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와 앵글로가톨리시즘
1. 성공회(Anglican Communion)
가) 명칭
영국 교회를 위시해서 영국 교회의 대표주교인 켄터베리 대주교 관구와 통공관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성공회라고 부른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원래 사도신경의 ’거룩하고 공변된 교회’라는 구절을 한자화한 것으로 한국, 일본,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해 온 것이다.
나) 체제
켄 터베리와의 통공관계는 전통적이고 가족적인 유대관계를 뜻하지만, 성공회에 속한 모든 교회가 켄터베리 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독립된 관구를 이루지 못한 몇 교회(한국 성공회와 같이)들이 관구외(外) 교구로서 켄터베리의 관할하에 있지만, 나머지 절대다수의 성공회 교회들은 각기 독립된 관구 또는 관구군(群)을 만들어서, 켄터베리를 정신적인 지도자 또는 영적인 대표자로 추대하는 외에는 전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운영해나간다. 실상 주교가 관할하는 교구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성공회가 지켜온 가톨릭적 전통의 하나이다. 교구마다, 관구마다, 그리고 여러 교구 또는 여러 관구가 모여서 구성하는 각 나라의 성공회(미국, 중앙 아프리마, 일본)마다 독립된 헌장과 교회법 체제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영국 교회의 헌법상 관할자인 영국왕은 물론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다) 교세
근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성공회의 교세가 급격히 커져서, 교구가 새로이 만들어지거나 재구성되는 일이 잇달아 정확한 통계를 제시할 수 없지만, 세계 각 지역에 대략 500개의 교구(따라서 같은 수의 교구장 주교)가 있고, 이들은 20여개의 관구와 관구군을 이루며, 각 관구 또는 관구군을 대주교 또는 수좌주교가 관할한다.
라) 주교회의
모든 교구장 주교들이 1878년 이래, 10년마다 한 번씩 모여서 성직, 교리, 예전, 선교 등 성공회 전체에 걸친 공동심사를 토의하는 람베트(Lambeth) 회의가 있고, 대주교나 수좌주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수좌주교회의(Primates Conference)가 있으며, 3년마다 한 번씩 모이는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가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개개 교구나 관구에 대해서 어떤 구속력을 행사할 수 없다.
마) 특징
로 마의 교황청과 같은 통제, 조정기관을 두기를 거부하면서 역사와 전통을 서로 달리하는 수많은 교회가 성공회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해 오는 거기에서 성공회의 한 교단으로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성공회에는 니체아 신경에 나타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자부심이 있지만, 가톨릭 교회와 차별되는 성공회 특유의 교리로서 ’앵글리카니즘’이라고 고집할 어떤 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공회에는 597년 성 아우구스티노가 영국 교회를 시작했을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경험, 그리고 영국 교회가 모체가 되어서 세계 도처에 뿌려진 복음의 역사 속에 배태된 성공회적인 태도가 있고, 분위기가 있고 기질이 있고 강조점이 있다. ’본질적인 것에 일치, 비본질적인 것에 다양성’이라는 전통을 이은 성공회는 밖으로는 다른 종파, 종교와 더불어 우애와 관용으로 공존하고, 성공회 안에 여러 갈래의 신앙태도와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가톨릭 전통을 강조하는 소위 앵글로 가톨릭(Anglo- Catholics)과 개신교적 경향이 짙은 복음주의파(Evangelicals)의 두 갈래가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같은 다양성(또는 종합성)은 성공회의 한 교구 안에서, 한 관구 안에서, 한 나라의 성공회 안에서 따라서 온 성공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일 것이다.
바)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성공회가 지난 19세기 이래 추구해 온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은 지속적이고 명예로운 것이었다. 동방 정교회와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돈독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 루터교회 등과의 일치를 위한 대화가 끊긴 일이 없으며, 인도에서 이룩된 것 같이 다른 교파와 합쳐서 새로운 연합교회(United Churches)를 형성하는 데 언제나 앞장서 온 것이 성공회이다.
