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알기 쉬운 사회교리
* 집 필 : 성염 교수 (서강대)
[1회]
나도 모르는 새에
성당 오니 참 좋더라! 우선 마음이 평안하고 주일마다 좋은 말씀 듣고 선량한 사람들과 사귀어 흐뭇 하더라. 교우들과는 술 한 잔을 해도 뒷끝이 없어 좋다. 주님의 축복 속에 내 아이 공부 잘하고 내 남편 사업 잘되고 식구들 건강하니 이 아니 고마운 일인가! 후세일랑 주님 손에 맡겨드리고....
그러다 보니 약간은 남 생각도 하여 한 마음 한 몸 운동에, 헌혈에, 사랑의 집 헌금, 이웃돕기 바자에 내것을 내주는 일도 조금씩 몸에 배어 좋다. 간간이 성당 마당에서 무농약 열무, 유기농 사과, 가톨릭 농민회 마늘과 고추가 팔린다. 내 식구 안심하고 먹일 먹거리라서 비싸다 않고 한 부대쯤 사들고 귀가한다. 내 생명도 자연의 생명도 다 귀하다는 강론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전번 주임 신부님은 성모회를 거들어 떡장수도 많이 하셨지....
사형제도를 폐지하자고, 낙태를 허용하는 법을 만들지 말라고 서명을 하란다. 게시판에 붙은 저 태아 사진이며, 텔레비전에서 보는 소말리아의 앙상하게 굶어 죽는 사람들, 유고내전과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납덩이처럼 가슴을 내리누른다. 전같으면 그냥 보아넘겼는데.... 신앙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새 내가 달라져가는 기분이다. 신부님은 그게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덕분이라는데, 글쎄 <사회 교리>가 도대체 뭘까?
[2회]
사회교리(社會敎理)?
열 십자(十)를 붓으로 쓰자면 가로 획을 먼저 긋더라? 아니면 세로 획을 먼저 긋더라? 잘못 쓰면 개칠을 한다고들 욕하는데.... 신앙생활 수십년이 되어도 "하느님 사랑이 먼저더라, 아니면 사람 사랑이 먼저더라?" 하며 머리를 갸웃둥해야 하는 경우를 많이 만난다. 누구는 "네 온 마음으로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마태 22,37-38)는 말씀을 꼽고, 누구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읍니다"(1요한 4,20)는 말씀을 꼽는다.
우리가 모시는 십자고상은 땅에다 박는 기둥이 먼저고 양팔을 매다는 횡목은 그 다음이면서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먼저 나중 없이 하나로 묶어 준다. 그래 살다보니 "목구멍이 포도청입니다. 양심대로 했다가는 장사 망합니다" 하는 소리가 입에 붙을 적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이 <사회교리>이다.
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셔서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 그 자손들을 일으키시고 보니, 남 없이는 사람 노릇도 못하고 구원과 멸망도 남들한테 잘하고 못하기에 달린 것이 우리 신세이다. 그래서 "현세에서 인간 사회 전체로 보아서나 개개인으로 보아서나, 사람다운 세상을 이루는 도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교회의 가르침"이 <사회교리>이다.
[3회]
人間大道
우리가 날마다 바라보며 사는 (북한산)은 오르는 길이 많기도 하다. (칼바위능선)을 타든 (진달래능선)을 타든 (깔닥고개)를 넘든 (백운대) 산정에 오르기는 매한가지다. 산이 클수록 자락과 골짜기가 많아 오르는 길도 여러갈래이다. 우리 선조들 말씀대로 대도무문(大道無門), 하느님의 나라는 들어가는 문이 따로 없다. 그런데 문은 따로 없다지만 길은 외가닥이다.
어머니이신 교회가 우리한테 가르치는 <사회교리>라고 해서 힘들고 겁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사람 귀한 줄 알아라!"이다. 지금의 교황님은 1979년에 좀 어려운 말씀으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그 깊은 경탄을 일컬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달리는 그리스도교라고도 일컫는다"(인간의 구원자 10항)라고 하셨다. "사람답게 살아라!"는 교훈만 아니고, "사람을 살려라!"는 엄명이다. 교황님은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다.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다"(14항)라고도 하셨다. 개인이든 하느님의 백성이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외길, 인간이라는 길이다.
알아듣기 힘들다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하리라!"(창세 9,6)는 말씀을 풀어준 것이 사회교리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이 가장 쉽고도 분명하다.
[4회]
하느님의 얼굴
하느님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누구를 닮으셨을까? 예수님의 얼굴이야말로 하느님을 꼭 닮으셨겠지만 예수님의 수의(壽衣)라고 전해오면서 이탈리아 도리노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는 염포마저 가짜라고 드러났으니 예수님의 얼굴을 볼 길은 없을 듯하다. 그럼 하느님의 얼굴을 세상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난 번 인간대도(人間大道)라고,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외가닥길, 사람한테 잘 해주는 길이라 했다. 내가 세상 사람을 다 구제하지는 못할 터이고 그럼 누구한테 먼저 잘 해주어야 할까? 어머니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회교리라는 것은 기실 <하느님의 얼굴 바로 찾기>라고 하겠다.
영양실조로 굶어 죽는 소말리아 어린이와 얼굴이 신선처럼 벌건 미국의 팔순노인을 마주 세운다면, 국민학교도 못나온 막일꾼과 일류대학 교수님, 예수라면 말만 들어도 침을 뱉는 무신론자와 하느님만을 위하여 태어난 신부님, 뺑덕 엄마만큼 못생긴 공사판 아주머니와 미스 코리아를 마주 세운다면 누구 얼굴에 하느님이 보일까? 나같으면 대뜸 장수하신 영감님, 유식하신 교수님, 거룩하신 신부님, 어여쁘신 아가씨를 꼽고 싶다. 하느님께 복도 많이들 받으셨지....
그런데 말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딴판이다. "하느님의 얼굴은 가난한 사람들 얼굴에 있다!" 교회는 이것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한다.
[5회]
가난이 죄?
신앙인이 처음부터 분명히 알아둘 것은 가난은 악이요 범죄라는 사실이다. 우리 앞에 "하느님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죄악의 희생자들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수긍되지 않거든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작년에 노벨 평화상은 멘추라는 여성, 과테말라의 설흔 세 살 난 젊은 여성에게 돌아갔다. 최근에도 쿠데타가 일어난 과테말라 국민의 53퍼센트를 차지하고도 정치와 사회 그리고 교육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채 군부의 인종말살 정책의 대상이 되어온 인디안 원주민의 한 사람이다. 인디안들의 살길을 찾아주려고 노력하다가 지금까지 수십명의 사제, 수녀들이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멘추가 열 두 살 때에 오빠가 농민 시위에 가담했다고 군인들에게 산 채로 불태워 죽임당했고 아버지는 총살당했고 군인들이 어머니를 강간한 뒤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그러니까 과테말라 인디안들의 가난은 천주교 국가인 그 나라에서 잘사는 신자들이 총칼든 신자 군인들을 앞세워 만든 죄악이다.
우리가 소말리아의 앙상한 해골들, 산 송장들을 텔리비젼이나 가톨릭 신문 2면에서 가끔 보았다. 그런데 인성회와 가톨릭신문 외에는 한국교회 어느 교구 어느 본당도 그곳을 돕자는 구체적인 모급 운동을 벌이지 않았다. 일년에 8조원의 음식 쓰레기를 내는 풍요한 한국 사회와 굶어죽는 소말리아 교회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눈뿐이다.
[6회]
세눈박이
십자가! 우리한테 얼마나 친숙한 표지인가? 성당 종탑에도 제단에도 우리집 안방에도 걸려 있고, 수녀님 복장에도 여교우들의 목에도 예쁘장한 금십자가가 반짝인다.
신앙인들이 남과 다른 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눈이 하나 더 달린 점이다. 두 육안 사이에 신앙의 눈이 하나 더 달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세눈박이인 셈이다. 남들은 십자가가 사형대라는데 우리는 구원의 깃발이라고 부른다. 미신자가 보기에는 무슨 정치활동을 하다가 로마 당국의 손에 걸려서 처형당한 죄수의 시체가 매달려 있을 뿐인데 우리 믿음의 눈은 거기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 죄많은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목숨을 내놓으셔야 했던 하느님의 아들을 뵙는다. 유다인들은 그분이 죽었다고, 그래서 끝장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죽어서 인류를 구하셨다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믿는다.
세눈박이라서 우리는 세상사도 조심해서 본다. 예컨데 어떤 회사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사람도 신문도 죄다 노동자들이 못된 사람들이라고 욕하지만 우리는 공정한 임금을 받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조심해서 본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직장을 잃고 감옥을 드나들면서 참교육을 외치는 일을 보면서 우리는 남들처럼 함부로 그들을 욕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권력자들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보라는 가르침, 그것이 <사회교리>이다.
[7회]
"엄마, 반찬 좀 많이 싸줘!"
초보운전이 아닌 바에야 우리는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도 경치를 감상하고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주부들은 부엌일을 하면서도 래디오의 여성살롱 시간 프로를 다 들으면서 울고 웃는다. 처녀가 선을 볼 때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지만 머리 속은 자기의 언행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까 헤아리고, 저 남자에게 내 인생을 걸 만한가 가늠하는데 온통 쏠려 있다.
신앙인들에게는 두 개의 육안 말고 신앙의 눈이 하나 더 달려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세눈박이 인생이라서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방법이 특이하다. 똑같은 사건을 세속의 사건이자 하느님의 사건으로 본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는 신앙의 이중시각(二重視角)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학교 도시락 싸는 엄마 곁에 와서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보자. "엄마 엄마, 그 반찬 좀 많이 싸줘. 우리 반 애들이 참 좋아해. 애들이 울 엄마 요리 솜씨 최고래...." "엄마, 그거 싸지마. 애들이 다 뺏어먹어버려." 육안으로 보면 둘째 아이가 자기 몫을 빼앗기지 않고 잘 챙길 똑똑이라고 하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두 아이가 전혀 딴 인생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 아이들의 언행을 지혜롭게 관찰하는 이중시각이 있어야
만 <사회정의>를 가르치는 교회의 뜻을 알아듣게 된다.
