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종교의 이해

구세군(Salvation Army)

구세군(Salvation Army)
가) 명칭 및 특성
- 구세군은 19세기 영국의 윌리엄 부드(W. Booth)가 창설한 국제 규모의 교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신앙공동체 형성, 빈곤과 악의 타파를 통한 사회개혁을 지향한다.

- 교리는 감리교의 영향을 많이 받긴하였으나 특정한 교파의 교리를 초월하여 있으며, 성서를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

- 조직은 효율적인 활동을 위하여 군대식을 채택하고 있다.

나) 연혁
웨 슬리의 감리교회를 거쳐 개혁 감리교회 목사였던 부드는 순회전도를 둘러싸고 교단과 마찰로 1861년 세워진 천막교회에서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빈민의 대부분은 아무런 문화적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빈곤과 죄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빈민가의 모든 문제는 교육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 부드는 이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빈민가 전도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후에 구세군 운동이 된 빈민가 전도는 런던 중부 최하류 계층민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10여년이 지난 1875년 소위 ’기독교 전도회’(the Christian Mission)이라고 불리게 된 그의 전도회는 32개의 지회를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드는 교회의 전통적인 전도방법이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도움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보다 강력한 전도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복음전파에 있어서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그 호소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서 고안된 조직이 군대식이었다.

1878년 기독교 전도회는 군대식으로 개편되었고, 2년 뒤에는 명칭도 구세군으로 변경하였다.

1880 년부터 구세군은 해외로 진출하여 전세계로 확장되었다. 구세군은 행정상 영국 런던에 만국본영(萬國本營, International Headquarters)을 두고 각 국가별, 지역별 사령부(Territorial Headquarters)를 두고 있다.

또한 1950년 영적 군대로서의 구세군 병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만국사관대학(The Salvation Army International Training Univeraity)을 세웠다.

다) 한국 구세군
빈민구제와 매춘, 음주 등의 사회악 근절을 위해 출발한 구세군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것은 1908년이다.

창설자인 부드 대장에 의해 파견된 윌리암 호가드 정령(正領)은 서울 평동에 ’구세군 대한본영’을 설치하고 사업을 전개하였다.

현재 한국에는 폐쇄된 해주, 개성 지방본영 및 서울, 충서, 충청, 충북, 경남, 전라 등 6개 본영이 있다. 매월 ’구세공보’를 발행하며, 월 2회 ’뉴스레터’도 발간한다.

산하기관으로는 구세군 사관학교, 기술학교, 신학원, 통신대학, 어린이집, 육아시설, 부녀시설, 양로시설 등 24개소가 있다.

황양주신부

성공회와 앵글로가톨리시즘

성공회와 앵글로가톨리시즘
1. 성공회(Anglican Communion)
가) 명칭
영국 교회를 위시해서 영국 교회의 대표주교인 켄터베리 대주교 관구와 통공관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성공회라고 부른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원래 사도신경의 ’거룩하고 공변된 교회’라는 구절을 한자화한 것으로 한국, 일본,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해 온 것이다.

나) 체제
켄 터베리와의 통공관계는 전통적이고 가족적인 유대관계를 뜻하지만, 성공회에 속한 모든 교회가 켄터베리 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독립된 관구를 이루지 못한 몇 교회(한국 성공회와 같이)들이 관구외(外) 교구로서 켄터베리의 관할하에 있지만, 나머지 절대다수의 성공회 교회들은 각기 독립된 관구 또는 관구군(群)을 만들어서, 켄터베리를 정신적인 지도자 또는 영적인 대표자로 추대하는 외에는 전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운영해나간다. 실상 주교가 관할하는 교구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성공회가 지켜온 가톨릭적 전통의 하나이다. 교구마다, 관구마다, 그리고 여러 교구 또는 여러 관구가 모여서 구성하는 각 나라의 성공회(미국, 중앙 아프리마, 일본)마다 독립된 헌장과 교회법 체제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영국 교회의 헌법상 관할자인 영국왕은 물론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다) 교세
근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성공회의 교세가 급격히 커져서, 교구가 새로이 만들어지거나 재구성되는 일이 잇달아 정확한 통계를 제시할 수 없지만, 세계 각 지역에 대략 500개의 교구(따라서 같은 수의 교구장 주교)가 있고, 이들은 20여개의 관구와 관구군을 이루며, 각 관구 또는 관구군을 대주교 또는 수좌주교가 관할한다.

라) 주교회의
모든 교구장 주교들이 1878년 이래, 10년마다 한 번씩 모여서 성직, 교리, 예전, 선교 등 성공회 전체에 걸친 공동심사를 토의하는 람베트(Lambeth) 회의가 있고, 대주교나 수좌주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수좌주교회의(Primates Conference)가 있으며, 3년마다 한 번씩 모이는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가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개개 교구나 관구에 대해서 어떤 구속력을 행사할 수 없다.

마) 특징
로 마의 교황청과 같은 통제, 조정기관을 두기를 거부하면서 역사와 전통을 서로 달리하는 수많은 교회가 성공회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해 오는 거기에서 성공회의 한 교단으로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성공회에는 니체아 신경에 나타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자부심이 있지만, 가톨릭 교회와 차별되는 성공회 특유의 교리로서 ’앵글리카니즘’이라고 고집할 어떤 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공회에는 597년 성 아우구스티노가 영국 교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경험, 그리고 영국 교회가 모체가 되어서 세계 도처에 뿌려진 복음의 역사 속에 배태된 성공회적인 태도가 있고, 분위기가 있고 기질이 있고 강조점이 있다. ’본질적인 것에 일치, 비본질적인 것에 다양성’이라는 전통을 이은 성공회는 밖으로는 다른 종파, 종교와 더불어 우애와 관용으로 공존하고, 성공회 안에 여러 갈래의 신앙태도와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가톨릭 전통을 강조하는 소위 앵글로 가톨릭(Anglo- Catholics)과 개신교적 경향이 짙은 복음주의파(Evangelicals)의 두 갈래가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같은 다양성(또는 종합성)은 성공회의 한 교구 안에서, 한 관구 안에서, 한 나라의 성공회 안에서 따라서 온 성공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일 것이다.

바)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성공회가 지난 19세기 이래 추구해 온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은 지속적이고 명예로운 것이었다. 동방 정교회와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돈독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 루터교회 등과의 일치를 위한 대화가 끊긴 일이 없으며, 인도에서 이룩된 것 같이 다른 교파와 합쳐서 새로운 연합교회(United Churches)를 형성하는 데 언제나 앞장서 온 것이 성공회이다.

일치를 위한 4가지 요건(성공회가 요구하는 4가지 요건, 1870년 제창)
- 성서를 신앙의 기본으로 삼고

- 사도신경과 니체아 신경을 믿으며,

- 주교, 사제, 부제의 성직제도를 고수하며,

- 성사, 특히 세례와 성체성사를 지킨다는 것

사) 대한 성공회
- 성립 : 1880년 후반에 영국의 외방선교 단체의 사제가 잠시 부산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한 일이 있지만, 대한 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11월에 코프신부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됨으로써 시작하였다. 한 사람의 한국인 교인도 생기기 전에 주교가 선임되고, 그로써 시작한 대한 성공회의 예는 흥미로운 일이다. 실상 한국인에게 세례가 베풀어진 것은 주교 축성으로부터 7년 후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 업적 : 코프주교 취임 초 수년 동안 선교활동은 다소 부진했다. 그러나 그때 코프 주교의 감독하에 이루어진 두 가지 사업이 있었다.
하나는 인천, 서울 등지에 기도소를 겸한 병원이 세워져서 일반환자들과 고아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 사업에는 주교와 그를 보좌하는 소수의 사제들과 소수의 수녀들이 합세했다.
또하나는 후에 정동에 성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을 지은 트롤로프 신부가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 개신교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성서 번역사업에 참여한 일이다.
성 공회의 의료, 복지, 교육사업은 일제 통치, 세계대전, 6.25 등으로 발전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살아있고, 성서번역과 보급에 대한 전통적 관심은 성공회가 성서공회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해온 것으로서 반증된다.
이시기에 이룩한 기념할 만한 사업은 강화읍에 세운 성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의 축성(1900년 11월 15일)이었다. 서구의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사찰 양식을 조합해서 세운 이 성당은 한편으로는 초기의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의 기틀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념물이자 강화도의 명소이기도 하다.

- 성격 : 코프 주교는 영국 교회의 가톨릭 전통을 강조하는 선교단체인 U.S.P.G.와 한국교회를 돕기 위해서 마련한 한국 선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며 약 20명의 사제를 거느렸다. U.S.P.G.와 한국에서 시무한 사제들의 성격으로 해서, 한국 성공회는 교회의 조직, 신앙태도, 예전 등에서 가톨릭적인 경향이 두드러진 교회로 성장해 왔다. 광복 후 특히 6.25 이후 미국. 호주 등 교회와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영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인 사제들로 대부분 대치되고, 한국인 주교가 육성되었으며,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교회를 위시한 세계교회와 선교의 양상이 크게 변천함에 따라서 이와같은 - 때로는 배타적이기까지 했던 - 경향은 보다 다양하고 보다 현실적인 교회생활과 선교활동으로 변모해 왔다.. 그러나 주교제, 성사생활, 공도문에 의한 예전 등 기본적 전통은 그대로 지켜져왔다.

- 정착과 벌전 1900년부터 1945년까지의 약 반세기 동안 성공회는 정착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1940년 이전에 영국이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제의 수와 맞먹는 20여명의 한국인 사제가 나왔다. 그리고 1910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 서울, 강화, 수원, 천안, 진천 등지에 성당이 서고, 황해도 백천, 연백에까지 교세가 확장했으며, 교우가 5,000명을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인천에는 성미카엘 신학원이 설립되었고, 1926년에는 숙원이었던 정동 대성당의 준공을 보았다.

