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
(공동체 : 교회의 이해와 실현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임병헌 신부(서울 대교구)
- 목 차 -
1. 문제의 제기
2. 공동체 신학의 전사(前史) 이해
2.1 이원론적 세계관과 구원관
2.2 경직된 교회관과 협의의 사목 이해
3. 구세사적으로 정향(定向)된 신학
3.1 원천으로부터의 쇄신
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
4. 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공동체
4.1 공동체 신학과 그 취지
4.2 사목의 원리로서 공동체
4.3 공동체의 구체적 실천
4.4 미래를 위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형으로서의 공동체
5. 글을 맺으며
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
(공동체: 교회의 이해와 실현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격동의 새로운 변화를 예감하며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맞았던 새 천년기의 시작을 벌써 우리는 4년 째 뒤로 하고 있다. 기실 “정보화 사회”라 총칭되어지는 오늘날 여러 분야의 사회 변화들은 기존의 삶을 규정하던 산업 사회의 사고 구조와 행동 양식으로부터의 결별을 촉구하고 새로운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루가 다를 정도의 엄청난 양과 빠른 템포를 가지고 변화하는 사회현상들을 체험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숨 가쁘게 그 변화의 리듬을 쫓아가든지 아니면 그저 두 손을 놓은 채 무기력하게 바라보든지의 선택에 내몰려진 듯 여겨진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어지는 ‘기존하는 것’에 대한 기득권 혹은 우선적 가치는 설자리를 잃은 듯 보여 진다.1)
이러한 격변의 한 복판에 2000년 전통의 교회가 오늘도 순례의 여정을 걷고 있다. 어떤 눈으로 이 변화의 소용돌이를 바라보아야 할까? 이러한 사회 변화가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기존하는 교회 현존 양식과 삶의 방식이 변화된 사회 상황 하에서도 변함없이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 앞에 교회는 자신을 적응하고 쇄신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고, 공의회 폐막 후 벌써 40년이 흘렀다. 물론 공의회가 오늘의 세대 변화를 예견하고 교회의 쇄신과 적응을 위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해답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의회의 전체적 기조와 신학은 적어도 오늘의 변화된 상황 안에서 교회가 자신을 쇄신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풍부한 단초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2)
“공동체 신학”은 바로 이 공의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회의 “쇄신된 자기 이해”이고 변화된 세상 안에서 교회가 자신을 구체화 하고 실현하기 위한 미래의 비전(vieion)이라 할 수 있다.3) 이런 맥락 하에서 한국 교회 ‘소공동체 사목’은 공동체 신학을 실천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서울 대교구가 1992년 ‘소공동체 사목’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어 점진적으로 전국 각 교구가 이에 동참함으로써 이제는 한국 교회 전체가 지향하는 구체적인 사목 프로그램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적으로 확산된 ‘소공동체 사목’의 지속적 추진과 정착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이론적 성찰과 신학적 기반이 얼마나 숙고되어 있는지의 물음이다. 이러한 숙고의 전제나 병행이 없는 소공동체 사목의 추진은 그 지속성을 유지하기 힘들 뿐 아니라 사목의 방향이나 합목적성을 추구함에 있어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하의 고찰에서는 그러기에 소공동체 사목의 지속적 성장과 미래의 방향 설정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공동체 신학이 지니고 있는 공동체의 신학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공동체 신학의 의미를 서술하고자 한다. 다른 발표에서 소공동체의 실천적 문제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지기에 본 고는 특별히 공동체 사목의 근거가 되는 신학적 내용을 부각시켜 상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 사목의 신학적 배경과 의미는 무엇이고 교회의 미래를 위해 그것이 지니는 신학적 전망은 무엇인지가 이하의 글에서 주된 탐구 대상이 될 것이다.
교회를 ‘믿는 이들의 공동체’4)로 파악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공동체 신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까지 천년을 넘게 중세를 지배해 온 신학적 기반과 교회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공의회 이후 공동체 신학에서 강조되는 신학적이며 실천적인 주장들은 그 이전의 신학과 실천들에 대비되는 측면이 적지 않고 이런 대비의 내용을 파악함으로써 결국 공동체 신학이 지향하는 바를 보다 더 또렷하게 규명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항에서는 그러기에 20C 초엽까지도 강하게 영향을 미쳤던 중세적 신학 경향 가운데 공동체 신학과 대비되고 연관되는 몇 가지 관점을 선별하여 약술하고자 한다.