[8회]
팔의 길이
"손이 크다"라는 말이 있다. 장안의 일류 복부인 얘기가 아니다. 여자들은 으례 깍정이들인데 남달리 남에게 잘 주는 사람, 그것도 쬐끔 주지 않고 넉넉히 내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부잣집 맏며느리깜이라고들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남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우리 팔이 남보다 길다는 것이다. 품이 넓다는 것이다. 품이 넓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품안에 맞아준다는 뜻이다. 욕심스런 우리네 뭉뚝한 팔도 처자식, 피붙이는 끌어 안는다(그것도 못하면 사람도 아니게?). 동료들, 계꾼들, 같은 쁘레시디움 단원들, 성당반 교우들은 품을 줄 안다. 그리고 세월이 가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그 팔이 조금씩 더 길어져서 측은한 사람들을 안아 주게 된다. 불쌍한 사람이면 보아 넘기지를 못한다. "정이 많은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다(多情佛心)"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가 늙어, 죽을 때가 임박하여 과연 얼마나 신앙이 숙성했는가 스스로 재어보고 싶으면 자기 팔길이를 재보면 되리라. 팔의 길이는 우리 사랑의 크기, 이웃 사랑의 크기를 말해 준다. 그리스도신자는 마땅히 사회정의에 투신하여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결국 우리의 팔이 넓어졌을 때에만 알아듣는 말이다.
[9회]
밖으로 굽는 팔
어떤 노인이 자기집 정원에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이웃이 물었다. "망고나무를 심는 중이오." 노인이 대답하였다. "아니, 그 나무에서 망고를 따 잡수실 생각입니까?" "그게 아니오. 나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평생 즐겨 먹은 망고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심은 나무였음을 깨닫게 되었소. 그래서 이렇게 조금이나마 몇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이 것은 그분들에 대한 내 감사의 표시라오." (안토니 드 멜로의 <맷돌> [타임기획]에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 맞는 말이다. 똑같은 몫돈이 나가도 친정식구한테 주는 마음하고 시댁식구 주는 마음이 그렇게나 다르다. "처삼촌 무덤에 벌초하듯"이라는 속담도 있고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다. 정말 세속의 이치대로 살아가는 한 팔은 안으로, 안으로만 굽는다. 교회의 <사회교리>를 배우면서 우리 팔을 밖으로도 뻗어 보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안방에 걸린 십자가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한숨을 짓게 되는데, 어느날 문득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었다. "저런, 저런, 저럴 수가...." 저기 십자가에 안으로 안으로만 굽어지는 팔을, 안으로 굽지 못하게시리, 하느님이 아예 못질을 해 버리시다니! 아아, 신앙이 저토록 힘들어서야!
[10회]
I.N.R.I
우리 목에 걸고 다니는 금붙이는 십자가나 방에 모셔둔 십자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 머리 위에 외국말로 I.N.R.I 넉 자가 새겨져 있다. 빌라도가 십자가에 써 붙인 죄목 <나자렛사람 예수, 유대인의 왕>을 첫 글자만 딴 것이다. 빌라도가 사형수 이름 앞에 굳이 <나자렛사람>이라는 출신지를 써넣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루살렘 집권층과 언론이 예수님을 다짜고짜로 미워한 이유 하나가 그분의 출신지였다. 가난한데다가 반골이어서 주는 것 없이 미운 갈릴래아 출신이었다. 예루살렘 당정협의회에서 예수를 처형하기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자 니고데모가 항의를 제기한다. "우리의 율법에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또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소?" 그러나 여당사람들이 한 마디로 잘라말한다.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이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람 아니라는 판단기준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를 뽑아온 모든 선거에서 우리는 지방색 하나로 모든 것을 결정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저 옛날 예수의 십자가 명패를 읽고나서는 "아하, 갈리래아 출신이야? 그렇다면 죽어도 싸지. 죄가 있든 없든 그 지방 사람들은 씨를 말려야 해!"하던 유대인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11회]
아낌없이 주는 마음
(지난 가을,) 어느 본당에서 보좌신부님과 자모님 사이에 주고 받던 말 : "스테파노 잘 있읍니까?" "예 신부님, 고 3이라 정신 없어요." "그래도 주일미사에는 보내시지 않구요..." "대학에 붙고 봐야죠." "대학도 중요하지만 하느님도 계시고 천당도 가야하지 않겠어요?" "내원참 신부님도. 아니 대학 떨어지고 천당은 가서 뭘한대요?" ".... ...."
신앙의 눈이 하나 더 생기면 불편한 점이 여간 많지 않다. "제가 하느님께 섭섭하게 해 드린 게 뭡니까? 그렇다면 우리 아들놈만은 붙여 주셨어야죠!"라고 앙탈을 부릴 엄두가 안난다. 아무리 서러워도 "주여, 주여..." 하는 탄식이 고작이거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부모된 마음이라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다. 입시부정을 위한 학부모들의 엄청난 모험과 파멸을 신문지상에서 우리는 충분히 목격하였다. 부모는 무엇이든 아낌없이 주고 있고 앞으로도 줄 게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주는 마음> 아닐까? 그런데도 대개는 그것만 빼고 다 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로다!" 허지만 우리 중의 누가 자기 귀한 자식을 내놓아 세상의 죄를, 이 나라의 사회악을, 자기 인생고를 짊어지게 하겠는가? 이 용기를 배워야만 하느님 마음을 알 것 같지만....
[12회]
헌금은 왜 하나?
"장사, 장사 해도 하느님을 상대로 하는 장사만큼 이익이 많은 장사가 또 없읍니다. 교회에 내는대로 갚아 주시고 헌금하는대로 열 배로 스무 배로 갚아주십니다...." 약장사 비슷한 이런 설교를 여러분은 성당에서 한번도 못 들었을 것이다. 많이 드리면 많이 갚아 주신다는 셈본은 하느님을 우리 부모만도 못한 장사꾼으로 낮추보는 불경죄다. 부모가 우리를 낳고 기르고 교육시키신 것은 자식인 우리를 사랑해서였지 우리가 잘해드려서가 아니었다. 부모 사랑을 배워서 형제간에 의좋게 살 줄도 익힌다.
헌금을 하는 것은 하느님께 배웠기 때문이다. <주는 마음을>! 우주를 내시고 내 생명을 주시고 당신 외아들도 내주셨다. 신앙생활하다 보니 우리 팔도 쬐금은 넓어지고 하느님 마음도 쬐끔은 배워서 우리도 뭔가 내놓을 줄 알게 된 것뿐이다. 내 수입의 일부나마 내어놓아 교회 공동체를 책임지고, 교회를 통해서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생각이다. 십일조니 교무금이니 주일헌금이니 해서 하느님이 우리한테 세금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 교회 공동체를 우리가 책임지는 것은 지당하다. 독신생활의 신분까지 감수하며 오로지 신자들에게 봉직하시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일, 우리가 모여 예배를 올리는 성당과 부속시설을 관리하는 일, 성당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교회된 우리의 당연한 본분이다.
[13회]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대한 반성
신앙과 선거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주님을 맞는 준비다. "두 사람이 들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둡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둡니다"는 말씀에서, 데려가고 버림받는 기준은 무엇일까?
굳이 교회의 <사회교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자라면 누구나 자기는 굶주리고 헐벗고 울고 신음하는 사람을 돕고 싶다고 말한다. 무죄하게 옥에 갇히고 정의를 위하여 힘쓰는 사람을 아끼고 돌보겠다고 마음먹는다. 누구나 자기는 이 땅이 조금 더 정의로와지기 바라고, 없는 사람들도 사람 대접을 받고 살기 바라며, 민주화와 통일을 바란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행동으로 나타낼 때에는 여지없이 자기 본색을 보인다. 이기적이고 악랄한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 수십년간 주교님들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닥칠 때마다 그 선거가 우리 나라에 내리시는 하느님의 구원에 매우 중요한 은총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실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불의와 부정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중대한 기회라고 가르쳐 오셨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지방색이라는 집단이기심과 돈봉투 하나에 가난한 겨레와 나라의 구원의 역사을 팔아넘겨 오지 않았던가? 마땅한 후보가 없다면서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기회를 저버리고 연휴 여행이나 가지 않았던가? 금년에 와서 폭로되는 저 무시무시한 부정부패는, 사실상 여당이라니까 우리가 무조건 찍어준 우리의 대표요 우리의 정당이 아니던가?
정치와 투표까지 고백실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신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요, 사회교리에 조금씩 눈떠가는 조짐이겠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또한 이 나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시니까....
[14회]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대한 반성
휘장 속의 만남
"문앞을 지나쳐 가버리시는 하느님이 나는 두렵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이다. 지나간 3공, 5공, 6공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의 때를 얼마나 자주 잃어 버렸던가 반성해 보자.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이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짓고난 다음, 모세는 그 장막 속에 들어가서 단독으로 야훼 하느님을 뵙고 명령을 받았다. 나이 30이 넘는 겨우들은 그간에 투표소의 휘장 속에 많이도 들어갔다. 거기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 않는 휘장 속에서 투표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과 단둘이서 마주 섰던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서 비리, 정보사 땅 사기, 건영 비리, 보안사 민간인 사찰, 한준수씨가 폭로한 관권부정선거, 군부대의 비리, 명동의 금융부정 등이 사회의 죄를 성찰했다. 감옥에 갇힌 양심수가 천명을 넘고 전교조 교사 1300명이 직장을 쫓겨난지 3년이 넘는다는 것도 생각했다. 이 정권과 우리 민족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저지른 이 엄청난 죄들이 검찰의 은폐로 다 숨겨져 버렸고 그릇된 언론들의 조작으로 다 잊혀지고 말았지만, 우리 신앙인만은 하느님 앞에서 이 죄를 통회하고 보속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는 그 공범자가 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했다. 나의 영원한 운명, 이 나라의 구원과 멸망은 투표소의 휘장 속에서 내가 찍는 한 표에 달려 있다는 엄청난 생각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저 부정의 원흉들에게 한 표를 던졌다!
