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성사
세례성사: 새로운 생명과 생활방식
세례수에 상징적으로 침수(沈水)됨으로써 당신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결합'된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당신은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묻히고, 함께 부활'한다(「전례헌장」 6항; 교리서 1086).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 숨은') 그리스도의 입양된 형제 자매이지만, 그분의 몸의 가시적인 한 구성원이다(교리서 1266).
죄 에 대하여 죽은(원죄는 물론 본죄까지도 세례수로 말끔히 씻긴) 당신은 '마치 문을 통과하듯이' 교회 공동체에 입문했다. 당신이 돌이킬 수 없게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은 것은 하나의 독특한 평생 소명의 시작이었다(교리서 1214-1216, 1263-1264, 1271).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례 소명을 여러 가지 본당 활동들을 통해서 수행한다. 예컨대, 본당 신부들을 도와 성체를 분배하고, 독서를 하며, 성서를 설명하고 성가대 활동을 하며, 전례 안내를주도하고, 주보를 나눠 주며, 본당사목위원, 구역장이나 반장, 레지오 마리애 단원, 빈첸시오회 회원, 주일학교 교사, 연령회, 그리고 그 밖의 여러 활동들에 참여한다(교리서 991).
어떤 사람들은 교리교사, 피정 프로그램, 성서 연구, 기도 모임, 매리지 엔카운터(ME), 선택, 교회문헌 연구 등의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성령운동에 가담하여 함께 하느님을 찬미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례 신앙을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세례받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자신들의 세례 소명의 신비를 살아 내는 몇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교리서 898-913).
세례의 생명을 사는 한 가지 방식은 수도생활이라고 불린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은총에 유의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수도회에 들어가 '형제'(수사) 또는 '자매'(수녀)가 된다. 또 어떤 수도자들은 신부가 되어 수도생활과 사제적 직무를 병행하기도 한다(교리서 914-933).
축성된 수도자들로서 이 사람들은 가난, 정결, 순명이라는 복음적 권고들을 충실히 지키며 살기로 서약함으로써 하느님께 온전히 투신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설명하고 있듯이 그들의 생활은 하느님께 봉헌되었다.
"이 봉헌은 세례성사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욱 풍성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인 것이다."(「수도생활 교령」 5항; 교리서 2102-2103)
세 례성사를 통하여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세례성사로 새로 난 모든 사람들 사이를 묶어 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에 가담하는 것이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22항). 당신은 세례성사를 결코 다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을 하느님께 영원히 결속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 유대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은총과 신앙을 잃을 수는 있지만, 세례성사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당신은 하느님께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다. 이것을 '세례 인호'(洗禮印號)라고 부른다. 그 동일한 유대가 당신을 다른 모든 세례받은 사람들과 성사적인 방식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다. 당신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고, 우리는 모두 '성사적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함께 연결되어 있는 세례성사의 신비를 죽을 때까지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교리서 941, 1271, 2791).
성령의 봉인이며 성부의 선물인 견진성사(교리서 1285-1321)
견 진성사(堅辰聖事)는 세례성사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성령의 봉인(封印)과 성부의 선물을 받는 성사이다. 세례성사 및 성체성사와 더불어 견진성사는 입문성사이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신앙인은 성숙한 그리스도교 증인의 생활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 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깊은 현존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후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교리서 1302-1303).
만일 당신이 오늘 견진성사를 받는다면, 집전자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올리브 기름과 발삼 향을 혼합한 축성 성유에 적셔서 당신의 이마에 십자성호를 그을 것이다. 이 행위는 동시에 안수 행위로서 사도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성사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당신에게 도유하는 동안 집전자는 당신의 새로운 견진명(堅辰名)을 부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십시오."
이 말들은 초창기 교회 공동체와 연결된 말들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약속된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특전입니다."(에페 1,13-14; 교리서 1299-1300)
견진성사에 사용되는 '특은'(Gift)이라는 말은 대문자로 씌어지는데, 그것은 이 성사에서 우리가 받는 '선물'(Gift)이 바로 성령 자신이시기 때문이다(교리서 1293).
고해성사(교리서 1422-1498)
고 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해서 우리는 세례 이후에 저지른 죄들에 대한 하느님의 치유하시는 용서를 받게 된다. 이 성사는 '화해의 성사'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이 성사가 우리를 하느님과는 물론 교회와도 화해시키기 때문이다. 화해의 이 두 측면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교리서 1468-1470).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그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죄는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약화시킨다. 우리가 고해성사에서 받는 치유는 자신에게는 물론 교회에게도 건강과 힘을 회복시켜 준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났거나 아주 멀어졌다면 그 해악은 그 죄인에게 돌아간다. 경죄(輕罪)는 그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경직시키고, 사죄(死罪)는 그 관계를 단절시킨다(교리서 1854-1863).