일치를 위한 4가지 요건(성공회가 요구하는 4가지 요건, 1870년 제창)
- 성서를 신앙의 기본으로 삼고
- 사도신경과 니체아 신경을 믿으며,
- 주교, 사제, 부제의 성직제도를 고수하며,
- 성사, 특히 세례와 성체성사를 지킨다는 것
사) 대한 성공회
- 성립 : 1880년 후반에 영국의 외방선교 단체의 사제가 잠시 부산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한 일이 있지만, 대한 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11월에 코프신부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됨으로써 시작하였다. 한 사람의 한국인 교인도 생기기 전에 주교가 선임되고, 그로써 시작한 대한 성공회의 예는 흥미로운 일이다. 실상 한국인에게 세례가 베풀어진 것은 주교 축성으로부터 7년 후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 업적 : 코프주교 취임 초 수년 동안 선교활동은 다소 부진했다. 그러나 그때 코프 주교의 감독하에 이루어진 두 가지 사업이 있었다.
하나는 인천, 서울 등지에 기도소를 겸한 병원이 세워져서 일반환자들과 고아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 사업에는 주교와 그를 보좌하는 소수의 사제들과 소수의 수녀들이 합세했다.
또하나는 후에 정동에 성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을 지은 트롤로프 신부가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 개신교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성서 번역사업에 참여한 일이다.
성 공회의 의료, 복지, 교육사업은 일제 통치, 세계대전, 6.25 등으로 발전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살아있고, 성서번역과 보급에 대한 전통적 관심은 성공회가 성서공회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해온 것으로서 반증된다.
이시기에 이룩한 기념할 만한 사업은 강화읍에 세운 성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의 축성(1900년 11월 15일)이었다. 서구의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사찰 양식을 조합해서 세운 이 성당은 한편으로는 초기의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의 기틀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념물이자 강화도의 명소이기도 하다.
- 성격 : 코프 주교는 영국 교회의 가톨릭 전통을 강조하는 선교단체인 U.S.P.G.와 한국교회를 돕기 위해서 마련한 한국 선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며 약 20명의 사제를 거느렸다. U.S.P.G.와 한국에서 시무한 사제들의 성격으로 해서, 한국 성공회는 교회의 조직, 신앙태도, 예전 등에서 가톨릭적인 경향이 두드러진 교회로 성장해 왔다. 광복 후 특히 6.25 이후 미국. 호주 등 교회와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영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인 사제들로 대부분 대치되고, 한국인 주교가 육성되었으며,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교회를 위시한 세계교회와 선교의 양상이 크게 변천함에 따라서 이와같은 - 때로는 배타적이기까지 했던 - 경향은 보다 다양하고 보다 현실적인 교회생활과 선교활동으로 변모해 왔다.. 그러나 주교제, 성사생활, 공도문에 의한 예전 등 기본적 전통은 그대로 지켜져왔다.
- 정착과 벌전 1900년부터 1945년까지의 약 반세기 동안 성공회는 정착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1940년 이전에 영국이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제의 수와 맞먹는 20여명의 한국인 사제가 나왔다. 그리고 1910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 서울, 강화, 수원, 천안, 진천 등지에 성당이 서고, 황해도 백천, 연백에까지 교세가 확장했으며, 교우가 5,000명을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인천에는 성미카엘 신학원이 설립되었고, 1926년에는 숙원이었던 정동 대성당의 준공을 보았다.
