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상 실현을 위한 단체와 소공동체 관계모색
곽승룡(대전 가톨릭대학교 교수 ‧ 사목기획국장 ‧ 신부)
하느님께서는 본디 인간을 혼자 있도록 부르시지 않고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부르셨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느님께서는 하와를 창조하여 함께 도우며 살아가도록 가족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구원은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그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와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구현되어 나타나고 있다. 창조 때 아담과 하와를 함께 창조하신 것에서 이스라엘 성조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공동체로 묶어서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신 것뿐만 아니라 구세사 전체가 하느님과 공동체와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결정적으로 신약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구세주로서 마리아 요셉을 부모로 하는 가족 공동체에서 태어 나셨고, 가정 공동체에서 영에 이끌려 자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이루시면서 제자 공동체를 이룩하셨고, 결국 수난의 파스카를 통해 부활하셔서 사도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 공동체를 이룩하셨다. 한 마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부르시고 이루시며 나아가도록 초대하신 것이다. 소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16세께서 첫 회칙을 발표하시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회칙을 발표하셨다. 바로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바로 사랑의 공동체이시다. 구약과 신약 그리고 초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 곧 하느님께서 부르신 공동체는 하느님의 사랑, 아가페를 살아가는 공동체를 살아가야한다. 따라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모든 분야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신 사랑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다. 소공동체 연구, 방법, 실행, 사목, 교육 등 모든 것은 복음적 사랑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친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구현하고 서울대교구 시노드 정신을 계승하여 함께하는 교회, 참여하는 교회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통합사목연구소는 교회의 현안과 미래에 대한 사목비전 및 정책을 연구하여 교구 발전을 위한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소공동체 사목 현안 가운데 중요한 부분에 관련되어 있는 단체와 소공동체 관계모색은 이 시대와 미래 사목의 본질 가운데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주제를 전개하기 위해 먼저 교회, 본당의 어원과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고, 본당유형의 신학을 제시한 다음, 세계 교회에서 발생했던 공동체운동 곧 라틴 아메리카(BCC)와 아프리카(SCC) 그리고 아시아(AsIPA)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새로운 교회상 실현 과정에서 그 주역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본 주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친교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끝으로 본 주제에 대한 기존의 의견들을 간략히 살피면서 복음적 조화와 균형의 공동체 형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2.1. 본당 용어의 기원
지금의 본당은 길고 복합적인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다. 본당의 기본윤각은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믿는 이들의 신앙과 이들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적 조건에 의해서 그 형태가 이루진다. 본당은 그리스어 동사 paroikeo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의미는 ‘가까이 또는 옆에 살다.’ ‘시민권 없이 외국인 또는 이방인으로 살아가다.’이다. 이 동사는 70인역의 구약에서 60번 정도 사용되었고 일반적으로 ‘외국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다.’ ‘외국인으로 있다.’라는 의미로 주로 나타난다. 구약에서 paroikia는 ‘ 자기 집과 고향을 떠나 외국 땅에서 시민권이나 거주권 없이 유랑하거나 생활하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의 외국인 paroikos(창세17,10), 롯도 소돔에서 이국인 paroikos(창세19,9)이며, 이사악 역시 카나안에서 외국인이었다.
2.2. 본당의 기원은 신앙
paroikia 가 그리스말이면서 그것의 종교적 의미는 히브리 공동체의 신앙 경험에서 온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공동체의 기원에는 세 가지 인자가 있다. 첫째 부르심, 둘째 약속, 셋째 계약인데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은 늘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자로 머무름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당을 형성하는 것은 언젠가는 되돌려줘야 하는 빌려온 땅에서 살아가는 순례하는 공동체라고 보아야 한다.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히브리 공동체의 부분을 형성하려면 땅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계약을 맺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계약은 땅의 주인들이 아니라 임시 머무르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땅이 아니라 신앙이 계약된 공동체를 일치하게 한 것이다.92)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참 본당을 형성하였다. 이방백성 가운데 노예로 살면서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순례를 지속적으로 갈망하면서 계약에 믿음 충실하였다.
2.3. 본당은 공동체
본당의 또 다른 의미는 ‘모임’이다. 이 말은 그리스말 ekklesia, 히브리말 qahal의 어원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모임’이라는 히브리적 이해로부터 온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모임의 뜻은 네 가지 독특한 활동의 결과를 내포한다. 첫째 모임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의 최고 권위에 의해 함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둘째 하느님 말씀과 설명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셋째 어떤 종교적 행위 희생제사로서, 강복 또는 감사로 하느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넷째 모임은 공적 감독에 의해 파견된다.
신약에서 본당은 드물게 사용되는데,93) 그 뜻은 외국 땅에서 거주하는 외국인으로서 구약에서 발견되는 뜻과 연결된다. 또 한편 매우 신비적인 의미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듯이 세상을 꾸려가는 인간의 삶은 시대의 본질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가 태어난 참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인 것이다. 그는 순례자로서 땅 위에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교회와 본당의 의미가 주님께 영원히 돌아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이 땅이 영원한 고향이 아니라 순례하는 곳으로서 본당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 본당은 예배하는 장소로서 정해진 장소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 안에서 순례하는 이방인으로서 살아있는 신앙 공동체이다.94)
2.4.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
공동체의 신앙은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보다 더 중요하다. 곧 예루살렘 공동체는 기도를 위해 모이고, 말씀봉사가 다른 세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 성전(사도2,4), 2. 이스라엘과 어떤 지속성을 가르침 3. 솔로몬 성전의 현관 위(사도5,12)
어디서 모이든지 상관없이 신약의 공동체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설교 2. 예배 3. 사목적 돌봄. 물론 사도들은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사도6,2-4) 바오로 공동체에서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말씀 선포를 위해 책임을 나누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 저마다 할 일이 있어서, 어떤 이는 찬양하고 어떤 이는 가르치고 어떤 이는 계시를 전하고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를 말하고 어떤 이는 해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1코린14,26)
신약에서 교회는 본당(paroikia)과 교회(ekklesia) 모두를 표현하기를 선호한다. 먼저 순례하는 공동체 관점(본당)과 하느님 집의 식구와 성인들의 동료시민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관점(교회)등 이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의미가 아닌 보다 정의개념을 뛰어넘는 상징적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첫 그리스도 공동체는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코린토, 에페소 등 주요도시에서 형성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자체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성서학자 브라운(Raymond Brown)은 말한다.95) 물론 초기 교회에서는 조직화된 교회 형태가 세워지지 않았다. 초기에 가족들의 소공동체는 말씀과 기도, 봉사를 위해 집에서 모였다. 그런 가정교회들은 60명보다 약간 작은 단위로 모였다. 이 가정교회는 3세기 초중반까지 지속되었다. 바오로 서간에서 교회의 리더들은 환대의 덕96)이 있어야 하며 그럴 때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위한 장소로서 가정을 자발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1티모3,2;티토1,7-9)
교회조직에서 Jean Colson은 두 가지로 그 발전방향을 분류하였다. 첫째는 바오로의 방향으로서, 주교 또는 의장이 아니라 장로단(college of presbyters)이다. 일치는 한 사람의 리더가 아니라 많은 맴버들과 많은 독특한 기능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 신비체의 신학 위에 기초된다. 장로(주교가 아니라) 공동체들은 후기 사도시대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는데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에서였다.