죄 란 하나의 비극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하나의 기쁨에 찬 재결합이다. 루가 복음 15장에서는 이 기쁨을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나치게 자비롭다고 비난한다. 이에 응수하여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 말씀을 들려 주신다. 첫번째 비유에서는 하느님이 마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에 비유되고 있다. 잃었던 양을 발견하게 되면 그는 기쁨에 넘칠 것이다(교리서 1443).
두 번째 비유에서는 한 여인이 잃었던 은전을 찾아 내고는 큰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신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루가 15, 10; 교리서 545-546)
세 번째는 고집스러운 아들의 비유이다.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 올 때, 아버지는 따뜻한 포옹으로 그를 맞이한다(교리서 2839).
당 신이 참으로 슬퍼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당신의 죄를 진지하게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루가 복음에 묘사되어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엄격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도 더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다. 반대로, 예수님에 의해서 계시된 아버지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착하시다. 그리고 당신이 이 성사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 자신도 그러하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고해성사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얼싸안고 치유해 주신다(교리서 1441-1442).
병자성사(교리서 1499-1532)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당신은 죽음을 예감하게 되고, 언젠가는 죽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만일 당신의 병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만 쇠약해지거나 노약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교리서 1499-1525).
이러한 상황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하느님을 대면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당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는 특별히 성사적인 측면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런 성사적 상황을 위한 하나의 성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병자성사이다(교리서 1522).
병자 성사는 죽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성사에서 당신이 죽음의 순간에 그분을 만난다는 관점에서 그분과 대화하도록 당신을 초대하고 있다. 이 성사를 통하여 교회 전체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고통을 덜어 주시고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며 영원한 구원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한다(교리서 1520).
당신이 반드시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만 이 성사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병자성사와 거기에 수반되는 기도가 건강의 회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장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쇠약하거나 노약할 뿐이라고 할지라도, 병자성사를 요청할 수 있고, 아니 꼭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당신이 질병이나 노령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성사를 받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교리서 1514-1515).
병자성사는 당신으로 하여금 좀더 충만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그렇게 동참함으로써 당신은 교회 전체의 영적 선익에 기여하는 것이다. 당신이 병자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좀더 충만하게 동참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더 충만하게 동참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교리서 1521).
혼인성사: 생명을 주는 하나 됨의 성사(교리서 1601-1666)
어 느 시대 어떤 문명 속에서도,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서 어떤 신비로운 거룩함을 느껴 왔다. 거기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는 막연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생명의 원천과의 하나 됨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예식들과 사회 규범들은 언제나 결혼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교리서 1601-1642).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 때에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어떤 새로운 차원을 결혼에 부과함으로써 결혼을 혼인성사로 만들었다(교리서 1601).
혼 인에서 남편과 아내는 매우 실천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사랑하도록 부름받는다. 즉 서로의 가장 인격적인 필요들에 봉사하고 서로 자신의 개인적 생각과 느낌들을 진지하게 나눔으로써, 그들의 하나 됨이 언제나 살아 있고 성장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부부의 사랑은 혼인에 고유한 행위로써만 독특하게 표현되고 완성되는 것이다."(「사목헌장」 49항; 교리서 1643-1654)
또 혼인에서 부부는 자기들의 성사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받는다. 그들의 명백한 친밀함에 의해서 부부는 어떤 특별한 것, 즉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것을 자기 자녀들 및 자기들과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퍼뜨리게 된다. 혼인의 주요 목적과 자연적인 결과는 새로운 생명, 즉 자녀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 곧 그리스도의 영의 생명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교리서 1652-1658, 2366-2367).
부부는 단지 그들이 서로 참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의 생활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주는(…)위대한 신비'(에페 5, 32)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교리서 1616).
혼인은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사적인 타협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성사적 소명이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통해서 그분의 몸인 우리와 하나 됨의 신비를 드러내고 심화시키는 한 매체이다. 이리하여 남편과 아내들은 그들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라는 에페소서(5, 21)의 권고를 따를 때 참으로 성사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교리서 1617).
가톨릭 교회에서 부부의 성사적 결합은 배타적이고(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합이다) 불가해소적이다(죽기까지는 둘이 서로 한 몸이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스러운 하나 됨이 현실이 되는 구체적인 방식들이다(교리서 1643-1645, 2360-2379).
부모가 자기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부가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좀더 친밀해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교리서 2201-2231).
성품성사: 직무적 사제직(교리서 1536-1600)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전체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본성과 과제들에 동참한다. 이것은 그분의 사제직에 동참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교리서 787-796, 1268, 1546).
