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

병자성사(病者聖事)

병자성사(病者聖事)
우리는 병자성사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병자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파스카 신비)에 특별한 모양으로 참여하며, 그분의 위로와 용기를 받으며, 필요한 경우 육신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을 얻게 된다.

1. 병자성사의 기원

우리 주님은 병자에 대하여 동정심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는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마태 11,5)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요한에게 밝혔다. 환자의 치료는 그리스도의 활동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마지막 심판에 관한 비유에서 벌받을 사람들에게 "내가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마태 25,36)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반면에 상받을 사람들에게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다"(마태 25,43)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이 복음선포를 돕기 위하여 활동할 때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부활 후에도 비슷한 사명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마르코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그들은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병자성사의 도유에 관한 첫 암시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구마적 치유로 이미 존재하던 관습을 인준하시면서, 그 관습에 새로운 의미를 부과하셨다(루가 4,18-19).

견진성사에서와 같이 우선 초대교회에서 행하여진 병자의 도유에 관한 기록을 야고보서에서 볼 수 있다. "여러분 중에 앓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2. 병자성사의 대상자

중세 때는 죽을 것이 거의 확실한 사람에게만 이 성사를 베풀었다. 그래서 이 성사의 명칭이 '종부성사' 즉, '죽음의 성사'로 불리웠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이 성사받기를 두려워하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병자성사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만 베푸는 성사가 아니라 병과 노쇠로 위험상태에 있는 이들이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신자가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면 벌써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병자가 죽음의 직전에 있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병자가 이 성사를 받은 후 건강을 회복하였다가 다시 병들었을 경우라든가 또는 같은 병세가 계속되다가 중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에는 반복해서 받을 수 있다. 위험한 병 때문에 외과수술을 받아야 할 때마다 병자는 수술 전에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 노환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많이 쇠진해지는 노인들에게는 병세의 위험성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이 성사를 줄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도 그들이 이 성사로써 힘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으면 역시 병자성사를 줄 수 있다(약 7∼8세 이상).

사제가 병자한테로 불려갔을 때 병자가 이미 죽었을 경우, 사제는 그를 위해서 하느님께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고, 자비로이 천국으로 받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병자성사는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병자의 죽음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조건부로 이 성사를 줄 수 있다.

3. 예식

병자성사를 베푸는 이는 주교, 본당신부, 병원 원목과 이들의 위임을 받은 사제들이다. 이 예식은 인사, 시작예절, 참회식으로 시작한다. 말씀 전례가 그 다음에 온다. 친구와 친척이 기도와 노래에서와 같이 독서에도 참가하여 공동체적 분위기를 만들면 더 좋다. 먼저 참석한 사제 모두가 안수한다. 그리고 성사 집행자가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혹은 급한 경우에는 이마나 몸의 아무 부분에 기름바른다. 성유를 바르는 행위가 안수이기도 하다. 특히 이 기름바르는 예식과 그것에 따르는 기도가 성사적 표지이다. 병자의 도유 예식은 환자를 위한 특별기도로 끝을 맺고 주님의 기도, 혹은 영성체와 강복이 뒤따른다. 기름바르는 예식을 미사 중에도 할 수 있다.

4. 효과

"이 성사는 성령의 은혜로서, 성령의 도유는 아직도 속죄해야 할 어떤 죄과가 있다면 그 죄과와 죄의 결과를 씻어 주어, 병자의 영혼을 거뜬하게 해 주며, 견고케 해 주고,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일으켜 줌으로써 병자로 하여금 그 도움을 받아 병고와 고생스러움을 더 쉽게 참으며 마귀의 유혹에 더 잘 대항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될 경우에는 육신의 건강까지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병자성사 예식서 119).

혼인성사(婚姻聖事)

혼인성사(婚姻聖事)
그리스도는 혼인성사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리스도는 혼인성사로 부부를 당신과 교회와의 사랑에 일치케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해서 서로 돕고 성화케 한다.

1. 성서에 나타나는 혼인

하느님은 혼인을 예정하시고, 창조의 절정 순간에 그것을 설정하셨다. 창조에 대한 두 가지 설화에는 혼인제도에 관해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 창조설화에서는 출산이 강조되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 둘째, 설화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우정관계가 먼저 나온다.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창세 2,24). 충실한 일부일처제가 구약성서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잠언서는 아내를 책임과 위엄을 가진 동업자로 묘사한다(잠언 31,10-31).

신약에서 혼인이 성사라고 표현한 것은 성 바울로의 에페소서이다. "남편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32).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와의 일치는 매우 친밀하여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보다 더 적합한 비교는 없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표징도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적절히 표현된다.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와의 일치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남편과 아내의 결합도 교회와 그리스도의 일치의 신비와 연관되기 때문에 서로 거룩하게 한다.

2. 혼인과 독신

성 바울로는 혼인의 신성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동정이나 독신생활 또한 권고한다(1고린 7,32-34). 교회는 혼인을 존중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영생에 대한 신앙을 뚜렷이 증거하기 위하여 혼인의 축복을 포기하는 생활형태(독신생활)도 또한 존중한다. 이런 생활을 하도록 불림받은 사람에게는 동정생활이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는데"(1고린 7,31), 동정생활은 영생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혼인성사로 결합한 사람들은 교회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보이는 표지이다. 독신자들은 혼인을 포기하지만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독신자들은 오히려 혼인이 표지하는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사랑을 특별한 방법으로 증거한다. 그들은 부부애가 거룩한 것이지만 잠정적 사랑이며,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서로의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수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결혼소명과 독신의 소명은 서로 대립하기는커녕 사랑의 성덕을 추구할 그리스도인의 기본 소명 안에서 서로 돕는다.

3. 혼인의 세 가지 선익(善益)

혼인의 세 가지 선익은 자손, 정절, 성사(聖事)이다. 하느님이 혼인을 세우시고 성화하신 것도 그 선익을 위해서이다.
(1) 정절(부부애)
제2 차 바티칸공의회는 혼인을 '사랑의 공동체'(사목헌장 47)라고 부른다. 정절은 최소한의 소극적 의미에서 결혼 상대자가 아닌 어느 누구와도 성행위를 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정절은 부부애를 보호하는 보루이다. 부부애로 깊이 맺어진 공동체는 조물주 친히 제정하셨고, 조물주 친히 그 법칙을 주셨으며, 결혼 당사자도 철회치 못할 인격적 동의로 맺은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교 적 부부애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순수한 사랑의 결실과 애덕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전행복을 고려하며, 품위있게 사랑을 표현하게 한다. 주께서는 이 사랑을 당신의 은총과 특별한 은혜로써 정화시키고 완성하시고 높혀 주셨다(사목헌장 49).
상 호간에 주고 받는 사랑은 당사자간의 기본적 평등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남편과 아내의 상호 의무는 동일하다는 매우 혁명적인 사상을 가르치시면서 부부평등의 기반을 쌓으셨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나아가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
진실한 사랑의 유대는 이기심과는 달리, 상대방을 위해서 상대방의 이득을 추구하려는 자유스럽고 굳은 투신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지속성을 갖는다.

(2) 자손(출산)
자 녀 출산이 혼인의 기본되는 선익이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확인하였다. 혼인의 목적은 '사랑의 나눔'과 '생명의 전달' 그리고 '상부상조'에 있다. 즉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성취함으로써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며 서로의 역할 안에서 서로를 도와 주는데 있는 것이다. "혼인과 부부애는 그 성격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자녀들은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다"(사목헌장 50).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다. 창조에는 당신의 끝없는 선(善)을 연장하고, 보급하고, 나누어 주기 위한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 부부가 자식을 낳으며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랑의 창조적 능력에 참여시키신 것이다. 교회는 인위적인 피임 방법을 거부한다. 성을 쾌락의 도구로 만들 위험성과, 하느님의 선물인 자녀 출산을 인위적으로 부정할 가능성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인구문제를 모른체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수의 자녀를 갖는 것이 가정의 품위를 지키는 데 유리할 수도 있음을 교회는 알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교회는 부부가 서로 협력해서 할 수 있는 자연피임법을 권장한다.

(3) 성사
①혼인성사의 집행자
혼 인성사의 집행자는 혼인 당사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혼을 금지하시므로 교회는 혼인 과정을 조심해서 감독하고자 한다. 보통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와 두 증인 앞에서만 유효하게 혼인할 수 있다. 혼인식을 주례하는 사제는 "신랑 신부의 동의를 묻고 그 답을 받아야 한다"(전례헌장 77). 그가 주교이거나 본당신부이거나 대리자이더라도 그 부부가 혼인할 자유가 있고, 혼인성사의 중요성과 존엄성을 알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 혼인의 목적과 의미를 알면서 진정한 혼인계약을 맺으려는 것인지 보살필 의무를 갖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혼인성사를 받기 전 일정한 교육(예: 가나혼인강좌)을 받도록 하고 있다.