1930년 일제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교활동을 추진한 트롤로프 주교가 객사하여 대성당 지하성당에 묻힌 후, 그 뒤를 이은 쿠퍼주교 때에는 북한 지역에서의 사업이 큰 활기를 띠었으며,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영국선교사들이 강제로 한국을 떠났을 때 남한의 성공회 교세보다 북한지역에서의 교세가 더 컸을 정도였다. 선교사들이 비우고 간 성공회는 종전 때까지 일본인 주교의 관할 하에서 최소한의 성사생활을 계속했을 뿐, 선교. 교육. 사회봉사는 붕괴와 침체를 면치 못했다. 종전 후 쿠퍼주교가 다시 돌아와서 교회 재건에 몰두하였으나 그가 사랑하던 북한지역의 교회는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 현황 : 한국 성공회는 1965년에 두 개의 교구(서울과 대전)로 분할되어 최초로 한국인 사제(이천환)를 주교로 축성하여,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그후 1973년에는 대전교구를 대전과 부산 두 교구로 나누어 그 두 교구장에 다시 한국인 주교가 착좌해서 그로부터 한국 성공회는 한국의 교회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은 최후의 선교사 서울주교 데일리 교구장이다. 그가 교구장으로 부임해서 그 자리를 이천환 주교에게 넘기기까지 10년 동안 (1955-1965년) 한국 성공회는 몇가지 뜻깊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기독교 연합사업(N.C.C.)에의 참여, 지역사회 개발과 기아해방운동 전개, 평신도 교육과 자급 사제직의 시도, 산업선교의 도입, 성미카엘 신학원 재개,확충 등이 그것이다.

1965년 이후의 성공회의 역사는 이와같은 기본적인 선교정책을 변천하는 한국과 세계의 상황에 맞추어서 전개한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 행정조직 : 한편 교회행정조직이 정비되어 각 교구장 산하에 교무국이 설치되고, 83년 1월부터 세 교구를 망라한 전국의회의 산하에 교무원이 설치되어, 세 교구의 균형있고 효율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기구를 갖추었다.

성 공회의 최소단위는 전도구이며, 전도구에는 영성체자들이 선출하는 교회의원으로 구성되는 교회위원회가 있고, 각 전도구의 사제와 교회위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교구의회, 그리고 세 교구의 교구장과 교구의회가 선출하는 사제와 평신도들이 구성하는 전국의회가 있다. 교구의회와 전국의회는 대한 성공회의 헌장이 구정하는 바에 따른 교회의 최고 입법기관이다. 이와같은 의회제도는 세계의 모든 성공회의 공통적 관습이며, 의회에서의 의결에는 주교, 사제, 평신도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어느 누구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 사업 : 대한 성공회는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천신신학교(성미카엘 신학원의 후신)를, 정박아 교육기관으로서 성베드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선교사업을 돕고 독자적인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는 성가수녀회가 있다.

2. 앵글로 가톨리시즘(Anglo-Catholicism)

가) 개념
일 반적으로 영국 국교회 및 성공회 안의 고교회주의(高敎會主義)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1838년 이래 일반에 쓰이게 되었다. 18세기 이래로 영국의 복음주의가 개인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과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 등으로 인해 19세기 초기의 영국 국교회에서는 교회관념이 희박해졌으며, 교회를 경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 경향에 대한 고교회측에서의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옥스포드 운동(1833년)이고, 그 신학적 입장이 앵글로 가톨릭시즘이라 불리게 되었다.

나) 사상 개요
-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교회의 신적 권위에 대해 국가도 침범하지 말아야 하며, 개인은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 교회는 본래적으로 유일하게 성스러운 가톨릭 교회이다. 초기 5세기동안의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영국 국교회는 그 가톨릭 교회의 올바른 사도 전승의 성직, 성사, 교의, 실천을 전달하는 하나의 지체이다(이른바 분지론 分枝論, branch theory).

-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모두 진정한 가톨릭 교회의 가지(枝)이므로 올바른 교류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 예배에서의 의식적 요소의 존중, 기도서를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공도의 질서회복, 예배음악, 건축장비의 면에서도 고대의 것을 존중하고자 노력하여 의식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단순한 외형의 존중은 본래의 취지가 아니다.

황양주신부

정교회(正敎會, Ecclesia orthodoxa)

정교회(正敎會, Ecclesia orthodoxa)
가) 명칭 및 구성
동방교회, 정교회, 하리스트 정교회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들의 총칭이며, 이들 정교회는 고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4개의 총주교 관구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가지며, 부분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다.

동방교회, 서방교회라는 명칭은 고대교회에서는 지리적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역사적 유래에 의하여 호칭된다.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당시의 로마제국 동부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이스 반도, 에집트 등지로 전파되었고,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 갈데아 지방과 아르메니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기원후 400년경에는 제국의 동부지역에 약 1천만 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는에 이들을 동방교회라고 하였다.

나) 분포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퍼져있으며,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을 신봉하는 콥트교회, 아비시니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야곱파 교회, 남인도의 말라바르 교회, 한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졌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도 모두 동방 정교회의 이단이다. 이들 교회의 신자는 통틀어 3억명 정도이다.

다) 동방교회의 체제
- 중심권위 : 다양한 동방교회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권위는 없다. 각 의식별로 총주교, 대주교, 주교의 계통 이 있지만, 같은 의식 안에도 여러 총주교좌가 있어서 서로 독립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 국민 교회의 최고 의결기관 : 자치적인 국민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은 시노두스 또는 전국 공의회이며, 이 회의에는 평신도도 참석하고 있다. 동방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세계공의회를 최고 권위로 인정하지만 그런 공의회는 역사상 한 번도 개최된 일이 없다.

- 국가와의 관계 :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로마시대부터 국가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았으며, 오늘의 공산체제 안에서도 변함이 없다.

라) 동방교회의 역사
정 교회는 5-6세기경 그리스도의 위격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가 대립하면서 형성되었다. 동서교회는 1054년에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풀의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면서 결정적으로 분열되었고, 그 뒤 서로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분열의 폭은 더욱 깊어졌다.

콘스탄티노풀 총주교좌 : 그리스도교는 1세기 중엽에 제국의 수도 로마에 전해졌고, 거기서 제국의 서부 즉 서유럽에 전파되었으며, 400년 경에는 약 50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서방교회라고 하였다. 이 서방교회에서는 로마가 유일한 종교,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교리신학, 전례, 법제, 관습 등이 서방교회 전체에 확산되어서 서방교회는 외형적으로 상당히 통일된 단일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에는 로마 시대 이전부터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소아시아의 에페소, 그리이스의 아테네 등 정치, 문화, 교역, 학문의 중심지들이 여러군데 있었으므로 동방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도 자연히 이러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몇 개의 그룹이 형성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그 신자수와 신학적 권위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 로마를 교황에게 넘기고 자기는 동방의 비잔틴(콘스탄티노풀)으로 옮긴 뒤(330년)부터 비잔틴은 황제의 후광을 업고 영향력을 증대하여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능가하는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381년 제 1차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함께 콘스탄티노풀도 총주교좌로 공인되었다. 각 총주교좌는 그 주변의 교회들을 지휘하여 거의 자립적인 구역을 형성하였으므로 각 구역은 고유한 전례와 관습을 발전시켰다.

- 5세기 : 콘스탄티노풀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신격과 인격의 두가지 위격이 있다는 설을 주장하다가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단죄되고 추방되었다.

그 뒤 로마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사소한 분쟁을 계속하면서도 신앙의 일치를 계속하였지만, 라틴어와 그리이스어의 차이, 관습과 제도의 차이, 니체아-콘스탄티노풀 신경의 해석 차이, 그리고 비잔틴 총주교들이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야심 등으로 인해서 양 교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 9세기 : 포시우스 총주교는 한 때(864-868년) 로마와 분리되었다가 다시 화해하였다. :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풀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라틴교회가 누룩없는 빵을 사용하고, 사제의 독신제를 고집하며 신경에 필리오꿰(Filioque)를 삽입하였다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 성 레오 9세 교황은 동방교회에 특사를 보내어 담판하였으나 결렬되었다. 교황의 사절 훔베르트 추기경은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을 선고하였으며, 체룰라리우스도 로마 교황(그때 교황좌는 성 레오 9세의 사망으로 공석중이었음)을 파문함(1054년)으로써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에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 등의 교회들이 속속 로마에서 이탈하였다.

- 1204-1261년 : 동로마 제국이 점점 쇠약해져서 이슬람 교도가 제국의 아시아 지역과 북아프리카를 석권 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므로 서방교회는 십자군을 일으켜 여러번 동방에 원정하였고, 한때는 거거에 라틴제국(1204-1261년)과 라틴전례 총주교좌를 설치하였다.

- 리옹 공의회(1274-1284년)와 플로렌스 공의회(1439년) : 양 교회의 일치를 결의하였지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호응이 없어서 무위로 끝났다.

- 1453년 : 터키제국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풀이 점령됨으로써 동로마제국은 멸망하였고,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풀 총주교의 지배에서 독립하였다.

- 16세기 :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동방교회는 완강히 반대하였으며, 우크라이나 교회의 중요한 일부가 가톨릭과 합일하였다.

- 17세기 : 루마니아 교회의 일부가 가톨릭화 하였다.

- 18세기 : 시리아 전례의 멜키트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하였다.

- 19세기 :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교회들이 독립된 국민교회가 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터어키가 유럽에서 축출되면서 비잔틴 총주교의 실질적 권한은 이스탐불 근처의 교구들에 국한되었다.

마) 각 정교회의 성립
동 방정교회의 중핵은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이스 정교회이다. 이들 정교회들은 둘 다 콘스탄티노풀에서 떨어져 나온 교회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 시작된 러시아 교회는 모스크바 대주교를 독립시켜 총주교로 삼았다(1589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전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동방정교회는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 그리이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그리이스 지방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이다. 당시 그리이스 지방은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중부 그리이스 지방이 마케도니아에 통합되었고, 지방구로 설정되어 콘스탄티노풀의 재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콘스탄티노풀 분열(486-516년) 때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고, 성화상 논쟁(725-842년) 때는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054 년을 기하여 그리이스 정교회는 서방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리이스 정교회도 터키인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발칸제국은 독립을 얻었고, 그리이스 독립전쟁(1821-1827년)에서 승리하여 독립하였다. 1833년 그리이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풀 총주교에게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총주교도 결국 승인을 하였다.(1850년) 그리고 1852년 그리이스 국회는 그리이스 정교회를 국교로 정했고, 아테네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주교회의(Holy Synod)를 설치하였다.