2.1 이원론적 세계관과 구원관
주지하는 바처럼 중세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과 역사관은 철저하게 이원론적이었다. Platon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승과 저승, 성(聖)과 속(俗) 그리고 영(?)과 육(肉)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세계관 하에서의 신학적 논의는 당연히 이런 이원론적 틀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이와 결부된 교회의 삶 역시 이분법적 사고의 틀 안에서 영위될 수밖에 없었다. 중세 전체를 통틀어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윤리관, 교회관, 구원관, 신관 등은 바로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의 이해 지평 안에서만 설명되고 실천되어졌던 것이다.
이런 이해 안에서 당시의 세계관은 이 세상이 저 세상을 위한 준비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 단순히 짧게 지나는 과정으로서 그 자체로는 의미를 지닐 수가 없었다. 또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자연히 죽음 후의 실재이며 지금은 질곡일 뿐 미래 후세에 이루어질 구원을 준비하기 위한 의미 이외는 아무런 가치도 지닐 수가 없었다.5) 이와 병행해서 영은 가치 있는 것이요, 육은 무가치한 것에 중점을 두어 윤리관이 형성 실천되었고6) 성과 속의 구분은 교회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구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논의되었다. 그리고 역사는 단순히 수평적 연장선으로 차안과 피안의 구분 이외에는 별다른 큰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다.
구원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도 이원론적 구분은 명확했다. 의화(Justificatio)7), 신화(Divinisatio)8), 지복직관(Beatificatio)9) 등 이런 대표적 개념으로 설명되어졌던 구원에 관한 정의들은 현세와 하느님 나라를 분리시켜 서술하였을 뿐 아니라 지나친 사변적 개념화를 통하여 구원을 현실 삶과 괴리된 추상적 실재로 파악토록 만들어 놓았다. 자연히 일반인의 의식과 삶 속에서 구원은 ‘지금’ ‘여기’에서 현재화되는 구체적 실재(實在)요, 역동적으로 감지되는 현실적 체험이 아니라 현세적 삶과 무관한 추상적 개념으로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하느님은 자연 현세와 무관한 피안의 하느님일 뿐, 역사(歷史) 안으로 개입하고 인간 삶 속에 현존하며 역사(役事)하는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논의의 먼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결국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의 참 모습은 간과된 채 불변과 부동의 하느님으로서 피안에 안주하고 있는 개념적 하느님만이 전면에 부각되어 강조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일반 신앙인의 의식과 교회적 삶은 탄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2.2 경직된 교회관과 협의의 사목 이해
중세를 관통하는 교회관 역시 이러한 신학의 영향 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원론적 세계관 하에서 지상의 교회는 천상 교회의 대리요, 이런 한에서 지상의 교회가 지니는 권위 또한 천상의 권위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위를 정당하고 올바르게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장치를 잘 갖추어야 했고 이는 곧 교회의 외적 조직과 교계 제도의 강화로 이어진다.10) 처음 의도는 단순했고 필요에 의한 선의였으나 교회의 외적 규모가 거대해지고 시대가 거듭되면서 교회는 점점 외적으로 잘 조직되고 관리되는 교계 제도로 비춰지게 된다. 결국 교회는 잘 짜여진 교계 제도 안에 안주하게 되면서 성서가 보여 주는 ‘세상 속에 구원의 성사’라는 교회의 참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교계 제도가 부각되어 강조되는 교회관의 지속과 확대는 결국 교회 안에 성직주의(Clericalismus)를 확산시키는 원인이 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직주의는 교계 제도를 구성하는 성직자들이 지니는 권위를 천상 교계적 권위를 대리하는 것으로 주장했었다. 이런 주장은 자연스레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이분법적 신분 구조를 만들어 내고 이를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의 이원론적 테두리 안에 결부시킴으로 해서 둘 사이의 괴리를 더욱 골 깊게 만들어 놓았다. 성직자는 성스러운 교회 내의 일에 그리고 평신도는 속(俗)에 해당하는 세상의 일에만 관심을 둘 것을 강조한다.11) 평신도는 교회의 일과 관련해서는 피동적 수혜자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 능동적 참여자로서의 역할은 설자리를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셈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덧붙여 성직 중심의 교계 제도와 동일시되는 교회관에서 교회는 하늘 나라의 보화를 지상에서 간직하고 관리하는 은총의 보고로 이해되고 성직자는 그 은총의 관리자이며 평신도는 은총의 수혜자로 규정된다. 즉 지상의 교회에 보관된 천상의 은총은 성직자에 의해 합법적으로 집행되는 여러 성사들을 통해서만 평신도들에게 나뉘어 진다. 결국 평신도는 성사를 통해 성직자들에 의해 관리되고 은총을 선사받는 일방적 수혜자의 의미 이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교회 안에 평신도들의 생동적인 참여와 책임 있는 역할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의 사목 형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교회는 천상 초원을 세상에 옮겨다 놓은 목장이요, 평신도는 양떼이고 성직자는 사목을 통해 양떼들이 풀을 잘 뜯도록 관리하고 보호하여 궁극적으로는 천상 목장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서 사목은 성사를 통한 영혼을 돌봄(Cura anima) 혹은 목자적 돌봄(Pastoral care)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 정의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사목은 성직자들의 행위, 그 중에서도 특히 성사 집전에 국한 될 수밖에 없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목이 단순히 성사의 기계적 집행이라는 형식주의를 야기 시킬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서 평신도의 지위는 항상 성직자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었고 이런 한에서 당시 평신도에 대한 정의는 이성과 자유에 근거한 자율적 행동이라는 현대 의식과는 아주 동떨어진 사고(思考)였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목에 대한 이해가 총체적으로 그릇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12)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가 보여준 사목의 역동성을 담기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고 성사의 거행에 있어 평신도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사명 그리고 책임을 일깨우기엔 더 더욱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할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교회 이해와 사목 형태는 20C에 들어 급격히 변화된 시대적?사회적 상황에 직면하면서 그 타당성과 실효성에 대한 강한 의문을 유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위에서 약술한 바와 같이 기존하는 신학적 사고의 틀이 계몽주의와 자연 과학의 발달로 야기된 19C 말과 20C 초의 시대?사회적 변혁을 감당해 내고 해석해 내기에는 한없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변화된 상황은 신학과 교회에 하나의 도전이요, 위기 상황으로 인지되었다. 새로운 신학적 성찰과 교회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 변화의 폭과 깊이는 당시 시대?사회적 변화에 상응하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3.1 원천으로부터의 쇄신
