 직후의 신자 들이 믿은 것은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것이었다. 테오토코스(theotokos:'하느님을 낳은 자',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맨 먼저 사용한 사람은 3세기 초 로마에 살았던 성 히뽈리또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은 말씀이 즉, 성삼위의 제 2위이신 성자로 마리아의 태중에 임신되는 첫 순간부터 육화(肉化)하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임신하여 낳은 여인이 바로 그 사람의 어머니인 것처럼 마리아도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마리아에게서 인간 육체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천상 성부께 영원히 낳음을 받은 것이지만, 강생을 통해서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임신하고 낳았다. 그래서 마리아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3.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예수님의 어릴 때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성령의 힘에 의하여 임신되었고, 성령은 인간 아버지의 관여함이 없이 마리아를 '감싸 주었다'는 믿음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마리아에 관한 모든 교리가 그러하듯이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해서도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은 자라는 그리스도론에 비추어 사색해야 한다.

마리아가 오로지 성령의 힘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임신하였다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교리이다. 교회는 또한 마리아가 동정녀로 남아 있으면서 예수님을 낳으셨다고 선포한다.

마리아가 당신 전 생애를 통해서 동정녀로 계셨다는 진리 또한 신앙의 교리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중대한 한 부분이란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보지 못할 때 마리아의 동정성의 의미도 찾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교리를 순수한 영성적 상징이나 신화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대한 역사적 차원을 인식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의 영성적 의미를 음미하려고 노력한다. 동정녀로서 하느님을 낳으신 것은 강생을 통해서 하느님이 참으로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을 증언하는 동시에 하느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시라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낸다.

마리아의 동정성에는 또한 교회적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도 있다. 교회는 동정녀 어머니로서, 말씀과 성사를 집행함으로써 그리스도 형제 자매를 낳는다고 비유할 수 있다. 또한 마리아는 사제나 수도자의 순결의 모범이시다.

4. 원죄 없이 임신되시고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로 예정되었으므로, 하느님은 미리 손을 써서 마리아가 말씀의 어머니가 되도록 자격을 갖추게 하셨다. 마리아가 받은 특유한 은총과 특권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마리아는 우리 각자가 제한된 한도 내에서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도달해야 할 것을 가장 잘 표시해 준다. 마리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 신앙, 희망, 사랑으로 성장하도록 기도하신다. 우리의 경우에는 세례의 은총이 우리의 '원죄없는 임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의 '동정녀 모성'에 참여할 수 있다.

마리아는 "구속의 가장 훌륭한 열매이다"(전례헌장 10,3). 이 가르침은 마리아의 무죄함에 대한 절정적 표현이다. 마리아는 죄 많은 인류에 속하는 아담의 한 후손이므로 의당히 원죄의 죄과를 받았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로 말미암아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교황 비오9세는 마리아의 원죄없는 임신은 계시진리라고, 1854년에 정식으로 정의하고 공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