두번째 공동체 조직의 형태는 공동체에서 자리하고 있는 한 사람의 리더, 수도자 주교에 의해서 특성을 이룬다. 이 리더는 공동체의 살아있는 일치의 이미지이다.
사도시기 이후 이러한 수도 공동체(한 명의 주교)는 교회 조직형태의 지배적인 형태로서 부상이 되었다.
2.5. 트리엔트 공의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오늘날의 본당은 기본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 전후에 모양을 갖추었다. 본당신부는 영혼의 돌봄을 위해 책임을 맡고 있다. 교구는 믿음 충만한 가운데 명백하게 본당들을 정의하고 나누며 본당은 주임사제에 의해 봉사 된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지역적(속지) 원리는 명백히 지역경계들과 함께 본당설립을 위한 규범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예외가 나타났는데, 인격적(personal) 원리는 특별한 본당을 세우는데 유용되었다. 특별한 본당이란 다른 전례를 사용하거나 소수 민족에 속해 있는 공동체이다. 본당신자는 일반 본당을 구성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로 정의되는 것이 분명하다. 기본원리는 각 본당은 자기가 속한 본당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예외의 경우 로마는 같은 교회를 사용하는 몇 본당을 허락하는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함께 본당의 설립과 분리는 주교에게 유보되어 있다.
2.6. 2차 바티칸 공의회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본당에 대해 특별히 그 어떤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는 여전히 트리엔트 공의회를 따르고 있다는 뜻으로서, 사목자와 주교 사이의 의존적 관계에서 본당을 설명하고 있다. “주교는 자기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이 언제나 어디에서 모든 양 떼를 지휘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신자들의 집단을 조직하여야 한다. 그 가운데에서 주교를 대신하는 사목자 아래에 지역적으로 조직된 본당 사목구가 가장 중요하다. 본당은 전세계에 세워진 가시적인 교회를 어느 정도 드러내기 때문이다.”97)
주교들의 사목임무들에 관한 교령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구 속지 정의로부터 오히려 의미 있게 출발하고 있다. “교구는, 주교에게 사제단의 협력을 받아 사목하도록 위탁되어, 자기 목자를 따라, 그 목자로부터 복음과 성찬을 통하여 성령 안에 모여서 개별 교회를 구성하여, 그 안에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러 오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으로 내재하며 활동하는 하느님 백성의 한 부분이다.”98)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 정의에 따라 교회 곧 본당 공동체는 속지의 차원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하느님 백성 위에 그 속지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속지로부터 백성에로 변화하는 것이 본당 수준에로 적용된다면, 본당의 많은 새로운 모델들이 변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먼저 본당 신학에 관한 일련의 토론들을 조명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몸소 백성들을 위해 실천하셨지만 오늘날 모습의 본당 공동체 형태를 위한 영원한 청사진을 주시지는 않으셨다. 공동체의 청사진은 하느님 백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교회와 본당의 변천은 매우 신학적인 흐름에서 성장해왔음을 알 수 있다. 본당과 교회의 변화성장에 영향을 끼친 데는 두 가지 인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첫째 인자는 교회와 본당에 관한 신학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본당과 교회 발전에 그 힘을 제공해주었으며, 또 다른 한 가지는 교회와 본당이 지속적으로 변화된 문화, 상황, 살아가는 나라의 방식에 따라 적용되어 갔다. 결국 교회의 신학과 세상의 문화가 서로 만나 오늘날의 공동체가 변화 발전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오늘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상 실현을 위해 본당 공동체 안에서 단체와 소공동체의 관계모색의 전단계로서 우선적으로 몇 가지 교회 공동체 모형을 신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1.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사도4,32-35)
예루살렘 공동체가 오늘날 본당신자들에 관한 지속적인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모형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본당 공동체의 모델로 예루살렘 교회를 적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목자 중심의 본당 공동체라기보다는 교구적 감독 공동체에 더 가까운 모형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영역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속지적 특성이 예루살렘 공동체의 주요 인자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본당과 같은 모델로 예루살렘 공동체는 느슨하거나 활력이 없는 구성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3.2. 이브 콩가르 모델
이브 콩가르 추기경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교회 모델을 제시한다. 첫 째 본당과 교구가 가정과 사회시민 공동체와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서술한다. 그가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비유가 하느님의 법만이 아니라 나라에 대한 교회의 적용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두 가지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면서 가정은 인간 삶의 중요한 필요성을 제공하고, 사회 공동체는 인간 삶의 특별한 발전을 위해 더 나아지도록 무엇인가를 제공하는데, 이는 사람의 성장을 위한 기회 제공이며, 직업의 기회들을 제시하는 구별(다양함)과 법과 강압에 의한 공동체 생활을 균일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기가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본당은 어머니의 모태로서 그 곳에서 그리스도인은 태어나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한 요소는 돌보는 모델이다. 한편 교구는 세례 받은 신자들에게 교회의 위대한 일들을 명한다. 교구는 신자들을 보다 큰 공공질서를 위해 일하며, 교회의 공동사업에 참여하기를 권한다. 국가와 사회가 시민들을 위해 시민의 영역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처럼 교구는 신자들을 위해 교회 영역 안에서 해 나간다.