직면한 도전 그리고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원천에 대한 숙고와 성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등한시 되었던 원천에 대한 깊이 있는 새로운 신학적 성찰은 이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 내기 위한 다양한 단초를 마련해 주었다. 원천에 대한 성찰에 있어 우선적인 대상은 교회와 신학의 원전(原典)에 해당하는 성서였다. 성서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그간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와 신학이 얼마나 자신의 본질적 핵심인 구원 역사에 관한 문제들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했는지 속속 밝혀내기 시작한다.
히브리적 이해의 지평 속에 있는 성서는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인간 또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놓지 않았다.13) 성서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종말론적 세계관을 견지하면서 차안이 피안과 철저하게 구분되고 분리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 현재임을 강조한다. 이런 성서적 사고 안에서 신관 역시 차안에 안주하는 부동(不動)의 하느님이 아니라 현재 안에 임재하는 하느님, 인간과 함께 살아 숨쉬는 역사의 하느님이 바로 신앙의 하느님임을 부각시킨다. 구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기존의 오해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성과를 갖게 된다. 즉 구원 역시 저 세상에 유보되고 국한된 실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역사(役事)로 감지되는 현재임을 밝혀낸다.
원전의 연구 결과로 얻어진 이러한 새로운 이해들을 통해 이제 세계와 역사는 더 이상 아무 의미 없이 단순히 지나는 과정이거나 무가치한 현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 계획과 구원 역사가 구체화 되고 현재화 되는 구세사의 현장으로서의 중대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14) 이는 또한 계몽주의와 자연 과학의 발전으로 크게 변화된 일반 의식 속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상응하는 신학적 이해와 실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이 구축된 신학적 이해 지평은 또한 교회의 자기 이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결국 교회로 하여금 자신이 견지했던 기존의 신학적 주장들을 총체적으로 점검케 하였고 교회는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변화된 시대에 자신을 적응하고 쇄신하기 위한 공의회를 개최하여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교회의 국면 전환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
‘신 신학 운동’으로 지칭되는15) 이러한 신학적 작업 결과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종합되고 수렴되어 변화된 시대 안에 교회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공의회의 주된 관심사는 빠른 시대의 변화에 교회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기의 주장이 어떻게 설득력 있게 이 시대에 선포될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이는 자신의 실존과 직결된 절박한 물음이었고 자연스럽게 교회의 본질과 실천에 관심을 집중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국 공의회는 선행 연구의 결과인 구원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근거로 이런 시대의 요청과 관심에 부응하여 교회를 새롭게 조명하고 원천에 상응하는 새 교회상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공의회는 천지 창조에서부터 세말(世末)에 이르는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교회의 정체를 파악하고 정의한다.16) 이런 교회의 본질을 비유적으로 잘 표현하는 개념이 다름 아닌 ‘하느님 백성’이다.17) 인간을 구원하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맨 처음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되고 구체화 한다. 당신이 지으신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충실히 머무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개입’ 하는 하느님이고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 그리고 그 백성과 함께 하는 ‘살아 있는’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 백성 또한 현존하는 자신들의 하느님에게 희망을 걸고 잠정적인 것이긴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채워지는 희망을 구원으로 체험하며 감사하고 찬미하는 구원의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이 하느님 백성이 훗날 신약에 들어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교회의 원형이 되고 모델이 된다. 결국 공의회는 교회를 구원 역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가시화요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종말론적으로 선취되는 구원을 체험하는 하느님의 백성 그 자체로 정의한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지상에 옮겨 놓은 천상의 교계 제도이거나 후세의 하느님 나라를 위해 유보된 보화를 저장해 놓은 보고(寶庫)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파견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느님에 의해 새로이 소집되고 형성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은 이 새로운 백성 안에서 옛 이스라엘인 당신 백성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시고 구원의 순례를 지속하고 있는 이 백성과 ‘함께’ 그리고 이 백성을 ‘위해’ 현존하며 역사한다. 이런 하느님의 현존과 역사가 곧 하느님 백성에게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구원인 것이다. 바로 그 구원이 현재화 되고 선취되는 장(場)이 다름 아닌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인 것이다. 결국 공의회에 의하면 교회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구원을 선취하도록 하는 한에서 교회는 세상 안에 ‘구원의 성사’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공의회는 교회가 지니는 구원의 성사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완성하기 위한 구원의 도구(Instrumentum Salutis)임을 분명히 한다.18)
