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正敎會, Ecclesia orthodoxa)
가) 명칭 및 구성
동방교회, 정교회, 하리스트 정교회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들의 총칭이며, 이들 정교회는 고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4개의 총주교 관구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가지며, 부분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다.
동방교회, 서방교회라는 명칭은 고대교회에서는 지리적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역사적 유래에 의하여 호칭된다.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당시의 로마제국 동부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이스 반도, 에집트 등지로 전파되었고,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 갈데아 지방과 아르메니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기원후 400년경에는 제국의 동부지역에 약 1천만 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는에 이들을 동방교회라고 하였다.
나) 분포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 퍼져있으며,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을 신봉하는 콥트교회, 아비시니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야곱파 교회, 남인도의 말라바르 교회, 한때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졌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도 모두 동방 정교회의 이단이다. 이들 교회의 신자는 통틀어 3억명 정도이다.
다) 동방교회의 체제
- 중심권위 : 다양한 동방교회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권위는 없다. 각 의식별로 총주교, 대주교, 주교의 계통 이 있지만, 같은 의식 안에도 여러 총주교좌가 있어서 서로 독립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 국민 교회의 최고 의결기관 : 자치적인 국민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은 시노두스 또는 전국 공의회이며, 이 회의에는 평신도도 참석하고 있다. 동방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세계공의회를 최고 권위로 인정하지만 그런 공의회는 역사상 한 번도 개최된 일이 없다.
- 국가와의 관계 :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로마시대부터 국가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았으며, 오늘의 공산체제 안에서도 변함이 없다.
라) 동방교회의 역사
정 교회는 5-6세기경 그리스도의 위격을 둘러싸고 동.서교회가 대립하면서 형성되었다. 동서교회는 1054년에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풀의 총대주교가 서로 파문하면서 결정적으로 분열되었고, 그 뒤 서로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분열의 폭은 더욱 깊어졌다.
콘스탄티노풀 총주교좌 : 그리스도교는 1세기 중엽에 제국의 수도 로마에 전해졌고, 거기서 제국의 서부 즉 서유럽에 전파되었으며, 400년 경에는 약 50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서방교회라고 하였다. 이 서방교회에서는 로마가 유일한 종교,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교리신학, 전례, 법제, 관습 등이 서방교회 전체에 확산되어서 서방교회는 외형적으로 상당히 통일된 단일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에는 로마 시대 이전부터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소아시아의 에페소, 그리이스의 아테네 등 정치, 문화, 교역, 학문의 중심지들이 여러군데 있었으므로 동방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도 자연히 이러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몇 개의 그룹이 형성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그 신자수와 신학적 권위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 로마를 교황에게 넘기고 자기는 동방의 비잔틴(콘스탄티노풀)으로 옮긴 뒤(330년)부터 비잔틴은 황제의 후광을 업고 영향력을 증대하여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능가하는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381년 제 1차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함께 콘스탄티노풀도 총주교좌로 공인되었다. 각 총주교좌는 그 주변의 교회들을 지휘하여 거의 자립적인 구역을 형성하였으므로 각 구역은 고유한 전례와 관습을 발전시켰다.
- 5세기 : 콘스탄티노풀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신격과 인격의 두가지 위격이 있다는 설을 주장하다가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단죄되고 추방되었다.
그 뒤 로마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사소한 분쟁을 계속하면서도 신앙의 일치를 계속하였지만, 라틴어와 그리이스어의 차이, 관습과 제도의 차이, 니체아-콘스탄티노풀 신경의 해석 차이, 그리고 비잔틴 총주교들이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야심 등으로 인해서 양 교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 9세기 : 포시우스 총주교는 한 때(864-868년) 로마와 분리되었다가 다시 화해하였다. :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풀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라틴교회가 누룩없는 빵을 사용하고, 사제의 독신제를 고집하며 신경에 필리오꿰(Filioque)를 삽입하였다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 성 레오 9세 교황은 동방교회에 특사를 보내어 담판하였으나 결렬되었다. 교황의 사절 훔베르트 추기경은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을 선고하였으며, 체룰라리우스도 로마 교황(그때 교황좌는 성 레오 9세의 사망으로 공석중이었음)을 파문함(1054년)으로써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에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 등의 교회들이 속속 로마에서 이탈하였다.