두번째 측면에서 콩가르는 본당은 두 가지 역동성으로 이루어져 성장한다고 설명하는데, 본당은 하나는 ‘위로부터’ 다른 하나는 ‘아래로 부터’ 기초된 공동체라고 설명한다. ‘위로부터’는 신적요소, 진리, 은총, 힘에서 오고, ‘아래로 부터’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모든 것에서 오는데, 서로 함께 특별한 공동체에서 살기, 기도의 친교 안에서 협력하기, 서로 봉사하는 사도적 활동 등이다. 본당은 아래로부터 형성되듯이 역시 작은 그룹들과 공동체들을 포함한다. 이 같은 큰 본당 공동체는 보다 작은 공동체들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콩가르가 본당을 공동체로 정의 내리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와 ‘아래로부터’ 역동성이 본당 신학에 가치 있는 공헌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역동성은 본당의 소공동체와 단체가 서로 협력하면서 든든하게 기초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체와의 관계모색은 당연히 복음적, 삼위일체, 그리스도론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다.
3.3. 칼 라너의 모델
칼라너의 본당 모델 신학은 콩가르와 사뭇 다르게 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칼 라너가 제시하는 본당의 형태는 매우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라너에게 첫 주제는 본당이 교회의 지역적 대표성으로 나타나는 활성화이다. “교회는 본당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자체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적 대표의 특성을 실현하기 위해 본당은 특히 교회의 성사거행에서 장소적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미사성제는 공동체에 의해서만이 거행될 수 있고, 공동체는 한 장소 한 백성 안에 함께 모인다. 가장 근본적인 본질의 측면에서 교회는 지역 속에 접속된 구체성에 연결 돼있다.”
라너의 두 번째 주제는 본당이 중요한 주체로서 교회의 제1원리 실현화이다. 교회, 본당은 첫째, 보편성과 기원의 형태로서 장소적 원리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본당은 백성들의 일치인데 그들은 특별한 장소에서 함께 살아간다. 공동체는 지역성의 원리위에 기초된다. 라너는 세 가지 요소들에서 그의 본당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1. 본당은 미사성제 거행을 통한 교회실현이며, 2. 중요한 일로서 본당은 성사거행의 장소이고, 3. 지역의 장소로서 본당이다. 따라서 칼 라너의 본당 신학모델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바는 성사 중심(미사성제)으로서 소공동체 영적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지역에 근거를 주고 있는 장소로서의 본당과 같이 소공동체의 교회적 기초모델을 그 지역에 철저하게 뿌리를 두어야 하는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3.4. 미래의 본당모델 신학
라너의 모델은 교회에 대한 본당의 공동체 신학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역성 역시 본당을 위한 원리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비평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비평의 근거로서 교회의 긴 역사에서 많은 예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시 같은 장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만으로 공동체를 이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본당에서 지역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실에도 어려움이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의 할렘가, 도시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흑인들을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본당의 지역성이 경제적으로 형평을 이루고 산다면, 그 지역성을 뛰어넘어 가난한 자, 어려운자들에게 까지 복음적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하는데, 만일 지역성이 교회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면 이는 바람직한 교회본당 모습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다.
한편 본당은 지역 공동체의 기원형태로 불리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비평을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본당은 주로 일반적으로 지역 공동체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의 기원형태는 주교를 중심으로 함께 모인 사제단과 함께하는 감독 공동체이며, 그를 공동체의 필요들에 따라 봉사하도록 명받는다. 데이비스는 라너의 모델이 초자연주의 안으로 몰게 하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비평을 보이면서, 전례거행이 공동체 또는 본당을 건설하기 위한 핵심으로서 너무 가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전례는 백성들의 삶을 세상 안에서, 일과 봉사의 삶으로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교회 안에 작은 교회와 교회법에 따른 본당실현을 말하는 신학들도 있다. Winter의 모델은 중세의 유럽 형태로 구조화된 본당이 오늘날의 세상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초되어 디자인되지 않았음을 비평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황은 익명의 그리스도인, 후기 그리스인 세상, 소수 그리스도교 또는 디아스포라 상황 같은 용어로 종종 묘사된다. 본당은 주로 신앙이 당연한 일로 생각되지 않는 아주 세속적인 공동체 안에 처해 있다. Winter에 의하면 교회의 선교는 오늘날의 상황에 응답해야 하며, 선교는 기존의 구조를 넘어서 극복해야 한다.
Winter가 믿는바, 교회 곧 본당은 예배와 사랑실천, 증거와 사도의 공동체로 있어야 하는 점이다. 이 같은 공동체를 성취하기 위해서 교구와 본당은 근본적으로 다시 구조를 건설해야 한다.10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공동체와 미사성제 중심에 대한 강조는 교회 안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전통은 신학적 사회학적 원리들 안에서 기본적으로 좋은 대안과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
지역도시를 위해 사도직은 누가 조직해야할까? 다양한 기초공동체의 사도직을 가꾸고 실행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사도직이 만일 미사성제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면 공통 사도직을 위해 우연히 형성된 공동체는 지역 미사성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오히려 약한 공동체 형성의 기초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Winter는 신선하면서 활기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오늘날의 복합적인 사회에서 조직의 문제에 대해 양성된 주역들과 함께 인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4.1. 기초공동체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는 해방신학과 함께 억압의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기존 사회체제 안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에서 발생한다고 구티에레즈가 말하였던 것처럼 비인간 실존으로 몰아가는 삶의 환경에서 새로운 삶의 실천을 위한 장으로서 기초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의 발생은 다분히 복합적인 것이다. 극심한 가난의 사회적 상황과 사제의 부족, 본당 구조의문제 등 종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60년대 초 브라질에서 처음 발생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기초 교회 공동체 형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몇 명의 주교들에 의하여 시도되었던 “복음화 캠페인”, “기초교육운동”들이 새로운 교회적 공동체들을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공동체들은 평신도들에 의해 스스로 브라질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이와 같은 확산 과정에 대해 주교회의가 정책적으로 지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시작된 기초공동체는 스스로 라틴 아메리카에 퍼져나가는 하나의 운동 형태로 확산되었는데 여기에 대해 메델린 주교회의는 사목적, 신학적 반성과 함께 기초공동체를 하나의 완전한 교회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려준 것이다. 그러므로 기초공동체는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서 발생한 가운데 주교회의에서 정책적으로 인정하고 강화함으로서 “교회안의 기초공동체”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메델린 주교회의의 결정은 세계가 기초공동체의 형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1974년 제3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의해서 공식적인 복음화의 유효수단으로 인정됨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는 크게 4가지로 구성되는데 그것은 성서, 공동체, 현실, 전례이다. 이 가운데 성서가 생명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있다.
