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당시 파리 소르본대학교의 법과대학생이었던 오자남은 토론 모임인 ‘역사 협의회'의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료들과 함께 ‘자선 협의회'를 설립하여 자선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조직적인 활동을 위해 몇 개의 ‘협의회'를 새로 만드는 가운데 그들은 1834년 2월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수호 성인으로 정하고, 1835년에는 회의 명칭을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로 바꾸었다. 아울러 같은 해 12월 8일에는 성인의 저서에 기초하여 회칙을 제정하였고, 1845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공적인 평신도 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조직과 규모면에서 성장을 거듭한 빈첸시오회는 현재 150개 이상 나라 에서 백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조직체로 발전 하였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1581년 4월 24일 프랑스 남서부 랑드 지방에 있는 닥스시 근처 푸이에서 가난한 농가의 6남매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남달리 총명했던 12살 때 닥스에 있는 코르들리에회 수도원에 보내져 드 코메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신학과정을 마친후, 1600년 9월 13일 생 줄리앙성의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후 , 빈첸시오는 1610년 마르그리트 여왕의 빈민 구제계를 담당하였고 그후 클리쉬 주임신부로 일하다가 세력있는 드 공디가의 가정교사로 임명 받기도 했다.
1617년 샤띠옹 레 동부에 주임신부로 부임한 빈첸시오는 40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 본당에서의 여러 가지 병폐등을 개선하는 한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애덕부인회'를 창설하여 그들을 돌보게 하였다. 1625년 1월 25일에는 당시 폐쇄적인 성직자들의 양성과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선교회 (라자리스트회)'를 창설하였다. 당시 많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가정을 가진 애덕회 부인들만으로 간호할 수가 없어 성루이즈 드 마리약의 도움을 얻어 1633년 11월 29일 가난한 이들의 영신적,육체적 봉사를 위해서 가난한 이들의 종들이라 불리우는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였다.
1660년 9월 27일 79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난 그는 1737년 6월 16일 성인 품에 오르셨고
1885년에는 교황 레오13세에 의해 모든 자선사업 단체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앙토안느 프레데릭 오자남 (Antonie Fredric Ozanam)은 181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리용 출신인 그의 부모님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임시로 밀라노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오자남은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영민하고 통찰력이 깊은 그는 흔히 철학 초보자들이 겪는 일종의 불신과 회의론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탁월한 철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노아로 신부 (Fa ther Noirot)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아로 신부는 오자남의 카톨릭 신앙을 확고히 다져 준 분이었다. 지식과 성덕을 겸비한 성인 사제 노아로 신부를 '영혼의 탁월한 교육자'라고 불렀다. 이렇게 청년기의 위기를 벗어난 오자남은 열린 정신의 신앙인으로 성숙해 갔다. 그의 신앙은 진리의 원천에서 물을 마실 수 없는 불안한 영혼들을 도와주고 싶은 불타는 열정으로 나타났다. 1833년 6명의 학생들과 같이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정신을 이어 받은 평신도 의 빈민구제 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를 창설하였다. 오자남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도와주는 일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이 목표에 충실하였다. 1997년 시복 되시고 2005년 시성 되셨다.
예수회 캄보디아 봉사단은 지뢰나 여러 사고로 인하여, 팔이나 다리가 없는 학생들이 숙소에서 생활하며 기계, 전기, 목공 재봉 등의 기술을 배워 스스로 자립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애인 기술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누르시면 캄보디아 장애인 기술 학교를 보실수 있습니다.
김광우 신부님은 중국 쓰촨성 한센인마을에서 지낸 이야기를 제1부 '중국, 드넓은 대륙에서 작은 사랑을 찾아'에 풀어놓고, 사제가 되고 한센인마을에 들어가기까지 여정을 제2부 '꿈꾸는 사제, 못말리는 선교사'에서 들려주고 있다.
그는 한센인들을 돌보며 생각지도 못하게 "신기료장수가 됐다"고 말한다.
"신발 만드는 신부, 정확히 말하면 신발 깔창 깔아주는 신부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할 때, 무릎을 꿇고 환우들의 발을 살펴보고 만지며, 그들에게 딱 맞는 신발을 만드는 일이 싫지 않았다. 그것이 점차 내 안의 즐거움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또 한 번 내 안에 계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곳을 누르시면 김광우신부님에 대한 기사와 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1975년에 ‘한국외방선교회’가 설립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성장하는 분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한국외방선교회‘는 감사와 보은의 정신으로 파푸아뉴기니, 대만 중국, 캄보디아, 모잠비크, 필리핀 등지에서 선교사제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선교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생들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누르시면 한국외방선교회에서의 선교 활동을 보실수 있습니다.
빈곤의 땅 말라위에 희망의 불꽃 살린다... 살레시오회 김대식 신부 3년 8개월째 선교 투신...
극빈국이지만 고아 등 지역문제는 스스로 해결... 전기, 수도시설 찾아볼 수 없어..
이곳을 누르시면 김 알렉산더 신부님의 말라위 소개 강론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평화방송에서 "6화 잠비아에 간 6인의 사제들 3부: 2012/01"에 수원교구 한상호 신부님과 의정부교구 김형근, 양현우 신부님의 선교활동을 담았습니다.
은퇴한 후 선교를 자원한 한상호 신부님은 잠비아 마냐마 본당을 선교센터처럼 만들어서 많은 후배 사제들과 봉사자를 초청해서 함께 사목하길 바라는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이곳을 누르시면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선교 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신부님의 최근 소식 “이제 이곳 마냐마라는 곳에 성당과 사제관 그리고 진료소를 완공했고 이제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으며 이번 6월3일에 이곳 주교님과 수원교구 이성효 총대리주교님을 모시고 봉헌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치원과 함께 학교 건물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미주 아프리카 희망 후원회 (CFACM)'는 아프리카의 오지 남수단 톤즈에서 사제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선교활동을 하시다 선종하신 故 이태석(요한) 신부와 함께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교육비와 의료비 지원등을 통하여 그들의 미래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이곳을 누르시면 아프리카 희망후원회의 최근의 활동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을 누르시면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파푸아 뉴기니의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하시는 김 세노리나 수녀님으로부터 온 메일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곳 파푸아에서 빈민 사목을 담당하고 있는 세노리나 수녀입니다. 저는 이곳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거의 무료 교육과 급식을 하고 있답니다. (중략)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일반학교나 기술하교에 다닐 수 있도록 닭 프로젝트나 일거리를 주어 미래에 희망을 갖게 도움을 준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쉽게 밤손님이 되어 목숨을 잃거나 장애인 즉 경찰이나 상대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 쉽게 상해를 입는 답니다. 저는 이 일을 통해 하느님의 꿈을 봅니다. 그분이 이토록 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 하나의 기적은 이렇게 은인들을 통해 우리 아이들을 더 잘 돌보라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답니다.”
이곳을 누르시면 평화신문에 실린 사랑이 필요한 곳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볼리바아 의 Santa Cruz에서 선교하시는 김 아멜리아 수녀님이 보내주신 선교활동 내용입니다. 평화신문 미주판 2012년 1월 15일자에 김 아멜리아 수녀님의 기사가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