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철 신부님 곡 "이 영혼 받으소서"입니다.
파트별 음원
아래의 글은 이종철 신부님께서 성가를 작곡하게 된 계기를 소개한 글입니다. 이 글에 소개된 어머니 장례식을 위한 장례미사곡에 포함된 곡이 고별식 성가곡인 『이 영혼 받으소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 쉬실 때 나는 넋을 잃고 어머니의 맥박을 꼭 쥔채 멈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곧 어머니의 숨과 맥박이 동시에 멈추고 입술이 새파래지셨다. 나는 어머니의 시신을 그대로 둔 채 재빨리 연필과 오선지를 찾아 들고 언덕 위의 성당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 불러 드릴 성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른 형제들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울부짖는 동안 장남인 내가 시신 곁을 떠나 없어졌으니 난리가 났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은 나를 미쳤다고까지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누가, 왜, 그 순간에 장례곡을 만들라고 성당으로 끌고 갔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감히 성가를 만든다는 것을 상상도 못해 봤다. 하여간 나는 성당에 올라가 성체 앞에 꿇어 앉아 눈물과 콧물을 한없이 흘리며 입당성가부터 마침성가 그리고 고별식 성가까지 장례미사곡 1세트를 두어 시간 만에 만들어냈고, 누나와 동생 둘과 함께 부를 4부 합창을 연습하여 장례미사 때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성가를 만들게 된 동기다. 그때 내 나이 27살이었고, 신학교에서 쫓겨나 여자중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굳게 믿었던 큰아들은 멀리 유학까지 가서 사제서품을 몇 달 앞두고 등산길에서 추락사하여 그곳에 묻혀 버렸고, 형을 대신하여 신부가 되겠다던 나 역시 신학교에서 쫓겨났으니,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자 어머니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는 종종 어머니 생각을 하다 보면 성모님 생각이 난다. 믿었던 외아들이 효도는커녕, 동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더니 설상가상으로 십자가에 발가벗긴 채 매달려 죽어 가는 꼴을 봐야 했던 그 성모님 말이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주일 새벽미사에 참례하고자 우리집과 같은 담을 쓰는 언양성당으로 가시던 길이었다. 회갑을 갓 넘긴 어머니는 농사일하며 아이 열둘을 낳고 기르는 동안 온갖 병치레를 하느라, 팔순 노인처럼 늙고 유난히 허리가 꼬부라지셨다. 특히 두 아들의 비운에 속이 얼마나 상하셨던지 온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 어머니가 차가운 겨울 아침, 성당을 오르는 계단에서 그만 넘어지셨다. 마침 성당에 오던 교우 한 분이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가 쉬시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정도 가지고 주일미사를 빠질 수는 없지요." 하며 기어코 성당 안으로 들어가셨고 비틀거리며 예물봉헌을 마치고 돌아 나오다 두 번째로 또 넘어지셨다.
교우들이 놀라며 병원으로 가자고 권유했으나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미사에 빠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며 끝까지 참으셨던 어머니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나오는 길에 세 번째로 넘어지셨다. 즉시 의사를 불렀지만 이미 때를 놓치고 말았다. 의사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다며 가방을 챙겨 떠났고 동네 교우들은 넋을 잃고 그저 '예수 마리아'를 외워 대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달려간 나는 이미 말문을 닫아 버리고 숨만 가쁘게 몰아 쉬는 어머니 품에 머리를 박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성당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 뒤로 성가작곡을 여러 번 포기할 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계기가 계속 이어져서 나는 그것이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내려 주시는 은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하 생략 2004년 가톨릭 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