4.2. 소공동체
아프리카의 소공동체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현실과 문화의 토양 위에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구축하여,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기초공동체를 그들의 새로운 교회형태로 받아들이게 된다. 룸코 연구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고 가톨릭 교회의 복음화 과업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공의회 정신에 따른 룸코 연구소의 사목비전을 살펴보면
첫째, 공의회의 ‘하느님의 백성’ 교회론에 의거하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본질적인 동등성을 회복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직, 사제직, 왕직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둘째, 공의회에서 새롭게 발견한 ‘친교의 교회’를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 말씀을 원천으로 하는 공동체를 활성화하며 셋째, 사회에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참된 지역 교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룸코 연구소는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 평신도의 교회사명수행을 위해서 ‘말씀’을 중심으로 한 소공동체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룸코 연구소는 교회, 소공동체, 성서, 교리교육,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공동체 영성 등의 주제를 많은 신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자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각 프로그램 형태의 교재와 포스터 등의 보조 자료들을 발간하였다. 이에 Harry Hoeben은 아프리카의 소공동체에 대해 세 가지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다. 먼저 공동체 안에서 상호간의 가치와 동일함 그리고 공동 결속을 느끼게 되었다. 소공동체는 문화적 토양 위에서 모순 없이 서로의 유대를 강화하게 되었다. 둘째로 교회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소공동체를 통해서 모든 이들이 참관자(參觀者)가 아닌 참여자(參與者)의 입장이 되었다. 참여의 입장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 비전을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소공동체는 그 특징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3. AsIPA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FABC) 평신도 사무국 산하에 AsIPA(Asian Integral Pastoral Approach) 즉 ‘아시아사목을 위한 통합적 접근’은 아시아교회 안에서 소공동체가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총 3회의 총회를 통해서 소공동체에 대한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였는데 1996년에 있었던 1차 총회가 AsIPA의 소공동체 기초를 익히는데 머문데 반해서 2차 총회부터는 통합사목방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혔다.
제2 차 총회에서 이해된 소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방법이며, 이 안에서 모든 이들이 새로운 교회의 구성원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며 특별히 가정교회를 활성화 할 수 있다고 밝힌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소공동체는 변화하는 세상의 복잡한 체제를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 놓고 변모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선포방법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된 소공동체에 대해서 몇 가지 과제가 부여되는데, 그것은 소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강생하신 하느님에 대한 토착화와 소공동체의 영성, 사회복음화,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은 요청되었다.
AsIPA 제2차 총회에 이어서 제3차 총회에서도 역시 소공동체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AsIPA 3차 총회는 아시아 각 지역의 소공동체가 공동의 비전과 관심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토의를 하였는데 동시에 AsIPA 2차 총회에 이어진 소공동체 운동의 여정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졌다. 그래서 가정, 영성, 지도력, 직무와 관련된 사목활동 나눔이 이루어졌고, 참여하는 교회, 공동책임, 교회비전의 실현과정과 결실에 대한 숙고를 통해 미래의 아시아 사목을 위한 방향성과 계획을 모색하였다.
제4 차 총회는 2006년 11월8-15일 인도 남부 트리반르룸에서 ‘소공동체, 친교의 교회를 향하여(SCC/BCC Towords a Church of Communion)’에 대한 주제로 친교의 교회론 심화, 소공동체를 통한 통합사목의 의미 검토, 소공동체 도입과 육성을 위한 혁신적 구조 발견, 소공동체 관련 자료 공유와 계획 수립으로 세분화되어 열렸다.104)
5.1. 다양성과 단일성의 조화
교회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삼위일체 신비의 원리 곧 다양성(위격들)과 일치성(본성)의 신비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학적 영성적 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기비움(kenosis, self-emptying)으로 드러난다. 삼위일체 신비의 영성은 하느님의 자기비움, 성자의 자기 비움, 성령의 자기비움으로 나타나는데, 자기비움은 또 따른 표현으로 ‘사랑의 역동성’(dynamical Agape)이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부터 줄곧 인간을 향한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며,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기비움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탈자아’ 곧 사람이 되신 강생사건으로 드러난다. 성자의 자기비움은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스스로 받으시고 결정적으로 세상의 죄를 위해 수난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드러난다.
삼위일체 신비의 영성은 다양성과 단일성의 조화 원리로 드러난다.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서로 서로 일치하여 자율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영성이 드러난다. 조화를 이루는 영성의 원리는 삼위일체 신비 가운데 특별히 성령의 역할로 드러난다. 성령은 서로 다른 다양성과 단일성을 하나로 통합된 조화의 원리이다. 이러한 조화의 원리는 삼위일체 영성과 신심운동단체의 영성으로서 교회 안에서 단체와 소공동체 관계모색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또한 소공동체 안에서 교계의 원리와 협의회의 원리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가 다양하게 통합되어 나타나도록 한다. 물론 이 원리는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소공동체 안에서 사목적 협력을 위한 친교와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5.2. 미래 공동체를 위한 통합과 조화
교회는 궁극적으로 위타(爲他) 공동체이기 때문에 변화된 사회 속에서 유동성과 다원성이 증가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종래의 속지 공동체를 직장, 범주 공동체로 확대 보완할 필요가 있다. 소공동체는 독립성, 개방성, 인간성, 소규모성, 범주 공동체 및 직장 공동체 등의 특성을 지녀야 ‘세상과 내일을 위한 공동체 구조가’가 될 수 있다고 클로스터만은 말한다.