[14-1회]
우리의 선택
로마인 총독은 자기 민족 지도자들의 손에 붙잡혀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넘어온 유다인 죄수가 최후진술이랍시고 하는 말을 들었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소리를 듣습니다." 재판관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우리도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진리라면 곧잘 알아들을 것 같은데 진리가 현실에, 더군다나 정치 사건 속에 나타나면 거의 못 알아본다. 여하튼 무죄한 줄 알면서도 식민지 주민 하나를 사형에 처한 그의 정치적 행동에서 인간 빌라도는 자기 진심을 드러냈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라는 저주는 인류가 지상에서 사라지기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만 보시는 휘장 속에서 선택을 하였고, 우리가 뽑은 인물이 앞으로 5년간 행할 모든 언행과 정치를 하느님 앞에서 함께 책임지게 되었다. 아울러 나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면서 지금까지 나의 선택으로, 내가 뽑은 정치가들 때문에 이땅의 가난한 이들이 얼마나 시달렸고, 무죄한 이들이 얼마나 많이 죽고 갇혔으며,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거짓과 불의와 부정이 일어났는가 성찰하게 된다. 정치와 투표까지 고백실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신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요, 사회교리에 조금씩 눈떠가는 조짐이겠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또한 이 나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시니까....
[15회] 성탄후
헤로데의 경배
"구세주 빨리 오사...." 대림에 부르던 성가대로라면야 너나없이 쌍수를 들어 아기 예수님을 맞았을 법한데....
그토록 고대하던 구세주가 태어나셨는데, 하느님께서 때가 찼다고 여기시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는데"(갈라 4,4), 그분을 맞아들이는 인간들의 태도는 너무도 놀랍고도 너무도 다르기만 하였다. 목자들을 보자. 구세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천사들에게 들어서 처음 알게 된 이 가난하고 순박한 백성들은 "어서 베틀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사실을 보자" 하면서 곧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자 기겁을 하였다. 당장 국가안전회의를 소집하였고 정보국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고나서 헤로데는 외국인들을 접견한다.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 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 주시오." 약속대로 헤로데도 아기에게 경배하였다. 단지 그 경배라는 것이 특전부대를 보내어, 유다인의 왕으로 났다는 아기의 생일을 어림잡아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버린" 학살이었다. 나의 본심이 과연 목자들 맘인지 헤로데 맘인지 몰라 두려울 때가 많다.
[16회] 새해에
시작과 끝
서양사람들은 정월을 <야누스의 달>(January)이라고 부른다. 머리 하나에 얼굴 둘을 지닌 로마 야누스 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 해의 끝과 또 한 해의 시작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숨쉬고 있는 1993년 1월 3일은 정말 은총의 시간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은 너의 동의없이 너를 창조하셨지만, 너의 동의없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우리가 은근히 겁먹던 10월 28일의 휴거도 일어나지 않고, 저 비장한 대통령 선거도 끝나고 1992년이라는 시간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불제자들이야 달리 생각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직선의 시간밖에 없기에, 내가 한번 펑크내어버린 시각은 영겁에 이르도록 돌아오지 않고 나는 그것을 수정하거나 회복할 길이 없다. 지난해 가까운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내 소임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 내 팔 안에 얼마나 많은 이웃을 보듬어 안을 수 있었는가에 따라서, 그 시간은 아마도 영원한 황금으로 도금되었을 것이다.
새해를 맞아서 나의 삶과 처지를 하느님 은총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서 사느냐, 나의 팔을 조금이라도 널리 펴보고자 안간힘을 쓰느냐, 이 땅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책임지고자 하느냐에 따라서 금년도 나의 구원이 되거나 나의 심판이 되겠다.
[17회] 연초에
대학 떨어지고...
지난 연말 대통령 선거가 있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허해진 심정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까? 이 나라에 힘없고 돈없는 사람도 사는 세상 죽기 전에 한번 보았으면 하던 사람들, 30년을 두고 민주화투쟁을 해 오던 사람들,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호남인들, 전교조 선생님들, 감옥에 갇힌 이들과 그 가족들... 성금요일 주님 무덤가에 주저앉아 서럽게 서럽게 울던 사람들과, 드디어 <나자렛놈>을 해치웠다고 축배를 들며 잔치를 열던 사람들....
전기대학 입시결과가 발표되면서 얼마나 숱한 젊은 혼들이 허공에 뜬 발길로 거리를 헤매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밤을 어버이들이 저리게 저리게 에어오는 가슴을 안고 잠을 설치고 있을까? 재수 삼수생들이 겪는 자신과 부모님께 대한 부끄러움.... 그런가 하면 집집이 전화를 걸어 아들의 합격을 알리고 잔치를 하고 축하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우린 살았다!")
신앙의 눈이 하나 더 생기고 내 마음의 팔이 한 치라도 넓어졌다면, 우리의 마음은 누구에게 쏠릴까? 하느님의 아들이 왜 헤로데 왕자로 태어나지 않고 갈릴래아 목수아들로 태어났는지, 왜 빌라도처럼 출세를 못하고 도리혀 그 사람 손에 걸려 죽었는지 알듯알듯하다.
[18회] 세례성사
서러운 세례
요르단강에서 예수님은 세례받는 이들 틈에 끼어서 세례자 앞에 섰다.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세례를 받자고. 거기에는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모인 가난뱅이들,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사람들, 가진것 없기에 모두 평등한 그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었다. 가난한 죄인들 중의 하나로 줄서신 그 자세, 그 사람들 서러움과 신음과 가슴앓이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가짐 때문에,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서럽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시는 말씀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 맘에 든 아들치고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는 십자가 팔자를 면한 사람이 없는 연고이다. 세례... 자기가 죽어야 자기를 살리는 곳이다. 나 혼자 천당가기로 마음 먹으면야 천하에 쉬운 것이 세례요 신앙생활이지만 사회교리가 귀에 익으면 그렇지가 못하다.
이 강토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강, 민족의 얼이 서린 물길, 제주도사람들의 한, 지리산의 한, 거창과 산청과 함양의 한, 광주의 한과 눈물과 한숨이 어우러진 저 강물 속으로 한국 교회가 몸을 담그면, 우리 겨레는 교회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 배달겨레의 귀에 익숙한 음성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19회] 견진성사
두려운 견진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는 자리에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으셨다. 그러나 어떤 식의 메시아가 되어야 하는지를 아지 못하셨다. 그래서 성령은 그를 "곧바로" 광야로 보내신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메시아상을 예수님의 머리에 심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당하신지 우리는 복음서를 읽어 알고 있다.
"견진성사를 받아야 믿음으로도 어른이 된다." 맞는 말이다. 성령을 받으면 어른이 되므로 교회는 우리를 싸움터로 보낸다. 사회로 보낸다. 그곳은 어린이들의 전쟁놀이터나 전쟁영화를 찍는 촬영소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는 싸움터이다. 사기를 치고 뇌물을 주고 도둑질하고서 구차하게 살아남는 그리스도신자는 이미 산송장이다. 사랑과 정의와 선을 위하다가 사기당하고 쫒겨나고 얻어맞고 목숨을 빼앗기는 바보는,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살아남는다.
구약시대에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예언자가 되었다. 그리고 예언자로 불림받은 사람치고 제 명에 북은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최후의 대예언자 예수님을 포함해서! 하느님이 전하라시는 말씀이 하나같이 정의니 민주니 통일이니 자유니 하는 불같은 소리라서, 세도있고 경건하고 글발이나 쓸 줄 아는 사람들한테 미움받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저 처럼 매서운 견진을, 저처럼 당차던 성령운동을 도대체 누가 방언이니 철야기도니 하는 기분풀이로 초쳐놓았을까?
[20회] 성체성사(1)
"개에게는 주지 말라!"
우리 본당의 어느 주일미사 풍경 : "여봇, 돌아와 앉지 못해욧?" "아니 왜 그러는 거야?" "잔말 말고 들어와요!" "왜 그래? 내 참..." 영성체 행렬에 끼어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강단있는 아내가 기여코 소매를 잡아 끌어다 자리에 앉혔다. 부인은 이어서 미사수건을 가다듬고 남편이 섰던 줄로 들어서면서 중얼거린다. "고따위 짓 하고 와서 영성체해? 성사도 안 본 주제에...."
낚시간답시고 주일미사를 빠졌는지, 꼬집히다 꼬집히다 술집 장면을 자백하였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죄인>이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는 사람은...." 그래서 성체는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표다. (못된짓 했는지 안했는지 알아내는 표다!)
"경건하게 성체를 모실 순간입니다. 교우들, 즉 세례를 받으신 분들만 나오셔서 영성체하시기 바랍니다." 혼인미사나 장례미사에서 으례히 듣는 해설자의 안내 말이다. 그래서 성체는 신자와 미신자를 가르는 표가 된다.
"천상빵인 우리음식 자녀들의 음식이니 개에게는 주지말라." 성체축일에 부르는, 성토마스가 지었다는 송가의 한 구절. 그래서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개신교 신자도 성당 미사중에 영성체 못한다. 성체는 이단자와 정통 신자를 가르는 표가 된다. 아아, <일치의 성사>의 모습은 어디에 갔는가?
[21회] 성체성사(2)
"이 예를 행하여라!"와 "이것을 하여라!"
<가톨릭 성가>에는 성체성가가 무려 57편이나 실려 있다. 성찬이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 많은 성가 그 많은 구절 중에서 내 옆 자리의 '이웃'교우를 쳐다보게라도 만드는 것은 전부 여섯 구절뿐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내 일신의 영생을 비는 애원, 천당에 한 자리를 주시기를 비는 것으로 그친다. 그리스도와의 사사로운 일치만 이루어지면 더 바랄 것 없다는 생각이다. 어디서부터 잘못 풀렸을까?
성경 구절 한 마디(1고린 11,24)가 잘못 풀린데서 유래한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읍니다."