이 같은 공의회의 교회관은 교회의 본질을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교회에 본래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구원의 역동성을 부각시키고 신자들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선취되는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는 것이었다. 결국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통해 현존하는 구원에 참여함으로써 활력을 얻고 이를 통해 교회는 세상에서 더욱 구원의 성사가 될 수 있다는 공동체 신학의 근본 기초가 바로 이 공의회에 의해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공의회에 의해 새롭게 정의된 교회 이해를 이제 어떻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해 내고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 즉 어떻게 오늘의 교회가 이 세상 안에 구원의 성사요 구원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구체적인 물음이 공의회가 폐막된 이후 교회 안에 최대의 현안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각 지역 교회들은 지역 시노드를 개최하여 공의회의 구체적 실천을 모색하였고 신학적인 후속 작업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이런 여러 노력 가운데 크게 눈에 띄는 것이 다름 아니라 공의회가 제시하는 구원의 성사로서의 교회관을 ‘공동체’를 통해 구체화 하고 공동체의 삶을 통해 실천하려는 신학적 작업과 실천적 노력들이라 할 수 있다. 즉 공동체는 단순히 교회를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 지니는 구원의 역동성과 세상 안에 구원의 성사로서의 교회 모습을 이 공동체에 담아 표현하려는 교회의 구체적인 쇄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4.1 공동체 신학과 그 취지
공동체 신학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쇄신된 교회의 구원사적 자기 이해와 교회의 자기 실현을 지향하고 있다. 공동체란 용어는 새로이 만들어진 특수 개념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성서 번역본에 교회라고 번역된 성서상의 용어 Ekklesia를 교회(Kirche 혹은 Church)라 번역하지 말고 공동체(Gemeinde 혹은 Community)라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19) 이런 주장은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교회 쇄신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용어 변화를 통해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총체적인 교회 이해와 쇄신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공동체 신학의 주장에 의하면 그동안 공의회 이전까지 중세를 관통하여 내려온 교회의 모습은 성서에서 제시된 교회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 모습 속에서 교회 안에 체험되던 구원의 역동성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교회가 교계 제도와 동일시되면서 교회를 정의하고 설명함에 있어 교회의 구조적이고 법적인 측면만 부각되어 강조되었다. 이로써 교회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본래의 성서에 나타난 구세사적 의미가 훼손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면서 교회를 쇄신하고 성서의 교회 모습을 재현하기에는 이 용어가 시대?사회적 부하를 너무 크게 안고 있어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총체적 쇄신을 위해서는 Ekklesia를 성서적 의미에 맞게 공동체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것을 통해 그 용어가 지닌 본래적 의미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단순히 용어상의 번역을 문제 삼고자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용어의 변화를 통해 앞서 서술한 것처럼 성서적 의미에 상응하는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교회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이해하고 쇄신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즉 교회가 공동체로서 성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미 이 세상에서 선취한 종말론적 구원을 향유하는 장(場)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금 여기서’ 선취되고 향유되는 ‘구원의 장(場)’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개념이 다름 아닌 ‘공동체’(Ekklesia)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이 초대 교회의 모습을 오늘에 가장 잘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고 또 현대 의식의 이해 지평에도 훨씬 더 부합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보여지는 공동체는 우선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믿는 사람들의 모임’(Ekklesia)이요, 하느님의 백성(Qahal Jahwe)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함은 인간을 향해 직접 건네시는 말씀 그 자체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 역사하신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듣는 것이다. 이 들음은 또한 단순한 청각적 들음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들음을 통해 공동체로 모인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역사를 기억(Anamnesis)한다.20)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役事)는 이 기억을 통해 공동체 안에 현재화 되고 또 그 기억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신과 역사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 공동체를 통해 현존으로 체험된다.21) 이처럼 성서에 나타난 공동체들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공동체의 형성과 삶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능력(구원)을 체험하고 향유하는 생동감 넘치는 구원의 공동체(구원의 場)였다.