②혼인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
혼인은 불가해소적 사랑의 계약이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원한 사랑을 상기시키는 거룩한 표징이다. 그 계약처럼 혼례를 마친 혼인성사의 효력은 절대로 풀리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창 세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듯 하느님께서는 '이혼'을 인정하시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분명하게 '이혼'을 엄금(마태 19,4-6; 루가 16,18)하시면서 그것이 창조주의 본래의 뜻이라고 명시하셨다(마태 24,35). 사도 바울로 역시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1고린 7,10-11. 39; 로마 7,2-3).
어떤 경우에 하느님은 사회관습법에 의한 혼인을 해소하는 것을, 다시 말하면 영세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맺은 혼인의 해소를 허락하신다. 비신자 부부 중에 하나가 신자가 된 경우에, 비신자가 신자와 평화롭게 살기를 거부하면 교회는 그 신자의 재혼을 허락한다. 교회는 성 바울로의 말씀(1고린 7,12-16)을 그렇게 이해하여 왔다. 이 권리를 '바울로 특전'이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간의 혼인성사이었고, 참된 혼인합의와 혼인성사를 받았으면, 한 배우자의 죽음으로가 아니고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교회는 굳게 선언하고 가르친다.

4. 혼인의 특수문제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또 신자들도 교회 밖에서 재혼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이혼과 재혼을 허락할 수는 없다. 혼인 계약의 지속적 힘을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남편, 아내, 자녀의 선익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나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교회는 부부가 공동생활을 피하여 별거하는 것을 허락한다.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는 부부가 계속 동거하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일 수 있다.

고해성사(告解聖事)

고해성사(告解聖事)
고해성사란 무엇인가?
고해성사란 하느님과 이웃을 거슬러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에게 그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고해성사의 효과는 무엇인가?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벌을 면제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또한 내 이웃과도 화해한다.

1. 고해성사의 제정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이렇게 해서 고해성사가 제정되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도와 그들의 후계자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안에 고해성사를 제정하셨다. 영세 이후 죄에 떨어지는 신자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총을 회복할 수 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는 죄를 사하는 이 권한을 행사하였다. 교회가 이 권한을 이행하는 예식인 고해성사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속적으로 죄를 사하신다는 믿음은 언제나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었다.

2. 고해성사의 형식

트렌트 공의회는 성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죄권을 지적하면서, 재판 형식의 고해성사를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더 나아가 사제는 '판사'처럼 행동하면서 죄를 사한다고 트렌트 공의회와 현대 교회는 가르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죄권을 주시고, 사도들에게도 지상에서 푸는 권한을 주셨을 때에(마태 18,18), 인간의 사법심리 절차를 하느님의 정의의 표징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사도들로 하여금 그 이후에도 사죄권을 갖게 하셨다(마태 19,28).

범인인 죄인은 자신을 고소하고, 주님의 대리자 앞에서 유죄를 인정하고, 통회하며 주님께 다가간다. 고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고해을 듣는 사제는 고해자의 마음 개방, 통회,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에 따라 죄를 용서해준다. 사제가 고해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이다. 그래서 사제에게 한 말은 절대 비밀의 의무로 보호받는다. 그 표지를 통하여 행동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다.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다"(로마 14,10).

3. 고해성사를 위한 세 가지 요구 조건

죄는 하느님과 맺은 우정,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 자매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맺고 있는 친교를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고해성사는 바로 이러한 죄로 인한 파괴, 분열을 복구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그리고 내 이웃과 다시 화해시키는 성사이다. 그러기에 고해성사를 '화해의 성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죄는 자동적으로 용서되지 않는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안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죄를 완전히 용서받자면 성사의 세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참회, 고백, 보속이다.

(1) 참회(또는 통회·痛悔)
제 일 중요한 것은 참회이다. 하느님을 침해하였음에 대한 진정한 아픔이 따라야 한다. 참회는 사랑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고, 죄를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고, 또한 하느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통회이어야 한다. 통회는 신앙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며, 인간 행동의 어떤 나쁜 결과에 대한 후회에 기초한 단순한 인간적 후회이어서는 안된다. 하느님 외에 아무것도 더 중요시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우정을 끊는 모든 대죄에 대하여 슬퍼해야 한다.

(2) 고백
하느님의 법에 의하면 조심스러운 양심성찰을 해서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대죄뿐 아니라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도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영세 이전에 범한 죄를 고백할 필요는 없다. 또한 한 번 고백하여 사죄를 받은 대죄를 다시 고백할 필요는 없다.

(3) 보속
교 회는 죄에 대한 '현세적 벌'이 있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고해자가 자기 죄에 대하여 보상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고해자는 사제가 요청하는 '보속'을 함으로써 자기 죄에 대한 약간의 보상을 하여서 고해행위를 완수해야 한다. 보속이란 사제가 고해자에게 주는 실천행위를 채우는 것으로 자신의 죄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나 물질적인 손해를 진정으로 기워 갚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보속행위는 실제로 죄에 대한 치료약이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약으로써 생활개선을 위한 도움이 된다.

4. 완전한 참회(상등통회·上等痛悔)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이 참회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 위에 사랑하기로 한 하느님을 아프게 하였기 때문에 슬퍼하는 참회라야 '완전한 참회'라고 할 수 있다. 참회가 신앙의 다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즉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처벌이 무서워서만 통회한다면 그 참회는 '불완전한' 것(하등통회·下等痛悔)이다.

중죄에 떨어졌던 사람이라도 완전한 참회를 하면 즉시 하느님과의 친교를 다시 맺게 된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에서가 아니면 대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신앙의 가족과의 관계를 파괴했던 사람은 성체를 영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을 중대한 의무를 가진다.

5. 고해성사의 대상이 되는 죄

모든 죄가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므로 큰 죄(대죄), 작은 죄(소죄)로 나누어 어떤 죄가 고해성사의 대상이 된다고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거스르는 죄는 전부 고해성사의 대상이 된다. 주관적으로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무겁게 느껴지는 죄 또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사소한 죄에 대해서까지 병적으로 고해성사를 볼 필요는 없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화해이지, 하느님의 벌을 피하는데 있지 않으며, 하느님은 우리에게 벌을 주려고 기다리는 판사가 아니시라 우리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루가 15,11-32)에서 처럼 착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또 미사 때 우리는 참회예절을 하는데, 이로써 우리의 사소한 죄는 전부 사해진다.

6. 대사(大赦)

약점을 가진 우리를 돕기 위해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대사는 이미 용서받은 죄에 해당하는 현세적 벌의 전부나(전대사·全大赦) 부분의(한대사·限大赦) 면제를 말한다. 대사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한의 힘으로 죄의 용서를 이미 받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 일부를 나누어주며, 죄에 해당하는 현세적 벌의 양을 제거하거나 경감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교회가 대사에 부과하는 선행을 해야 한다.

7. 고해성사의 효과

고해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죄인은 치료의 은총을 받아 회복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며, 잃었던 아들과 같이 성부의 환영을 받는다(루가 15,20-24). 동시에 죄인은 공동체 안에 돌아와 공동체의 성찬 식탁(영성체)에 다시 참석한다. 고해성사는 실제로 세례의 거룩한 상태를 회복하거나 갱신한다. 세례의 거룩한 상태를 잃으면 고해성사로써 회복할 수 있다. 대죄를 범한 신자에게는 고해성사를 받고 죄의 용서를 청할 의무가 있다. 죄의 용서는 가능한 한 속히 청해야 한다. 교회법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받으라고 요구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죄를 지은 이들은 그때마다 가장 빠른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조심스럽게 자주 받는 것은 소죄의 치료에도 매우 유익하다.

잦은 고해성사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열심한 이에게는 고해가 깊은 회개를 하는 방법이고, 성령 안에 키워지는 방법이 된다. 이런 정신으로 교회는 규칙적이고 잦은 고해를 권장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성사를 병적으로 자주 보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8. 어린이 고해성사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에는 부모와 대부모가 유아를 대신한다. 그러나 지능이 발달하면, 어린이들은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유아세례를 실현하고 재생시킬 수 있다. 어린이 고해성사는 너무 오래 지연되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의 논리적 사고가 성숙함에 따라 도덕적 양심에 비추어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능력도 수련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첫영성체를 하기 전에 첫 고해를 해야 한다. 고해와 영성체에 적절한 연령은 어린이가 추리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즉 만 9세쯤이다. 그 시기부터 고해와 영성체에 관한 법규를 지킬 의무가 시작된다.

9. 고해성사의 공동체성

초대교회에서 어떤 중죄를 범한 죄인은 파문되고, 공개적 보속행위를 해야 하였으며, 성목요일에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의 지체이므로 한 지체의 병은 몸 전체에 고통을 일으킨다. 적어도 개인의 실패는 몸 전체의 성장을 방해하고 활동력을 제한한다(1고린 12,26).