*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9 세기경 키에프 주민들이 콘스탄티노풀과 접촉하면서 복음이 전해진 러시아에는 공주 올가(Olga)의 입교(957년),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1세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 1세의 딸 안나의 결혼으로 전도가 활발하였다. 13세기에 타타르인이 러시아에 침입하게 되자 러시아인들은 동북부로 이주하였고, 교회의 중심도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넘겨졌다.(1328년) 그리고 모스크바의 주교 욥이 콘스탄티노풀의 총주교로부터 총주교의 칭호를 부여받은 뒤부터 모스크바는 소위 제 3의 로마로서 당시 터키인의 지배 아래 있던 콘스탄티노풀을 대신하여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피요트르 대제 때는 총대주교 제도를 폐지하고(1700년), 12인의 위원을 두어 주교회의를 관장케하여 교회를 국가의 지배아래 두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제도들은 러시아 혁명 때까지 존속하였다.

혁 명후 2차 대전 시작(1941년)까지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마르크스 유물론과 반종교정책으로 교회가 짜르 체제를 지탱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 탄압하였다. 교회재산은 몰수되었고, 성직자는 투옥, 처형당하였다. 1929년 이후 정부는 조직적인 반종교투쟁을 감행하였고, 1941년 대독일전쟁 개시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은 반종교정책을 완화시켰다. 반종교선전이 중지되고 1943년에는 주교회의 개최가 허락되었다. 뒤퐁이 죽은 뒤(1924년) 공석으로 남아있던 총주교좌에 세리카가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는 서서히 힘을 회복하였교 성직자 교육과 신학연구를 위한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서 냉전이 강화됨에 따라 정부의 대종교정책도 강화되었지만 신자의 공직취임 금지조치 이외에는 겅책에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 선교사업에 현저한 업적을 남겼고, 1961년 뉴델리의 세계 교회회의를 통해 WCC에도 가입하였다.

* 루마니아 정교회 ( Rumanian orthodox church)
1856 년 공국(公國)이 된 루마니아는 25년 뒤에 독립왕국이 되었다. 최초의 왕자 코사는 교회를 독립시키기로하여 국회의 동조를 구했고, 그에 따른 법률도 통과되었다. 1885년 콘스탄티노풀 총주교 요아킴 4세는 정식으로 루마니아 교회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1차 대전 후 영토와 국민이 증대하면서 교회의 지위도 강화되어 1925년에는 총주교좌가 설치되었다.

* 불가리아 정교회(Bulgarian orthodox church)
1204년에서 1393년까지 불가리아 교회는 독립된 주교좌를 갖고 있었지만, 터키인의 침략 이후 투르크 제국이 멸망할 때(1393-1856년)까지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의 지배아래 있었다.

1860 년에 주교 힐라리온이 교회이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가 이를 민족적인 이단이라하여 반대했고, 다시 총대주교 안티모스 6세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파문하였다. 그 뒤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배려로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가 파문을 풀면서 양교회의 관계는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
1219년 성 사바(Saba)에 이해 독립 주교좌가 되었고, 1346년 총주교좌 교회로 승격되었다. 1389년 이후 약 5세기간 터키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교회도 독립을 잃고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의 재치권 아래 있었다. 1876년 국가가 완전 독립하면서 교회도 1879년 자치를 회복하였다.

* 알바니아 정교회(Albanian orthodox church)
1912년 터키로부터 독립한 뒤 교회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폈다.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추진된 이 투쟁은 1908년부터 사제 놀리(Noli)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회교인으로서 뒷날 국왕이 된 조구(zogu)의 침입을 받아 놀리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37년에야 알바니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로부터 정식교회로 인정되었다.

* 그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1951년), 폴란드 정교회(1925년) 등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헝가리, 마케도니아, 우크라이나 등에도 동방정교회 신자들이 살고 있다.

바) 가톨릭과의 관계
가 톨릭과 정교회 사이는 15세기 이후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화해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시도되었다. 500년만인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만났다. 양측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 기간 동안 정교회측의 옵저버가 참관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1964년 제 3차 정교회회의에 모인 14개 정교회 대표들은 로마와 교회일치적인 입장에서 계속 대화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가톨릭에서는 동방교회에 관한 문제를 관할하는 성(부서)을 1917년 독립시켜 동방교회성성( Congregation for Oriental Church)이라 명명하고 있다.

사) 현재의 상태
동방교회들의 현재상태는 그 대부분이 공산진영에 속하기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기도 힘에 겨운 형편이다. 대체로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각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의식에 따라 크게 5그룹으로 분류된다.

ㄱ) 비잔틴 의식에 속하는 정교회 : 이스탐불을 위시하여 그리이스, 루마니아, 조지아, 알바니아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신자수는 1억 2천만명에서 1억 7천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ㄴ) 칼체돈 공의회를 거부하고 분리된 아르메니아 의식의 교회 : 소련령 아르메니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함하여 370만명으로 추산한다.

ㄷ) 기타 : 서부 시리아 의식의 신자는 약 70만명, 동부 시리아(갈대아)의식의 신자는 17만명, 콥트 의식의 신자 약 130만명 등으로 추산한다.

그 리고 동방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가 여러 가지 기회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일치를 이룬 동방 가톨릭교회들의 신자도 약 1천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그들의 고유한 전례와 관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리상으로 로마 교회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의 동방교회들이 항상 경계하는 대상이 되어서, 객관적으로 보면 교회일치 운동에 있어서 좋은 위치에 있기도 하다.

아) 한국 정교회
한 국의 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 정교회의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주한 러시아 공사관에서 시작된 선교는 1900년 황제 고종으로부터 정동의 땅 1,000평을 하사받아 성 니콜라이 성당을 건립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2대 신부로 온 스케초프스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6년 노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전과 이에 따른 원조의 중단, 1917년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과 이에 따른 선교활동의 중단 등으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이 크게 위축된 데다가, 1945년 이후 정교회를 주관하던 볼리카르프신부와 김의환 신부가 추방되거나 납북됨으로써 교회는 거의 문을 닫다시피 하였다. 1950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출전하였던 그리이스군 군목들의 주선으로 1956년 소속이 그리이스 전교회 산하로 옮겨졌고, 1966년 성당도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으로 옮겼다.

자) 동방교회의 특징 / 교리와 신앙생활
동방교 회들 중에서 가톨릭과 일치한 교회는 전례와 관습만 다르고 교리는 가톨릭과 같다. 정교회는 교회의 초기 7번의 공의회를 가톨릭과 함께 인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인 성삼론과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표현이나 설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몇가지 교리와 실천상에 차이가 있다.

- 계시(성서와 성전) : 하느님의 계시는 성서와 성전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인정하지만, 러시아 교회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성서의 제 2정경을 성경이 아니라고 한다.

- 성령론 : 콘스탄티노풀의 성령론 해석에 있어서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해석하는데, 정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하신다고 해석한다.

- 성모께 대한 신심 : 성모께 대한 신심은 두터우면서도 성모 무염시태 교리는 배척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모는 모태에서 성화되지 않았고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성화되었다 한다.

-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 :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는 하지만 사후에 보속을 하는 연옥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동방교회에서도 죄의 사면장을 발행하지만, 죄의 사면으로 벌도 사면된다고 하면서 가톨릭의 은사교리를 배척한다.

- 교황의 수위권 : 교황의 명예상 수위권은 인정하나 통치권적 수위권을 배척하고,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을 부인한다.

- 신심생활
- 전례 : 미사와 성무일도에 집중되어 있고 대단히 장엄하고 복잡하다.

- 세례 : 세례를 받은 자라야 타인에게 세례를 줄 수 있고(실제는 사제와 부제), 긴급한 경우 외에는 세 번 물에 잠그는 침수식으로 거행한다.

- 견진성사 : 견진은 여러번 받을 수 있다.

- 미사 : 반드시 누룩으로 발효시킨 빵을 사용하며, 평신자도 빵과 포도주를 받아서 영성체 한다. 일반 신자들은 성탄축일, 부활축일, 베드로.바오로 축일, 성모승천축일에 영성체하며, 영성체하기 며칠 전 부터 단식을 하기도 한다. 신심은 깊으나 교리적으로 너무나 무지한 것이 큰 문제이다.

- 병자성사 : 건강한 사람도 받을 수 있다.

- 혼인 : 양 당사자의 동의로써가 아니고 사제의 축복으로 성사가 된다.

- 신품 : 특별한 관면이 없으며 다른 교파의 주교에게서 받은 신품은 무효로 본다. 수도자가 아닌 재속 성직자는 신품받기 전에 결혼할 수 있으며, 1923년 이후로는 홀아비가 된 부제나 신부는 재혼할 수도 있다.

- 전례시기 : 예수부활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성탄축일은 1월 6일(공현축일)에 지낸다.

- 신심 : 성모와 성인과 그들의 성화공경이 활발하고 순례행사를 즐기며, 수도생활을 매우 높이 존경한다.

- 신학과 전례 : 신비주의적인 색체가 농후하며 교회가 각 국민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전례와 성서는 일찍부터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문학이 발흥하였다.

- 성직자 : 성직자는 수도지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며, 성직은 사도전승에 따라 주교, 사제, 부제등을 두는 고대의 성직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 성찬의 전례 :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주로 성 크리소스토모의 전례를 사용하지만 1년중 10번은 성 바실리오 전례를, 한 번은 성 야곱 전례를 사용한다.

- 신심 : 교회 신심생활의 중심은 삼위일체의 예배이고, 여기에 성모와 여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첨가된다.