성서가 보여 주는 이 같은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변화된 오늘의 시대 상황 안에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그 구원의 공동체가 지녔던 활력과 역동성을 오늘에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분명 교회의 쇄신에 있어 단순한 지엽적 질문일 수 없는 것이었다. 공동체 신학은 이러한 물음이 교회의 전반적인 구조와 제도, 전례와 신심 생활을 포함한 삶의 양식 그리고 기존하는 사목 방법에 대한 총체적 숙고와 성찰을 촉구하는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도전이 성직자나 평신도 혹은 수도자 중 어떤 한 부류에만 국한된 채 해당되는 것일 수는 없다. 공의회가 강조하는 바처럼 교회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이루는 공동체이기에 그 안에 너와 내가 따로 없이 공동으로 이 도전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공동체 신학은 바로 이러한 공동의 노력을 통해 비로소 구원을 중재하고 구원에 참여하는 구원의 공동체로서 ‘하느님의 공동체’(Ekklesia tou Theu)는 형성되고 이루어 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4.2 사목의 원리로서의 공동체
공동체는 이처럼 교회가 ‘무엇이냐?’라는 교회의 본질적 이해에 대한 교회론적 답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어떠해야 하느냐?’라는 실천적 질문에 대한 사목 신학적 답을 제공해 준다. 즉 어떻게 교회가 변화된 오늘의 시대 상황 안에 자신의 본래적 역동성과 생동감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사목적 물음에 공동체 신학은 그 기준과 목표를 설정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교회 이해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목 원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공동체 신학은 ‘사목’을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이전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로 해석하고 정의한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이전 이원론적 세계관 하에서의 사목 이해는 성직자들의 올바른 성사 거행을 통해 교회에 위임된 은총을 잘 관리하고 분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22) 이것이 곧 내세를 위한 성실한 준비를 의미했고 그래서 더 사목은 좁은 의미에서 ‘영혼을 돌보는 일’(Cura anima)에 국한되어 이해되었다. 당연히 이런 사목에서는 성직자들의 역할이 부각되고 평신도는 일방적 수혜자로만 머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삶의 형태가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속에 넓게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넓은 의미의 사목은 예수의 삶을 모델로 삼아 그가 열두 제자 공동체와 함께 행한 구원의 행적들을 오늘의 공동체 안에 재현해 내는 것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즉 예수의 삶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구원을 가시화 하고 중재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사목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의 삶을 모범삼아 이 세상에 구원을 중재하고 가시화 하는 교회의 모든 삶과 행위들을 넓은 의미에서 사목이라 정의하는 것이다.23) 이런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삶을 뒤따르고 그 삶을 오늘의 시대에 재현하도록 불리움을 받고 그에 응답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그 하느님 백성 모두가 신분의 구분 없이 이 세상에 구원의 중재를 위한 사목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과 사명을 부여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평신도들은 교회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수동적 자세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구원의 체험과 중재를 위해 투신하고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 신학은 사목에 있어 평신도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이를 통해 공동체에 생동감을 불어 넣고자 한다.
