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기도는 교회 일치운동의 혼

기도는 교회 일치운동의 혼

우리나라 에서 그리스도교 일치주간 행사가 시작된지는 올해로 30년이 훨씬 지났다. 그러나 완전한 교회 일치는 아직도 요원하다. 기대가 컸던 이들은 '답보하는 교회'에 실망하기까지 했고, 소심한 이들은 '진리의 순수성'을 위해 더 폐쇄적인 태도를 굳혔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후해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교회일치운동을 펼쳐왔으며, 이같은 활동을 전세계의 일치운동에 적지 않은 변 화를 가져왔다. 현대 교회는 특히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등 문헌을 통해 이를 실천하면서 쇄신되어 가고 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세운 교회의 분열은 325년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우스파의 배격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역시 교회 분열의 큰 줄기는 역시 동방교회의 갈라짐과 종교개혁이다. 869년부터 2년 동안 열린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최초로 동방교회를 서방교회에서 분리시키려 한 포시우스를 파문했고, 1054년에는 미카엘 체룰라리우스가 포시우스의 정신에 따라 서방교회와 시비를 하다가 파문되면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를 파문, 교회 는 둘로 갈라졌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선언을 기점으로 시작된 분열은 영국왕 헨리 8세의 영국교회 독립 선언(1531년), 쟝 칼 뱅의 그리스도교 제도론 발표와 장로교 시작(1536년) 등으로 번져나갔다. 1545 년부터 19년간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일시적으로 프로테스탄트 대표들이 참석했으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개신교의 많은 주장이 배격됨과 동시에 가톨릭 교리의 대부분이 세밀하게 규정되고 기틀이 잡혔다. 이어 1589년에는 러시아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재치권에서 독립, 모스크바 총주교좌를 세움 으로써 그뒤 많은 나라에 이와 비슷한 국가별 독립교회가 발족했다. 17세기 침례교 발족, 18세기 감리교 발족, 19세기 구세군 발족 등으로 교회는 계속 세포 분열하듯 나뉘어져 나갔다.

교회 일치운동은 1894년 교황 레오 13세가 성령강림대축일을 전후해 일치기도주간 실천을 장려하면서 시작돼 1908년 미국 폴 왓슨 신부가 '교회 일치기도 주간'을 준수하면서 본격화됐다. 이어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일치를 위한 공동기도의 필요성을 깨닫고 1926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전신인 '신앙직제운동'에서 성령강림주일에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 설정을 제안했고 그 결실로 48 년 암스테르담 총회부터 시작해 91년 캔버라 7차 총회까지 이어지면서 교회일치가 활발하게 논의됐다.

1964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특히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해 기도야말로 교회일치운동의 혼이라고 강조하면서 기도주간의 준수를 장려한다. 특히 공 의회 문헌이 교회 일치성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성삼위의 고백과 신·망·애 삼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성서적이며 세계교회협의회의 선언과도 공통성을 가져다주었다.

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기로 가톨릭은 동방교회 및 프로테스탄트와의 대화를 시작한다. 1967년에는 러시아정교회와 신학대화 및 사목활동 분야에서의 접촉을 가졌고 1973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로마에서 이집트 콥트교회 총대주교 쉐누다 3세와 함께 그리스도교 교리를 담고 있는 신앙선언문에 서명했으며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방문해 신학 대화를 위한 '로마 가톨릭-정교회 합동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70년대 들어 동방 교회와의 대화가 본격화됐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단들과의 교회일치운동은 67년 이후 루터교와 성공회, 감리교, 오순절교, 침례교 등 각 교단들과 협력 위원회 설치 등을 통해 다채롭게 진행됐다. 특히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교회일치운동은 성공 사례로 꼽힌다.

최근 교회일치운동과 관련해 가장 주목받는 회칙은 1995년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대다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교회 일치에 대한 열망을 인정하고 수위권(首位權) 개방 문제를 언급하는 등 대화의 토대를 과감하고도 진지하게 제공하고 있다.