삼위일체 안에 세 위격들은 한 하느님이지만, 각자는 완전한 위격이다. 이렇듯 삼위일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도 역시 다양한 인간들이 완전한 인격으로서 각자는 손상되지 않으면서 하나로 통합되어있어야 한다. 교회의 하느님 백성 역시 서로 상호 친교의 본성을 살아야 한다. 이같이 미래 본당의 바람직한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 통합과 조화의 훈련을 시도해야 한다. 곧 소공동체와 단체와의 통합과 조화는 그 어느 쪽으로의 흡수와 축소가 아니라 한 공동체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제2 차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를 친교의 공동체로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 가톨릭 교회가 친교의 교회론을 실현하고 증거 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는 자유와 권위 사이의 충돌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친교와 일치는 존재하지만 획일성과 전체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성을 의미하는 가톨릭은 하느님 백성 곧 여러 신자들이 친교와 일치의 삶을 살아간다는 다양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삼위일체 모습으로서 교회에 대한 관념을 드러내었고 친교의 교회론을 이해하도록 선언하였다. 공의회는 삼위일체적 본성의 표현이다. 삼위일체의 모습에 따른 다양성 속에서 친교와 일치는 공의회 속에서 모인 주교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공통된 정신에 도달함으로 행동 속에서 보여 질 수 있다.
5.3. 속지와 속인 공동체의 기능적 보완 및 다양성의 조화
차동엽 신부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기초란 존재 즉 being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가 있겠다.106) 곧 소공동체는 속지차원의 기초, 존재의 차원을 말한다. 그러나 차동엽 신부는 또한 그라이나커 이론을 원용하면서 사회의 유동성과 역동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속지적 원칙을 기능적인 원칙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사회학적 연구를 통하여 현대 도시 사회의 복잡 다양한 구조와 다원적인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종래의 거대하고 단색적인 존재방식에서 지역적 특색과 다양한 직능을 반영한 ‘공동체 교회’로 탈바꿈해야한다고 주장한다.107) 현재의 복음선교에서 특별히 밝히고 있는 소공동체의 필요성도 대도시화로 인하여 발생하는 ‘익명화’와 ‘집단화’를 주요인으로 꼽고 있다. 현 사회와 교회 그리고 가정 상황이 소공동체 사목과 모임을 위해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곧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남성 신자들의 참여의 부족이 급격히 발생하였다. 더욱이 본당 주임신부의 열성으로 소공동체 모임이 빈번해지다보면 기존의 신심 사도직 단체(레지오 등)들과 마찰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것도 본당 공동체의 현실로 나타난다.
소공동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와 신앙생활의 본질을 살아가자는 복음운동 곧 교회다운 교회 살기 운동, 새로운 교회로 있는 존재방식이다. 익명성에서 탈피하여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여 소그룹으로 만나 새로운 신앙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인식시켜줄 수 있다면 시간적으로 제한된 만남이라도 괜찮다. 제도교회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소그룹을 조직해야 한다.
5.4. 위임과 책임을 나누는 교회의 주체, 평신도의 위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교회 안에 직분상의 교계제도를 언급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제를 채택하여 모든 믿는 이들의 ‘일반적 사제직’이 ‘특수 사제직’에 우선함을 천명하고 있으며(제2장), 고유한 ‘평신도’부분의 장을 할애하여 평신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삼중직무를 가진다고 밝힌다(제4장).108)
「평신도 교령」에서 역설하였던 것처럼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도 평신도의 사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계 안에서 그 구원사명을 위하여 직무와 은사를 부여하신다. 성령께서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교계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은혜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며 각기 개별적으로 능동적인 공동책임을 지도록 그들을 부르신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세례를 받은 신분과 그 고요한 소명으로 말미암아 각자의 능력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적, 예언자적, 왕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기 받은 소명의식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고 각자가 받은 고유한 소명을 수행해야만 하는 공동체성안에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직무와 친교와 구원활동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보프는 소공동체에서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 “기초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평신도 운동이다. 평신도는 소공동체 안에서 복음의 목적을 수행하고 교회의 향방과 현안의 결정 과정에서까지도 매체와 수단의 역할을 한다.”라고 말하였다.109) 최덕기 주교는 본당의 소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평신도가 교회 생활에 협조자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게 해 주기에 교회의 주체 확립이란 차원에서 본당의 소공동체화가 요청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우선 과제 중 하나가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인으로서 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목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교회의 기초공동체를 통하여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평신도들은 소공동체 안에서 신앙과 삶을 연계하는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이로 인해서 교회와 사회를 개선하고 변화시킬 힘을 얻을 것이다.110)
5.5. 신자 리더 양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의 특성을 세속성에 두고 평신도의 사명을 ‘세상을 성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각기 공동체에서 평신도 사도직이 구체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공동체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소공동체가 결성이 되어 자신들의 삶을 말씀 안에서 정화하고 결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나 수도자로만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그 공동체는 자생력이 없어지게 된다. 실제적으로 그들의 역할은 공동체 안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러한 면에서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부각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공동체를 이끌어나갈 평신도지도자를 양성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 즉 평신도들의 역할이 새롭게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럴 때 현재의 소공동체 운동이 생활 안에서의 공동체로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소공동체가 한 시대의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로부터 늘 새롭게 태어나는 교회 살기라는 것을 드러내는 충분한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한편 소공동체의 영성, 친교와 나눔과 조화는 소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자율적인 참여와 역할 위임이 이루어지는 원천이 되고 있다.