미사 때에 수백 수천번을 들어 온 이 대목을 원문에 견주어 본다면, 공동번역 성경이나 미사경본에 나오는 "이 예를 행하여라!"는 틀렸고 원래는 그냥 "이것을 하여라!"이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의 번역이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두 문장을 곰곰이 헤아리면 신앙의 신비가 보인다!
[22회] 성체성사(3)
<이것>과 <이 예>의 차이
<이것을 하여라>와 <이 예를 행하여라>는 어떻게 다를까? 한번 새겨보자. 주님의 만찬의 밤은 당신이 잡히시던 밤이었다. 죽음을 지척에 두신 시각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은 과월절에 쓰는 양을 "잡는 날"이었다. 일찌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이면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것>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운명에 말려들어야 하는데 다행히 <이 예>를 하는 사람은 미사참례만 하면 된다. <이 예>를 행하는 사람은 그저 영성체만 하면 끝나는데 <이것>을 하는 사람은, 한심하게도, 이 사회와 민족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죽어야 한다. <이 예>는 그리스도를 성부께 제물로 바치고서 끝나는데 <이것>은 교회가, 우리가 자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이 예>를 하는 사람은 하얀 제대위 황금색 금잔에, 황금색 성반에 담긴 하이얀 밀떡만 우러르고 있다가 보약 먹듯이 영하고 나가면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하는 사람은 옆사람의 누렇게 뜬 얼굴이며 깊은 한숨이며 속으로 곪아든 상처까지 쳐다봐야 한다. "빵을 쪼개시고" <내 생각해서 이것을 하여라> 하셨다면 우리도 우리 먹을 빵을 쪼개어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굶주린 이들을 우리가 먹는 밥상에 불러 들이는 일이다. 성찬이 이렇게 짐스러울 수가....
[23회] 성체성사(4)
모령성체(冒領聖體)
천주교 신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죄는 모령성체이다. 영성체를 하려다가도 마음이 께림칙하면 자리에 주저앉는다. 바울로의 경고가 무서워서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8-29절).
그런데 우리는 이 경고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고 있는 것일까? 이상한 것이 사람이어서 성경마저도 제멋대로 읽는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 사람이란 누군가? 고린토서 바로 앞대목에 정답이 나온다.
"여러분은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각각 자기가 가져 온 것을 먼저 먹어치우고 따라서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술에 만취하는 사람도 생기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까?"(21-22절).
한 성당 안에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 착취하는 고용주와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죄다. 그러니까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고 제것만 챙기는 사람, 누렇게 뜬 옆사람 얼굴은 외면하고서 황금색 성작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 남 줄 줄 모르면서 보약먹듯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은, 바울로 사도의 말씀대로라면, 자기의 영원한 심판을 먹는 셈이다.
[24회] 고백성사(1)
고백실과 개수대
어느 고백실에서 있음직한 상상적인 장면 : "거래처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만 술김에 술집여자와 몸을 더럽혔읍니다." "부인께는요?" "재수없게 그만 들켜서 단단히 경을 쳤읍니다." "술집 여자는요?" "예? 그여자야 거래처한테서 돈을 받았으니까..." "그게 아니고 그여자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없으시냐는 말입니다." "그런 여자야 몸을 파는 게 직업이죠, 신부님. 저를 안 받았어도 딴 손님을 받았을 테고 거래처사람한테서 팁을 단단히 챙겼을 테니까...."
그의 고백에서 아내에 대한 신의의 배반은 안중에 없다("재수없게 그만 들켜서..."). 몸을 팔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 못하는 여성을 돈으로 유린한 짓도 대수롭지 않다("팁을 단단히 챙겼을 테니까..."). 그의 유일한 걱정은 몸을 더럽힌 일이요 그 일로 영혼이 더러워져 혹시 영성체 못하는 일이겠다. 언제부터 고백성사가 더럽힌 손발을 씻는 세면대, 영혼을 설거지하는 개수대가 되고 말았을까? 도대체 6계명을 빼놓으면 고백할 것이 별로 없는 성사가 되었을까?
"사회적 죄"(社會的罪)라는 말은 뜻도 모르게 되었을까?
이 사람이 고백하고 영성체하려면 먼저 아내에게 부정을 용서받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까? 술집의 그 96번 아가씨는 다름 아닌 나의 죄 때문에 거기 몸팔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까? 한국땅 사내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매음이 있다는 "사회악"이 바로 자기 죄라는 것을 인정이나 할까?
[25회] 고백성사(2)
"또 판공성사야?"
"(성탄) 판공이 어제 같은데 또 (부활) 판공이라? 성사 볼 게 있어야 말이지... 죄라면 사는 게 죄지, 나야 법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인데.... 헌데 저 착하디 착한 수녀님들은 매주일 고백성사를 보신다니 이상도 하다. 죄를 지을래야 지을 건덕지도 없는 분들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백 꺼리가 없는 것은 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죄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진 연고이리라. 다정한 사람끼리는 표정과 눈짓만으로도 상대방의 심경과 요구를 다 눈치챈다. 그 대신 미움이 싹튼 부부들은 상대방의 상처를 할퀴어주는 것이라면 할 말 못할 말, 할 짓 못할 짓을 가리지 않는다.
"사랑이 크면 죄가 무거워진다(?)" 내 한 마디, 동작 하나가 누구 마음을 상해 주지 않나 소심해진다. 이웃의 끼니 굶는 사람, 학교 못가는 아이, 버림받고 외로이 사는 아낙네나 노인, 철창에 갇힌 사람... 그들의 불행과 고통이 모두 내 탓으로, 내 죄로 여겨진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고 외쳤듯이, 주님을 닮아 팔길이가 늘어나는 신앙인은 고백 꺼리가 산더미처럼 많아진다.
[26회] 고백성사(3)
"성사 보기 힘드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되었을 때 맞아주지 않았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지 않았고... 이 지극히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4,45) 교우님, 소말리아에서만 작년에 3백만명이 굶어 죽었고, 전세계에 나라없는 피난민이 천만명이고, 한국에만 양심수가 천명이 넘었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곧이들으십니까? 말씀 그대로 심판받으시리라 여기십니까? "천만에요. 그냥
해보신 말씀이시겠죠. 내가 무슨 수로 저걸 다 지킵니까?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교리공부해서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대죄(大罪)와 소죄(小罪), 원죄(原罪)와 본죄(本罪)라는 말뜻을 알 게다. 그런데 개인적 죄(個人的罪)와 사회적 죄(社會的罪)라는 말뜻을 구분하는 신자는 매우 적다.
사회적인 죄라는 것은 가정이나 동네나 국가, 혹은 전세계에서 "사람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고 온갖 불평등과 불의를 자아내는 체제"를 가리킨다. 사람마다 그런 상황을 조장하면서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죄를 말한다. 예컨데 집집이 퐁퐁을 써서 (한강)이 죽으면 그 죄는 (서울) 사람 모두가 뒤집어 써야 한다. 탁아소가 없어 엄마가 파출부나간 틈에 불타죽은 어린이들의 죽음은 탁아소도 제대로 만들지 않은 (서울시)와 그 동네 사람들 죄악이다. 과거 이 나
라 정권들이 저지른 광주학살, 온갖 경제비리, 지역차별, 무수한 양심수의 고통은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에 투표한 국민 모두가 하느님께 심판받을 사회적 죄이다. "아이고, 성사 보기 여간 힘들게 만드시누먼...."
[27회] 병자의 성사(1)
종부성사를 받으면 영낙없이 죽는다(?)
세상에 천벌받을 종교인들이 만들어낸, 참으로 한심한 질문이 하나 있다. "랍비,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었읍니까? 저 사람입니까? 혹은 그의 부모입니까?" 그러니까 모든 불행과 질병은 죄값이요 하느님의 벌이란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병들고 불구된 인간은 무조건 죄인이란다. 그러니까 권세있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장수하는 사람은 선인이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단다!
그래서 노인들은 병자의 성사 받기를 두려워한다. 얼마전까지도 이 성사를 종부(終傅: 마지막이 가까운)라고 불렀으므로 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끝장났다!"는 말로, 하느님의 사자(= 저승사자)에게서 사망진단서를 발급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종부성사를 받으면 안죽을 병자도 영낙없이 죽는다는 미신도 생겼다.
예수님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생전에 어디를 가시든 예수님이 하시는 첫 번 일은 병자들을 낫게 하시는 일이었다. 굶주리는 사람들 만나시면 빵의 기적을 하시면서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자 애쓰셨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질병과 재앙과 사별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생의 중대한 고비인 질병과 죽음까지도 성유로 축성하여 하느님께 제사처럼 받치는 병자의 성사를 집전한다.
[28회] 병자의 성사(2)
"내가 왜 죽어?"
어설픈 부부관계를 두고 "돌아 누우면 남남"이라는 말이 있지만, 치통을 잃아본 사람이나, 골수암으로 고생하는 친지를 둔 사람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에 손쓸 것이 별로 없음을 안타까워 한다. 병자의 성사란 무엇인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가족도 의사도 손쓰지 못할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병자들의 손을 붙들어 주시는 성사이다. 그러니까 죽음의 성사가 아니라 생명의 성사이다.
신앙을 함께하는 이들의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시리라"(야고 5,15)는 희망이 이 성사의 원천이다. 그대신 만약 환자의 그 질병과 죽음이 그 사람의 빈곤과 과로, 공장의 공해나 공사장의 안전미비, 이 사회의 불의한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 성사는 바로 그 사고와 질병에 책임있는 사람들과 회사경영자들과 정부에 하느님의 심판을 일깨우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도 정작 죽음을 피할 길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죽어?"라고 몸부림칠 것인가? "나는 어찌 살라고?"라면서 매달릴 것인가? 예수님은 당신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 것"(마태 26,28)이라고 여기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신 것은, 하느님 아들이라는 신분도, 훌륭한 가르침도, 놀라운 기적도 아니고, 다름 아닌 당신 죽음으로였다! 따라서 우리가 죽는 것은 죄값도 아니요 명이 짧아서도 아니다. 우리 주님이 죽으셨으므로 우리도 따라 죽을 따름이다.