- 1204-1261년 : 동로마 제국이 점점 쇠약해져서 이슬람 교도가 제국의 아시아 지역과 북아프리카를 석권 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므로 서방교회는 십자군을 일으켜 여러번 동방에 원정하였고, 한때는 거거에 라틴제국(1204-1261년)과 라틴전례 총주교좌를 설치하였다.
- 리옹 공의회(1274-1284년)와 플로렌스 공의회(1439년) : 양 교회의 일치를 결의하였지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호응이 없어서 무위로 끝났다.
- 1453년 : 터키제국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풀이 점령됨으로써 동로마제국은 멸망하였고,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풀 총주교의 지배에서 독립하였다.
- 16세기 :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동방교회는 완강히 반대하였으며, 우크라이나 교회의 중요한 일부가 가톨릭과 합일하였다.
- 17세기 : 루마니아 교회의 일부가 가톨릭화 하였다.
- 18세기 : 시리아 전례의 멜키트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하였다.
- 19세기 :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교회들이 독립된 국민교회가 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터어키가 유럽에서 축출되면서 비잔틴 총주교의 실질적 권한은 이스탐불 근처의 교구들에 국한되었다.
마) 각 정교회의 성립
동 방정교회의 중핵은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이스 정교회이다. 이들 정교회들은 둘 다 콘스탄티노풀에서 떨어져 나온 교회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에 시작된 러시아 교회는 모스크바 대주교를 독립시켜 총주교로 삼았다(1589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전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동방정교회는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 그리이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그리이스 지방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이다. 당시 그리이스 지방은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중부 그리이스 지방이 마케도니아에 통합되었고, 지방구로 설정되어 콘스탄티노풀의 재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콘스탄티노풀 분열(486-516년) 때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고, 성화상 논쟁(725-842년) 때는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054 년을 기하여 그리이스 정교회는 서방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리이스 정교회도 터키인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발칸제국은 독립을 얻었고, 그리이스 독립전쟁(1821-1827년)에서 승리하여 독립하였다. 1833년 그리이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풀 총주교에게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총주교도 결국 승인을 하였다.(1850년) 그리고 1852년 그리이스 국회는 그리이스 정교회를 국교로 정했고, 아테네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주교회의(Holy Synod)를 설치하였다.
*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9 세기경 키에프 주민들이 콘스탄티노풀과 접촉하면서 복음이 전해진 러시아에는 공주 올가(Olga)의 입교(957년),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1세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 1세의 딸 안나의 결혼으로 전도가 활발하였다. 13세기에 타타르인이 러시아에 침입하게 되자 러시아인들은 동북부로 이주하였고, 교회의 중심도 키에프에서 모스크바로 넘겨졌다.(1328년) 그리고 모스크바의 주교 욥이 콘스탄티노풀의 총주교로부터 총주교의 칭호를 부여받은 뒤부터 모스크바는 소위 제 3의 로마로서 당시 터키인의 지배 아래 있던 콘스탄티노풀을 대신하여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피요트르 대제 때는 총대주교 제도를 폐지하고(1700년), 12인의 위원을 두어 주교회의를 관장케하여 교회를 국가의 지배아래 두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제도들은 러시아 혁명 때까지 존속하였다.
혁 명후 2차 대전 시작(1941년)까지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마르크스 유물론과 반종교정책으로 교회가 짜르 체제를 지탱한 점을 신랄하게 공격, 탄압하였다. 교회재산은 몰수되었고, 성직자는 투옥, 처형당하였다. 1929년 이후 정부는 조직적인 반종교투쟁을 감행하였고, 1941년 대독일전쟁 개시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은 반종교정책을 완화시켰다. 반종교선전이 중지되고 1943년에는 주교회의 개최가 허락되었다. 뒤퐁이 죽은 뒤(1924년) 공석으로 남아있던 총주교좌에 세리카가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는 서서히 힘을 회복하였교 성직자 교육과 신학연구를 위한 신학교와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후 동서 냉전이 강화됨에 따라 정부의 대종교정책도 강화되었지만 신자의 공직취임 금지조치 이외에는 겅책에 반대하지 않는 한 상당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 선교사업에 현저한 업적을 남겼고, 1961년 뉴델리의 세계 교회회의를 통해 WCC에도 가입하였다.