그러나 이 '신자들의 공통 사제직' 너머에는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성품성사(聖品聖事)를 통하여 받는 그리스도의 특수한 또는 '직무적 사제직'이 있다(교리서 901, 1547).
공 통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은 각각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동참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유형은 서로 상관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예컨대, 성찬 제사에서 서품받은 사제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그 희생제사를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고, 백성들은 그 봉헌에서 사제에게 가담한다. 사제와 백성의 두 가지 역할은 상호 보완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교리서 901-903).
사제들은 성품성사의 충만함을 소유하고 있는 주교(主敎)들로부터 자신들의 사제직을 받는다. 주교는 사제들을 서품할 때, 그들에게 자신의 사제직과 사명에 동참할 권한을 주는 것이다(교리서 1562-1564).
사 제(司祭)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고 자신들의 백성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성숙시키는 권한에 속하는 모든 것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한다. 그들은 세례를 베풀고 치유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하고 혼인성사와 병자성사에서 교회의 증인 역할을 수행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제들은 '사제를 으뜸으로 하는 신자 공동체의 중심'(「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항)인 미사를 거행한다. 모든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한다는 단일한 목표에 결합되어 있다(교리서 1565-1568).
사 제들이 서품받을 때, 그들에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행동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내적인 능력인 '특별한 영적 인호(靈的印號)가 새겨진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2항). 이 특별한 내적 '인호'가 사제들을 서로 성사적 유대로 결합시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시켜 주는 사실이다. 이 '구분됨'은 사제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업에 온전히 헌신하도록 돕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교리서 1581-1584).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적하고 있듯이,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사람들의 선익을 위한 그 밖의 다른 직무들도 수행한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2항). 이것이 의미하는 한 가지는 백성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제들도 백성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사제들과 밀접히 결속되어 일하는 평신도들은 사제들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내에서 지도자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교리서 910).
주교들과 사제들 외에, 부제(副祭)들도 성품성사에서 특별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주교에 의해 수여되는 부제직은 사제직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사제 서품의 첫 단계로서 받는 성사이다. 그렇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고대의 부제품이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하나의 고유한 권리를 지니는 직분으로서 복원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구들이 더 이상 사제직으로 나아가지 않는 부제들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종신부제'(終身副祭, permanent deacon)라고 불린다. 해당 지역 주교의 권한을 받아 일하는 종신부제들은 본당 사제들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봉사한다(교리서 1569-1571, 1596).
성체성사(교리서 1322-14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의 제2장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聖體聖事)의 신비"를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배반당하시던 날 밤 최후만찬 중에 당신의 살과 피로써 감사의 제사(즉 미사)를 제정하셨으니, 이는 당신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십자가의 제사를 세세대대로 영속화하고, 사랑하는 당신의 정배(貞配)인 거룩한 교회에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념제를 위탁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요, 사랑의 맺음이며,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게 하여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에게 미래 영광의 보증을 주는 파스카(즉 죽음에서 영광된 새 생명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잔치이다."(「전례헌장」 47항; 교리서 1323, 1398)
이 신비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다. 그것은 '모든 복음 설교의 원천이며 정점'이고 '신자 공동체의 중심'이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대한 교령」 5항; 교리서 1175, 1181, 1324-1327, 1392).
미 사가 거행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제의 인격 속에 그리고 특히 빵과 포도주의 형상하에 현존하신다. 모든 미사에서 그분의 죽음은, 피흘리지 않은 채 성사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제사로서 봉헌되는 하나의 현존하는 실재가 된다. 십자가의 희생제사가 제대 위에서 거행될 적마다 우리 인류를 위한 구원사업은 수행된다(교리서 1333, 1350, 1372).
미 사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월절(過越節) 희생물인 그리스도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분과 함께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 그 다음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의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받아 모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구원의 파스카 신비의 바로 핵심,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교리서 1330, 1356-1359).
주님의 만찬을 먹으면서 우리는 모든 시간을 재며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한다(1고린 11, 26). 이 사랑의 향연을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온전히 한 몸이 된다.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할 우리의 미래는 하나의 현실이 된다. 우리가 나누는 식사 안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룰 하나 됨이 상징화되고 실재적이 된다. 미사에서 과거와 미래가 함께 실재적으로 신비 안에 현존하게 된다(교리서 1382-1398, 1402-1405).
만일 당신이 그것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고 그것 속으로 들어간다면, 성체성사는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자극하며 당신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당신이 거룩한 신비를 외면하게 될 때, '신앙으로 고백하는 바를 행동으로 포착'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신비 안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성체성사가 보존되고 있는 장소로, 즉 감실(龕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로 되돌아온다면, 당신은 그분의 현존이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교리서 1066-1075,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