그래서 병자의 성사는 모든 인간의 죽음을 축성해 주는 성사이다. 죽음이 무의미하다면 삶 전부가 의미없어지니까. 우리가 죽어 남들을 살리는 성사이다. 기왕 의사도 손댈 길 없는 상태라면, 죽어 하느님 앞에 가야만 가족을 영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부양할 수 있을 테니까....
[29회] 혼인성사(1)
"사랑이라는 굴레"
<빈첸시오회> 활동을 해 본 사람은 프레데릭 오자남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 회의 창립자요 당대 불란서 평신도 운동의 기수요 소르본느대학 교수였다. 그의 친구로 당대의 이름있는 신학자 라꼬르데르 신부는 오자남이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자 부디 사제가 되어 훌륭한 주교가 되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오자남은 어여쁜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불쌍한 오자남! 그 사람마저 덫에 걸리다니!" 라꼬르데르신부의 탄식이었다.
몇해 후 그 신부가 로마에 갔다가 교황 비오 9세에게 꾸중을 들었다. "신부님, 제가 알기로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은 일곱 성사라고 합디다. 그런데 신부님 말대로는 예수님이 여섯 성사와 덫 하나를 제정하신 셈입니다. 신부님, 결혼은 덫이 아니고 크나큰 성사올시다."(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강론).
날개가 없는 천사를 자처하는 자매들이여, "남편이라는 십자가, 자식이라는 십자가, 시어머니라는 십자가" 운운하며 서럽게 서럽게 탄식하는 자매들이여, 결혼은 분명 십자가가 아니고 성사올시다. 사목회 활동에 보태어 성체분배 몇차례 해보고서는 "처자식만 없다면 사제나 되어.... 하다못해 종신부제라도 되어..." 하면서 몽상에 잠기는 형제들이여, 마누라라는 존재가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을 뿐더러, 혼인은 덫이 아니고 성사올시다. 우리 구원과 멸망이 달린
성사올시다!
[30회] 혼인성사(2)
아담의 첫 마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때는 첫날밤에 신랑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가 부부의 일평생 금슬을 점치는 것이라 하여 금구(金口)라고 불렀다는데, 인간이 지상에 나타나 맨먼저 내뱉은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는가?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이 자기한테 데려오시는 하와를 보고서 아담이 "아,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살에서 나온 살... " 하던 감탄사("아!")였다고 한다.
부부들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되어서도 두 사람의 첫번 만남에서, 결혼식에서, 첫날밤에 저절로 입밖에 새어나오던 "아!"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서 둘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교회는 가정을 "운명 공동체"라고 부른다. 부부는 입맛만 닮는 게 아니라 가치관과 정치적 입장도 닮는다. 돈과 "우리 것"만 찾고 자식들에게 가르치면 거기서 둘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둘이서 사랑하고 하느님을 모시고 자녀를 양육하면 그것은 작은 가정교회요 천국이 비치는 호수이다. 이기심과 부정으로 뒤얽혀 마치 두 마리의 독사처럼 물고 뜯는다면 굳이 사후 심판대까지 갈 것 없이 이미 지옥을 겪는 셈이다. 그때 아담의 감탄사는 온데간데없고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는 파렴치한 변명만 남는다.
그러니까 "저 원수하고 언제 헤어져 천당가노?" 하는 말은 착각이다. 어느 성인의 말을 기억하시라! 지상에서 최후로 눈을 감았다가 후세에서 눈을 뜨는 순간 제일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숨넘어 갈 때에 지상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똑같은 사람들에게 그곳에서도 에워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31회] 혼인성사(3)
사랑만이 정화한다
개돼지에게도 사람한테도 먹는 것보다 큰 즐거움이 없다. 그래서 밥을 먹는 가장 평범한 행동을 하느님은 성찬의 성사로 드높이셨다. 성(性), 인간의 행위 가운데서 가장 짐승다와 보이면서도 두 인간을 가장 긴밀하게 묶어주는 이 끈을 하느님은 혼인 성사로 격상시키셨다. 부부행위는 그래서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처럼, 제사처럼 성스러운 의식이다. 제삼자가 훔쳐본다면 참으로 부끄럽지만 하느님만 지켜보아 주신다면 그것은 둘의 사랑으로 감싸인 더없이 경건하고 지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가장 귀한 선물도 인간은 가장 짐승답게 악용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느님의 모상인데 남성이 여성을 매춘과 포르노와 소비향락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면, 자기 살, 자기 뼈와 더불어 남성 자신이 전락한다. 혼외정사는 혼인의 성사를 모독하는 독성죄이다. 부부는 함께 구원받거나 함께 멸망하며 제삼의 방도가 없다.
세상에 정녕 못난이가 있다면 사내라는 것 외에 자랑할 것 없는 남자이겠다. 어디 가서나 개처럼 죽어 살면서, 이 사회의 엄청난 불의와 폭력에 저항은커녕 야합하고 복종하고 찬양하면서, 가정에 와서는 힘없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독재자로 군림하는 사람은 혼인성사를 모독하는 죄인이다.
그리고 가부장사회에서 하시당하는 여자들은 자신이 여자임을 부끄러워하고 멸시하게 마련이다. 산부인과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지금도 딸을 낳고서 돌아눕거나 한숨짓거나 눈물흘리는 산모들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혼인성사의 이 많은 상처들은 신앙에 힘입은 사랑만이 정화할 수 있다.
[32회] 신품성사(1)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우리 본당에서 서품자가 나는 기회에 사용할 만합니다)
[금년에도 우리 본당에서는 사제 한 분이 탄생한다. 돌아오는 7월 16일 수유 2동 3반 교우 이봉춘(요아킴) 형제의 아들, 이충열(디도) 부제가 사제로 서품받을 것이다. 하루전인 7월 15일에는 수유 3동 6반 교우 장원애(아녜스) 자매의 아들, 김종한(분도)군이 부제로 서품된다.]
옛적부터 교회에서 사제는 그분을 내는 교회와 직결되었다. 쉽게 말해서 [수유]본당 사제는 [수유]본당 교우 가운데서 뽑아 서품하였다. 지금도 서품공시라는 것을 하여 부제가 사제직을 받기에 합당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신자들이 정하고, 특히 부당한 점이 있으면 이의를 말할 여유와 권한을 주고 있다.
지금 교회제도는 [수유]본당 교우를 사제로 서품해도 [수유]본당의 사제로 남지 않고 [서울]교구라는 커다란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게 된다. (어차피 시집보내는 딸이 있으면 집에 들여오는 며느리도 있듯이) 우리 본당에서 일하시는 신부님들도 모두 다른 본당에서 낸 분들이니까 섭섭해 할 것은 없다.
다만 우리 본당이 합심하여 젊은 교우 한 분을 사제로 바쳤다는 뜻으로, 부제품이나 사제품에 필요한 비용은 교우들이 한데 염출하여 부담한다. 그래서 7월 4일에는 축의금 봉헌이 있을 것이다. 자기 아들딸 시집장가보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생각한다면, 우리 [수유]본당 공동체가 키워서 하느님의 교회에 바치는 이 젊은이들을 위하여, 독신으로 살면서 오로지 교우들에게 봉사할 분들을 위하여 집집이 체면이 깎이지 않을 부조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새 사제에
게 필요한 것을 개인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면 [원장수녀님께] 의논드리면 된다.
[33-1회] 신품성사(2)
부처님 지고가는 당나귀
신부님이나 수녀님 처지를 부러워하는 교우들을 종종 본다. 결혼생활 실컷 누리다가 뭔가 좀 아니꼬울 때에,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식으로 그분들의 생활을 넘보는 것이다. 곁에서 "당신은 어차피 늦었으니 아드님 신학교에 보내고, 당신 따님 수녀원 보내시지 그래요?"라고 한 마디 하면 당장 꿈을 깬다.
사제직은 성령께서 주시는 카리스마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하게 봉사하는 카리스마이다. (우리는 결혼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는 카리스마를 받았다!) 그분들의 독신생활은 이 봉사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처자식이 있을 적에 남을 위해서 살고 남에게 잘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경험해서 알지 않은가?
사제직은 오로지 남을 위해서 사는 봉사직이지 특권이나 칭호는 아니다. 교우들이 제아무리 떠받들고 공경해도, 사제들은 자기가 부처님을 모시고 가는 당나귀 처지임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한테 절하는 것은 등에 지고가는 예수님 때문이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님을 실감하면서 산다.
우리의 대사제 예수님은 평신도이셨다. 더군다나 당대의 사제계급에게 미움 받아서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삶 자체가 하느님께 올리는 예배요 제사였다. 특히 그분의 죽음은, 우리 믿음대로, 만민을 죄에서 구하는 인류사의 가장 성스러운 제사였다. 교회는 이것을 신자 모두의 "보편 사제직"이라고 일컫는다.