황양주신부

침례교 (Baptist Church)

침례교 (Baptist Church)
가) 형성
성인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의 여러교파를 지칭하는 말이다. 침례교는 17세기 초 영국의 스미스(1552-1612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스미스는 그의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영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하였는데, 그곳에서 메노나이트(Mennonite)의 영향을 받고 유아세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스미스의 영향을 받아 유럽과 미국 등지에 많은 침례교회들이 생겨났다.

나) 분파
침례교에는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일반 침례파(General Baptist), 이에 반대하여 선택된 소수만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특수 침례파( Particulr Baptist), 신앙에 의해 극단적인 치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파(Liberalist), 성서의 자구적 해석을 주장하는 근본주의파(Fundamentalist) 등이 있다.

다) 기독교 한국 침례회 연혁
- 대한 기독교회 : 188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독립선교사로 파송된 말콤 펜윅이 내한하였다. 한국에 온 그는 서울, 솔내, 원산 등지로 전전하다가 1893년에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미국 북침례교회의 목사이며 부흥전도사인 고돈 목사와 교분을 갖게 되었으며, 침례교의 신앙이 성서적이며 복음적이라 확신하고 침례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캐나다에 체류하는 동안 1894년 한국 순회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189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펜윅은 원산에 자리잡고 선교사업을 계속했다.
1901 년 재정난으로 한국에서 철수한 엘라 씽 기념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충남 공주, 강경 지방의 사업을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순회 선교회와 병합하였다. 그후 문서 전도자들을 각처에 파송하여 사업을 확장하다가 교회수가 31개로 늘어나자 교단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06년에 충남 강경에서 교단대회를 소집하고 46개조의 교규와 더불어 대한 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대한 기독교회의 조직구조는 감목정치치리에 의한 중앙집권적 권위체제였다. 전교인들은 감목인 펜윅 선교사를 필두로 한 하나의 교회로 조직되어 감목의 지도 아래 있었다. 모든 직분은 감목에 의하여 임명되고 각 지역으로 파송되었다. 어떠한 특정교단적 색체의 성향은 전혀 배제되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신약성서적 회중의 개념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 동아기독교회: 1921년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회에서 ’동아기독교회’라 변경했다. 이는 일제가 ’대한’이란 명칭을 이 땅에서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대한’의 명칭을 사용치 못하게 강압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 동아기독대 : 1933년 펜윅 선교사에 의해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대’라 변경하였다. 당시 교회는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날로 속화하여 가고 기독교 이외에도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므로 교회의 성별(聖別)을 강조하는 뜻에서 ’회’ 대신에 양무리를 뜻하는 ’대(隊)’로 변경하였다.

- 동아기독교 : 1940년에 ’대’라는 명칭이 군대를 뜻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당국의 주목을 받는다하여 ’대’ 대신에 다시 ’교’로 바꾸어 동아기독교로 변경했다.

- 교회해산 : 1944년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했다. 동아기독교의 교인들은 황궁요배를 거절하고 신사참배를 거역한다고 하여 33인의 목회자를 투옥했으며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방기금으로 헌납하고 동아기독교를 강제 해체시켰다.

- 대한기독교 침례회총회: 1946년 남한에 남아있던 소수의 교단 지도자들은 교단 재건을 위하여 충남 칠산에서 모임을 가졌다. 같은 해 9월 강경에서 다시 대회를 소집하고(36차) 교단조직을 총회제로 바꾸었다.
위적인 중앙집권적인 감목체제를 회중적인 장로회 행정체제로 변경하고 교단 명칭도 다시 ’대한 기독교회'로 바꾸었다.
임 원의 명칭도 감목을 총회장으로, 감노는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과 반장은 각기 집사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북한과 만주, 시베리아 지역의 교세를 상실한 교단은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947년 미국의 선교기관과의 제휴를 모색하게 되었다.
1949 년 교단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강경 총회에 미국 남침례회 외국 선교부의 동양 총무인 베이커 코우덴박사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코우덴 박사는 대한 기독교회의 형편과 신앙행습이 미국 남침례회와 유사함을 확인하고 협조를 확언했다. 이 총회에서 대한기독교회는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 침례회 총회로 변경했다. 이것은 교회의 성례로서 지금까지 침례의식을 행하여 온 대한기독교회가 한국에 있어서 그들의 교단색체를 처음으로 ’침례교단’으로 천명하는 침례교단 조직의 역사적 시발이었다. 이 강경 총회에서 ’대한 기독교 침례회총회’와 미국 남침례회 외국선교부 간에 이루어진 역사적 제휴는 1950년에 최초의 선교사로 에버나디 부부를 한국에 파송함으로써 한국에 있어서 본격적인 침례교 선교사업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부터 한국 침례회 총회와 교단체제와 교회 행정체제는 미국 남침례 교회의 행정체제 및 신앙원리에 따라 점차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 교단 분열(1959- 1968년) : 1960년대 한국 침례교단은 발전을 위한 여러 시련을 거쳤다.
대 거 유입된 타교단 교역자들의 신앙행습문제, 교역자들의 안수문제, 정치적 파당문제, 및 선교부와 한국 총회간의 갈등 등은 불행하게도 1959년부터 68년에 이르는 10년간의 교단 분열을 가져왔다. 이 분열은 침례교의 투철한 신앙원리의 실천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대전 총회파와 옛날의 펜윅 선교사의 동아기독교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포항총회파 간의 분열이었다.

- 기독교 한국 침례회 연맹 총회(1968-현재) : 양파로 갈라졌던 교단은 1968년 다시 통합하였다.
분 열기간에 배태되었던 교단 안의 여러 가지 불건전한 요인들은 제거되고 신앙행습과 교리행정에 있어서 시행착오의 경험과 반성은 70년대 교단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 침례교 신학대학에서 젊은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선교부, 침례회 출판사, 침례회 방송부, 침례병원, 교회 진흥원 등의 기관들을 통하여 한국 침례회 연맹총회는 70년대에 교단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비약적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라) 조직 및 교리
조직은 조합교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특별히 규정된 신앙선언은 없다.
다만 근본주의자들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원죄, 구원의 필요성,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천국과 지옥이 영원하다는 것, 성서가 신의 영감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 성서가 신앙과 행동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 등을 믿는다.

교리면에서 침례교는 가시적인 교회를 신앙으로 가지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 통치되며, 그리스도에 의해 보장된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회의 일원이 도기 위해서 신앙과 세례가 요구된다.

마) 종교의식
침례교는 세례와 주의만찬 이 두가지 의식을 인정하고 있지만 성사는 아니다.
세례는 죄를 사하는 성사라기보다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라 할 수 있고, 주의만찬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상징할 뿐이다.
또한 목사는 신자들에 의해 선출된다.

황양주신부

여호아의 증인

여호아의 증인
1) 개관(槪觀)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은 한국에서 발생된 신흥종교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유입된 그리스도계 신흥종교 가운데 가장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종종 큰 논란과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선교 활동은 대단히 적극적이다. 이들은 기성 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서를 독특하게 해석하면서 집요하게 접근한다. 따라서 기성 교회 신자들과의 대립과 충돌 또한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 정치체제와 정치권력의 거부, 병역 의무와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수혈 거부, 특정 직업에 대한 포기 권고, 시한부 말세론, 가정·직장 및 학교 생활의 포기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공식 명칭은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이다.
그 러나 일반적으로는 여호와의 증인, 또는 "파수대"의 단어인 "워치 타워"라고 불린다. 여호와의 증인이 란 명칭은 1931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출원은 이사야 43,10의 "너희가 바로 나의 증인이다"라는 구절이라고 한다.

2) 창시자와 연혁

가) 창시자
여 호와의 증인의 창시자는 럿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7세 때 어떤 사람을 만나 성경 토론을 하다가 상대방으로부터 지옥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안식교 지도자의 저서와 안식교 출신 신자들의 성경 해석에서 큰 영향을 받아 예수의 재림 문제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4세기의 이단자 아리우스( Arius )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것을 받아들여 자기 나름대로의 교리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럿셀은 1870년 10대의 어린 나이로 정식 신학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였는데, 그 성경 공부반의 회원들은 그를 목사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들을 중심으로 1872년 여호와의 증인의 전신인 ’미국 성서 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이 단체는 1884년 ’시온의 파수대 소책자 협회’(Zion’s Watch Tower Tract Society)란 명칭으로 펜실베니아주에 단체 등록을 하였다. 럿셀은 1876년 ’주님 재림의 목적과 방법’이라는 소책자에서 "예수는 1874년에 재림하였지만, 그의 재림은 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인 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며, 말세의 시간 또한 임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879년 자신의 독특한 성경 해석 방법을 실은 ’시온의 파수대’라는 잡지를 발간하였고, 1886년에는 ’천년 왕국의 여명’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후에 ’성경 연구’라는 책으로 개정되었다.
한편 럿셀은 1914년에 발행한 세계 제1차 대전을 보고 "세계는 1914년으로 끝난다. 그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신자가 144,000명에 이르게 된다면 세속적인 정부와 일반 교회들은 불과 유황 속에 던져지고(요한 묵시록 7장의 144,000을 여호와 증인의 숫자라고 해석함, 14,10의 심판을 여기서 언급), 우리 여호와 증인들은 세계를 통치하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 예언은 적중되지 않았다. 또한 이시기를 전후하여 럿셀과 여호와 증인 교단은 몇 가지 어려움을 맞고 있었다. 그 하나는 소위 ’기적의 밀’(Miracle Wheat) 사건이었다. 즉 럿셀이 축복한 밀은 다른 종자보다 5배나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다고 하여 1파운드당 1달러 씩을 받고 팔았는데 이 사실을 보도한 신문사를 상대로 법적 투쟁을 하여 패소하였다. 또 다른 사건은 럿셀이 자신을 비난하는 글을 쓴 침례교 목사를 상대로 고소한 사건인데, 이 재판 과정에서 럿셀이 희랍어를 모른다는 것과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럿셀의 부인이 럿셀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혼 사유는 럿셀의 독단적이고 이기적이며 지배적인 태도 그리고 럿셀과 다른 여자 신도들간의 추문 때문이었다.
말세론의 不適中과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은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하였다. 많은 신자들이 교단을 이탈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성 교회로부터의 비난 또한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던 중 럿셀은 1916년 캘리포니아 전도 활동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열차 내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나) 연혁
 럿셀이 사망한 몇 달 후, 협회의 고문이었던 루터포드(Joseph Franklin Rutherford, 1869-1942)가 교단을 계승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이름이 채택된 것은 그의 지도하에서였다. 그는 교단 본부를 뉴욕의 부툭클린으로 옮기고 모든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신정(神政)정치적 통치를 지향했다. 루터포드는 럿셀을 주장을 수정함으로써 교단이 맞는 위기들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우선 그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144,000명에 이르게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주장을 요한 복음 10,16을 인용하면서 여호와의 증인 교단에는 144,000명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다른 양’(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는 구절에 따라)들도 있다고 수정하였다. 또한 럿셀이 말세의 시기를 1914년으로 정한 것에 대해, 1914년은 말세의 시작이 아니라 끝 날의 시작이라고 수정하였고 예수 재림 시기를 1914년에서 1975년으로 수정하면서, 예수는 재림 후 1918년 자신의 궁궐(말라3,1)에 들어가 하늘 정부를 세우고 자신들의 교리를 믿지 않는 이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세의 시간을 1825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불발로 끝나자 다시 1975년 10월 1일이라고 재 수정하였다.
루터포드 사망 후, 여호와의 증인은 노어(Nathan Homar Knorr)에 의해 주도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이 비교적 큰 교단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노어의 공헌 때문이었다. 그가 재임 기간 중 신자의 수효는 11만 5천명에서 2백만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새 세계 번역 성경’(The New World Translation of Holy Scriptures)이라는 독자적인 번역 성경도 출판되었다. 1977년 노어의 사망 후 여호와의 증인은 제 4대 회장인 프란쯔(Frederick W, Franz)에 의해 계승되어 오고 있다.