[평화신문 오 세 택 기자]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4)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4)
4. 역사적 반성 및 교훈
16세기의 종교개혁은 한 가톨릭 신부인 Luther의 교회 안에서 가톨릭적 교회쇄신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개인과 경제, 사회적 상황에서 교회밖에서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종교개혁의 직접적 원인은 Luther자신의 개인적 성격과 사상과 더불어 중세 말기 종교적 배경에 있다. 신학에 있어서 교회생활과 연결되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이나 교리는 성서구절의 인용이나 학문적인 견해의 나열과 같은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그 방법을 일깨워주는 지혜를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에 인간의 가치를 들어높히던 인문주의와 사도시대로의 복귀를 내세운 개혁의 요구와 종교개혁과 연결하여 볼 때에 인간성 회복은 우선 신을 전제로 해야 하며, 교회쇄신의 주창은 독실한 종교성을 갖추고 과격하거나 혁명적이기보다는 설득적이어야 한다. 아울러 종교개혁은 교회의 내분에 그 원인이 있다면 우리는 교회의 일치에 유의해야 한다. 교회는 항상 그 내부로는 쇄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외부로부터는 침해의 위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합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는 어떤 세속적, 물질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복음정신에 입각한 사랑과 이해의 연결이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중세 말기의 교회의 세속화는 종교개혁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세속화를 개탄하기 이전에 우리들 자신이 세속화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겠다. 성직자의 경우에, 신적 소명감과 영신적 사명의식 속에서 공인으로서 물욕과 명예욕에서 해방되어 세속적 직업이 아닌 사제직을 이러한 사욕의 충족을 위한 도구화하기보다는 사도적 청빈의 실천으로 삼아야겠다. 그리고 중세 말기의 정치와 종교의 혼동에서 정교분권의 원칙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 입장에서 유의할 점은 교회가 동등한 자세에서 정치 속에 휘말리기보다는 그 위에서 국가의 사회논리와 도덕향상을 위해 충고와 격려로 선도적 역할을 해야겠다. 수도원은 무엇보다도 생활을 통해서 교회 영성의 활성화에 이바지해야 하며, 평신도의 교회예전의 참여에 있어서도 형식주의를 지양하고 그 참된 의미를 깨닫고 보다 적극 적인 신심행사에 임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생활해야겠다.

사목 67호, 1980년 1월, 14-25쪽 참조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3)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3)

3. 종교개혁의 종교적 원인

종교개혁의 종교적 원인을 고찰하는 데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적환경 즉 정치적 상황, 경제적 상태, 그리고 사상적 배경 등을 무시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주된 이유가 된 종교적인 면 - 교회의 상태 - 에 제한하여 취급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교 사상

1) 유명론(唯名論)

14 세기부터 유럽 중부 지역과 영국은 신학의 쇠퇴기에 들어섰다. 중세 후기의 신학자들은 토론의 枝巧(지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기법은 대부분 순전히 외면적 문제에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 후기의 신학은 실재적이 될 수 없는, 즉 교회생활을 외면한 단조롭고 표면적인 장황한 말마디로 격하된 스콜라 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참된 신학이 교회생활 특히 그의 성사적 생활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라면 이 시대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었다.

중세 말기의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는 유명론(唯名論)을 내놓은 영국인 William of Occam이있다. Thomas Aquinas 사상의 舊方法(구방법)은 희미한 옛 모습일 뿐, 여기에 유명론의 新方法(신방법)이 대치되었다. 그런데 Occam의 신학체계는 근본적으로 非가톨릭적이었다. Thomas와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에 반대하여 자연계와 초자연계, 인간이성과 신의 계시 사이의 조화를 거부하였다. Luther는 그의 스승인 유명론자 Gabriel Biel을 통해서 Occam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을 Occam에 의한 신과 자연과의 내적 연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자연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을 거부하였다. 인간은 오직 신이 자신을 계시할 때에만 신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Occam의 인간이성과 자연에 대한 主義(주의)는 계시에 대한 굳은 신뢰와 대응하였다. 오로지 계시된 聖事(성사)만이 신앙의 원천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Luther의 聖事唯(성사유)의 사상은 이런 견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울러 Occam은 인간의 이성을 무력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오직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인식케 하고 인간의 구원을 이룩해 준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Luther의 信仰唯(신앙유)의 원칙이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Occam은 인간의 본능 자체는 무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신의 은총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Luther는 후에 이러한 恩寵唯(은총유)의 교의를 끌어들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따라서 가톨릭 입장에서 볼 때에 Luther의 이단은 Occam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세 가지 唯(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있다.