[33-2회] 신품성사(3)
피곤한 어부
교형자매들이여, 사제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곧잘 우리의 험담에 오르고, 작은 결점에도 이러쿵저러쿵 우리가 불만스러워하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 눈에 사제들은 자칫 위태위태해 보입니다. 그들의 선택과 소명이 그래선지 성덕의 첨단에 서 있지 못하면 입체감이 가장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주시는 힘으로 그침없이 상승하고 있지 않는 한, 측량키 어려운 가속도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제들은 이방인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없이도 잘 살고, 신자들이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으며, 주일미사에서 귀에 솔깃한 위안의 말만 찾고, 제 가진 것 없는 사람과 나누어먹으라고 호소하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설령 예수라도 그냥두지 않겠고 눈을 부라리는 세상에서 사제는 초라한 이방인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의 사제들은 피곤한 어부입니다. 이것은 비록 서양 교회의 모습입니다만 (한국 교회도 언젠가 이리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읍니다), 밤새 빈 그물을 내렸다 올렸다 하는 어부들, 그래도 혹시 잔챙이 한 마리라도 걸리기 바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고 말씀드리는 어부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사제들 역시 갈바리아까지 스승의 뒤를 따라갑니다. 가나촌에서 최고급 포도주에 거나하던 베드로, 가파르나움에서 기적의 떡광주리를 들고 신바람나던 베드로, 다볼산에 그냥 있기가 좋다던 베드로, 그는 군중 맨 끝에서 슬금슬금 행렬을 따라가 먼 발치에서나마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읍니다. 며칠 뒤 호숫가에서 세번 다짐하시고 세번 물으시자("너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본당에서 새로 탄생하는 사제와 우리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사제들, 개인적으로 아는 다른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존경할 만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34회] 신품성사(4)
"아! 하느님의 사람이여" (1디모 6,11)
사제는 성숙한 남성입니다. 청춘이 그의 정신에서 시듦이 없고 인간과 자연에 항상 놀라워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발랄한 미혼자가 아닙니다. 그도 나약과 실수와 때로는 죄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는 "우리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여, 그의 용기를 꺾지 마시고 그를 시험하지 마시오. 사십대 기혼자의 성숙과 평정이 갖추어진 남성이 되도록 거들어 주시오.
사제는 성실한 인간입니다. 은총에 겸허하게 순응하면서 하느님과 자기와 타인에게 성실하고자 애씁니다. 우리 죄의 실재성과 그 상흔을 들여다보고 부드럽지만 용기있는 음성으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입니다. 고백실을 물러나가는 우리의 쓰라린 다짐들이 거의 언제나 헛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느님 사랑이 인간의 죄악과 배신에 꺾이지 않으신다는 소신을 품고 있읍니다. 그러니 고백실의 훈계와 강론과 충언을 귀담아 들으시오.
그는 교회의 사람입니다. 스무 세기의 긴 세월동안 언제나 주님의 괴이심을 받아 젊어지고 순결해지고 더욱 지혜로워지는 어머니께 아들다운 신뢰와 사랑을 바칩니다. 교회의 얼굴이 아무리 쭈그렁이고 심술궂고 고집스러워도 종국에 가서는 순종과 평화를 교회에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를 교회의 품에서 멀어지게 만들지 마시오. 줄기에서 떨어져나간 포도가지가 되어 말라버립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한테 들려주며 복음을 읽고 복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언어, 십자가의 언어로 말합니다. 자신과 자기에게 지워진 교우들의 죄과를 무릎꿇어 속죄하기에 그의 무릎에는 옹이가 들고 찌르는 가시가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와함께 미사를 봉헌할 적마다 그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따스한 안방에서 처자와 저녁기도를 올릴 때에 사제관의 고독한 그를 위하여 기도하시오.
[35회]
교회의 사회교리
반년을 두고 변죽만 울려 왔으니 본격적으로 <사회교리> 강좌를 시작해 볼까? 무슨 책을 교재로 삼을까? 공의회 문서(예: <사목헌장>)도 있고 교황님들의 회칙(예: <백주년>)도 있고 신학자들이 쓴 연구서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본당 서점이나 바오로서원에 들려 "사회교리에 관한 책좀 주셔요."라고 섣불리 주문했다가는 40권이 넘는 책을 안고 쩔쩔맬 것이다.
교리라니까 그래도 제일 권위있는 교리서를 따르기로 작정하자. 작년(1992) 10월에 교황님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라는 공식 교리서를 펴내셨다. 구교우들이 기억하고 있던 <천주교 요리문답>이 트렌토 공의회에서 나온 해가 1566년이니까 실로 426년만에 나온 천주교의 공식 교리서다. 이 새 교리서가 앞으로도 400년을 갈지는 모르지만, 우리말 공식 번역서가 나오기까지도 족히 이태는 걸릴 테니까 우리 본당 교우들이라도 앞당겨 공부하자. 새 교리서의 사회교리는 제 2부, 제 1단, 제 2장 "인간 공동체"에 나온다. 첫 항목(1877)을 보자.
"인류의 소명은 인류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드러나고 성부의 외아드님의 모상으로 변모함에 있다. 각 사람이 하느님의 행복에 들어오도록 부름받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명은 개인적인 형태를 띤다. 그러나 또한 전체로 본 인간 공동체에 해당하는 소명이기도 하다."
[36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자식은 얼굴 생김새나 입맛, 목청과 걸음걸이만 부모를 닮는 게 아니다. 어버이의 성품이나 덕성은 물론 (기분 나쁘게도) 부모의 못된 성깔이나 멍청한 머리나 술 담배 노름 버릇까지 따라온다. 이쁘든 밉든 우리 자식은 우리 생김새를 쏙 빼닮는다. 죄많든 착실하든 사람이 하느님 모상이듯이....
"인류의 소명은 인류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드러나고 성부의 외아드님의 모상으로 변모함에 있다. 각 사람이 하느님의 행복에 들어오도록 부름받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명은 개인적인 형태를 띤다. 그러나 또한 전체로 본 인간 공동체에 해당하는 소명이기도 하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77항)
"사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유식한 철학자들은 "사람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대답하고 유식한 신앙인들은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다!"라고 답변한다. 무산계급의 유토피아, 유신시대, 주체사상, 신한국의 창조, 민주주의, 사회주의... 다 좋은 말이다. 다만 그런 정권하에서 사람이 피어나고 살만하면 그것은 좋은 정치, 훌륭한 사상이고 사람이 쪼그라들고 짓밟히면 나쁜 정치, 악한 사상이다. 사람이 만물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구 맘대로 사람이 만물의 척도냐고? 하느님 맘대로다! 왜 그러냐? 사람이 하느님 모상이라서 그렇다!
나 혼자 하느님 모상이면 다 되는가? 천만에! 한 가족으로, 배달겨레로, 온 세계 인류로 하느님 모상이 되어야 한다. (수유)본당으로, (서울대)교구로, 전세계 가톨릭교회로 그리스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37회]
"모든 사내는 늑대라..."
고대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고 했다. 그런데 같은 시대의 희극작가 테렌티우스는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사람이 분수와 도리를 알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금세기에 와서도 무신론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철학자 마르셀은 "타인은 나의 구원이다!"라고 하였다.
부부간에 서로 "그대는 나의 태양, 그대는 나의 운명!"이라고 노래부를 수 있고, "저 웬쑤같은 화상을 안 만났더라면..." 하고 한탄할 수도 있다. 부모가 자식을 두고 "하느님이 태워주신 내 분신..." 이라고 대견해 하기도 하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너같은 것을 자식이라고 낳았더냐?"고 탄식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나의 아내와 자식과 시부모로 인해서 지옥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구원받고 있는가? 교회의 가르침은 엄정하다.
"모든 사람은 똑같은 목적 곧 하느님께 이르도록 부름받았다. 하느님의 세 위격의 일치와 사람들이 진리와 사랑으로 서로 이룩해야 하는 형제애 사이에는 어떤 유사함이 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뗄 수 없다."(1878항)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사회생활을 필요로 한다. 사회 생활은 사람에게 덧붙여진 무엇이 아니라 그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이다. 타인들과의 교제, 상호 봉사, 그리고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사람은 자기 능력을 발전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소명에 응답한다."(1879항)
[38회]
무자식이 상팔자라?
지난번 대학입시 부정이 터지면서 신문에 줄줄이 나오는 학부모 명단을 볼 때에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실감났다. 마음 같아서는 마누라도 자식도 친구도 다 소용없고, 사업도 직장도 다 때려치우고 싶은 때도 없지 않다. 그럴땐 수녀님과 신부님이 왜 그리도 부러운지.... 헌데 새 교리서는 이런 푸념을 절대로 용서 않는다.
"사회라는 것은... 일치의 원리에 입각하여 유기적으로 결합된 개인들의 집합이다.... 사회로 말미암아 각 사람은 (과거의) "상속자"가 되고 "달란트"를 받는다. 그 달란트는 각자의 사람됨을 풍부하게 만들며 각자는 그것으로 성과를 얻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가 속하는 공동체에 헌신해야 마땅하고,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공권력을 존중해야 한다."(1880항)
우리가 하느님께 받는 달란트는 결국 한국이라는 국가 사회를 통해서 받은 것이다. 그러니 좋든 싫든 주부로서, 회사원으로서, 학생으로서 공동체에 이바지해야만 자기 완성과 구원을 얻는다. 허나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나라가 먼저인가? 철학한다는 사람들이 수 천년을 따져온 물음에 교회는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사람이 먼저다!
"모든 공동체는 고유한 목적에 근거하여 성격이 정해지며, 따라서 특정한 규범을 따른다. 그렇지만 모든 사회제도의 근원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 아니어서는 안된다."(1881항)
[39회]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겼으니...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 보고서도 가정의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은 바보다. 월남의 보트피플이니 유고내전을 보면서도 자기 나라가 중요함을 모르면 천치다. 국가와 법이 없으면 힘센 자와 도둑놈만 살아남는다.
"가정과 시민 공동체는 인간의 본성에 보다 직접적으로 상응하며, 인간에게 필요불가결하다. 사회 생활에 가능한대로 많은 수가 참여하는...단체들과 선거 제도를 만들어내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사회화는 개인의 자질, 특히 그의 창조 정신과 책임감을 신장시킨다.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공헌한다." (1882항)
하지만 올해의 신문과 텔레비전은 지난 30년간 이 나라가 거대한 도둑떼 손아귀에 있었고 우리는 여당이라고 해서 멍청하게도 그 도둑떼한테 착실히 투표해온 것을 깨닫고 가슴을 치게 만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회화(社會化)는 또한 위험을 수반하기도 한다. 국가의 지나친 강압적 개입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위협할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보조성(補助性)이라는 원리를 만들어냈다."(1883항)
사회와 국가가 도리혀 해를 끼치는 경우에 이를 막아주는 이 보조성의 원리라는 것이 뭐냐고? 중앙정부는 지방자치단체의 내부 생활에 간섭하여 그 고유의 임무를 제거하면 안되고, (서울시나 도봉구청은) 통반과 성당과 학교를 지원해서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며, 이런 기관들은 가정이 올바로 살아가게 돕는다는 말이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빨리 하라는 것은 야당이나 재야인사들의 목청이 아니라 사실은 천주교의 교리이다.