* 루마니아 정교회 ( Rumanian orthodox church)
1856 년 공국(公國)이 된 루마니아는 25년 뒤에 독립왕국이 되었다. 최초의 왕자 코사는 교회를 독립시키기로하여 국회의 동조를 구했고, 그에 따른 법률도 통과되었다. 1885년 콘스탄티노풀 총주교 요아킴 4세는 정식으로 루마니아 교회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1차 대전 후 영토와 국민이 증대하면서 교회의 지위도 강화되어 1925년에는 총주교좌가 설치되었다.
* 불가리아 정교회(Bulgarian orthodox church)
1204년에서 1393년까지 불가리아 교회는 독립된 주교좌를 갖고 있었지만, 터키인의 침략 이후 투르크 제국이 멸망할 때(1393-1856년)까지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의 지배아래 있었다.
1860 년에 주교 힐라리온이 교회이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가 이를 민족적인 이단이라하여 반대했고, 다시 총대주교 안티모스 6세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파문하였다. 그 뒤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배려로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가 파문을 풀면서 양교회의 관계는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 세르비아 정교회(Serbian orthodox church)
1219년 성 사바(Saba)에 이해 독립 주교좌가 되었고, 1346년 총주교좌 교회로 승격되었다. 1389년 이후 약 5세기간 터키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교회도 독립을 잃고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의 재치권 아래 있었다. 1876년 국가가 완전 독립하면서 교회도 1879년 자치를 회복하였다.
* 알바니아 정교회(Albanian orthodox church)
1912년 터키로부터 독립한 뒤 교회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폈다.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추진된 이 투쟁은 1908년부터 사제 놀리(Noli)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회교인으로서 뒷날 국왕이 된 조구(zogu)의 침입을 받아 놀리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37년에야 알바니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풀 총대주교로부터 정식교회로 인정되었다.
* 그외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1951년), 폴란드 정교회(1925년) 등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헝가리, 마케도니아, 우크라이나 등에도 동방정교회 신자들이 살고 있다.
바) 가톨릭과의 관계
가 톨릭과 정교회 사이는 15세기 이후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화해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시도되었다. 500년만인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서 만났다. 양측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 기간 동안 정교회측의 옵저버가 참관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하기도 했으며, 1964년 제 3차 정교회회의에 모인 14개 정교회 대표들은 로마와 교회일치적인 입장에서 계속 대화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가톨릭에서는 동방교회에 관한 문제를 관할하는 성(부서)을 1917년 독립시켜 동방교회성성( Congregation for Oriental Church)이라 명명하고 있다.
사) 현재의 상태
동방교회들의 현재상태는 그 대부분이 공산진영에 속하기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기도 힘에 겨운 형편이다. 대체로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각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의식에 따라 크게 5그룹으로 분류된다.
ㄱ) 비잔틴 의식에 속하는 정교회 : 이스탐불을 위시하여 그리이스, 루마니아, 조지아, 알바니아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신자수는 1억 2천만명에서 1억 7천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ㄴ) 칼체돈 공의회를 거부하고 분리된 아르메니아 의식의 교회 : 소련령 아르메니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함하여 370만명으로 추산한다.
ㄷ) 기타 : 서부 시리아 의식의 신자는 약 70만명, 동부 시리아(갈대아)의식의 신자는 17만명, 콥트 의식의 신자 약 130만명 등으로 추산한다.
그 리고 동방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가 여러 가지 기회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일치를 이룬 동방 가톨릭교회들의 신자도 약 1천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그들의 고유한 전례와 관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리상으로 로마 교회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의 동방교회들이 항상 경계하는 대상이 되어서, 객관적으로 보면 교회일치 운동에 있어서 좋은 위치에 있기도 하다.