2) 그리스도신적 인문주의는 14세기에 이태리에서 발단하여 15-16세기에 유럽 지역에 번진 지성적 운동이다. 인문주의란 명칭은 이 운동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의 앙양에 관심을 두는 데에서 나왔으며 또 이는 다른 인문주의 운동들과 구별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운동은 고대 희랍과 로마 문학에 대한 심미적 태도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국가주의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태리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들의 조상인 로마인들의 고대 문화의 재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울러 이들은 객관적, 스콜라적, 체계적 사상을 경시하고 주관주의, 개인주의와 인간 각자의 경험에 치중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과학적 방법, 즉 역사적, 철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법은 원천에 비판적 탐구 및 복귀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북부 및 서부 유럽의 인문주의는 그 개인주의적 성격에 종교적 의미를 적용하여 각 인간은 '성령의 궁전'으로 존중하였고 고대 원문, 원서로의 복귀에 있어서 고대적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적 원천, 즉 신약성서 - 특히 희랍어 신약성서 - 와 신부들의 저서를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란 용어가 나왔다. 한편, Luther가 성서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을 사도시대로의 복귀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는 종교개혁과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한 원인(遠因)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들은 내적 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개혁을 주장하였지만, 혁명적인 인물들이 아니었으며, 후에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단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톨리시즘을 떠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2. 교회 상황

1) 중세적 일치의 약화를 초래한 역사적 사실들 중의 하나는 교황청의 Avignon, 즉 교황의 Avignon 생활이다. 이는 1305년 새로 선출된 프랑스인 Clement 5세가 당시에 이태리의 불안한 정정으로 인하여 교황청을 Avignon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어 Gregory 11세가 1377 성녀 Catharine of Siena의 독책으로 로마로 환도하기까지 70여년간 계속되었다.

6명의 Avignon의 교황들과 교황청 성직자의 대부분이 프랑스인이었고 그 사고방식도 프랑스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보편적 영신 지도자들이기 보다는 프랑스의 국가주의로 여겨져 다른 지역, 특 히 독일 지방에서 교황권의 세 력의 상실과 그 종교적 보편주의의 소멸을 갖고 왔다. 아울러 이들은 세력 증강에 집착하여 세속적 권한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교회세제를 확장시켜 교회생활의 어느 부분에도 돈과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교회세금의 미납은 성사수여 금령이나 교회의 공공 전례참석 금령 등 영신적 처벌의 대상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황들의 지나친 중앙 집권화와 교황청 재정정책에 대한 악감은 유럽 전체에 번지게 되었다. 마침내 대사부의 논의는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는 마지막 불꽃이 되었다.

그리고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일치를 약화시킨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서구의 대분열 즉 교황청의 분규(1378-1417)였다. Gregory 11세의 서거(1378년) 이후, 16명의 추기경들은 프랑스인 교황의 선출을 저지하려는 로마 시민의 우려와 군대의 위협하에 타협하여 半프랑스인 Urban 6세를 새 교황으로 뽑았다. 그는 원만한 성격을 갖추지 못하여 교황청 성직자들 및 추기경들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갔다. 곧이어 프랑스와 스페인의 추기경들은 교황선거가 강압에 의한 것이기에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또 하나의 교황 Clement 6세를 선출하였다. 이에 두 교황을 가진 교회의 혼란시대를 수습하기 위해 주교들과 추기경들은 Pisa에서 집회를 열어 두 교황을 파직시키고 Alexander 5세를 선출하나 이 교황은 곧 사망하였다. 다시 회의에서 John 23세를 선출하나 물러났던 다른 두 교황들과 그 추종자들이 승복치 않았다. 따라서 교황은 다시 세 명이 되었다. 이에 이러한 교회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Constance 공의회(1414-1418)에서 세 명의 교황을 면직 또는 강제해임 시키고 Martin 5세를 교황으로 내세움으로 교황청의 대분규는 끝났다.

이 사건은 교회를 부실성 시대로 이끌었다. 이제 대중은 진짜 교황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또한 이 분규는 교회 안에 불신과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각 교황의 지지자들은 사방에서 - 교구, 수도원, 본당, 그리고 가정에서까지 - 충돌하였다. 교황들은 각자 반대파들을 파문하여 모든 그리스도 교회는 파문상태하에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공의회주의, 즉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학설을 발생케 하였다. 이 사상은위에서 언급한 Constance공의회에서 주창되어 Basle공의회(1431)에서 재확인되었다. 이 주장은 교황의 정치적, 영신적 권위는 약화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한 Luther의 종교개혁을 더욱 쉽게 해주었다.

2) 종교개혁의 외침

12세기 말 이후로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사도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교회인들 사이에세도 일어났다. 즉 제4차 Lateran공의회(1215)는 교회개혁에 대해 취급하였고, 성인 Francis of Assisi(1118-1226)의 주요한 임무 도 교회개혁이었다.
개혁의 요구에는 교회의 악폐에 대한 비난도 들어있었다.