기실 예수가 원했고24) 그의 뜻을 진정으로 재현하는 구원의 공동체는 모든 하느님 백성이 이 구원의 중재를 위해 공동으로 투신하고 그를 위한 책임을 분담함으로써 비로써 형성되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투신과 책임의 분담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은 공동체 안에 현존하고 공동체를 통해 중재되는 하느님의 구원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 공동체는 구원을 중재하는 모든 사목적 행위의 기준과 목표가 되는 것이고 또한 원리가 되는 것이다. 사목의 원리로서 공동체는 결국 모든 하느님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그 참여를 통해 선취되는 구원을 체험하도록 하는 데 모든 사목적 관심과 방법을 집중시킨다.25) 이런 하느님 백성의 능동적 참여와 구원 체험이야 말로 공동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요 이를 통해 비로소 교회는 활력과 역동성을 지닌 구원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런 한에서 교회는 공동체로서 세상 안에 '구원의 성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3 공동체의 구체적 실천
잘 알려진 것처럼 공동체의 구체적 실천 사례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전개된 남미의 “기초 공동체” 운동들은 이러한 신학적 기반들을 근거로 하여 후에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이 기초 공동체는 이론에 앞서 실천이 선행한 경우이다. 대다수 남미의 국가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지역적 특수성은 그들이 지닌 풍요로운 문화와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억압이라는 비구원의 상황을 야기시켜 놓았다. 오랫동안 비구원의 상황 하에서 고통을 견뎌내면서 그들은 복음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들의 복음적 숙고는 구원이 차안의 실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선취되는 종말론적 현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이러한 자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하였고 그 사람들은 이 공동체를 통해 자신들이 경험하는 비구원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고(연대, Solidarity) 투신함으로써 하나 둘 씩 비 구원의 상황이 극복되어지는 구원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구원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결속력을 더하게 하고 그 공동체는 활력과 생동감을 얻게 된다. 물론 광활하게 넓은 땅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제의 수 때문에도 현실적으로 사제 없는 이런 공동체의 확산은 탄력을 잃어가던 남미 교회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 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26)
이렇게 이론적 숙고에 앞서 현실적 필요에 의한 구체적 실천이 앞선 남미의 기초 공동체는 자신들 안에서 뿐 아니라 다른 대륙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문제는 이들의 실천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기 위해서도 또 그들의 실천이 지속성을 갖고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이런 실천적 사례들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신학적 작업을 필요로 하게 된다. 여기에 많은 남미의 신학자들이 동참하게 되고 그들의 작업을 통해 ‘해방 신학’이라는 남미의 특수성이 반영된 신학적 관점이 차츰 자리를 잡게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해방 신학의 근저에는 앞서 언급한 구세사적으로 정향된 역사 신학이 놓여 있다. 즉 하느님의 역사 또는 하느님의 능력으로서의 구원이 저 세상의 실재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구체적 응답과 참여를 통해 지금 여기서 선취되고 현실화 되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고 응답하는 곳에 비 구원의 상황을 극복해 주는 하느님의 현존과 역사(役事)가 체험되며 그것이 곧 공동체 즉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는 지금 여기서 선취되어 성사적으로 현시되는 구원의 체험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실천과 정리된 신학이 남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비구원의 상황이라 인식하고 역사 신학의 취지를 근거로 하여 자기 나라의 고유한 상황과 문화에 걸맞는 신학적 이론과 실천적 공동체 모형들을 제시하고 구체화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이런 설명이 공동체가 빈곤과 억압의 상황에 처한 나라들에게만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그러기에 공동체는 그런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폄하시키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처한 비 구원의 상황이 이러한 숙고를 하도록 한 촉매제는 되긴 했지만 그 주장과 실천의 근거에는 공의회가 제시하는 신학과 교회관이 자리 잡고 있고 그래서 오히려 남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대륙들의 공동체 운동들은 공의회가 제시하는 교회관을 구체적으로 더 잘 실천한 모델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외적 상황은 다르더라도 유럽의 교회가 역으로 이 공동체를 통한 사목 방법을 활용하여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우연의 결과라 할 수 없는 것이다.