6.1. 소공동체와 단체
구역반은 행정구역상으로 나눈 것이다. 과거에도 본당 쇄신 프로그램을 위하여 구역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소공동체 운동은 그 틀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넣어 공동체의 삶을 엮어내는 과정이자 출발이다. 구역반을 심화시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고 복음의 맛을 들이게 하는 것이 소공동체이다. 복음 나누기는 복음의 맛을 들이게 하고 복음으로 살게 하고 빛과 소금이 되는 신앙인이 되게 한다. 레지오는 50년 된 좋은 나무의 하나일 수 있다. 여기에만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가? 그 나무를 벨 수는 없다. 나머지 땅들도 가꾸어야 한다. 소공동체는 잘됐다/못됐다로 평가할 수 없다. 이제까지 교회는 바닥의 기초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나무만 키워왔다. 소공동체 운동은 기초바닥을 튼튼히 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현대사회는 유교문화, 일제시대, 군사문화 등 계급 문화를 통해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신자들은 80년대 이후의 신자들이다. 자율성, 합리성을 추구하는 신자들이다. 밭갈이는 신자들 사제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기존의 것을 없애서는 안된다. 사도직 단체를 모두 없애면 어려워진다. 신심단체들은 소중히 보호해야 한다. 척박한 땅이 소공동체이자 구역반이다. 소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소공동체, 레지오 모두 매주하면 너무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소공동체가 공동체성을 가질려면 매주 만나는 것이 좋다. 빠른 시간 안에 소공동체를 잘하려는 마음에 레지오와 소공동체가 겹치면 소공동체로 가라고 강요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공동체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성급한 마음으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공동체는 기초 신앙생활이다. 기본을 체험하지 않고 신심만을 추구하면 안된다. 교회의 본질을 놓치면 안된다.
6.2. 구역반을 레지오와 함께 하면 어떻겠나?
속성상 두 가지가 틀리기 때문에 함께하면 위험하다. 레지오는 계급을 지니고 있고 소공동체는 누구나 함께 평등하게 하는 것이다. 레지오는 신심 단체로 두고 소공동체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소공동체는 가시적인 결과가 눈에 빨리 보이는 것이 아니다. 숫자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되면 불만을 느끼고 소공동체에 불만을 느끼게 된다. 그것보다는 복음에 맛들이고 공동체의 체험을 느낀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봐야 한다.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처음에는 많이 모이더니 이제는 많이 떠난다는 소리를 들었다.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첫번째 단계가 거짓 공동체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혼돈이 온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단점을 받아주기 시작할 때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혹시라도 신자들이 상처를 받고 떠난다는 건 꼭 겪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6.3. 소공동체가 위에서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공동체가 되는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소공동체의 정신에 따르면 아래에서 시작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 성직자 중심이었다. 신자들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촉매가 없다. 신자들의 자율성이 취약하다. 소공동체는 위에서부터 하기가 어렵다. 사제들이 봉사하겠다고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다. 그러므로 위에서부터 하는 것은 쇄신의 뜻이 있는 것이다. 신부님들이 본당에서 소공동체를 하자는 것은 위에서부터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목적 열정이다. 그런 후 신자들이 성숙한 후 빠져나가는 것이다.
우리 팀이 교회의 팀으로 살아가는 첫 번째 증거이다. 우리가 팀으로 일하는 것 자체가 책보다 더 좋은 교육도구 이다. 혼자서 이 내용을 가르친다면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의 정반대로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를 말하는 것과 행동과 같아야 한다. 하느님 세분이 동등한 것처럼 교회 임원들 사이에 동등성이 있다. 동등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로 함께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공동으로 일하는 것이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6.4. 본당의 단체와 소공동체 공동사목
몇년 전부터 한국교회에서 통합사목, 공동사목의 바람이 불고 있다. 물론 시대와 사회 그리고 인간의 삶이 변화되기 때문에 참으로 필요사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통합과 공동사목의 본질적 실천 원리는 ‘함께 살아감’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이 공동사목의 본질을 증거 하는 것이며, 본당에서 단체와 소공동체의 조화가 공동사목의 기초이다. 다시 말해서 사목위원과 구역반장들과 단체장들이 공동으로 협력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공동사목의 기초이며 이럴 때 단체와 소공동체가 함께 공동으로 협력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성직자 수도자 신자가 서로 하느님 백성으로서 협력하고112), 본당의 단체와 소공동체의 조화와 협력이 바로 공동사목의 기초모델이라고 생각한다.
7. 1. 단체와 소공동체
한국천주교회에서 소공동체사목이 전개되면서 몇 가지 갈등구조가 발견되어 왔다. 첫째 소공동체를 사목중심에 두는 본당주임사제와 기존의 단체중심의 사목을 하고 있는 사제들 간의 갈등이다. 전자의 사제들은 대부분 기존의 사목협의회를 구역중심으로 본당의 사목적 사업과 결정을 자문 받고 때에 따라서는 자문뿐 아니라 함께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주고 있는데, 이것이 소위 구역중심의 본당사목협의회이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천주교회의 교구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단체와 소공동체간의 갈등구조이다. 특히 레지오 마리애와 소공동체와 관계가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확한 통계를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본당에서 소공동체중심 사목을 해가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프레시디움수가 줄어든다는 보고이다. 물론 사목자나 봉사자들이 소공동체 사목을 중심에 둔다고 레지오를 물리적으로 줄어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레지오 마리에가 이 시대에 보다 복음을 중심으로 마리아영성과 삶에 비추어 대안적으로 제시되면서 교우들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단체와 소공동체는 삼위일체 신비와 복음의 가르침으로 서로 협력관계로 존재해야 하며,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향으로 무엇이 먼저인가?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굳이 가리는 소공동체와 단체의 우열 기준은 누가 ‘더 복음적’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원리적으로는 공동체의 기초, 기본은 가정이고 소공동체이고 본당이며 교구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와 원의 그리고 추구하는 경향을 두고 볼 때는 공동체의 기본 못지않게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단체들도 삶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기계적인 공동체 구조의 교회론적 강조로 소공동체를 주장한다면 단체를 통한 공동체적 신앙의 활성화는 더욱 소원해질 것이고 교회 공동체 주변으로 숨어들어 가는 경향을 띌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들이 현재로서는 갈등구조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이며 단계적으로 단체와 소공동체의 공동 공동체적 교회론의 합의 선언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본질인 공동체들의 친교가 이루어야 할 것이다.