자신만을 직접 해치는 죄악도 공동체의 조화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할 때 그는 타인을 침해하고, 그 사람과 가족에게 손해를 끼친다. 또한 그는 공동체 전체의 개방성과 상호 신뢰에 금이 가게 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생명의 맥박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널리 퍼진 사회 부조리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사람이 어둡고 엄청난 부조리와 관련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양심성찰을 할 때에 자기의 사회적 책임과 죄악의 사회적 결과를 성찰해야 한다.

10. 고해성사 예식의 종류

고해성사는 공동예식과 개인적 예식 두 가지 방법으로 집행될 수 있다. 공동예식도 성사의 중요한 개인 요소는 보존되어야 한다. 각 고해자는 자기의 죄를 개별적으로 고해하고 개별 사죄를 받는다. 그리고 개인적 예식도 교회의 모든 전례행위가 그러하듯 공식적 요소를 갖는다. 고해성사는 보통으로 공식적으로 인가한 장소에서 집행되고, 중죄를 범한 사람은 사죄를 받을 때까지 성찬 식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영성체 할 수 없다).

공동고해는 고해의 교회적 성격을 더 명백히 드러낸다. 공동고해는 죄의 사회적 측면을 인정하며, 죄인이 하느님께 돌아오면 공동체와도 화해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동고해의 독서, 성가와 기도는 참석자들을 통회시키면서 하느님의 가족으로 묶어 주고, 각 고해자가 개인적 회개와 새로운 결심을 깊이 하도록 돕는다. 개인고해에도 일정한 이점이 있다. 개인고해는 융통성이 많으며, 성사 집행이나 영성적, 사목적 지도를 병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수한 이유 때문에 개별적으로 죄를 고해할 수 없을 때에는 공동 사죄경으로써 성사적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지방주교가 규정한 중대한 요구가 있을 때에만 공동사죄를 줄 수 있다. 공동사죄를 받은 이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동사죄를 재차 받기 전에 개인고해를 해야 한다. 개별적 고해와 개별사죄만이 신자들이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정상적인 길이다.

11. 고해성사 예식

(1)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기 전
①조용히 자신이 지은 죄를 알아 냄(양심성찰)
②지은 죄를 뉘우침(참회)
③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함
④고해소에 들어감

(2) 고해성사를 보는 방법(○는 고해자, †는 사제)
○(사제 앞에서 십자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당신이 범한
죄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십시오. ○아멘
○(고해성사 본 지가 언제인지를 말한다)
고해성사 본 지 (몇달, 몇주일) 됩니다.
(알아낸 죄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죄의 고백이 끝난 후 사제는 훈계와 보속을 준다)
○(보속을 받은 후 통회의 기도를 한다)
내 하느님, 나의 범죄로 만유 위에 사랑받으셔야 할 당신의 마음을 상해드렸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나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 진심으로 통회하나이다. 또한 당신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범죄의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결심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공로를 보시고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사제는 고해자 머리 위에 손을 펴들고 사죄경을 외운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아멘.
†야훼님 좋으시니 찬미합시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도다.
†주께서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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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聖體聖事)

성체성사(聖體聖事)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세우셨는가?
그리스도는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의 제사를 계속하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가운데 당신의 구원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당신 자신이 우리와 일치하는 가운데 우리끼리도 서로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1. 교회 생활의 중심인 성체성사

성체성사는 무엇인가?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으뜸되는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재현을 뜻하기도 하고(제사로서의 미사), 영적 생명으로 우리에게 넘겨 주신 당신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다. 성체는 단순히 상징이나 예식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의 구속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성사이다. 바로 이 이유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고 절정이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시고, 성체는 교회 안에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므로, 성체성사는 교회의 모든 직무와 사도직의 "원천이고 절정"(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과 노동과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하도록 불리우고 인도된다"(직무 5).

2. 성체성사와 구약의 파스카잔치

구약성서에 나타난 많은 제사에서 거룩한 잔치가 예배의 한 요소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노아(창세 8,20)와 아브라함(창세 15,9)의 경우에도 음식을 바치는 제사 가운데 하느님과의 계약이 맺어진다. 그 후 그들의 후손들이 이 계약 준수를 거절해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출애굽(이스라엘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을 통하여 구약에서 가장 큰 계약을 시나이산에서 맺으셨는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잔치(음식을 나눔)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출애 12,3-5.11-14.17).

이렇게 식사는 해방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에집트에서 탈출하기 전 가족 단위로 음식을 나누었던 사건이 출애굽 사건 전체를 드러내 주는 상징으로 여겨져, 하나의 예식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파스카 잔치라고 한다.
에집트로부터의 구원사건 전체가, 파스카 양과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파스카 잔치 예식을 통하여 계속 기념되었다. 이 잔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최후만찬 때 이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최후의 만찬: 성체성사를 세우심

예수께서는 언제 성체성사를 세우셨는가?
사 람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최후만찬을 하시던 중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로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계속 행할 것을 명하셨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기 전에 베푸신 최후만찬 때에 주님은 새로운 기념 제사를 세우셨다. 먼저 예수님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셨다. 이 거룩한 밤에 예수님은 다가올 새 선물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과거의 보배는 새 선물의 그림자나 모형에 불과했다고 하셨다. 그분은 새 계약의 규정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저녁식사 도중에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다가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그분은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끝으로 그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명령하셨다.

파스카 잔치와 마찬가지로 새 계약을 이루는 이 기념 제사(미사)도 제사인 동시에 거룩한 식사이다. 십자가의 제사를 피흘림 없이 재현하고, 그 제사의 구속 은총을 적용하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이 희생으로 바쳐진다.

4. 초대교회의 성찬례(미사)

초대 교회생활을 기록하던 당시의 교회저자들은 성찬예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니, 성찬이 공동체의 기본적 행사였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장 잘 표시하고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성 루가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던"(사도 2,42) 예루살렘의 새로운 신자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 신자들은 보통 이웃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서 행하던 성서 중심의 예식에 참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여 서로의 집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복음과 새로운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사도 2,43-47).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성서 독서의 계획표와 기도문을 작성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기념제사 식사와 합류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성찬 예식의 병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지내는 성찬예식에도 계속 남아 있다.

5. 미사(성찬례)

미사(성찬례)란 무엇인가?
미 사는 십자가 위에서 바칠 제사를,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식사의 형태를 빌어 행하신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니, 이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구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당신 몸과 피로 영적 음식을 취한다.

미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특히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를 성사적으로 거행한 최후만찬의 재현이다. 따라서 미사는 십자가 제사이자 파스카 잔치이다.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만 봉헌된 피흘린 제사가 재현되고, 그것의 기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보존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이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악을 용서한다.

십자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에서도 예수님이 성부께 끝없이 무한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주례 사제이며 제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사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과 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교회는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합쳐서 봉헌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제와 제물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1) 미사의 구조
미사는 크게『말씀전례』와『성찬전례』로 나눌 수 있다. 미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시작예식(始作禮式)
사제가 제대 앞으로 나옴
- 입당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그날 미사의 주제가 드러남)
②말씀전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
- 제1독서(보통 구약에서 뽑으며, 그날 복음과 관계되는 구절)
- 화답송(성서의 시편으로서, 방금 들은 말씀에 대해 감사, 찬미드림)
- 제2독서(복음을 제외한 신약에서 뽑음)
-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라는 뜻으로,
복음을 듣기 전에 백성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환호임)
- 복음 - 강론 - 신앙고백 - 보편지향기도
③성찬전례
주님의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십자가 제사를 기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서 봉헌노래를 부르고 미사예물(헌금)
을 바침
- 예물기도 - 감사송 - 거룩하시도다 - 감사기도 - 주의기도
- 평화 예식 - 빵 나눔 - 하느님의 어린 양 - 영성체 전 기도 - 영성체 - 감사침묵기도 - 영성체 후 기도
④마침 예식
파견
- 강복 - 파견

(2) 제의(祭衣)의 색(色)
미사 중에 사용되는 색은 5가지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흰 색 무죄함과 환희, 부활의 상징으로서 순교하지 않은 성인들, 성모, 천사 축일과 부활, 성탄시기에 사용.
붉은색: 피(순교)와 사랑을 상징하며, 성령, 순교자 축일에 사용.
녹 색: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상징하며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가 아닌 연중시기에 사용.
보라색: 참회와 겸손의 표시로서, 대림시기, 사순시기에 사용.
검은색: 죽음을 상징하며 장례미사 때 사용.
이밖에 흰색 대신 노란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에 참회 가운데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 장미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6. 미사지향과 미사예물

사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 백성의 여러 가지 요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성부께 미사를 봉헌한다. 하느님만이 이 완전한 숭배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느님에게만 봉헌된다.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인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지내는 것이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특별 지향,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 어떤 영신적인 또는 현세적 필요,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 등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한다. 이런 청을 할 때에 보통으로 금전적 기부를 한다. 이 미사예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미사성제에 좀더 깊이 참여하고자 한다는 원의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미사예물의 봉헌자는 미사성제에 자신의 제물을 첨부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돕는다. 결국 미사예물을 빌미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신앙 자세라 할 것이다.