 다) 한국에서의 역사와 현황
 여호와의 증인이 한국 사회에 전래된 것은 1912년 홀리스터(A. A. Holister)선교사 부부가 내한하면서부터 였다. 그 후 1914년에는 한국 성경 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 한글로 번역, 인쇄되었고, 1923년에는 인쇄공장도 설립되어 수많은 인쇄물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정치권력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규정하는 교리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에서 출판된 간행물들은 1933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압수·소각되고 말았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시에는 궁성요배와 신사 참배의 거부로 인해 전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그 중에는 옥중에서 사망하는 자까지 있었다.
8.15광복 후, 여호와의 증인은 교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선교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자의 수효가 수 만 명에 달하기까지 하였다. 많은 신자들은 가정과 직장, 또는 직업까지 포기하면서 말세에 대비하였으며, 말세에 구원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각 가정을 방문하면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타낸 병역 거부, 가정 파탄, 학교 중퇴, 직장 포기 등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예언된 말세 시기가 적중하지 않자, 많은 이탈자들이 발생하게 되었고, 선교 활동도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들은 또 다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1975년을 말세의 시간으로 보았던 것은 계산상의 착오였다고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말세의 시기는 제시하지 않은 채 곧 말세가 닥치게 된다고 하면서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86년 현재, 한국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교세는 회중(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수 715개, 전도인(신자)수 4만 4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기성 교회와의 교리 상의 차이점

 가) 성경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발간한 성경들은 자신의 전통과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오역(誤譯)들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번역한 ’새 세계 번역 성경’이라는 별도의 성경을 갖고 있다.
그 러나 정통 성서학자들은 ’새 세계 번역 성경’이 성경의 내용을 가감했을 뿐만 아니라, 오역으로 가득차 있고, 문법도 엉망이며, 성서에 나타난 연대의 계산도 잘못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요한 복음 1, 1의 후반부를 "그 말씀은 하나의 신(a god)이셨다"라고 번역하였으며, ’주(Lord)’, 또는 ’하느님(God)’은 ’여호와(Jehova)’로 무려 197곳이나 바꾸어 번역하였다. 이들은 또한 ’성령’은 ’여호와의 활동력’으로, ’십자가’는 ’고통의 형틀’로 번역하는 등 수많은 자의적 번역이 나타나며, 성서의 연대 계산도 대부분 잘못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새 세계 번역 성경’이야말로 완전무결하게 번역된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선교 활동이나 기성 교회 신자들과의 대화에서는 기존의 성경들과 함께 이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토론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과 기성 교회 신자들 간의 성경 토론에서는 근본적으로 어떤 성경이 올바르게 번역된 성경인가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과의 성경 토론은 대부분 합의점을 찾기 어렵고 토론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 삼위일체의 부정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기성 교회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 가장 먼저 제기하는 주제는 삼위일체론이다. 이들은 삼위일체란 용어가 성경의 어느 부분에도 없다고 강조하며, 또한 히브리 예언자들과 사도들도 이 교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삼위일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것도 아니고, 성서적인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 예수의 천주성 부정
이들에 따르면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 이들은 기성 교회에서 요한 복음 1,1을 들어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한다. 이들은 요한 복음의 결론 부분인 20장 구절의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 구절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 결코 하느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자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지음을 받은 자로 아담과 천사뿐이 없기 때문에 예수는 천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최고의 영적 지위에 있던 영적 피조물 미카엘 대천사가 대천사의 성품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라) 영혼 불멸 성의 부정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영혼이란 육체적 생명과 분리되는 별개의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그냥 소멸될 뿐, 어떠한 의식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새 세계 번역 성경’에서는 신명기 12,20을 "너희 영혼이 고기를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번역하는 한편, 예레미야 2장의 "가난한 무죄한 자들의 영혼이 피"라고 번역하면서 이들은 기성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영혼을 인간의 정신적 특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어떻게 영혼이 고기를 먹고 싶어하고 영혼이 피를 가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선 성서 번역에서부터 기성 교회와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 지옥의 존재 부정
영 혼의 불사불멸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내세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과도 통한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기성 교회에서 말하는 지옥은 비성서적이고 비이성적이며 하느님의 사람과 반대되고 하느님의 공의와도 모순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인간이 죄를 짓더라도 그 대가는 죽음일 뿐(로마6,23),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들은 하느님은 사랑의 근원이고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분이 자기 자녀인 인간을 영원한 지옥 불로 보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나 공의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죽음은 소멸 그 자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바) 시한부 말세론
여호와의 증인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시한부 말세론 이다.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세상 종말의 시기를 구체적으로 예언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게 되고, 그 결과 가정, 직장, 학업까지도 포기하는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시한부 말세론이 적중하지 않으면 다시 수정하여 제시하곤 하였는데 최근에 예언하였던 말세의 시간은 1975년 10월 1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다시 빗나가자 1975년으로 종말의 시기를 잡았던 것은 아담의 창조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 때에는 하와의 창조일을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에 계산 착오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담의 창조 일부터 하와의 창조 일까지의 기간만큼 종말의 시간은 지연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정확한 시간은 예언할 수 없지만 그 시기는 바로 앞으로 임박했다고 주장한다.

4) 선교 활동

여 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비종교인이나 타 종교 신자들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자,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개신교 신자들보다는 가톨릭 신자들을 선교의 가장 바람직한 대상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성경 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 활동에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보다는 어느 정도의 관심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성경 해석상의 오류와 문제점들을 교회에서 교육받아 왔기 때문에 선교의 효과가 높지 않은 반면, 그러한 지식과 교육 경험이 적은 가톨릭 신자들은 이들에게 좋은 선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이 대문에 붙여 놓은 ’천주교 교우의 집’이라는 문패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에게는 바로 선교 대상의 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의 교회인 왕국 회관에는 가톨릭 신자 출신들이 대단히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비율이 전체 신자의 반 수를 훨씬 넘기도 한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감독자로 활동하다가 이탈하여 ’이단 방지 선교회’를 조직한 최백용씨의 증언에 따르면, 여호와의 증인에서의 가톨릭 신자 출신의 비율은 전체적으로 70%가 넘는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적극적이고 집요하게 선교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들의 교리와 이들이 갖는 책무 때문이다. 이들의 교리에 따르면 전교 활동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만이 곧 닥쳐 올 말세에 구원을 받아 천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전교 활동은 곧 구원을 얻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에게는 매달 정해진 시간 이상의 선교 활동을 해야 할 책무가 있는데 그 시간은 신자들의 직급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직급에 관계없이 모두가 한 주일에 5시간씩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육을 받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만일 신자들이 교단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교리에 대한 의문을 발설하면 가차없이 제명 처분한다.
여호와의 증인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선교하고 있음은 이 교단에서 출판돼 ’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이란 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상대방과 만났을 때, 어떻게 말을 건네며 선교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자세히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상대가 대화를 거절하였을 경우,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대화를 중단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하는 방법’이라는 장을 보면 거기에서는 대화를 중단하기 위해 상대방이 꺼낼 수 있는 말의 유형을 13가지나 제시하고, 각각의 유형에 따라 응답하는 예문을 많게는 10가지씩이나 열거하고 있다. 따라서 상대방이 거절하는 이유와, 상대방의 수준에 따라 거기에 맞는 예문을 꺼내기만 하면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5) 여호와의 증인의 문제점

가) 국가 체제의 부정과 병역의무의 거부
여 호와의 증인들은 "정부의 권력은 사탄 마귀로부터 받았기에 우리의 적이다. 곧 멸망할 정부를 위해 협조하거나 국기배례는 물론 국가를 위해 병역을 이행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신자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신권 왕국의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을 조국이라고 불러도 안되고, 병역의무는 물론 학교에서의 교련 교육도 받아서는 안되고 국가 공무원과 같은 직업은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 수혈 거부
이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피를 먹지 말라"(레위3,17; 7,26-27; 17,10-14; 19,26; 신명 12,14.23- 25; 15,13)는 구절과 신약성서에 언급된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사도15,20)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피를 먹거나 수혈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한 사고를 당하여 무의식 상태일지라도 수혈을 거부해야 한다고 하여 수혈 거부 카드를 전세계 신도들에게 발급해 주어 항상 의무적으로 휴대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이 지시를 어기고 수혈을 하여 살아난다면 협회는 제명처분을 한다.