아) 한국 정교회
한 국의 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 정교회의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주한 러시아 공사관에서 시작된 선교는 1900년 황제 고종으로부터 정동의 땅 1,000평을 하사받아 성 니콜라이 성당을 건립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2대 신부로 온 스케초프스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6년 노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전과 이에 따른 원조의 중단, 1917년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과 이에 따른 선교활동의 중단 등으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이 크게 위축된 데다가, 1945년 이후 정교회를 주관하던 볼리카르프신부와 김의환 신부가 추방되거나 납북됨으로써 교회는 거의 문을 닫다시피 하였다. 1950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출전하였던 그리이스군 군목들의 주선으로 1956년 소속이 그리이스 전교회 산하로 옮겨졌고, 1966년 성당도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으로 옮겼다.
자) 동방교회의 특징 / 교리와 신앙생활
동방교 회들 중에서 가톨릭과 일치한 교회는 전례와 관습만 다르고 교리는 가톨릭과 같다. 정교회는 교회의 초기 7번의 공의회를 가톨릭과 함께 인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인 성삼론과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표현이나 설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몇가지 교리와 실천상에 차이가 있다.
- 계시(성서와 성전) : 하느님의 계시는 성서와 성전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인정하지만, 러시아 교회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성서의 제 2정경을 성경이 아니라고 한다.
- 성령론 : 콘스탄티노풀의 성령론 해석에 있어서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해석하는데, 정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하신다고 해석한다.
- 성모께 대한 신심 : 성모께 대한 신심은 두터우면서도 성모 무염시태 교리는 배척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모는 모태에서 성화되지 않았고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성화되었다 한다.
-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 :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는 하지만 사후에 보속을 하는 연옥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동방교회에서도 죄의 사면장을 발행하지만, 죄의 사면으로 벌도 사면된다고 하면서 가톨릭의 은사교리를 배척한다.
- 교황의 수위권 : 교황의 명예상 수위권은 인정하나 통치권적 수위권을 배척하고,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을 부인한다.
- 신심생활
- 전례 : 미사와 성무일도에 집중되어 있고 대단히 장엄하고 복잡하다.
- 세례 : 세례를 받은 자라야 타인에게 세례를 줄 수 있고(실제는 사제와 부제), 긴급한 경우 외에는 세 번 물에 잠그는 침수식으로 거행한다.
- 견진성사 : 견진은 여러번 받을 수 있다.
- 미사 : 반드시 누룩으로 발효시킨 빵을 사용하며, 평신자도 빵과 포도주를 받아서 영성체 한다. 일반 신자들은 성탄축일, 부활축일, 베드로.바오로 축일, 성모승천축일에 영성체하며, 영성체하기 며칠 전 부터 단식을 하기도 한다. 신심은 깊으나 교리적으로 너무나 무지한 것이 큰 문제이다.
- 병자성사 : 건강한 사람도 받을 수 있다.
- 혼인 : 양 당사자의 동의로써가 아니고 사제의 축복으로 성사가 된다.
- 신품 : 특별한 관면이 없으며 다른 교파의 주교에게서 받은 신품은 무효로 본다. 수도자가 아닌 재속 성직자는 신품받기 전에 결혼할 수 있으며, 1923년 이후로는 홀아비가 된 부제나 신부는 재혼할 수도 있다.
- 전례시기 : 예수부활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성탄축일은 1월 6일(공현축일)에 지낸다.
- 신심 : 성모와 성인과 그들의 성화공경이 활발하고 순례행사를 즐기며, 수도생활을 매우 높이 존경한다.
- 신학과 전례 : 신비주의적인 색체가 농후하며 교회가 각 국민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전례와 성서는 일찍부터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문학이 발흥하였다.
- 성직자 : 성직자는 수도지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며, 성직은 사도전승에 따라 주교, 사제, 부제등을 두는 고대의 성직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 성찬의 전례 :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주로 성 크리소스토모의 전례를 사용하지만 1년중 10번은 성 바실리오 전례를, 한 번은 성 야곱 전례를 사용한다.
- 신심 : 교회 신심생활의 중심은 삼위일체의 예배이고, 여기에 성모와 여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첨가된다.
황양주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