7. 교무금과 주일미사예물(헌금)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번 돈의 일부(원래는 십분의 일을 바쳤다)를 교회에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돕고 사제의 생활을 위해 돈을 희사하게 된다. 교무금(敎務金)은 각 신자가 교회(일반적으로 본당 신부)와 협의하여 매달 얼마씩 내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며, 이외에도 매번 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감사헌금이나 교회의 특별 활동(예: 성전 신축기금)을 위한 헌금을 한다.

이 모든 헌금 행위는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모든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8. 미사의 집전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셨다. 미사를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품성사를 통하여 부르시고 날인하여 당신의 대리자로 행동하도록 권한을 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도에 따라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교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축성의 말을 할 때에 신약의 제사가 재현되어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자들도 자신들의 "왕다운 사제직"(1베드 2,9)의 힘으로 봉헌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함으로써 또한 "사제의 손을 빌어서 제물을 봉헌할 뿐 아니라 그 제물을 사제와 함께 봉헌하며, 자기 자신도 제물로 봉헌하면서"(미사경본2, 서론 62), 신비체의 지체로서의 직책을 완전히 이행함으로써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다.

9. 영성체(領聖體)

성체와 성혈은 무엇인가?
성 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는 미사 중에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니라"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을 받아들여 성체와 성혈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고백한다.

성체성사(성체와 성혈)를 받는 것을 영성체라고 한다. 영성체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들과도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먹으면서, 말씀전례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대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보통 경우에는 하루 한 번만 영성체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한다. 성체만 영하거나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시게 된다. 그리스도는 성체와 성혈 모두에 온전하게 현존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영성체를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에 관한 하느님의 법은 없다. 교회는 신자들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사순절 시작과 부활시기의 끝 사이에 영성체 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히 성체를 자주 받아 영하여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깊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주 혹은 매일이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교회헌장 42).

10. 영성체 준비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받자면, 영세한 가톨릭 신자로서 은총 지위에 있고 성체에 관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대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영성체 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를 범한 사람이, 영성체를 해야 할 긴급한 사정이 있으나 고해성사를 볼 기회가 없으면 영성체 전에 완전한 통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후에 기회가 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영성체를 합당하게 할 중대한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고린 11,27-29).

우리가 영성체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음식과 술을 먹지 말 것을 교회는 명한다. 이 공복재(空腹齋)는 성체로써 우리가 받는 그분에 대한 외적인 존경의 공동표시이고 참회하는 준비이다. 환자와 노인에게는 15분의 공복재로 넉넉하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복재가 필요없다. 또, 물을 마시거나 약을 먹는 것은 허용된다.

11. 영적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가장 자명한 표징은 음식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파스카 잔치에서 사용되던 음식은 구약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식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후만찬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순수성과 새로움의 상징이라고 보았다(1고린 5,6-8).

포도주가 사용되는 미사에는 음식의 상징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최후만찬 때에 먹고 마시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음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과 잘 맞는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35.55).

12. 일치의 성사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가 그 자체로 일치의 상징이다. 많은 밀알이 모여서 빵을 이루고, 많은 포도알이 모여서 포도주를 이루듯이 하느님의 가족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 공동체가 빵을 나누어 먹는 그 자체가 일치를 상징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단일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사랑이 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를 이룩한다.

영성체가 강조하는 일치는 우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인 것이다(요한 15,4).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 함께 뭉치고 사랑의 활동을 통해서 서로를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성체성사가 세 번째로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천상 유산이다. 성찬예식 전체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옥좌 주위에 모여서 하느님 자신을 영원한 보상으로 받을 것이다.

미사참례는 우리를 지상의 살아 있는 교회와 일치시킬 뿐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신앙으로 표시되어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도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를 봉헌하며, 모든 성인들과 결합함으로써 천상의 예배하는 교회에 매우 밀접히 일치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13.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성체 안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 아래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교회의 신앙은 요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요한 6,22-71).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8.51).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믿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불신자들이 떠나갔어도 예수님은 당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당신 말씀에 대한 불신자들의 이해를 바꾸려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놓고, 당신은 실제로 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성체 안의 경이스러운 현존 양식은 독특하다. 교회가 믿고 기도하고, 자선사업과 신앙의 활동을 할 때에,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성사를 집행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의 현존은 참된 현존이라고 묘사될 만큼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사제가 예물을 들고 봉헌의 말을 했을 때 빵과 포도주는 없어지고, 그때부터 우리 앞에 놓여있는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인 것이다. 예수님은 영성적으로 당신의 지식, 관심, 활동으로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전체적으로, 하느님이며 사람으로서, 실제적으로 또 영구히 현존하신다. 봉헌 후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이 남아 있는 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계속 현존하신다.

14. 성체 신심

교회의 초기에 성체를 보존하던 중요 이유는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님의 성체를 존경스럽게 모셔가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성체에 대한 신심은 깊고 넓혀져 갔다.

성체성사가 있는 곳마다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래서 이 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어디서나 예배드려야 한다. 성체에 대한 예배는 무릎을 꿇거나 절하기, 성체조배 등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가지 신심 행위로써 표현된다. 13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성인들의 힘으로 성체 대축일이 제정되었다. 가끔 성체를 보통으로 모셔두는 감실에서 제대 위로 모셔 내놓고 조배하는 방법(성체현시)도 있다.

성품성사(聖品聖事)

성품성사(聖品聖事)
성품성사란 무엇인가?
성품성사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교회 안에 주교, 신부, 부제를 세우는 성사로서, 이 성사를 통하여 이들 성직자들에게 필요한 은혜가 베풀어진다.

그리스도는 왜 성품성사를 세우셨는가?
그리스도는 성직자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고, 거룩한 제사(미사)를 바치며, 하느님의 백성을 지도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그의 구속사업이 계속되도록 성품성사를 세우셨다.

1. 성품성사의 기원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최초의 성목요일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시오"라고 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성품을 주셨다. 성품성사는 그리스도의 의도와 최초의 성목요일에 하신 예수님의 분명한 행동과 말씀에 그 기원을 둔다.

성품성사와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파스카 성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바치셨다. 그런데 성체는 그 제사를 계속적으로 재현한다. 사제직은 하느님의 이 사업에 인간이 특별히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사제직은 볼 수 있고 외적인 사제직이다. 우리 구세주 주님이 이것을 제정하셨고, 당신 몸과 피를 축성하여 봉헌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에게 주셨다고 성서가 보여 주며, 가톨릭 교회의 전통도 항상 가르쳐 왔다.

2. 사제직(司祭職)

사제로 성품되는 사람은 세상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표징이 된다. 사제는 그리스도와 긴밀히 일치하므로 사제직은 그의 실존의 영구적 부분이 된다. 사제직은 하느님의 물릴 수 없는 선물이다.

성품성사를 받을 때에 사제는 "새로이 하느님께 축성되었고" 그들은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산 연장이 되어, 천상 효력으로써 온 인류사회를 재건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업을, 세기를 통하여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제직은 기름발리움으로써 특별한 영적 인호가 새겨지고, 이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 행동할 수 있도록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제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사시고 행동하신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영속시키는 유일한 힘을 형성할 때에 표현된다(교회헌장 10). 사도들의 본질적 활동은 복음의 선포, 공동체의 구성과 지도, 죄의 용서, 병자의 도유, 성체성사의 거행, 인류를 구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의 연장 등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사제직에 성품된 사람들은, 성화하고 가르치고 다스린다. 사제의 모든 존재와 활동의 원천은 그리스도이시다. 사제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제생활과 활동을 현세에서 계속 실현한다.

3. 항구한 사제직

사제직의 축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번 사제로 성품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사제이다. 한 사제가 어떤 이유로든 직무 행사에서 면제되거나 해임되어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에의 이러한 특별 참여관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제직의 영구성은 사제가 성품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양식에서 나온다.

그래서 성품성사는 '종말론적 표징',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가 올 것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사제가 자신을 자유로이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고 사제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활동할 힘을 얻고, 그리스도의 최상 권한에서 나오는 필요한 권한을 받는다.

4. 보편사제직과 직무사제직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신적 생명과 사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보편사제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품성사는 사제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명에 독특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한다. 성품은 성품받은 이를 그리스도의 진정하고 권위있는 특별한 대리자로 만든다. 최후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직분상의 사제직을 별개의 성사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성품받은 이의 사제직은 신자의 보편사제직과 다르며 구분된다.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교, 사제, 부제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활동에 특수한 양식으로 참여하도록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5. 교회의 직무

신약성서에 여러가지 직무가 나오지만 정확하게 그 기능과 직명이 전부 규정되지는 않았다. 디모테오서, 디도서와 베드로 일서가 쓰여질 때에는 어떤 직분의 기능은 좀더 분명히 구분된다. 여기서 오늘날 성품성사의 핵심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주교의 안수는 한 사람을 사제로 날인한다는 핵심이 신약성서에 나온다.