[40회]
기름칠을 해야만...
뇌물을 안주면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법망에 걸리면 맨먼저 찾아오는 사람이 검철청 브로커였다. 경찰은 흔히 젊은 국민을 두들벼 패는 지팡이였다. 월남전을 빼놓고는 한국 군대는 (이북)동포와 (제주도, 지리산, 광주에 사는) 국민을 상대로 전쟁해 왔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하느님은 모든 권한의 행사를 당신에게만 유보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이 그 본성의 고유한 역량에 따라서 스스로 행사할 정도에 있는 기능을 각 피조물에게 맡기신다.... 인간 공동체를 통솔하는 사람들의 지혜는 하느님의 이 처신에서 영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 섭리에 봉사하는 자로 처신하지 않으면 안된다."(1884항)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입으로 떠벌이고서는, 기생충이 사람을 피빨아 먹듯이, 권력을 받은 사람들이 국민을 뜯어먹을 고기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공금은 다 제 돈이요 국토는 다 제 땅이었다. 우리는 강도들을 믿고 정권과 관직과 수사권이라는 식칼을 쥐어준 셈이었다.
교회는 한 마디 더 한다. "보조성의 원리는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를 반대한다. 이 원리는 국가의 개입의 한계를 분명하게 만든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조화시키고자 한다. 진정한 국제 질서를 수립하고자 한다."(1885항)
[41회]
중산층 천주교
"사회는 인간 소명의 실현에 불가결하다.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차원을 내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 종속시키는 가치의 올바른 위계가 존중될 필요가 있다."(1886항)
과연 천주교신자들은 물질과 본능을 정신적 차원에 복족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을까? 얼마전 <가톨릭신문>에 난 기사들은 이 물음에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한다. 뱃속에 있는 자기 아이, 좁디좁은 자궁 속이라 도망도 못가는 태아를 의사의 손을 빌려 가위로 토막내서 죽여 없애는 낙태! 천주교 신자도 믿지 않은 사람과 똑같이, 똑같은 숫자로 낙태를 저지르고 있단다. 유교신자나 불교신자보다 낙태를 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단다. 주일에 갈데없어서 성당에 나 오는 것은 아닐 텐데....
"수단과 목적의 혼동은, 협조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에다 최종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거나, 인간을 단순히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게 만들어, 결국 불의한 구조들을 조성한다. 불의한 구조는 입법자 하느님의 계명과 상응한 그리스도교적 행동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1887항)
근자에 자식을 부정으로 대학에 입학시킨 부모, 돈을 상납하고 진급한 군인들, 국회와 공직에서 쫓겨난 사람들, 온갖 비리로 구속된 고위층 인사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유난히 많다는 검찰청 뒷이야기.... 하느님 축복으로 돈벌고 출세하다 보니(중산층의 교회!) 그리 되었을까? 아니면 신앙 따로 삶 따로 국밥을 차리다 보니 그리되었을까?
[42회]
폭력은 무조건 안되는가?
현총련파업이니 학생시위니 하는 사건을 텔레비젼 뉴스나 신문에서 접할 때에 등골이 오싹하는 교우들이 많다. 학생들이 맞아죽는 것은 "에이 참!" 한마디로 지나가지만, 경찰이 죽으면 분노를 터뜨리는 분들이 있다. 노동자들이 인권을 외치며 분신자살해도 "병신들!" 하고 넘어가다가 만일 기업주가 손해보는 일이 생기면 "노조의 배후에는 필시 빨갱이들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명분인즉 교회는 평화를 사랑하고 신앙인은 폭력을 절대 거부하기 때문이란다. 과연 맞는 말일까?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경제개발에 커다란 희망을 걸면서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공동선을 극도로 해치는, 명백한 압제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혁명과 폭동은 새로운 부정과 새로운 불균형을 초래하며 인간을 파멸에로 이끌어간다"(민족들의 발전, 31항)고 경고하였다.
그런데 그뒤 20년이 지나서, 지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6년)는 "교회의 교도권은, 개인의 기본권과 공동선을 심대하게 손상시키는 명백하고도 장기화된 폭정을 종식시키는 최후수단으로서 무력투쟁을 용인한다"(자유와 해방, 79항)는 선언을 하였다. "...제외하면...폭력은 안된다!"라던 문장이 20년만에 "최후수단으로서 용인한다!"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1889 은총의 도움이 없으면 인간은 "한편으로 악에 떨어지는 비열한 마음과 다른 편으로 그 악을 쳐부순다고 착각하면서 그 악을 증가시키는 폭력 사이에나 있는 샛길, 대개는 좁은 샛길을 식별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43회]
간추린 사회교리 ①
지난 몇 주간은 작년에 로마 교황청이 발행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교리조목을 설명하면서 이러저러한 사설을 끼워넣었다. 지금까지는 새교리서 제 2부[= 지킬 계명], 제 1단[= 개론], 제 2장 <인간 공동체>의 제 1절 <인간과 사회>를 소개하였는데 사회생활에 대한 근본자세를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복습을 겸해서 한데 간추려 보자. <천주교 요리문답>을 기억하는 분들은 아래 나오는 조목조목을 외워두고 싶을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신앙인들의 <사회 생활의 참여>라는 제 2절을 다루겠다.
1890 하느님의 성삼위의 일치와 사람들이 서로 이룩해야 하는 형제애 사이에는 어떤 유사함이 있다.
1891 인간이 자기 본성에 맞게 발전하려면 사회 생활이 필요하다. 어떤 사회 단체, 즉 가정과 시민 공동체는 인간의 본성에 보다 직접적으로 상응한다.
1892 "모든 사회제도의 근원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1893 단체와 선거 제도에 가능한대로 많은 수가 참여하도록 조장하여야 한다.
1894 보조성의 원리에 의하면, 국가나 보다 큰 사회가 개인과 중간 단체의 창의성과 책임을 대신해서는 안된다.
1895 사회는 덕성의 발휘를 용이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며 방해해서는 안된다. 가치의 올바른 위계가 존중될 필요가 있다.
1896 죄악이 사회 분위기를 전도시키는 곳에서는 마음의 회개와 하느님 은총에로의 회심을 호소해야 한다. 사랑은 정의로운 개혁을 촉진한다. 복음을 떠나서는 사회 문제의 해결이 없다.
[44회]
공권은 악마에게서?
지난 몇 달의 사정정국을 보면 우리나라 역사는 국민이 "도둑에게 열쇠 맡기고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고" 살아온 역사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은 부정선거나 쿠데타나 광주시민의 학살을 수단으로 군인들이 돌아가면서 독차지하고는 떵떵거려왔다. 지금은 관청을 가도 공무원들이 좀 고분고분해졌지만, 전에는 "동냥을 가면 개부터 짖는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그래서인지 우리 신앙인에게도 공권력(公權力)이라는 말이 달갑지도 못한 것으로 들려온다. 강도의 손에 쥔 식칼같아 섬찟하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는 "공권은 도덕적 차원에서 요청되는 만큼,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1899항)고 잘라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마저도, 사람들한테는 원래 국가도 정부도 필요없었지만, 원죄로 타락하여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폭력적이 되어 하는수없이 이를 다스릴 공권력이 필요해졌다고 가르친 적이 있었으므로 교회가 바로잡은 것이다.
1897 "인간 사회가 질서있고 또 번영하려면, 그 사회에 합법적인 공권이 있어서 질서를 보장하고 충분할 정도까지 공동선의 실현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1898 모든 인간 공동체는 그것을 통솔하는 공권이 필요하다. 이 공권은 인간본성에 본래의 토대를 갖는다. 공권은 시민 공동체의 단결에 필요하다. 그 임무는 가능한대로 사회의 공동선을 보장하는 데에 있다.
[45회]
8.15와 안도마
우리나라는 성모님과 인연이 많다. 우선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을 맞은 날이 성모승천 대축일이었고,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은 원죄없으신 성모님이다. 그런데 8.15마다 우리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죽였을 적에 경성 주교관은 처음에 그가 천주교신자일 리가 없다고 우겼다. 또 안의사가 사형당하기 전에 마지막 성사를 보고 싶다고 청했고 빌렘(홍)신부가 가겠다고 자청하였으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안도마가 살인자라 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빌렘 신부는 사목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안도마에게 최후의 고백성사를 주었다.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2개월 성직정지의 징계를 내렸고 결국 불란서로 보내버렸다.
뮈텔 주교의 처사는 살인을 금하는 엄격한 사목자의 입장이므로 정당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천주교의 태도와 대조적이다. 일제말 개신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많은 박해를 받고 있을 때에, 천주교는 예컨데, 명동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이 줄지어 남산으로 올라가 신사참배를 하고 내려오곤 하였다!
1990년 안도마 의사가 순국한지 80주년을 맞아 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안도마 의사를 교회 안에서도 복권시키고자 시도하였으나 주교들의 냉담한 태도로 실패하였다. 지난 30년 군사독재하에서 저항하다 사형당하고 분신자살한 천주교신자들이 안도마 의사와 함께 교회에서 복권될 해방절은 언제쯤일까?
[46회]
<평화의 댐>과 신앙
편한대로 잘 잊어버리는 교우들은, 박정희장군이나 전두환장군이 통일주체 국민회의니 하는 거수기들을 동원하여 대통령이 되고 국민의 대통령선거권을 빼앗아버린 10년 역사가 까마득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배만 뜨뜻하게 먹여주면 고맙다는 생각이었으니까. (내 손아귀에 쥔 것 나눠먹자는 작자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욕심도 없지 않았을 게고.)
1901 공권이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질서에 속해 있다면, "정치 체제와 집권자 지명은 국민들의 자유 의사에 맡겨져 있다."