1930년 일제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교활동을 추진한 트롤로프 주교가 객사하여 대성당 지하성당에 묻힌 후, 그 뒤를 이은 쿠퍼주교 때에는 북한 지역에서의 사업이 큰 활기를 띠었으며,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영국선교사들이 강제로 한국을 떠났을 때 남한의 성공회 교세보다 북한지역에서의 교세가 더 컸을 정도였다. 선교사들이 비우고 간 성공회는 종전 때까지 일본인 주교의 관할 하에서 최소한의 성사생활을 계속했을 뿐, 선교. 교육. 사회봉사는 붕괴와 침체를 면치 못했다. 종전 후 쿠퍼주교가 다시 돌아와서 교회 재건에 몰두하였으나 그가 사랑하던 북한지역의 교회는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 현황 : 한국 성공회는 1965년에 두 개의 교구(서울과 대전)로 분할되어 최초로 한국인 사제(이천환)를 주교로 축성하여,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그후 1973년에는 대전교구를 대전과 부산 두 교구로 나누어 그 두 교구장에 다시 한국인 주교가 착좌해서 그로부터 한국 성공회는 한국의 교회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은 최후의 선교사 서울주교 데일리 교구장이다. 그가 교구장으로 부임해서 그 자리를 이천환 주교에게 넘기기까지 10년 동안 (1955-1965년) 한국 성공회는 몇가지 뜻깊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기독교 연합사업(N.C.C.)에의 참여, 지역사회 개발과 기아해방운동 전개, 평신도 교육과 자급 사제직의 시도, 산업선교의 도입, 성미카엘 신학원 재개,확충 등이 그것이다.
1965년 이후의 성공회의 역사는 이와같은 기본적인 선교정책을 변천하는 한국과 세계의 상황에 맞추어서 전개한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 행정조직 : 한편 교회행정조직이 정비되어 각 교구장 산하에 교무국이 설치되고, 83년 1월부터 세 교구를 망라한 전국의회의 산하에 교무원이 설치되어, 세 교구의 균형있고 효율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기구를 갖추었다.
성 공회의 최소단위는 전도구이며, 전도구에는 영성체자들이 선출하는 교회의원으로 구성되는 교회위원회가 있고, 각 전도구의 사제와 교회위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교구의회, 그리고 세 교구의 교구장과 교구의회가 선출하는 사제와 평신도들이 구성하는 전국의회가 있다. 교구의회와 전국의회는 대한 성공회의 헌장이 구정하는 바에 따른 교회의 최고 입법기관이다. 이와같은 의회제도는 세계의 모든 성공회의 공통적 관습이며, 의회에서의 의결에는 주교, 사제, 평신도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어느 누구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 사업 : 대한 성공회는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천신신학교(성미카엘 신학원의 후신)를, 정박아 교육기관으로서 성베드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선교사업을 돕고 독자적인 사회복지사업을 추진하는 성가수녀회가 있다.
2. 앵글로 가톨리시즘(Anglo-Catholicism)
가) 개념
일 반적으로 영국 국교회 및 성공회 안의 고교회주의(高敎會主義)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1838년 이래 일반에 쓰이게 되었다. 18세기 이래로 영국의 복음주의가 개인의 구원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과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 등으로 인해 19세기 초기의 영국 국교회에서는 교회관념이 희박해졌으며, 교회를 경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 경향에 대한 고교회측에서의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옥스포드 운동(1833년)이고, 그 신학적 입장이 앵글로 가톨릭시즘이라 불리게 되었다.
나) 사상 개요
-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교회의 신적 권위에 대해 국가도 침범하지 말아야 하며, 개인은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 교회는 본래적으로 유일하게 성스러운 가톨릭 교회이다. 초기 5세기동안의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영국 국교회는 그 가톨릭 교회의 올바른 사도 전승의 성직, 성사, 교의, 실천을 전달하는 하나의 지체이다(이른바 분지론 分枝論, branch theory).
-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모두 진정한 가톨릭 교회의 가지(枝)이므로 올바른 교류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 예배에서의 의식적 요소의 존중, 기도서를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공도의 질서회복, 예배음악, 건축장비의 면에서도 고대의 것을 존중하고자 노력하여 의식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단순한 외형의 존중은 본래의 취지가 아니다.
황양주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