성 녀 Catherine of Siena와 성인 Bridget of Sweden은 당시의 교회 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5세기 말에는 개혁의 외침과 교회 악폐에 대한 불만은 일반화되어 갔다. 당시의 개혁의 대상은 고위성직자들과 교황청의 자본주의였다. 이 성직자들은 사치생활을 하면서 순박한 신도들을 착취하는 폭군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3. 성직자

1) 르네상스 교황들

르 네상스 교황들은 Nicholas 5세에서 시작하여 Leo 10세에 이르는 10명의 교황들을 말한다. 이들의 시대적 사명은 교회의 개혁과 회교도들과의 논쟁을 위한 서구의 단합이었으나 실천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주로 르네상스 교황들의 두 가지 역사적 과오에 있다. 첫째는 족벌주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교회의 재산, 영토를 사유화하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자기들의 가족에게 분배하는 가족정치를 감행하였다. 둘째는 배타적 자기중심주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르네상스 교황들은, 비록 그들의 개인적 취미의 소산인 문화적 업적에 대한 호평을 받고 있지만, 당시에 그들의 본래의 종교적 사명인 교회개혁에 身하기를 소홀히 하였고 안일한, 더 나아가서는 비도적적 생활을 하였다. 아 울러 몇몇 교황은 증회의 방법을 통해서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러한 성직판매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묵인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교황은 교회의 영신적 지도자이기보다는 세속적 군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Nicholas 5세(1447-1458)는 탓할 데 없는 인문주의자였고, Vatican 도서관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회교도를 대항하여 방어전선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Callistus 3세(1455-1458)도 역시 십자군운동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정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으로 인하여 자기의 조카 두 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족벌주의적 과오를 범하였다.

Pius 2세(1458-1464)는 매우 유명한 인문주의자로서 40세까지는 나태한 생활을 하다가 뉘우치고 곧 신부, 주교가 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회교도와의 충돌로 인하여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Paul 2세(1464-1471)는 선임 Pius 2세와 마찬가지로 족벌주의를 행사하지 않고 그의 교황 재위 기간을 보냈다.

Sixtus 4세(1471-1484)는 방지거회의 전직총장으로 그의 수도원에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서 교회행정에 족벌주의 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는 두 명의 조카를 추기경단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예술사에 있어서 Sixtus는 Vatican의 Sistine성당의 건립자로 기억되고 있다.

Innocent 8세(1484-1492)는 증회(주: 뇌물공세)의 방법을 통해서 교황에 선출되어 성청 행정의 타락, 교회개혁의 무관심 등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자기 친척인 13세의 소년을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Alexander 6세(1492-1503)는 교리상 오류는 범하지 않았으나 그의 직무수행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Alexander의 재위 기간은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 시대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25세에 그의 삼촌인 Callistus 3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후, 많은 성직록을 소유함으로 치부하였다. 그는 증회의 방법을 통해서 교황에 선출되었고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Alexander는 족벌주의의 정영(政榮)을 실천하였고 가족들에게 정략적 결혼과 이혼을 감행하였다. 한때에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실현하지 않았다.

Pius 3세(1503)는 Pius 2세의 조카로서 교회개혁을 약속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대관식이 있은 지 26일만에 사망하여 실천되지는않았다.

JUlius 2세(1503-1513)는 Sixtus 4세의 조카로서 증회를 수단으로 하여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성직매매에 의한 교황선출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Julius는 교황으로서 윤리적으로 탓할 것이 없었으나 성격이 횡폭하였고 그리스도의 대사제로 보다는 왕 또는 장군으로 처신하였다. 그는 교황령의 회복과 확장에 성공함으로써 교황권의 세속적 명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교황은 예술 애호가로서 유명한 미술 작품들의 제작을 명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Michelangelo의 Sistina성당의 천장화(天障畵)와 San Peitro 성당의 모이세의 석상(石像)과 Raphaaelo의 바티칸 궁전의 천장화 등이다. 그리고 새로운 베드로 대성전의 건설을 계획하여 이를 위한 대사부의 판매는 Luther의 95개조가 나오게된 동기가 되었다.
Leo 10세(1513-1521)는 그의 권세가인 가정의 배경으로 13세에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윤리적 잘못은 없었으나 인생을 향유하는 데에 빠졌고 책임감이 없었다. 그의 책임감의 결여는 Luther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볼 수 있다. 이 교황은 Luther를 시시한 언쟁이나 좋아하는 수사로 여겼고, Luther의 항의 속에 내포되어있는 뜻이 무엇인지는 알 능력이 없었다. 그는 Julius가 시작한 제5차 Lateran공의회를 속개하여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약간의 사소한 개혁에 그쳤다.