4.4 미래를 위한 한국 교회의 새로운 모형으로서의 공동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동체는 변화된 시대 및 사회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키기 위한 교회의 쇄신된 자기 이해요 동시에 자기 실현(사목)을 위한 사목의 원리이다. 이제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근거를 두고 그 후속 시대에 성장?발전되어 오늘에 이른 공동체의 이론과 실천들이 다가올 교회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교회의 새로운 실현 양식으로 미래의 사회에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지의 물음이다. 특별히 이러한 질문을 단편적이나마 한국 교회 상황과 연관시켜 숙고해 보는 일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변화는 그 양이나 속도에 있어 세계의 어느 나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특이하다. 한국 사회는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탈바꿈한지 얼마 안 된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금 그 산업 사회를 벗어나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는 전환기적 혼돈 상황을 비교적 짧은 시기에 연이어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과 변화에 비례한 그만큼 또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이 상존한다 할 수 있다. 윤리와 가치관의 혼돈 현상은 차치하더라도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빠른 템포의 도시화와 그에 따른 주거 이동, 삶의 세분화와 전문화를 통한 생활 양식의 다양화 그리고 정보의 홍수와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더욱 촉진될 개인화 경향 등만 보더라도 미래의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변화 되고 다원화 되어 있을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27)
변화된 미래 모습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는 없지만 확실하게 예측되는 한국 사회에 불어 닥칠 변화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 교회는 무풍지대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미래를 위한 한국 교회의 실존 전략은 무엇일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화두 같은 대답으로서의 표제어가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 이해 속에 함축된 ‘다양성 속의 일치’(Enheit in Vielfalt)이다. 다변화 되고 다원화 될 미래의 삶의 양식이나 방법 그리고 사회 형태와 가치관들… 교회 역시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삶의 구조와 표현 양식 그리고 다양한 사목 형태를 가질 수 있어야만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자신의 생명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물론 이 교회의 다양성이 교회의 본질로부터 유린된 채 그 본질을 호도하거나 왜곡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일치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나인 공동체에 수렴되고 일치되어 있을 때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성 속의 일치를 가능하게 해 줄 교회의 자기 표현 양식이 다름 아닌 공동체이다. 그 이유는 공동체가 이뤄지는 삶의 자리가 일정하게 정해진 제한된 지역(Territorium)일뿐 아니라 삶의 분야와 양식(Function)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있는 곳에 위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통한 사목 방법이 지역의 원리(Territorial Prinzip)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기능의 원리(Functional Prinzip)28)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와 삶의 세분화 및 다양화에도 불구하고 세분화된 사회의 각 영역 그리고 다양화된 삶의 자리가 곧 공동체의 현존 장소일 수 있다. 이렇게 공동체가 현대 사회에 상응하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확보하는 한에서 오늘날 교회의 대안일 수 있고 교회에 생명력과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인 전체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어 일치를 보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래의 한국 사회에 있어 공동체가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공동체가 구원을 선취하고 중재하는 場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실현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앞서 언급한 두 번의 엄청난 전환기적 사회 변화를 체험하는 동안 한편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실감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 발전 이면에 잠재된 여러 형태의 ‘비 구원 상황’을 체험하고 있다. 이전에 남미가 처했던 상황과 외적인 모양새는 같지 않지만 내적인 내용 면에 있어서는 유사한 소외와 단절 그리고 억압과 예속 등의 비 구원 상황이 지금 한국 사회에 산재해 있다.29)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되는 현대인들의 구원에 대한 요청에 적합하게 응답할 수 있는 전략이 다름 아닌 공동체이다. 즉 다양한 삶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그 삶의 현장에서 유연하고 탄력 있게 형성될 수 있는 공동체는 그 삶의 자리가 하느님 백성으로 하여금 복음적 투신과 참여의 현장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 백성의 복음적 투신과 참여를 통해 그 공동체는 구원을 체험하고 구원을 중재하는 장(場)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또 공동체는 교회의 본질을 잘 반영하는 교회상이요 다양화 될 한국의 미래 사회 변화에 적합한 교회의 표현 양식이며 교회의 새로운 모형(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본 글은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수행되어 온 ‘소공동체 사목’을 성찰하고 미래의 진로와 발전을 모색하는 데에 있어 ‘소공동체 사목’의 근거가 되는 공동체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그 좌표 설정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자 의도되었다. 소공동체 사목의 지속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제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적 방법들이 숙고된 신학적 기반에 근거를 두지 못하면 지속성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본 고는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신학적 배경과 의미 그리고 공동체가 교회의 미래를 위해 지니는 신학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다. 이런 서술을 통해 본 논문은 공동체가 교회의 본질에 부합하고 변화된 사회 상황에 상응하는 교회상이며 미래의 교회 이해와 실현을 위한 새로운 사목 원리요 교회의 새로운 모형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본 글은 공동체 신학이 함축하고 있는 광범위한 내용을 제약된 지면에 모두 담아내는 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공의회 이후 봇물처럼 터진 공동체 신학에 대한 논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소공동체 사목이 시작된 이후에도 이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약하나마 이 글이 소공동체 사목의 미래와 성숙을 위한 신학적 성찰의 작은 밑거름이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소공동체 사목이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기반으로 구원 역사와 구원 중재라는 사목의 더 큰 틀에서 즉, 교회의 자기 실현(구원 중재)을 위한 기본 기능인 Martyria, Liturgia, Diakonia, Koinonia를 활용하여 교회의 총체적 삶을 숙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김정용 신부(광주 대교구)