다) 기존 사회생활 파괴
여 호와의 증인에서는 세상 종말의 시간이 임박했으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 전도 활동에 전념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다"라고 의식화시킴으로써 신앙생활을 막는 식구가 있을 경우에는 가정을 떠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곧 닥칠 세상 종말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재산과 명예를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직장 생활마저 어렵게 만들고, 교련 훈련의 기피와 전도 활동을 위해 학업까지 중단하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이 종교에서는 다가오는 지상낙원에서는 병에 걸리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으므로 병원, 약국, 장의사 같은 직업은 포기하도록 가르친다.

라) 기성 종교 비판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기성 종교들은 모두 사탄이 창시한 사탄의 조직이고, 기성 교회의 교역자들은 ’음녀’라고 부른다. 그리고 말세에는 기성 교회를 믿는 자 모두가 거꾸러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이 발간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교리서 제16장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반 관습들’에서는 가톨릭의 비난하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즉 십자가를 걸거나 종교적인 형상과 그림, 즉 성물과 상본을 사용하는 행위, 성인 축일을 제정하여 기념하거나 세례를 받을 때 본명을 정해 주는 행위 등은 하느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인간과 제도에게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행위들이라고 강조한다. 또 여기에서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내는 것도 예수가 그것을 명령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과 가르침에 따라 이들은 기성 종교의 성물들을 우상이라고 비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일례로 1987년 제주 교구의 9개 본당과 2개 공소에서 20여개의 성모상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는데, 경찰의 조사로 1988년 1월에 범인이 체포되고 그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판명됨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증명해 주었다.

마) 가정 윤리의 파괴
이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리라...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치 않고..."(마태10,22)등의 성경귀절을 인용하면서 ’참 종교를 택하므로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반대를 받는다’(여호와의 증인 교리서 342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342면)고 가르치면서 부모나 어떤 윗 사람에게도 절을 하거나 인사를 하지 못하게 하며, 생일, 회갑은 물론 부모나 남편의 생일날에는 식사도 같이하지 않는다.

황양주신부

우상숭배

우상숭배
그릇된 예배

그릇된 예배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그르치기 때문에 예배의 본성에 정면으로 반대된다. 그릇된 예배, 우상숭배 행위는 다음 3가지 유형이 있다.
1. 참되신 하느님께 대한 그릇된 예배: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하느님을 끌어들이려는, 헌신적인 신심의 정신이 결여된 그러한 외적 예배행위
2. 우상숭배 : 거짓 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행위
3. 미신과 마술 : 악마와 어둠과 마술적인 힘에 대해 종교적 신앙과 신뢰심 비슷한 것을 갖는 것.

1. 하느님께 대한 그릇된 예배
참된 예배는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을 드리는 데에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신심과 완전한 복종을 표현하는 것이다. 반대로 그릇된 예배는
1) 하느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종교 행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
2)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 신심과 봉헌을 진실로 표현하지 않고 하느님께 합당치 않은 외적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
3) 순전히 인간의 감정과 열망을 해소하기 위한 종교적 행위들이다.(의무감에서)

* 신심의 준마술적 행위 :
이 것은 어떤 규정된 예식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또는 요구된 번수대로 그 예식을 반복해서 행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특정 예식이나 기도들을 말한다. (이런 기도나 예식은 예컨대, 사람이나 동물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나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또는 어떤 사람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등등의 목적으로 행하게 된다.) 그 효과는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선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예식이나 기도 자체의 신비로운 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힘이 사람이 바라는 성공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준마술적 행위는 사도 바오로가 말한(1고린 12,28-30) 하느님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얻는 치유의 은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은사는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신뢰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본이나 유해가 상징하는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예배와 신앙과 존경을 드려야 할, 하느님과 성인들과는 관계없이 그 성물들 자체에서 특별한 효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위들은 하느님께 대한 내적 신심보다는 물건 자체에서 효력이 발생한다고 믿는 오류이다.

* 부당한 방법에 의한 그릇된 예배 :
제사와 예배 행위는 하느님께 지불해야 할 세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내기만 하면 사람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심의 순수한 표현이 아닌 예배의 방법과 행위들로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아주 강하게 비판했던 예식주의 형식주의에 빠진 예배를 말한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참조 이사1,11-17; 예레 7,21-26)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마음과 사랑과 순종을 원하신다. 이러한 내적인 정신이 없는 제물과 예식은 헛된 것이다.

2. 거짓 신들에 대한 예배(우상숭배 : Idolatry)
그릇된 예배의 가장 심한 형태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 신들, 순수 피조물, 악신, 마귀 등에 대한 예배와 흠숭이다.

* 우상숭배는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선하신 하느님 외에 그분께 반대되는 악령들도 있다. 악령의 노여움을 달래어 그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게 찬사를 드리고 제사를 바쳐야 한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려 했던 경향도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야훼를 섬기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힘을 가진 그 지방의 잡신들을 공경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잡신 공경의 이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악한 세력과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들도 완전히 하느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들에게 예배를 드려서는 안되고 덕스러운 생활로 그것들을 물리쳐야 한다.
고대 동방의 종교와 희랍과 로마제국의 종교들은 모두 다신교였다.? 많은 신들과 여신들을 숭상하게 된 원인은 일반적으로 참 하느님에 대한 의식적인 배신이 아니고 단순한 무지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세상의 피조물도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황제들은 흔히 신격화되었고 그 외의 이름난 사람들도 그러했다. 짐승, 나무, 바위와 같은 피조물들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 성서가 말하는 우상숭배의 참으로 중요한 의미는 피조물이나 현세적 가치를 최고의 선으로 격상시키는 데에 있다. 성서는 돈과 쾌락, 그와 비슷한 현세적 사물들을 최고의 선으로 받드는 사람들을 우상숭배자들이라고 표현한다.(마태6,24; 에페5,5; 필립3,19; 골로3,5). 현대 문명에서는 부귀, 물질적 발전, 국력 등등에 대한 우상숭배가 가장 위험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을 버리고 현세적. 물질적, 육체적인 것에 완전히 빠지게 되면, 현세적 가치에다 신적 영광의 옷을 입혀 그것을 위해 자기 생애를 바치게 되며, 자기의 본질을 이루는 종교적 본성을 저버리게 된다.

3. 미신(U≫aa superstition)
넓은 의미에서 미신은 객관적으로 근거없는 대상에 대한 무익하고 맹목적인 신앙과 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참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실천의 준마술적 남용도 포함된다.

좁은 의미에서 미신은 상상적인 어떤 세력을 믿음으로써 행하게 되는 무익한 신앙과 실천이다.

신자들의 미신적인 종교생활의 오류는 실제로 존재하는 하느님과 성인들로부터 어떤 은혜를 얻기 위하여 부당하고 무익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의 미신의 오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어떤 힘을 믿는 것이다.

1) 미신의 원인에는 무지가 크게 작용한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 자연의 현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 하느님의 참된 개념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미신에 쉽게 빠진다. 무지한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비상하고 두려운 일을 당할 때 그것에 대한 해명을 얻기 위하여 어떤 신비로운 힘을 믿게 된다. 또한 미신은 흔히 조상들로부터 물려받는다.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그것을 피하기가 어렵다.

2) 미신의 가장 심층적인 원인은 하느님께 대한 참된 신앙이 없고 참된 종교를 믿지 않는 데에 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많은 미신이 성행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 참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과 학이 발달하고 지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하다. 이런 불안정과 걱정 속에서 사람은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을 찾는다. 하느님의 섭리에서 피난처를 찾지 못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얻지 못한다면, 사람은 자기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되는 미신에 떨어지기 쉽다.

3) 미신은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기 존재를 알아보려 하고 그러한 불안정과 걱정에서 도피하려는 절망적 시도의 하나이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심오한 진리와 초월성을 향한 질서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미신은 하느님의 절대적 통치권에 대한 인간의 시각을 왜곡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신은 자기의 불투명한 존재를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잡신이나 세력을 주문 암송과 예식으로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 성서는 점장이. 복술가, 혼백에게 물어보는 자, 주문을 외는 자, 마술사, 술객 등 미신을 행하는 자들을 모두 단죄하고(신명 18,9-14; 이사2,6;8,19; 예레27,9-10; 사도19,19), 요술쟁이와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점장이는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애22,18; 레위20,27) 그러한 미신행위가 신앙이 없는 데서 기인된 것이라면 불신앙의 중죄가 된다. 확실히 미신은 적어도 객관적으로 볼 때 사람이 건전한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환상에 의해서 결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끔 개인적. 사회적 무책임을 범하는 죄가 된다. 따라서 필요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활동은 무력해지며 참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을 직시하지 못한다.

* 미신은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상징이나 표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예식이나 관습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영적인 실재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종교적. 전례적. 상징의 사용은 그 순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상징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적인 것에 접근하도록 도와준다.

* 미신은 인간의 초심리학적 능력의 사용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가끔 일상생활 속에서 이상한 여러 가지 힘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초능력의 과학적 합리성은 설명되지 않고 있지만 초능력의 존재는 경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현상 중에 많은 것들을 미신이나 마술로 보아 넘겼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것들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들임을 인정해야 하며, 그것들의 사용을 일방적으로 죄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초능력과 같은 비상한 현상을 모두 다 마술적이고 미신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되고, 반대로 그것들이 속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든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든 너무 쉽게 믿어서도 안된다.

페쉬케著 그리스도교 윤리학 3권 우상숭배에 관한 글을 황양주신부가 요약. 정리한 것임

다종교 상황과 선교

다종교 상황과 선교
이 글은 박태범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겸 신부님이 쓰신 글로 경향잡지에 수록된 글입니다.