7. 2. 미래를 향한 조화와 협력을 통한 복음적 통합만이 살길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혼자’ 그리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인간은 ‘혼자’이면서 ‘함께 곧 우리’인 것이다. 내가 생물학적인 개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나를 감싸고 있는 ‘막’ 곧 살덩이 피부이다. 나의 몸 안을 들여다보아도 세포 세포들이 서로간의 경계인 ‘막’과 ‘막’ 사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세포덩어리들로 나를 만들고 있다. 부분적으로 보면 세포와 세포는 개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나’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 세포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대전에서도 용전동에 살고 있다. 용전동과 옆의 송촌동은 다른 동네이지만 대전이라는 관점에서는 같은 시민이다. 또 같은 충청도민이고 대한국민이다. 지구라는 행성도 다른 행성과 구별되는 ‘막’이 있다. 대기권이다. 함부로 대기권내에 들어오거나 나가기가 힘들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더 큰 관점에서는 같은 태양계, 은하계.....등 공동체성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소공동체와 단체와의 관계도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당장은 단체와 소공동체가 다름과 갈등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미래와 거시적 관점에서는 서로 조화와 협력을 통한 복음적 친교공동체성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단체와 소공동체의 단계적인 성장과정을 통한 소공동체 중심의 복음적 대통합의 공동체론을 지향하고 하느님 백성의 참여구조를 과감하게 제도화할 것 제안하는 바이다. 여기서 단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사목자는 처음단계에서 단체를 지양하고 소공동체를 집중 활성화하고, 어떤 사목자는 단체와 소공동체의 다양한 일치와 협력을 강조할 것이며, 어떤 사목자는 단체 중심의 사목을 현실적으로 양성화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목자는 교구와 협력하여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교육을 우선적으로 하여 그 비전을 공유하면서 전략을 함께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처음 단계에서 어떤 방식을 취하든지 복음과 성체와 이웃사랑이라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성이 잘 나타나도록 미래를 향해 복음을 중심으로 조화와 협력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복음적 친교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복음나누기의 한국적 심성과 문화에 가까운 방법이 토착화되어야 할 것이며, 교리, 신앙체험, 영성, 사목, 전례, 교회운영 등에 있어서 복음 중심의 친교와 사랑의 본질이 한국문화와 한국인 심성과 만나 토착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한국초기천주교회 박해시대의 교우촌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공동체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몫이라고 본다.
7.3.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실현과 교회구조
십년 이상 소공동체 사목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도 2001년부터 소공동체 전국모임이 첫 번째로 개최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하였다. 그런데도 한국의 소공동체는 아래로부터의 역동성 보다는 위로부터의 역동성에 너무 의존되어 있기도 하다. 필자는 교구의 사목국장으로서 소공동체 전국모임 등 대외적으로는 단체도 소공동체라고 강조하면서 소공동체와 복음적 협력을 매우 강조하여왔다. 왜냐하면 소공동체와 단체가 갈등을 발생하는 자체가 복음적 내지 공동체적이 아니기 때문이며, 소공동체와 단체는 근본적으로 본당 공동체의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교구나 본당에서 단체 특히 레지오는 그 영성과 비전에 따라 변화하면서 소공동체가 본당의 중심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전국적으로는 기존의 단체(레지오)가 교회발전의 밑거름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며 그 가치를 인정해 줄 뿐 만아니라 이제는 소공동체와 협력하여 본당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야 하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한편 몇 년 전부터 교구마다 교구와 본당의 사목구조를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변경하고 있다.113) 그러나 분명히 교구나 본당의 구조는 가장 나중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교구나 본당의 구조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가 트리엔트 공의회의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 구조를 바꾸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 신학과 정신으로 새로운 교회의 모습답게 새로운 구조를 제시하지 않고 기존의 구조를 수직성에서 수평성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구조를 그대로 따랐는가를 깊이 있게 숙고해야한다. 오랜 세월 살아 온 구조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뿐 아니라 위에서 몇몇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있다. 왜냐하면 서둘러서 교황청에서 법으로 그 구조를 바꾼다 해도 지역교회까지 그렇게 구조변화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구조가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도 40년이 지나간 요즘에도 알아듣고 실현하기가 쉽지 않은데, 구조를 위로부터 바꿨다고 해서 그대로 살 것인가? 실제로 소공동체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정신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평적 사고를 말하면서도 그 구조는 곧 트리엔트 공의회의 구조 아니 더 나가서 유럽의 봉건구조 같은 틀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라고 하니, 갈등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 백성과 정신은 그렇게 수직적으로 구조화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외적으로 교회의 구조가 달라진 것이 어디 있는가? 교황, 주교, 사제, 부제, 신자 교회신분에는 어떠한 것도 생성과 소멸된 것이 없다. 다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수직적으로 이뤄졌고, 지금은 수평적으로 교회를 말하고 있는데, 새로운 구조라고 말하는 틀이 과연 복음과 삼위일체 신비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구조가 먼저 변화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트리엔트의 구조를 기초로 두고 그 위에 새로운 정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을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다. 구조가 새롭게 변화할 교회의 중요한 인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구조에 먼저 하느님 백성의 친교를 열심히 살아가자는 것이다. 대화하며 나누며 봉사하며 복음적 수평 공동체로 그렇게 살아가면서 하느님 백성의 동의와 협력으로 성령께서 그 정신에 맞는 구조를 언젠가는 이루어 주실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 한국천주교회가 서둘러서 교구와 본당의 구조를 하느님 백성들과 함께 그 비전과 인식과 협력의 공유과정을 거치지 않고 위로부터의 역동성과 큰 목소리로 변화시켜 간다면 분명히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도 실현될 수 있을 지 의문이 된다. 사회와 국가도 헌법과 대통령 중심제나 내각책임제나 그 구조를 바꾸는 것은 동의와 협력으로 그리고 역사와 문화와 정서가 녹아든 삶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총체적 종합적 합의로서 가능한 것이지 몇 사람이 많은 이들이 살아가야하는 구조를 뚝딱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하느님 백성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현재의 구조를 동의와 협력으로 그 비전을 공유 하면서 서서히 아래로부터 움직임의 결과로서 최종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단체와 소공동체는 서로 구조적 조정에 앞서 복음적이며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적으로 협력과 사랑의 구체적 실현으로 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을 실천해가야 할 것이다.