I. 발제 논문의 주제
발제 논문으로 제시된 본래 주제는 ‘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천주교 소공동체’이다. 그리고 발제자가 제시한 또 다른 주제는 ‘공동체: 교회의 이해와 실현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논평자의 견해로는 이 두 주제가 서로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본래 주제 자체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동안 전개되어 온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 사목의 현황을 신학적으로 성찰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발제자는 이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150쪽 참조). 그러나 발제자가 본래 주제와 더불어 새롭게 제시한 주제는 전혀 다른 맥락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발제 논문의 내용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아쉽게도 발제 논문에는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에 대한 신학적 진단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발제자는 “실천적으로 확산된 ‘소공동체 사목’의 지속적 추진과 정착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이론적 성찰과 신학적 기반이 얼마나 숙고되어 있는지”(135쪽) 묻는다. 이 물음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나온 것인가? 발제자가 던지는 물음의 근거불명은 문제 제기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II. 발제 논문의 문제 제기
발제자는 사회 현상에 대한 매우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언급으로부터 문제를 제시하면서 급속한 사회 변화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교회가 과연 “기존하는[발제자에 따르면 전통적인] 교회 현존 양식과 삶의 방식”으로 이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지 의문에 처한다(134쪽 참조). 그러나 발제자의 문제 제시와 물음은 ‘문제 제기의 내용’ 자체로 보아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대로 문제 제기가 피상적인 현상 읽기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교회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현재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발제 논문에는 단지 변화되고 있다는 것 외에 사회 현상 변화가 내포하고 있는 징표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없다. 이러한 사회 현상 읽기 때문에 반듯하게 보이는 발제자의 물음 자체마저도 마치 고립된 것처럼 여겨진다.
매우 피상적인 세계 현상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역을 거쳐 공동체 신학이라는 내용물을 싣고 곧장 한국교회의 소공동체에 안착한 논문의 속도는 마치 추상화를 보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발제자는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의 구체적 맥락에 대한 진단을 무사 통과한 후 그에 대한 구체적 분석도 검증도 없이 곧장 ‘실천적으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소공동체 사목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신학적 기반’을 문제 삼고 ‘신학적 숙고 없이는 소공동체 사목의 지속성과 방향’은 불투명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135쪽 참조. 또한 결론부분인 149쪽 참조). 그리고 발제자가 내놓는 처방이 이른바 ‘공동체 신학’이다.
그러나 발제자의 의도, 즉 ‘소공동체 사목’의 근거가 되는 공동체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그 좌표 설정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자”(149쪽) 한 의도는 결정적으로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수행되어 온 ‘소공동체 사목’을 성찰”(149쪽. 이 성찰이 발제 논문의 어디에서 이루어졌는가?)하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이 공동체 신학이 어디에 땅(토대)을 두고 이루어진 작업인지 그 정체를 공감하기 어렵다.
발제자가 언급한 바대로 신학적 숙고 없이 구체적 실천의 방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와 동시에 논평자는 신학적 이론 역시 구체적 실천의 현장 속에서 익혀서 나온 것이 아니면 그 역시 생명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III. 한국 교회의 소공동체 사목을 위한 신학적 기반으로서 “공동체”?
1. 한국 교회의 사회적 환경과 대안으로서 공동체
발제자는 한국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해서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공동체론의 당위성을 정당화 한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변화와 다원주의적 경향 때문이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다시 정보화 시대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한국 사회는 도시화, 생활 양식의 다양화, 그리고 정보와 매체의 발달로 인한 개인화 경향의 특성을 띠고 있다(147-148쪽 참조). 발제자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실존 전략’은 바로 ‘공동체’이다.30)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일정한 지역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지역의 원리)와 삶의 분야와 양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기능의 원리)를 포괄하고 있어 현대 사회가 요청하는 다양성과 역동성에 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148쪽 참조).
공동체론 주장의 또 다른 사회적 맥락은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 과정에서 빚어진 여러 형태의 심각한 ‘비구원적 상황’이다.31) 이런 상황에서 교회 공동체가 복음적 투신을 통해서 구체적 삶의 현장과 역사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증거함과 동시에 현세 질서의 복음화와 하느님의 구원 체험을 세상 안에서 매개하는 역동적 구원의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사명과도 상응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한국 교회의 새로운 모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148쪽 참조).
논평자가 보기에 발제자의 한국 사회 분석은 물론이고 그에 따른 공동체 교회론의 논거 역시 엄밀하거나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 사회 안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공동체’라는 교회 스펙트럼을 통해 바라보려고 하는 발제자의 의도는 장차 한국 교회에서 더 심도 있게 숙고되고 논의되기를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