오늘날 교회에는 성품성사가 세 가지 교계적 계층 혹은 품으로 나타나는데 주교품, 성품, 부제품이다. 이러한 직분은 초기교회에서도 구분되고, 교회의 초대교부들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주교(지도자), 사제(원로)와 부제에 대한 언급(필립 1,1)이 자주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의 지도자를 선정하시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지도하고 성화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신약성서는 확실히 말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동반자며 교회의 기초로서 그들이 갖는 역할 이행을 위한 특정한 은혜와 의무를 받았다.

사도들이 자기들의 일을 계승하기 위하여 선정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친히 확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조자와 후계자를 선정하였으며, 이들도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안수하였다.

(1) 주교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그리스도의 의향대로 주교들은 사도들이 처음에 하던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도직 계승은 실제로 주교들에게 이루어졌다. 주교들의 사명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 교는 성품되어 지방교회의 구심점이 되고 일치의 원천이 된다. 그 일치는 특히 주교들이 사제와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성체의 제사를 드릴 때에 나타난다. 주교는 다른 주교한테서만 성품되며(교회헌장 21), 교회의 거룩한 오랜 숭엄한 전통은 주교만이 성품과 부제품을 주도록 제한한다. 주교는 견진성사의 통상 집행자이기도 하며, 지방교회의 공동체에서 일치의 원천이며 표징으로서, 예배에 있어 지도자이고, 공식적이고 전통적 전례자이며, 교구의 으뜸가는 교사이다.

(2) 사제(신부)
사제는 주교들과 더불어 성품성사에 참여한다. 사제는 주교를 도와 교구의 일정 지역을 담당하여 복음을 전하고 신도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사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고해성사로써 죄를 사한다. 사제의 다른 기능은 설교, 교회를 위한 기도, 병자의 도유 외에 다른 성사를 집행하여 세례로써 사람들 안에 시작된 신적 생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비록 대사제직의 결정인 주교품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권한 행사에 있어서 주교에게 매여 있지만 사제로서의 영예만은 주교와 함께 지니고 있다(교회헌장 28). 통칭 신부(神父)라고 불리는 이들은 재속사제(교구에 소속된 사제)와 수도사제(수도회에 소속된 사제)로 나뉜다.

(3) 부제
주교직이나 사제직과 마찬가지로 부제직도 성품성사의 일부이며 하느님이 제정하신 것이어서, 교회 안에 영구적 자리를 차지한다(필립 1,1).
부 제라는 직명은 '봉사'라고 하는 희랍어에서 나온 것으로 사도행전 6,1-4에서 보듯이 봉사하기 위한 직책이다. 부제는 교회에 봉사하며 이미 사도시대에 부제직의 임무가 크다고 인정되었다. 부제는 전례행사를 돕는다. 즉 부제는 성체를 분배하고 세례를 주며, 복음을 선포하고 설교한다. 부제는 신앙의 증인이며 옹호자이다.
초대교회에서 부제직은 공동체 안에 중요성을 갖는 영구직이었다. 그러다가 서방교회에서는 부제직은 잠시 동안만 행사되는 품이 되었으며, 곧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채우는 직책이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구 부제직을 복구시켰다. 유럽과 미국, 남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위시한 여러 나라에서 종신 부제직을 받아들였는데, 이들 종신부제들은 사회 안에서 일반 직장을 가지고 혼인도 하면서 교회의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주교들의 협의에 달려 있다.

6. 여성 사제직

교회 내에서 여성의 봉사는 초기에서부터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를 풍족케 하였다. 그러나 여성이 교회에서 사제나 주교로 성품된 적은 한번도 없다. 마리아도 교회 안에서 다른 어느 사람보다 더욱 큰 역할을 하였지만 아무런 사제 직무에 불리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당대의 사회적 압력에 대항하여,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 앞에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다고 강력하게 선포하였으면서도 여자를 사제직에 부르지는 않았다.

물론 남자나 여자나 아무 신자도 성품성사에 대한 권리는 갖지 않는다. 성품성사가 영성적 성장이나 개인적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품성사는 교회내에서 그리스도의 뜻에 맞추어 신앙 가족의 선익을 위하여 좋다고 판단하는 사람에게만 준다.
여성에 대해 사제직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법에 의해서라기 보다 관습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7. 사제적 소명의 표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사제직에 들어간다. 한 청년이 건강하고 상당한 지능과 사제직에 요구되는 성격을 가졌고, 또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제적 활동을 하려는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성소의 '표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명의 여부를 확인하는 임무는 교회에 있으며, 그 선정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품할 책임도 교회에 있다. 선택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다(요한 15,16).

성품성사는 교회 내의 한 특정 지위를 정해 주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다. 그것은 성사이며, 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권한을 준 것뿐 아니라 그런 권한을 거룩하게 행사하게 하는 은총도 주는 성사이다. 성품성사는 직무에 대한 특별 은총을 준다.

8. 사제의 독신제

교회의 초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일편단심으로 생명과 마음을 바치기 위하여 독신생활을 하는 사제가 있었다(1고린 7,32-35). 독신생활은 사제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욱 비슷하게 한다. 성 바울로는 독신생활이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데에 많은 자유를 주고, 그분께만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게 한다고 지적하였다(1고린 7,32-35).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설교하는 사제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크나큰 개인적 희생을 하며 일생을 살도록 교회는 원하고 있다. 사제의 독신생활은 종말론적 표지, 영생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사제생활을 강요받지 않기 때문에 사제의 독신생활 규정은 결코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독신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사제직에 응답한다. 독신생활 규정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완화할 권한이 교회에 있다. 그러나 교회의 경험과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사제들이 생활화하는 이 특은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매우 좋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제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사제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하여 불림을 받았는지에 관한 사색과 묵상이 사제의 일상생활의 일부이어야 한다. 사제는 깊은 영성적 확신과 기도와 희생의 정신이 없이 자기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

9. 사제의 권위: 봉사를 위한 권위

사제의 권위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 선익과 일치를 지향하는 교회의 목적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행사하여야 한다. 첫 번째 권위의 행사는 사제가 하느님의 말씀을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신자들에게 권위있게 해석하기를 요구한다. 두 번째 권위의 행사는 사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부여한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사명과 관련된다(요한 17,11). 결국 사제가 갖는 권위란,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한 권위이며 사제 자신을 위한 권위가 아닌 것이다.

10. 사제와 사회정의 문제

사제 본연의 사명은 정치, 경제나 사회적 질서의 사명이 아니라 종교적 질서의 사명이다(사목헌장 42). 그러나 사제는 자기 직무를 이행하면서 특히 인간의 불의와 억압의 문제가 아주 심한 지방에서, 좀더 의로운 사회질서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사제가 사회, 정치적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 한다거나 거기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면, 이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하고 실현하여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제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 할 것이다.

사제는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정의가 필요하며, 이러한 정의를 해치는 불의를 고발하고 제거할 임무를 사제는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제가 직접 정치, 경제 문제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개선책도 제시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제는 자신의 신분에서 이탈하지 않고도 사회를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정의에 투신하는 경우에도 사제는 항상 교회적 일치를 유지하며, 복음과 부합하지 않는 말이나 폭력을 배척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며, 새로운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견진성사(堅振聖事)

견진성사(堅振聖事)
견진성사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견진성사로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세상에 증거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된다.

견진성사 때 주교가 견진자의 이마에 바르는 기름(크리스마 라고도 불림)은 무엇을 뜻하는가?
구약시대에 예언자, 왕, 사제에게 기름을 부어 세운 전통에 따라, 성령의 상징인 기름을 받는 견진자는 이제 하느님의 예언자, 왕, 사제가 되어 세상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드러내고 전하는 자가됨을 뜻한다.

1. 견진성사의 기원

성체, 세례, 고해성사에 관한 뚜렷한 가르침은 복음에 있으나 견진성사에 관한 가르침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견진성사에 관한 말, 즉 기름 바르는 예식에 관한 말이 나온 때는 그리스도는 이미 승천하신 후였다.