1) 과거에 단체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규 모가 큰 본당 공동체에서 단체들이 그렇게 중요해진 이유는? 단체들은 평신도들이 교회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었기 때문이다.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서로 관심을 기울이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 적인 공동체 역할을 하였다.
단 체들과 수도회들은 어떤 면에서 비슷한가? 수도회들은 전체 교회가 실천해야 할 어떤 특은을 강조한다.(예 가난) 그리고 그것들은 교회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과업이나 사명을 보충한다. (예를 들면 병든 사람을 돌보기, 신앙을 전수하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등)
2) 우리 본당에 있는 단체들이 창설될 당시 목적으로 삼은 특정한 “특은”이나 과업은 무엇인가?
그 런데 지금 그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예를 들면 특별한 형태의 신심을 도모하기, 어머니들과 젊은이들 그리고 가난 한 사람과 앓는 이들을 돕기 등 단체들은 교회 내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사명이나 과업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목활동에 관계하여, 창설될 당시 의도했던 것을 넘어설 때가 많다.
3) 단체들 중에서 지역의 요구에 응답하기보다는 외국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 있는가?
어떤 단체들은 지역 본당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결과로서 생긴 것이 아니 라, 그냥 외국에서 받아들인 것들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것을 없애고 지역 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단체들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4) 단체와 소공동체의 구성원들
단 체와 소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단체 회원들은 본당의 어느 곳에서든지 심지어는 다른 본당에서도 올 수 있다. 그것들은 교회 내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 그런데 소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서 가장 지역적인 교회를 형성한다. 단체나 소공동체의 “가입 조건”은 무엇인가? 단체에서는 일정한 가입 조건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결혼했다든 지, 노래를 잘한다든지, 여자 혹은 남자여야 된다든지, 재정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든지, 회칙을 지킨다든지 등 소공동체에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예비 신자들, 이혼한 신자들, 술주정꾼, 낯 선 사람 등 모두가 들어올 수 있다.
5) 소공동체와 단체가 하는 일들
단 체들은 창설될 당시 목적으로 삼은 일을 한다. 소공동체는 지역 교회의 모든 기본적인 기능을 책임지도록 불림받는다. 일의 목록에는 한계가 없다. 주일 전례(사제가 없더라도), 신앙 전수,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사회 정의를 옹호하기 등 수도 없이 많은 것이다. 예 : 낯선 사람이 “이 지역에 가톨릭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 사람을 단체에 안내하겠습니까 아니면 소공동체에 안내하겠습니까? 그 이유 는 무엇입니까? 동아프리카 협의회는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 도적인 교회가 가장 지역적으로 육화한 것이다.” “학교나 운동들, 직업이나 관심사에 따라 생긴 모임들도 가치가 있고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소공동체를 보충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6) 단체나 소공동체에서 성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단체들은 성서보다는 회칙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소공동체에서는 복음나누기를 삶의 영적 기반으로 삼도록 되어 있다.
7) 단체들과 소공동체에서 제복이나 회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제복이나 회칙을 강조하는 단체들이 많다. 소공동체에는 복음 나누기, 지도자의 교대, 필요할 때마다 함께 일하는 것외에 정해진 “회칙”이 없다. 제복은 소공동체 정신에 위배된다.
8) 단체들과 소공동체에서 지도력을 어떻게 행사하는가?
엄격하게 상위하달식의 구조를 가진 단체들이 많다. 소공동체에서는 팀으로 이루어진 지도력, 교대하는 지도력, 그리고 “떠오르는 지도력” 즉 그룹 중의 어떤 사람들이 전체 그룹을 대신해서 일을 맡는 지도력 에 대해 이야기한다.
9) 단체와 소공동체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단체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소공동체는 교회가 가장 지역적으로 육화된 것이다.
10) 단체들과 소공동체 사이의 긴장
단체들과 소공동체들 사이에 긴장이 생길 수 있는 영역은 많다. 이러한 긴장들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 하는 일들이 부분적으로 같다. + 모임 시간이 같을 때가 있다. 둘 다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짐이 무겁다고 느끼고, 단체들을 위협을 느낀다. + 소공동체 구성원들은 열등감을 느낀다. + 본당 사목 협의회나 사제가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호하고 다른 하나는 소홀 히한다. 등 그 이유는 + 단체들은 자기들이 소공동체보다 역사가 깊다고 생각한다. 초대 교회에 이미 소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말이다. + 단체들은 소공동체가 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하나의 절충안으로서. 왜냐 하면 전에는 평신도가 교회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 단체들은 그 창설자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떠맡는다. + 단체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같은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가입하기 쉽고, 인간 본성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준다. 예) 제복 등 + 주된 이유 : 소공동체가 지역 교회라는 개념을 무시하는 것
11) 소공동체는 가장 지역적으로 육화한 교회라고 본다. 그렇지만 아직도 본당 에는 단체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질문한다 :단체들은 소공동체의 삶을 어떤 방법으로 협조하고 보충해야 하는가? + 단체에는 열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소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추진력이 될 수 있다. + 단체들은 소공동체가 할 일 즉,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 깊은 신앙 체험을 제공 하는 일, 소공동체가 할 수 없는 특정한 관심사를 제공해 주는 일(예 어머니 들, 간호사들, 교사들)등을 한다. + 단체들은 규모가 큰 일을 수행하도록 돕는다. 예를 들면, 앓는 사람이 있을 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고, 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산업적인 관계 등.
12) 단체들이 자신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새로 운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 교회를 소공동체들로 엮어진 공동체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단체들을 위한 자각 프로그램을 한다. + 소공동체와 단체들 사이의 대화 + 단체들의 자체 평가 + 본당 사목 협의회에서 소공동체들과 단체들을 조정, 정리한다. + 수도회나 전교회로부터 배운다. + 사제가 겪어야 할 변화로부터 배운다. 잠비아에 있는 모든 교구의 단체들과 운동들은 (그 대표들이 잠비아 주교 협의회의 평신도 위원회에 참석하는데)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매주 목요일은 단체들의 회합을 위해서 남겨 둔다. 그날 소공동체 모임은 없다. (2) 소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단체에도 속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