2) 재속성직자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의 고위성직자들은 중세 말기에 세 가지 입장으로 처신하였다. 즉 봉건영주, 문인들과 학자들의 후원자, 그리고 자신들의 교구를 보살피는 영신 지도자로 분류될 수있다.

그 러나 일반적으로 주교직이란 하나의 세속적 직업과 같은 평범한 인상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영신적 사명을 망각하고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주교들은 신학이나 사제양성및 교육에 관심이 없었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이런 생활을 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의 정상적 수입으로는 부족하여 여러 성직록을 취득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임지 재(任地 在)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 이런 악 들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주교직이란 거의 독점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고위성직자들의 부조리한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다.

하급성직자들인 신부들은, 당시에 신학교가 설립되어 있지 않아서, 소수를 제외하고서 대부분이 신학교육이나 성직자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하였다. 품(品)에 요구되었던 것은 기초적 교리지식과 독서능력이 전부였다. 그러나 라틴어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부들이 많았다. 또 성직자로서 비도덕적 생활을 하거나 사목적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신부들이 목자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실행하였다는 점도 고려해야겠다.

3) 수도원

일반적으로 수도원들도 병폐가 있었다. 이들은 입회자가 돌봄이없이 방종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휴식처로 보였고, 참다운 수도성소자가 거의 없었으며, 지원자는 누구든지 엄격한 심사없이 입회할 수 있었다. 이는 수도원들의 폐단의 중요 원인이 되었다. 귀족들이든 평민들이든 수도생활을 부양할 수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도피구로 생각하였다. 아이를 수도원에 보내려는 부모들은 그의 의향이나 자질은 아랑곳없이 마음대로 하였다.

소수의 새로운 수도원들이 창립되었지만 영향을 크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공동생활의 형제회', '공동생활의 자매회'와 'Windesheim 회'는 예외였다. 이들은 당시에 그리스도 중심의 내적, 개인적 신심을 강조하고 교회의 악폐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쇄신을 주창하던 '현대의 신심'이란 신앙운동의 대표자들이 었다. Luther는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경영하던 Magdeburg의 교회학교에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던 형제회원들과 어느 정도의 정신적 내지 영적 교술을 갖게 되며, 이 신앙부흥운동은 Luther의 영성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때때로 수도원의 성직자들은 재속성직자들과 충돌을 하였고 14-15세기 동안에는 다소간의 성공적인 개혁을 하기도 하나, 일부 수도원에서는 내분을 일으키키도 하였다. 한 예로 Luther가 속해있는 Augustine은수사회를 들 수 있다.

사목 67호, 1980년 1월, 14-25쪽 참조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2)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2)
2.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문제점
1. 역사적 원인
역사적 원인이란 개념은 오늘날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자주 현대 역사서들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개념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직접적 이유뿐 아니라 간접적 이유 즉 원인(遠因)까지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이유일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는 인간 자유의지 행위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엄격한 인과법칙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 원인은 많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하나의 역사적 원인이 같은 시대에 상이한 역사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중세말기의 '현대의 신심'이란 영성운동은 두 가지의 역사적 사건, 즉 가톨릭 쇄신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아울러 역사적 원인은 그 결과를 설명하지만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우리에게 역사적 반성의 기회를 주며 역사적 교훈을 얻게 한다. 이러한 뜻에서 그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하겠다.