2. 견진성사 기름(크리스마)의 뜻

원래 견진성사 때 사용되는 올리브 기름은 대개 고대세계에서처럼 팔레스티나에서도 값진 물품이었다. 용도가 다양한 만큼 의미도 풍부하였다. 아론은 도유(塗油)를 받아 대사제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그랬다(레위 8,12.30). 후에 사무엘은 사울을 도유하여 왕으로 세웠고, 다윗에게도 그랬다(1사무 10,1;16,13).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도유받음으로 성령을 받고, 비범한 결과를 내었다. 즉 사울은 예언하게 되고, 주의 성령은 다윗에게 급히 다가갔다. 이렇게 해서 기름은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보내진 은총의 참여이며, 성령의 오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3. 성령의 성사로서의 견진성사

견진성사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안수와 크리스마 성유(聖油)를 바름으로써 성령강림 일에 받은 성령의 은총을 전교회와 모든 회원들에게 전달하는 성사이다. 견진은 전세계로 향하고, 교회 안에서 영구히 재현되는 성령강림이다. 견진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부르심이다.

4. 견진성사 집전자

견진성사로써 완전히 교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까닭에, 한 지방교회의 우두머리인 주교가 견진성사를 베푸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에 의해 교회가 위임하면 어느 사제든지 견진성사를 집행할 권한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통상적으로 주교만 성사를 집행하도록 하고 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후에 안수(按手)를 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성령을 주었다. 이렇게 주교의 집전을 통해서 성령을 받을 때에는 견진자를 교회와 또한 사람 속에서 증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결합시키는 깊은 유대가 드러난다"(견진성사예식서 7).

5. 세례와 견진

교회 초기에는 세례 직후에 견진성사가 집행되었다. 세례는 재생이고 새로운 창조이지만, 성령으로써 완성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아직도 지도, 격려, 용기, 성장을 더 필요로 한다. 교황 바울로 6세는 "신자들은 세례성사로써 재생하고, 견진성사로써 강화되며, 성체 안의 영생의 음식으로써 유지된다"고 가르쳤다.

어른이 세례를 받는 경우, 세례 집전 사제가 즉시 견진을 베푸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교회의에서 사목적 이유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주교가 견진성사를 베풀도록 규정한 까닭에 어른 세례자라 할지라도 다시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교육을 받은 후에 주교로부터 견진을 받는다.

라틴 예식에 속하는 견진성사 예식서는 어린이들에 관해서 "견진성사의 집행이 보통으로 만 7세까지 지연되지만, 사목적인 이유에서 좀더 성숙한 연령에까지 지연되는 것을 허락한다"(견진성사예식서 11)고 하였다. 많은 곳에서는 사춘기 초기까지 견진성사를 연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교적 생활 전체가 재출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어른 단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본다면(에페 4,13), 견진성사가 사춘기에나 더 늦게 집행되어도 아직도 입교의 성사로 보는 데에 큰 지장이 없다.

6. 성장의 성사

견진성사는 성장을 의미하며, 견진자가 성장하도록 요구하는 계속적 도전이다. 이 성장을 위해서도 생명이 요구되며, 견진자는 은총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견진은 순간적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고, 또 즉각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다. 견진은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주어지고, 영구적 결과를 내는 성사 중의 하나로서 영구적 인호를 준다.

7. 견진성사의 효과

견진성사는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 안에 성령강림을 영구화하는 성사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이며, 그것을 받는 사람은 "성령이 계신 성전"(1고린 6,19)이 된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성장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고 하셨다. 견진으로써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여 옹호할,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교회헌장 11). 현세에서의 사도적 임무를 위한 평신도의 소명과,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평신도의 역할이 견진성사와 관련된다.

8. 견진성사 효과의 근원

견진성사는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인 파스카 신비에서 효력을 받는다. "보통으로 미사 중에 견진성사가 집행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견진성사예식서 13). 견진성사가 미사와 떨어져서 집행되어도, 그것의 원천은 역시 파스카 신비이다. 크리스마 성유(성 목요일에 주교가 축성한, 견진성사 때 사용되는 기름)도 견진자가 이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이 받은 도유를 상기시킨다(마르 1,11).

세례성사(洗禮聖事)

세례성사(洗禮聖事)

세례성사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세례성사를 받으면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한 일원이 된다.

세례성사를 받는 사람은 교회 앞에서 무엇을 약속하는가?
악의 경향과 유혹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키기로 약속한다.

세례성사의 통상적 집전자는 누구인가?
주교, 사제, 부제가 통상적 집전자이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비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아무라도 세례성사를 베풀 수 있다.

세례성사의 예식은 어떠한가?
이마에 물을 부으면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는 세례경을 외운다.

1.세례성사를 주는 시기

(1) 부활성야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성탄, 부활, 성모승천 대축일(8월15일)과 그외 각 본당의 사정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세례성사를 베풀지만, 전통적으로는 부활성야, 즉 부활주일 전날 밤이 세례성사를 위한 시기이다.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약 3년간 예비신자로서 교리교육을 받은 후 사순절(부활을 준비하는 부활 전 40일간)에 집중교육을 받고 부활성야에 세례성사와 견진 및 성체성사를 받는다.
사순시기가 초대 예비신자들에게 세례 전 교육기간이었듯이 부활성야는 세례 준비, 세례 서약, 신앙 갱신 준비를 위해 가장 적당한 때이다.

부활성야 예식은 보통 성당 마당에서 행하는 빛의 예식으로 시작한다. 새 불에서 부활초에 불을 켠다. 부활 촛불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부활초를 들고 성당 안으로 행렬하는 가운데 먼저 주례자, 그 다음에 봉사자, 끝으로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이 파스카 초에서 자기 초에 불을 당긴다. 모두 구세사(救世史)의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빛의 영광 안에 기뻐하면서 부활찬송을 노래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세업적을 기록한 독서를 차례로 낭독한다.

제단 초에 불이 켜지고 대영광송이 시작되면 종이 울린다. 성서에 나오는 구세사를 요약하는 기도로써 물을 축성한다. 부활초가 물에 담구어지면 부활초가 상징하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세대(聖洗臺)는 생명을 주는 것이 된다.
세 례 서약을 선언하고 신앙고백이 이어지며 끝으로 세례를 준다. 이렇게 영세자는 하느님의 선민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사제직"(1베드 2,5)에 참여케 된다. 영세한 사람에게 세례의 순결의 표지인 흰 옷을 입히는 것으로서 예절이 끝난다. 영세자는 이로써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축하하고 신앙을 갱신하는 성체성사에 참여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2) 사순절
사순절은 극기와 신앙 갱신의 기간이므로 공동체 전체의 것이다. 사순절은 예비신자의 교육기간이지만 영세자를 위한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모든 신자는 부활성야에 세례 서약을 갱신하면서 세례의 체험을 재생하고, 세례의 이해를 깊게 할 기회를 갖는다.
모든 극기 행위는 세례가 요청하는 완전한 개종,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사랑의 충동 하에 생활 전체를 반성하고 결단하여 재정비하는 완전한 내적 쇄신의 일부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타락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힘으로 좀더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극기는 전통적으로 기도, 단식, 자선행위를 포함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대개 단식보다는 충실한 기도와, 자선활동과 연결된 극기를 강조하는 것이 적당하며, 또 필요할지 모른다. 단식과 금육재가 사순절 때에 장려되지만 특별규정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 금요일에 단식재를 지키고, 매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킨다.
단식재를 지키는 날은 금육재를 겸한다. 금육재 날은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단식재 날에는 한 끼는 정식으로 하되 두 끼의 식사 때에는 적게 먹는다. 단식재는 만 18세에서 60세까지 지킬 의무가 있고,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 까지 지켜야 한다.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신자들은 이 특별규정에서 면제되거나 관면을 청할 수 있다.

단식재와 금육재가 극기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환자, 가난한 자, 비천한 자, 죄수, 실망한 사람, 영세민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생활로 증거해야 한다. 잘 먹던 사람이 단식함으로써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희사는 분명한 사랑의 행위이다.

2. 세례성사 예식

세례는 지망자를 성세수(聖洗水)에 세 번 침수하거나, 아니면 그의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면서 집행할 수 있다. 위급한 경우 사도신경을(이것도 급하면 생략할 수도 있다) 바치고 세례경을 외우면서 세례받을 사람 위에 물을 부으면 충분하다. 물을 사용하면서 주례자는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한다. 위급할 때에 세례받은 어린이는 병이 완쾌되면 보례(보충 예식)을 받아야 한다.

각 세례 지망자는 여자의 경우는 대모(代母: 영적 어머니)를 남자의 경우는 대부(代父: 영적 아버지)를 정해야 한다. 대부모는 성숙한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며, 영세자를 영성적으로 보살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으로 어느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세례 때에 지어준다. 물과 세례경은 영세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면서 영위하도록 불리운 삼위일체의 새 생명임을 상징한다.

3. 세례의 집전자

주교, 사제, 부제는 세례의 통상 집행자이다.

4. 세례의 주요 효과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함께 묻히는 것이다"(어린이세례예식서 6). 성세수는 우리의 죄를 씻어버리고 우리를 새 생명의 길에 올려 놓는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은 용서하고 치유하는 효과를 낸다. 따라서 세례는 원죄를 사하며, 유아기가 지나서 영세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지은 개인적인 죄도 모두 사해진다.