가) 들어가는 말

선교는 교회의 내적 본질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가 먼저 존재하면서 교회는 자신의 사명 중의 하나로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 사업을 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지상 과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활동은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한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세계화와 함께 일련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이미 지난 세기에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다종교 상황이라는 역사적 흐름의 거대한 물결에 도전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인 다종교 상황을 외면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도전은 그리스도교에게 타종교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리스도교의 선교 신학에서 새로운 신학적 이해와 반성을 요구한다.

1)다종교 상황에 직면한 그리스도교

역사적으로 돌이켜볼 때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종교 외의 다른 종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지고 그들 종교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지리상의 발견 이후이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타종교와의 만남과 접촉 그리고 동양 종교들의 서구 유입으로 세계의 다종교 상황을 소박하게나마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박한 다종교 상황에 관한 인식은 20세기에 들어와 지구가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면서 점점 더 강화되어 나갔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어느 한 국가, 한 민족 또는 한 사회 안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단순히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다는 정도의 의식을 가지는 데 머물렀다.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들 사이에 접촉이 많지 않았고 서로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국부적이었고 지엽적이었으며 또한 종교들 상호간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다종교 상황을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큰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또 그 상황에 크게 구애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실질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다종교에 관한 인식은 단순한 여러 종교들의 공존에 관한 인식을 넘어서게 되었다. 특히 대중매체의 발달로 각각의 종교들에 대한 내용들이 전세계 지구촌을 향하여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종교들 상호간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급증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발맞추어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변화한 상황에 적응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실은 문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새로운 천년대를 맞이한 그리스도교에게 세계의 다종교 상황은 더욱 절박하게 피부로 느끼는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정보 혁명을 통한 세계화는 이 지구를 그야말로 하나가 되게 하고 있다. 인류는 새로운 신대륙를 개척하여 디지토피아를 건설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의 주된 공간은 현실 공간이었으나 지금부터는 가상 공간을 통해 더 확장되어 가고 있다. 대중매체와 이동 수단의 발전은 고전적 의미의 세계를 하나의 동네로 만들었지만 인터넷의 발전은 이 지구촌을 클릭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한 점으로 응축하고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한 점에서 서로 만나게 되고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기에 그 어떤 종교도 자신에게 그 어느 때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다른 종교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의 그리스도교는 나름대로의 피치 못할 역사적인 사정에 따라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이러한 입장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1)라는 신학 격언에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신학 격언이 배타적으로 해석되어 가톨릭 교회만이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세워진 유일한 교회로 간주되고 타종교는 정복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이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신앙을 가진 이들은 우상숭배자로, 미신을 섬기는 자로 간주된 적도 있었다. 이때에는 교회가 선교를 하지 않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되면 그들은 모두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확신감에서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중요시하였다.
인간이 겪는 가장 심한 진통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이고,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은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녀 됨이고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불행은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형벌이다. 따라서 선교는 타종교인이 이교도적인 자신의 과거를 단호히 떠나 복음의 메시지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 교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8-19세기의 그리스도교 선교는 식민국가의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하였고 선교 정책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정책과 맞물려 이루어졌다.2) 많은 경우 선교사들이 군대의 뒤를 따라 들어가 점령된 식민지 민족들을 개종시킴으로써 교회를 부식하고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은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음에는 틀림없지만 오늘날 많은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후유증을 낳고 있다.
이러한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정복적 선교 정책은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안에 그대로 유지되어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서구로부터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자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 정부는 개종을 주목적으로 삼는 선교사들에게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 이어서 선교사들은 중국, 앙골라, 아랍 세계 등지에서 동일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이른바 '해방 신학'이 등장하여 이전의 식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통치 하에서 행해진 선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안에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긴장, 갈등, 불화, 전쟁 등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공의회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인류를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의지에 근거하여 비록 타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구원의 가능성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밝혔다. 타종교인들을 보는 시각의 중심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배타적인 축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포괄적 축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세워진 참된 교회요, 인류 구원을 위한 보편적 성사라고 규명하면서 타종교 특히 세계 종교라고 불리는 유다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3)
그러다가 20세기 말 새로운 쳔년대를 앞두고 '종교간의 대화'가 새로운 화두로 나타나면서 종교 다원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4)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를 궁극자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개념, 또 그것들에 대한 실존적인 응답 또는 반응으로 보고 종교간의 서열을 매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모든 종교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의미한다. 존 힉 같은 신학자는 그리스도교가 중심축이고 다른 종교들은 그 주위를 맴도는 주변적인 종교로 보았던 그리스도교 중심의 신학을 낡은 프톨레마이오스식 신학이라고 규정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교회, 그리스도교 또는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나 아도나이, 알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파니카 같은 가톨릭 신학자는 "우리는 개종이라는 도전에도 직면해야 한다."5)라면서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는 타종교로 개종할 각오까지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절대성을 믿는 것과 같이 모든 종교가 제각기 자기 종교와 신앙의 절대성을 믿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만이 절대성을 지닌다는 우월감을 가질 수 없기에, 선교의 일차 목적은 타종교인의 개종 곧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부터의 회개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곧 각 종교인들의 내적인 회개와 세계 평화 공동체의 형성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서구인의 제국주의적인 종교적 침략과 지배욕의 종교에서 벗어나 사랑과 봉사의 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종교에서 종교로 이동하는 개종에 강조점을 두기보다 내적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간의 대화에 무게 중심을 강하게 둔다.
한편, 지난 9월 11일에는 역사상 초유의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가미가제식 자살 특공대들이 민간 비행기를 납치하여 냉전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힘과 부를 상징하는 국방부 건물과 세계 무역 센터 건물을 공격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와 정신적 물질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 사건을 두고 그 원인을 분석하자면 매우 복잡하여 어느 하나가 유일한 것으로 제시될 수 없겠지만 적지 않은 세계 지성들에게서 '힘의 불균형이 낳은 거대한 문명 충돌'이라는 견해가 나와 주목을 끈 적이 있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도식화해서 볼 때 세계 문명은 서구의 기독교 문명, 중동의 이슬람 문명 그리고 아시아의 불교, 유교 문명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중에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이스라엘을 매개로 하여 충돌한 사건이 이번 뉴욕 테러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문명간의 평화는 없게 될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가 없이는 종교간의 평화가 없게 될 것이다."6)라는 한스 큉 신부의 말이 새삼 생각나게 해 주는 사건 앞에서 그 자살 특공대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고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으며 그들을 과연 개종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자위적인 의문이 생겨날 수 있다. 그들을 개종시키기는커녕 평화로이 공존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칫 상대주의에 빠지기 쉬운 종교다원주의의 주장과 근본주의자들의 경악할 행동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교회가 타종교들 안에서도 참되고 신성한 것들이 발견되고 그 종교들 역시 인간을 비추는 진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면서도 왜 선교를 해야하는가? 과연 유일성의 진리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는 거의 같거나 더 강한 주장을 하는 타종교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나타낼 수 있고, 나의 믿음과 같거나 더 강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등의 어려운 의문이 제기되고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학, 특별히 선교학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름대로의 대답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2) 선교 개념의 분화와 심화 과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를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을 '선교'(宣敎, Missiones)7)라고 정의한다. 이 문헌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점은 한국어로는 단순히 선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 선교가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공의회 이전 역사의 흔적으로 19세기경 선교라고 하면 서구를 중심으로 타민족들에 대해 펼쳐진 갖가지 외방 전교적인 선교 활동들을 지칭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복수적인 표현은 복음 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동적인 참모습을 더 잘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의 부식이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에서 선교를 단순히 복음을 모르는 사람만을 상대로 하는 활동으로 이해하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 있어서 각별히 유의해야 할 요소와 국면(局面)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복음화 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로써는, 복음 선교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 또는 단편적으로 규정할 때는 그것을 빈약하게 하거나 그르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모든 요소를 한 가지로 포괄(包括)하지 않는다면 복음 선교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8) 복음 선교를 단순히 교회의 부식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문헌에서 시대의 신앙감에 맞게 선교의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면서 새로운 단어 "복음화"(Evangelizatio)9)를 사용하면서 그 활동을 하느님 백성들에게 권고한다. 이 권고에서 교황은 인간의 내적인 변혁에 초점을 맞추어 비복음적인 삶의 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비구원적인 상황을 복음의 힘으로 바로 잡는 활동을 선교의 개념에도 포함시킨다. "복음 선교의 목적은 이 내적 변화의 성취에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할 때 교회는 복음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0)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逆戰)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11) 여기에서 선교는 비복음화된 사람들의 단죄를 피하기 위해 그들을 개종시키고 교회를 부식하는 과업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과 모든 문화들을 복음 정신에 맞게 바꾸는 일도 포함된다.
그런데 최근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는 선교의 고유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단수형의 선교(Missio)라는 말을 사용한다.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되살리면서도 다른 한편 예외적으로 선교 활동의 역사적인 흔적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 외에는 선교를 복수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에서 선교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선포와 지역 교회의 설립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의 추진"12)이라고 그 다양한 모습들을 요약하여 특징 지운다. 교황 바오로 6세가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모든 인간적 사회적 가치들을 복음의 힘으로 역전(逆戰)시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요한 바오로 2세는 좀더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증진하고 촉진시키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정적인 것의 역전과 긍정적인 것의 촉진이 대조적이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에서 토착화(Inculturatio)13)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선교 활동을 토착화와 연관시킨다. 회칙에 따르면 "토착화는 인간 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수용됨으로써 그 문화의 참된 가치의 내적인 변모가 이루어지는 것과, 여러 가지 인간 문화 안에 그리스도교가 삽입되는 것"14)으로 정의된다. 선교는 토착화와 동반되며 토착화와 함께 추진된다는 것이다. 이 토착화라는 신조어의 활용은 많은 논쟁을 발생시켰다. 토착화라는 새로운 표현에서 사회학자들은 "교회가 주어진 문화 안에 삽입되는 과정" 또는 "각 나라, 각 지역 혹은 각 사회적 분야 안으로 교회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 등으로 그 뜻을 제한하고자 함에 비해, 종교 전문가들은 선교와 관련하여 "특별한 문화 안으로의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삽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선교의 개념은 토착화라는 개념도 포괄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같은 문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가 복음화 사명의 일부임을 선언15)하고 그 이유를 타종교 안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타종교와의 대화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일부이다. 이 대화가 상호 인식과 상호 기여의 길이요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외방 선교에 배치되지 않을뿐더러 선교와 특수한 관련이 있고 선교의 한 모습일 수 있다. 사실 선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모르고 많은 경우에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께로 부르시며, 당신의 계시와 사랑을 충만히 그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시고, 비록 결함과 부족과 오류가 섞여 있을지라도 그들 종교가 증거하는 영적 풍요를 통하여 각 개인과 민족에게 당신의 현존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내신다."16) 그리고 교황은 어떤 경우에는 대화의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많은 선교사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는 어렵고 때로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대화의 길만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1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9월 2일부터 4일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종교 지도자 200인 모임에 보낸 담화문에서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는 종교 분쟁을 불식할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도해야 할 과제"라고 하면서 종교간의 대화가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일임을 밝혔다.
이렇게 볼 때 선교라는 개념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달라지면서 그 함축하는 내용이 매우 풍부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를 복음 전파와 교회의 부식(扶植)으로 보았으나, 교황 바오로 6세는 복음 선교를 단순히 복음 전파와 교회의 부식으로만 보지 않고 복음화라는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여 비복음적·비구원적인 상황의 역전 노력까지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증진하는 활동과 토착화 작업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까지도 선교 활동과 연관시켰다. 고유한 의미에 있어 선교는 예비신자를 인도하여 개종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부식하는 활동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선교는 이미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의 회개, 비복음적, 비구원적 상황의 역전, 복음 정신에 맞는 세상의 건설 또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의 증진, 토착화, 종교간의 대화까지 모두 이르는 활동인 것이다. 그런데 선교가 담고 있는 풍부한 내용 중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근본주의와 다원주의가 판치는 다종교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종교간의 대화가 세계 평화를 위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새로이 대두된다.