2.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견해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많은 역사가들과 실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일으켰거나 마련할수 있었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자세하게 조사하였으나 아직 합의된 설명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 가톨릭 학자들은 종교개혁의 기원을 밝히는 데에 특히 정치적, 논리적 사실들의 영향을 강조하였다. 즉 정치적으로는 왕과 제후들의 물욕, 중앙집권주의적 전제군주제의 발전과 국가주의의 성장을 들고 있었으며, 윤리적으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비도덕적인 고위성직자들의 정치욕과 영신적 사명감의 망각들을 열거하고 있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저자들은 정치적 원인과 동시에 성직자, 특히 교황들과 聖廳의 성직자들의 타락 등의 비논리성을 강조하였다. 또 어떤 역사가들은 인류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사회적, 경제적 사실들의 역할을 중요시하여 종교개혁을 그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신학적 표현 또는 결과로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 이후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및 비그리스도교의 역사가들은 세속적인 영향을 인정하지만, 그보다는 종교개혁의 종교적 원인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3.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입장
과거에, 수많은 가톨릭 지도자들은 교회 내의 악폐가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생과 성장 및 발달에 이바지하였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우 리는 그 한 예를 교황 Adrean 6세가 Nurngerg 의회에 파견된 교황사절인 Francesco Chieregati에게 보낸 훈령에서 볼 수 있다. 이 훈령은 의회에서 1923년 1월 3일에 공개되었다. 여기서 Adrian은 성직자들, 특히 교황들과 성청의 성직자들 사이에 있었던 폐해는 Luther의 종교개혁의 기원에 책임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Chieregati에게 이러한 과오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교황 자신은 聖廳의 개혁에 있어 최대의 노력을 다할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공표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종교개혁을 단순히 부정적 사건, 즉 반가톨릭적 사건으로 생각치 않는 이들이 있다.
그 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긍정적인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은 교회(가톨릭)에 대한 적의의 증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참다운 종교적 열망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한 예로 비엔나의 성인이라고 불리우는 Clement Mary Hofbauer를 들 수 있다. 그는 독일 민족이 교회에서 탈퇴한 것은 그들이 경건한 백성이 되어야겠다는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며 종교개혁은 이단자들이나 사상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심을 추구하던 이들에 의해서 뿌리박고 전파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본인의 입장에서도 이 주장은 납득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Luther도, 다른 종교개혁가들도 처음부터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있다고 생각치 않았고 가톨릭 신부로서 교회 안에서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교회개혁에 대한 가톨릭적 요구를 내세웠다.
바오로 6세는 제2차 Vatican공의회 제2 회기의 개막식에서 옵서버로 참석한 비가톨릭 종교자들에게 가톨릭이 그리스도교의 분열의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하였다.

사목 67호, 1980년 1월, 14-25쪽 참조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1)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1)
1. 종교개혁 -교회쇄신

오늘날 신학연구에서 교회와 관련하여 내놓고 있는 결론중의 하나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神人兩性(신인양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신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오류가 있을 수 없으며 신성하다. 그러나 神的 實在(신적 실재)라는 점에서는 교회안에 과실과 죄악이 현존하여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성 , 특히 지도자들의 행동이 인간적 동기 또는 인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과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교회가 그의 모델이며 이상인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내부에서 개혁의 외침과 쇄신운동이 일어났다. 16세기의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대표적인 교회혁신의 움직임으로는 8세기의 Boniface의 교회제도의 개혁, 10-12세기의 Cluny 수도단체의 수도원쇄신 캠페인과 Gregorian개혁운동, 14세기의 '현대의 심신'이란 교회영성의 활성화운동, 15세기의 Jojn Hu ss와 Girolamo Savonarola의 교회개혁의 요구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회혁신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이는 신앙의 단일성과 기본을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思(사)를 여러 갈래의 新派思想(신파사상)으로 분열시켜 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 - 루터주의, 칼빈사상, 영국 국교회주의등 - 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시대에는 두 가지 구별되어야 할 개혁운동이 있었다.
즉 교회 밖에서의 개혁과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다. 교회 밖에서의 개혁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종교개혁, 다시 말해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일으킨 개혁으로서, 가톨릭 의미에서 프로테스탄트 반란) 이라고도 불리며 여기에는 몇가지 유형이 구별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Luther의 종교개혁, Ulrich Zwingli의 종교개혁, John Calvin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 등이다.
한 편,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즉 가톨릭 종교개혁은 가톨릭 쇄신 또는 반동 종교개혁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두 개의 용어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쉽지 않다. 현대의 저자들은 가톨릭 쇄신이란 말마디의 사용을 제안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느누구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그 이전에 있었던 교회개혁의 움직임들이 가톨릭 교회 안에 있었다는 사실과 이런 교회내부의 쇄신운동들의 결과가 Trent공의회의 결정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자주 가톨릭 개혁운동을 반동 종교개혁만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문제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프로테스탄티즘과 관계없는 그 발단 이전의 종교운동을 생각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동 종교개혁이라는 주장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쇄신운동을 촉진시켰을 뿐 아니라, 가톨릭의 태도결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데에 있다.

사목 67호, 1980년 1월, 14-25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