세례 때에는 하느님의 특사(特思)로써 죄의 용서를 받는다. 원죄가 사해져도 원죄의 결과와 죄악에로의 경향은 남아 있다. 죄에로의 경향이 남아 있어 우리는 그것과 투쟁해야 하나, 이 경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그 경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노력하는 사람을 해칠 수 없다. 이 투쟁, 즉 우리 욕망과의 고통스러운 투쟁은 예수님의 죽음에 평생을 두고 참여하는 것이다.

영세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만 그분과 함께 죽는다. 세례는 우리를 교회의 성원이 되게 한다. 교회의 성원이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포도나무에 접목되어(요한 15,4-6) 그리스도의 몸에 깊이 결합되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과 함께 물로 씻는 세례는 사람들을 하느님 본성에 참여케 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준다"(어린이세례예식서 5).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이며 동시에 새로운 출생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자녀는 부모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어떤 양식이든간에 하느님의 본성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틀림없다.

베드로 일서의 대부분은 세례와 세례의 효과와 뜻에 관한 묵상이다. 성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정신과 진리에 있어 하느님의 사제가 되게 하는 세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1베드 2,9-10).

5. 어린이 세례(幼兒洗禮)

"이해도 못하고 개인적 투신도 못하는 어린이에게 왜 세례를 주는가? 부모가 어린이의 종교를 결정하여 선택의 자유를 없애거나 감소시키는 것은 부당하고 지각없는 것이 아닌가?" 교회법은 가톨릭 신자는 자녀가 출생 한 후 되도록 빨리 세례를 받게 하라고 명한다.
그리스도교의 거의 시초부터 전가족이 세례받을 때에 어린이 세례도 실시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어린이 세례의 신학적 이유를 제공하였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부모가, 특히 자기의 개종이 깊은 영성적 체험이 될 때에 그 체험에 자기 자녀들도 참여시키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자기 자녀들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자녀들의 전생활이 최후의 목표이고, 최상의 선이신 하느님께로 지향하기를 고대하지 않겠는가?

6. 세례의 종류와 구원 문제

교회는 복음 말씀을 따라(요한 3,5) 세례받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리스도나 세례에 관하여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구원될 수 없음을 뜻하는가?

세례에는 물의 세례(수세·水洗)만이 아니라, '피의 세례'(혈세·血洗)와 '열망의 세례'(화세·火洗)도 있다. 피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받는다. 열망의 세례 범위는 넓다. 세례받기를 분명하게 원하였으나 그 바람이 이행되기 전에 죽은 사람은 열망의 세례를 꼭 받는다. 명확하게 혹은 묵시적으로 세례를 열망하였으나, 어떤 사정으로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사람도 분명히 열망의 세례를 받는다. 자신의 과오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들도 선한 생활을 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만인에게 충분히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교회헌장 16)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칠 수 있다. 그들은 묵시적이지만 세례를 원하므로, 그것을 열망의 세례라 한다.

7. 세례와 성령의 인호(印號)

세례성사는 견진성사와 성품성사와 마찬가지로 영구적 인호 혹은 표징을 박아준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다른 성사는 한 번 이상 받을 수 있으나 세례, 견진, 성품성사는 한 번밖에 받지 못함을 뜻한다. 이 성사를 받은 사람이 대죄를 범해도, 이 성사의 결과는 존속되고 영구히 남아 있음을 뜻한다.

성 바울로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이미 우리에게 도장이 찍혔다고 한다.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에페 1,13).

사제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충분히 참여하고, 그분의 제사를 어디서나 재현하도록 서품을 받았듯이 모든 신자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기본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의무가 지워지며, 그리스도의 제사와 일치하여 자신들의 생활 전체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실패해도 그들은 세례를 다시 받지 않고, 고해성사로써 교회와 화해한다. 세례 인호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인의 영구적 소명의 표징이고, 또한 하느님의 자발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사랑의 표징이다.

교회의 성사

교회의 성사
세례성사: 새로운 생명과 생활방식

세례수에 상징적으로 침수(沈水)됨으로써 당신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결합'된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당신은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묻히고, 함께 부활'한다(「전례헌장」 6항; 교리서 1086).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 숨은') 그리스도의 입양된 형제 자매이지만, 그분의 몸의 가시적인 한 구성원이다(교리서 1266).

죄 에 대하여 죽은(원죄는 물론 본죄까지도 세례수로 말끔히 씻긴) 당신은 '마치 문을 통과하듯이' 교회 공동체에 입문했다. 당신이 돌이킬 수 없게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은 것은 하나의 독특한 평생 소명의 시작이었다(교리서 1214-1216, 1263-1264, 1271).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례 소명을 여러 가지 본당 활동들을 통해서 수행한다. 예컨대, 본당 신부들을 도와 성체를 분배하고, 독서를 하며, 성서를 설명하고 성가대 활동을 하며, 전례 안내를주도하고, 주보를 나눠 주며, 본당사목위원, 구역장이나 반장, 레지오 마리애 단원, 빈첸시오회 회원, 주일학교 교사, 연령회, 그리고 그 밖의 여러 활동들에 참여한다(교리서 991).

어떤 사람들은 교리교사, 피정 프로그램, 성서 연구, 기도 모임, 매리지 엔카운터(ME), 선택, 교회문헌 연구 등의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성령운동에 가담하여 함께 하느님을 찬미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례 신앙을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세례받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자신들의 세례 소명의 신비를 살아 내는 몇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교리서 898-913).

세례의 생명을 사는 한 가지 방식은 수도생활이라고 불린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은총에 유의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수도회에 들어가 '형제'(수사) 또는 '자매'(수녀)가 된다. 또 어떤 수도자들은 신부가 되어 수도생활과 사제적 직무를 병행하기도 한다(교리서 914-933).

축성된 수도자들로서 이 사람들은 가난, 정결, 순명이라는 복음적 권고들을 충실히 지키며 살기로 서약함으로써 하느님께 온전히 투신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설명하고 있듯이 그들의 생활은 하느님께 봉헌되었다.

"이 봉헌은 세례성사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욱 풍성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인 것이다."(「수도생활 교령」 5항; 교리서 2102-2103)

세 례성사를 통하여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세례성사로 새로 난 모든 사람들 사이를 묶어 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에 가담하는 것이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22항). 당신은 세례성사를 결코 다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을 하느님께 영원히 결속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 유대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은총과 신앙을 잃을 수는 있지만, 세례성사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당신은 하느님께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다. 이것을 '세례 인호'(洗禮印號)라고 부른다. 그 동일한 유대가 당신을 다른 모든 세례받은 사람들과 성사적인 방식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다. 당신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고, 우리는 모두 '성사적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함께 연결되어 있는 세례성사의 신비를 죽을 때까지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교리서 941, 1271, 2791).

성령의 봉인이며 성부의 선물인 견진성사(교리서 1285-1321)

견 진성사(堅辰聖事)는 세례성사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성령의 봉인(封印)과 성부의 선물을 받는 성사이다. 세례성사 및 성체성사와 더불어 견진성사는 입문성사이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신앙인은 성숙한 그리스도교 증인의 생활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 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깊은 현존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후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교리서 1302-1303).

만일 당신이 오늘 견진성사를 받는다면, 집전자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올리브 기름과 발삼 향을 혼합한 축성 성유에 적셔서 당신의 이마에 십자성호를 그을 것이다. 이 행위는 동시에 안수 행위로서 사도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성사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당신에게 도유하는 동안 집전자는 당신의 새로운 견진명(堅辰名)을 부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십시오."

이 말들은 초창기 교회 공동체와 연결된 말들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약속된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특전입니다."(에페 1,13-14; 교리서 1299-1300)

견진성사에 사용되는 '특은'(Gift)이라는 말은 대문자로 씌어지는데, 그것은 이 성사에서 우리가 받는 '선물'(Gift)이 바로 성령 자신이시기 때문이다(교리서 1293).

고해성사(교리서 1422-1498)

고 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해서 우리는 세례 이후에 저지른 죄들에 대한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용서를 받게 된다. 이 성사는 '화해의 성사'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이 성사가 우리를 하느님과는 물론 교회와도 화해시키기 때문이다. 화해의 이 두 측면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교리서 1468-1470).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그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죄는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약화시킨다. 우리가 고해성사에서 받는 치유는 자신에게는 물론 교회에게도 건강과 힘을 회복시켜 준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났거나 아주 멀어졌다면 그 해악은 그 죄인에게 돌아간다. 경죄(輕罪)는 그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경직시키고, 사죄(死罪)는 그 관계를 단절시킨다(교리서 1854-1863).

죄 란 하나의 비극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하나의 기쁨에 찬 재결합이다. 루가 복음 15장에서는 이 기쁨을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나치게 자비롭다고 비난한다. 이에 응수하여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 말씀을 들려 주신다. 첫번째 비유에서는 하느님이 마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에 비유되고 있다. 잃었던 양을 발견하게 되면 그는 기쁨에 넘칠 것이다(교리서 1443).