3) 한국 교회와 선교

한국 사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형적인 종교적 다원 사회이다.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등 살아 숨쉬는 신앙 공동체들이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회가 한국 사회이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다종교 상황을 피할 수 없고 운명적이기에 지금까지 서술한 모든 것이 한국 교회의 선교 활동에 모두 적용된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예비신자를 확보하는 새로운 양 모으기 운동, 냉담 신자들을 위한 잃은 양 찾기 운동, 신자 계속 교육을 통한 재복음화 운동, 복음 정신에 맞는 사회를 이룩하는 도덕성 회복 운동, 신앙의 토착화 운동 그리고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 등을 모두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다종교 상황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보면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선교와 종교간의 대화가 더 큰 무게를 지니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전래될 때부터 다종교 상황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고 아직까지 한 번도 소수 종교로서의 위치를 면해 본 적이 없다. 물론 한국 교회는 양적 질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1981년 140여 만 명이던 신자 수가 1986년 초에 200만 명, 1992년에 30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 2000년도의 통계를 보면 총인구 46,125,376에 신자가 4,071,560으로 총인구 대비 총신자의 비율은 8.8%이다. 교회의 피나는 노력으로써 한국 교회는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한국 사회 안에서 가톨릭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신자 수에 있어 여전히 소수이다. 한국 사회에서 8.8%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무종교인이거나 타종교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선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상 명령이다. 교회가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은 타종교인들에게 구원이 없어서이거나, 타종교 안에는 진리나 긍정적인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교회의 선교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대내적인 완전한 자기 통교를 바탕으로 한 파견에 그 기원을 둔다. 이 파견은 성부에 의한 아들의 파견이며, 아들에 의한 성령의 파견이며 이 파견과 연속선 위에 교회의 선교가 있기에 선교 활동은 교회의 깊은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교회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선교는 교회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신비의 심장에 있다. 교회는 선교적이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선교 사명은 사도들을 파견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그래서 교회에게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지상 명령이다. 선교의 모티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고, 성령의 숨결 아래 이미 출현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인간들의 역사 안에서 증진시키고자 하는 열망이다. 좋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 선교를 하는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명령이신 이웃 사랑의 극치이다. 교회는 선교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대내적 친교를 구성하는 사랑과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명시적이고 역사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는 타종교의 전통 안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함축적, 비주제적 또는 신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실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명시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축적인 방식으로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영향 아래 있는 타종교들이 구원에 긍정적 가치를 지니고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그 함축적인 성격 때문에 파편적이고, 불완전하고, 허약한 실재로 머문다. 하느님 나라의 표징인 교회는 인간 구원을 위한 효과적인 성사와 제도들을 잘 갖추고 있기에 함축적인 그리스도교 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명시적인 그리스도교와 조우할 때 자신의 의미를 더 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는 시대적 요청이다. 종교간의 대화 없이 종교간의 평화 없고 종교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역시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는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대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한국 주교회의 차원에서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를 활성화시키고 각 교구별로도 전담 부서를 두자고 촉구한 것은 아주 시의적절한 요청이었다. 한국 주교회의는 그동안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에게 경축 메시지를 보내는 등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지난 2000년 대희년 동안 미사 본기도 중에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화목하게 하시어'라는 내용을 넣어 기도로써 밑받침이 되도록 하였다. 사실 종교인들이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지 않고서는 여러 가지 사회악 제거는 물론 우리 민족의 숙원인 지역 감정 해소 그리고 남북 화해를 이룰 수 없기에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협력은 더 절실하다. 최근 여러 종단들이 연합하여 사형 폐지 운동, 분단 극복을 위한 온겨레 손잡기 운동 그리고 새만금 살리기 운동 등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는 신앙의 토착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토착화는 문화에의 토착화인데 우리 한국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종교 문화이며 이 종교 문화의 이해 없이는 올바른 토착화가 이루질 수 없다. 그리고 다종교 상황에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타종교 문화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가 요청된다. 종교간의 대화는 고전적 의미의 선교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한 설문 조사에서 '종교계에 바라는 사항'을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버릴 것'을 주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일반 국민이 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종교간의 경쟁, 갈등 또는 싸움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이고 이것을 잘하는 종교에 더 큰 호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성실히 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 참되다는 증거가 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선교가 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단순히 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나) 나오는 말

21세기 현대 사회는 고도의 지식 정보 사회로 시간적 공간적 격차를 뛰어넘어 다양한 신념 체계들이 공존하는 다원화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는 하나의 절대적 신념 체계이기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신념은 자칫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연결되기 쉽다. 특별히 유일신교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종교적 신념 체계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쉬워 타종교의 상징물은 우상으로 간주되며 나의 신념 체계와 다른 사람들은 저주받은 자, 적, 또는 사탄이 된다. 그리고 적 혹은 사탄에 대한 공격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충성 행위, 선택받은 자의 소명 또는 성스러운 과업으로 여겨지기에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엄청나게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잘 모르면서 과격한 행동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 뉴욕 참사에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 그러나 종교에서 제거되어야 할 적이나 타파되어야 할 우상은 인간을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여러 가지 사회악과 인간성을 유린하는 각종 관념이나 그릇된 가치관 곧 환경 파괴, 공해, 정보와 재화의 빈부 격차, 남녀 차별, 사회적 불평등, 부정부패, 살인, 강도, 생명 경시 풍조, 물신 숭배, 권력 숭배 그리고 성의 상품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선교 활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고전적 의미의 선교이든 넓은 의미의 선교이든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선교이든 그 활동에 있어 가장 강조되어야 할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도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다종교 상황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선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배타적이지 않으면서도 상대주의적인 종교 다원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도 극단적인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는 변증법적인 중용이다.
1) 정하권, [교회론] 제2편, 분도출판사, 1981년, 100-105면 참조.
2) 심상태, [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 출판사, 1989년, 338-339면 참조.
3)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4) 교황청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관련하여 두 개의 문서를 내놓았다. 지난 1997년 국제신학위원회에서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들"을 발표하였고, 지난 2000년 8월 6일 신앙교리성에서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종교 다원주의에 관한 교회의 관심이 큰 것을 잘 드러내 준다.
5) R. 파니카, [종교간의 대화], 김승철 옮김, 서광사, 1992년, 74면.
6) 한스 큉, "새 세계 질서를 위한 지구 윤리", [미래 사회와 종교],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 대회 발표 논문, 원광대학교, 2000년.
7) 선교 교령, 6항 참조.
8) 바오로 6세,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7항 참조.
9) [현대의 복음 선교]의 옮긴이는 '우리말 번역을 내면서'라는 글에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특별히 라틴어 Evangelizatio의 의미를 복음 선교, 복음화, 복음 선포, 전교, 선교, 복음화 활동 등으로 나열하면서 부득이한 곳을 제외하고는 복음 선교로 통일하여 번역하였다고 한다. 라틴어 어의 그대로 단순히 복음화로 번역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지게 하는 번역이다.
10) 바오로 6세, 앞의 책, 18항.
11) 위의 책, 19항.
1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34항.
13) 토착화(Inculturatio)라는 표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 치릴로 선교 1100년을 기념하여 1985년에 발간한 회칙 [슬라브 민족의 사도]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슬라브 민족들이 사는 땅에 개척자적으로 행한 복음화 업적 안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토착화라고 부르는 모델을 발견한다. 그것은 토착 문화에의 복음화 육화인 동시에 교회 생활 안에서의 이 문화들의 도입이다"(21항).
14) 요한 바오로 2세, 앞의 책, 82면.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 34항에서 종교간의 대화의 필요성이 이미 언급되고 있다. "선교 활동의 올바르고 질서 있는 실행은 복음의 일꾼들이 자기들의 임무 특히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나 문화와의 대화를 위해 학문적으로 훈련되고 또 그 실천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이 요구된다."
16) [교회의 선교 사명], 55항.
17) 위의 책, 57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