두 번째 비유에서는 한 여인이 잃었던 은전을 찾아 내고는 큰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신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루가 15, 10; 교리서 545-546)

세 번째는 고집스러운 아들의 비유이다.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 올 때, 아버지는 따뜻한 포옹으로 그를 맞이한다(교리서 2839).

당 신이 참으로 슬퍼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당신의 죄를 진지하게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루가 복음에 묘사되어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엄격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도 더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다. 반대로, 예수님에 의해서 계시된 아버지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착하시다. 그리고 당신이 이 성사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 자신도 그러하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고해성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얼싸안고 치유해 주신다(교리서 1441-1442).

병자성사(교리서 1499-1532)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당신은 죽음을 예감하게 되고, 언젠가는 죽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만일 당신의 병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만 쇠약해지거나 노약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교리서 1499-1525).

이러한 상황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하느님을 대면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당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는 특별히 성사적인 측면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런 성사적 상황을 위한 하나의 성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병자성사이다(교리서 1522).

병자 성사는 죽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성사에서 당신이 죽음의 순간에 그분을 만난다는 관점에서 그분과 대화하도록 당신을 초대하고 있다. 이 성사를 통하여 교회 전체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고통을 덜어 주시고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영원한 구원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한다(교리서 1520).

당신이 반드시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만 이 성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병자성사와 거기에 수반되는 기도가 건강의 회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장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쇠약하거나 노약할 뿐이라고 할지라도, 병자성사를 요청할 수 있고, 아니 꼭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당신이 질병이나 노령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성사를 받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교리서 1514-1515).

병자성사는 당신으로 하여금 좀더 충만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그렇게 동참함으로써 당신은 교회 전체의 영적 선익에 기여하는 것이다. 당신이 병자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좀더 충만하게 동참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더 충만하게 동참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교리서 1521).

혼인성사: 생명을 주는 하나 됨의 성사(교리서 1601-1666)

어 느 시대 어떤 문명 속에서도,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서 어떤 신비로운 거룩함을 느껴 왔다. 거기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는 막연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생명의 원천과의 하나 됨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예식들과 사회 규범들은 언제나 결혼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교리서 1601-1642).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 때에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어떤 새로운 차원을 결혼에 부과함으로써 결혼을 혼인성사로 만들었다(교리서 1601).

혼 인에서 남편과 아내는 매우 실천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사랑하도록 부름받는다. 즉 서로의 가장 인격적인 필요들에 봉사하고 서로 자신의 개인적 생각과 느낌들을 진지하게 나눔으로써, 그들의 하나 됨이 언제나 살아 있고 성장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부부의 사랑은 혼인에 고유한 행위로써만 독특하게 표현되고 완성되는 것이다."(「사목헌장」 49항; 교리서 1643-1654)

또 혼인에서 부부는 자기들의 성사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받는다. 그들의 명백한 친밀함에 의해서 부부는 어떤 특별한 것, 즉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것을 자기 자녀들 및 자기들과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퍼뜨리게 된다. 혼인의 주요 목적과 자연적인 결과는 새로운 생명, 즉 자녀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 곧 그리스도의 영의 생명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교리서 1652-1658, 2366-2367).

부부는 단지 그들이 서로 참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의 생활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주는(…)위대한 신비'(에페 5, 32)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교리서 1616).

혼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사적인 타협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성사적 소명이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통해서 그분의 몸인 우리와 하나 됨의 신비를 드러내고 심화시키는 한 매체이다. 이리하여 남편과 아내들은 그들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라는 에페소서(5, 21)의 권고를 따를 때 참으로 성사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교리서 1617).

가톨릭 교회에서 부부의 성사적 결합은 배타적이고(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합이다) 불가해소적이다(죽기까지는 둘이 서로 한 몸이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스러운 하나 됨이 현실이 되는 구체적인 방식들이다(교리서 1643-1645, 2360-2379).

부모가 자기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부가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좀더 친밀해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교리서 2201-2231).

성품성사: 직무적 사제직(교리서 1536-1600)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전체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본성과 과제들에 동참한다. 이것은 그분의 사제직에 동참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교리서 787-796, 1268, 1546).

그러나 이 '신자들의 공통 사제직' 너머에는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성품성사(聖品聖事)를 통하여 받는 그리스도의 특수한 또는 '직무적 사제직'이 있다(교리서 901, 1547).

공 통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은 각각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동참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유형은 서로 상관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예컨대, 성찬 제사에서 서품받은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그 희생제사를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고, 백성들은 그 봉헌에서 사제에게 가담한다. 사제와 백성의 두 가지 역할은 상호 보완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교리서 901-903).

사제들은 성품성사의 충만함을 소유하고 있는 주교(主敎)들로부터 자신들의 사제직을 받는다. 주교는 사제들을 서품할 때, 그들에게 자신의 사제직과 사명에 동참할 권한을 주는 것이다(교리서 1562-1564).

사 제(司祭)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고 자신들의 백성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성숙시키는 권한에 속하는 모든 것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한다. 그들은 세례를 베풀고 치유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하고 혼인성사와 병자성사에서 교회의 증인 역할을 수행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제들은 '사제를 으뜸으로 하는 신자 공동체의 중심'(「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항)인 미사를 거행한다. 모든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한다는 단일한 목표에 결합되어 있다(교리서 1565-1568).

사 제들이 서품받을 때, 그들에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행동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내적인 능력인 '특별한 영적 인호(靈的印號)가 새겨진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2항). 이 특별한 내적 '인호'가 사제들을 서로 성사적 유대로 결합시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시켜 주는 사실이다. 이 '구분됨'은 사제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업에 온전히 헌신하도록 돕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교리서 1581-1584).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적하고 있듯이,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사람들의 선익을 위한 그 밖의 다른 직무들도 수행한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2항). 이것이 의미하는 한 가지는 백성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제들도 백성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사제들과 밀접히 결속되어 일하는 평신도들은 사제들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내에서 지도자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교리서 910).

주교들과 사제들 외에, 부제(副祭)들도 성품성사에서 특별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주교에 의해 수여되는 부제직은 사제직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사제 서품의 첫 단계로서 받는 성사이다. 그렇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고대의 부제품이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하나의 고유한 권리를 지니는 직분으로서 복원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구들이 더 이상 사제직으로 나아가지 않는 부제들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종신부제'(終身副祭, permanent deacon)라고 불린다. 해당 지역 주교의 권한을 받아 일하는 종신부제들은 본당 사제들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봉사한다(교리서 1569-1571, 1596).

성체성사(교리서 1322-14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의 제2장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聖體聖事)의 신비"를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배반당하시던 날 밤 최후만찬 중에 당신의 살과 피로써 감사의 제사(즉 미사)를 제정하셨으니, 이는 당신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십자가의 제사를 세세대대로 영속화하고, 사랑하는 당신의 정배(貞配)인 거룩한 교회에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념제를 위탁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요, 사랑의 맺음이며,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게 하여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에게 미래 영광의 보증을 주는 파스카(즉 죽음에서 영광된 새 생명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잔치이다."(「전례헌장」 47항; 교리서 1323, 1398)

이 신비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다. 그것은 '모든 복음 설교의 원천이며 정점'이고 '신자 공동체의 중심'이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대한 교령」 5항; 교리서 1175, 1181, 1324-1327, 1392).

미 사가 거행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제의 인격 속에 그리고 특히 빵과 포도주의 형상하에 현존하신다. 모든 미사에서 그분의 죽음은, 피흘리지 않은 채 성사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제사로서 봉헌되는 하나의 현존하는 실재가 된다. 십자가의 희생제사가 제대 위에서 거행될 적마다 우리 인류를 위한 구원사업은 수행된다(교리서 1333, 1350, 1372).

미 사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월절(過越節) 희생물인 그리스도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분과 함께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 그 다음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의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받아 모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구원의 파스카 신비의 바로 핵심,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교리서 1330, 1356-1359).

주님의 만찬을 먹으면서 우리는 모든 시간을 재며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한다(1고린 11, 26). 이 사랑의 향연을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온전히 한 몸이 된다.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할 우리의 미래는 하나의 현실이 된다. 우리가 나누는 식사 안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룰 하나 됨이 상징화되고 실재적이 된다. 미사에서 과거와 미래가 함께 실재적으로 신비 안에 현존하게 된다(교리서 1382-1398, 1402-1405).

만일 당신이 그것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고 그것 속으로 들어간다면, 성체성사는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자극하며 당신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당신이 거룩한 신비를 외면하게 될 때, '신앙으로 고백하는 바를 행동으로 포착'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신비 안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성체성사가 보존되고 있는 장소로, 즉 감실(龕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로 되돌아온다면, 당신은 그분의 현존이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교리서 1066-1075,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