편한대로 잘 잊어버리는 교우들은,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연극, 이북이 금강산 댐을 만들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참이니까 평화의 댐을 만들어 물길을 막자던 사기극에 바보처럼 놀아나고서도 화낼 줄을 모른다. 권력자가 짖으라는대로 짖어대는 관제언론에 바람이 들어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모아바치던 성금, 국민학생 코묻은 통장까지 욹어내던 돈이 아까운 줄 모른다.
1902 공권은 고유한 도덕적 합법성을 공권 자체로부터 이끌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공권은 전횡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자유와 책임 의식에 뿌리박은 도덕적 힘으로서", 공동선을 위하여 작용해야 한다.
교리서 두 구절로 미루어, 대통령을 뽑는 권리는 6.29선언으로 노태우장군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권리이다. 평화의 땜은 남한의 안보라는 공동선이 아니라 군사정권의 안보라는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80년대에 전두환정권에 항거하던 학생들을 욕하고 국민의 6월 항쟁을 욕하던 성직자들이나 교우들은 어디로 갔는가?
[47회]
대통령들의 자술서
있지도 않던 금강산댐 막을 평화의 댐을 세운다면서 코흘리게 동전까지 울거쓴 사기를 해명하라고 전두환씨에게 조사서가 갔다. 사람 죽이는 것 배운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비행기 탱크 대포 같은 값비싼 장난감 사들이고 만들면서 수조원의 돈을 어디다 썼느냐고 노태후씨에게 조사서가 갔다. 조사서를 보낸 신앙상의 명분은 다음과 같다 :
1903 공권은 해당 공동체의 공동선을 도모할 때에, 또 그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정당한 수단을 사용할 때에 한해서 합법적으로 행사된다. 만일 집권자들이 불의한 법률을 반포하는 일이 있거나 도덕 질서에 상반되는 척도를 구사하는 일이 있다면, 그러한 처사는 양심에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그럴 경우에 공권은 분명히 공권이기를 중단하고 횡포로 전락할 것이다."
두 전직 대통령이 감사원에 보낼 답서는 한 줄로 나올 것 같다. "나를 대통령으로 찍어준 병신들에게 물어보라! 끝!" 미사 중에 이 글을 읽는 우리들이 지난 10년 텔레비젼 뉴스도 볼 줄 모르던 청맹과니나 벽창호가 아니었다면, 전두환씨와 노태후씨 말이 백번 옳다. "카인아, 네 불쌍한 동포들이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 말씀이 들려도 "이딨긴요? 저것들 눈에 안 보이게 싹 쓸어버리실 수 없나요?"라는 대꾸가 우리 목구멍까지 올라왔었으니까....
광주학살 사건을 알고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의 설교를 듣고도, 우리 눈앞에서 맞아죽고 분신한 대학생들의 의거를 보고서도 우리는 당당하게 표를 찍었다. 혹시 하느님께 받을 우리 심판을 찍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없이... 군인이 좋아서, 전라도가 싫어서, 무엇보다도 내것 지켜주는 것이 고마와서 두 사람에게 내 투표로 공권을 맡겼었다.
[48회]
눈이 침침해서...
40대 후반을 넘기면 당장 나타나는 게 노안이다. 어느날 갑자기 눈이 침침해 지더니 신문 한 장을 보려고 해도 돋보기를 써야 한다. 바늘귀 끼는 일이 그렇게나 힘들어진다. 샛별같던 아내의 눈동자며 그이의 호수처럼 그윽하던 눈길은 까마득한 옛날이고, 흐리멍텅하고 벌게져가는 영감의 눈망울에다, 마누라 눈자위는 어찌 그리 질펀한지....
그래선지 주님 말씀이 새삼스럽다.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눈이 맑으면 당신의 온 몸이 밝고 당신의 눈이 흐리면 당신의 온 몸이 어두울 것입니다"(마태 6,22-23).
그렇다, 세상만사가 내 보기에 달렸다. 십자가 사형틀에 소름끼치는 송장이 매달렸는데, 신앙의 눈을 뜨면 구원의 깃발에 구세주께서 좌정하고 계시다. 얼굴만 보아도 밥알이 곤두서는 시어머니, 며느리도 사랑하려고 애쓰다 보면 내 구원을 손에 쥔 수호천사로 나타난다.
교회 공동체 가까이서 이런저런 봉사를 하다보면 상처받는 일이 간혹 있다. 그때마다 "내가 주님께 아낌없이 해드린 일들"이 계산에 떠오르는가 하면, "내가 뭐 아쉬워서..."라는 오만도 되살아난다. 겸손한 신앙, 만사를 공동체의 친교라는 관점에서 판단하고 언행하자면 오랜 인내와 신앙의 성숙을 기다려야 하리라. 우리가 시간과 재물과 정열을 교회에 바치고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루가 17,10)라고 고백하는 경지를
우리는 침침한 눈으로 희끄무레하게 내다보면서 살아갈 따름이다.
[49회]
누.네.띠.네
성당은 영화관이 아닙니다. 어둑컴컴한 극장에 옆에 누가 앉아있든 무슨 상관인가요? 스크린의 희비극과 스펙타클을 보며 울다가 웃다가 스트레스 풀고나오면 되지요. 자매님은 미사 중에 옆에 앉은 교우를 아시는지요? 제단위의 황금 성반에 담긴 하이얀 밀떡이야 지성으로 우러러 보시겠지만, 곁에 앉은 할머니의 누르끼리하게 병든 얼굴도 눈에 띠던가요? 어디 사는 누구고, 본명이 뭔지는 아시나요? <평화의 인사>를 할 때면 그 교우의 얼굴을 똑바로나 바라보시는지요?
성당에 오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백성"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한 몸"이라고도 가르치는데 미사 와서 옆사람이 안중에 없다면, 지매님은 성체라는 보약(補藥) 자숫고 혼자서 천당갈 일념뿐인가 봅니다. "나도 사람을 사귀고는 싶은데 성당은 워낙 쌀쌀맞은 데라서...."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당신부님께서는 "우리 좀 터놓고 사시다!"라는 사목지침에서 올해 <본당의 날>을 성대하게 치루기로 하셨답니다. 하루 반짝 행사가 아니라 나흘씩이나 하는 축제랍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이라는 아름다운 표어로, 사람 좀 사귀자고, 친교(親交) 좀 나누라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본당을 만들자고 이 축제를 마련하신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구하시지 않고, 한 가족, 한 본당, 한 나라로 구하신답니다. 우리는 천당에 들어갈 특석입장권 한 장을 사겠다고 줄을 서지만, 하느님은 가족으로, 반상회로, 본당으로 천국에 단체입장을 시키신답니다.
[50회]
박해자의 후손들
오늘은 영광스러운 103위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운데 혹시 박해자들의 후손 계십니까? 이조 왕족의 후예, 박해를 주도한 재상들의 후손, 포도청 관리나 포졸들의 자손은 없읍니까? 물론 우리는 지금 천주교신자가 되어 있으니까 순교자의 후손이지 박해자의 후손은 아닙니다.
과연 대원군 박해 시대에 선량한 백성들은 우리의 순교선열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요? 상감마마의 뜻을 어기고 서학을 믿는 대역죄인들, 서양 오랑캐의 패거리,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불효막심한 패덕자들, 한 마디로 죽일 놈들이 죄값으로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그들을 성인으로 받들고 순교지를 순례하고 그들의 이름에서 세례명을 붙입니다.
토마스 안중근 형제가 민족적 거사를 하였을 적에, 그런 살인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고 우겼고 최후의 고백성사마저 거절한 경성천주교(서울교구)가 80여년만에 그를 추도하는 미사를 올렸고 추기경님은 그를 의로운 신앙인의 귀감이라고 칭송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입조심을 해야 합니다.
빈민운동, 노동운동, 민주운동을 하는 성직자와 신자들은 우리한테 비웃음 받아왔고, 전교조 선생님들을 교회 학교들이 먼저 쫓아냈으며, 침묵의 교회를 찾아간 사제와 교우들(문규현, 서경원, 임수경)은 옥살이를 했습니다. 순교성인들과 안중근 의사처럼 이 사람들이 몇해 후에 교회의 순교자요 민족의 의인으로 받들어질 때에, 여지껏 그들을 욕해온 우리는 어찌되겠습니까?
[51회]
극장식 스탠드빠
노래방이 생기기 전에 어지간히 많던 것이 극장식 스탠드빠였다. 추기경님과 우리 본당신부님이 <소공동체운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아마 지금도, 우리 성당은 극장식 교회였다. 신부님이 복사들을 데리고 제단에서 열심히 미사를 공연(?)하시면 우리들은 거룩한 열심으로 구경해왔다. 미사가 끝나면 부리나케 성당을 빠져나갔다. 치성은 드렸고 복은 받아놨으니까 아쉬울 게 없다는듯이...
새로 이사온 교우도 아니면서 성당에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신자, 일찌기 반상회에 한번도 나간 적이 없는 사람, 본당신부님 성함이며 본당 살림이 어찌되는지 무관심한 교우, "주일미사는 나가고 교무금은 낼 테니까 더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사는 교우는 극장식 스탠드빠 성당이 편할 게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대답하셨다. "교회는 친교입니다." 서로 사귀는 것이다. 하느님과 사귀고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다. 사귐이 없는 성당, 사람들을 모르고 지내는 냉랭한 성당은 (천당가는 열차표 끊는 대합실이지) 교회가 아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나 혼자서 천당가면 된다는 생각은 형편없는 착각이다. 지난 주 얘기대로,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구하시지 않고, 한 가족, 한 본당, 한 나라로 구하신다. 우리는 천당에 들어갈 특석입장권 한 장을 사겠다고 줄을 서지만, 하느님은 가족으로, 반상회로, 본당으로 천국에 단체입장을 시키신다." 교회는 개인입장권을 팔지 않는다!
[52회]
십자가의 비밀
<김 아무개, 청와대를 사칭하여 대기업 회장에게서 100억원을 갈취하다!>
달포전에 이런 신문기사가 났었다. 청와대 연줄만 있다면 눈딱감고 몇 억, 몇 십억을 갖다 바치는 것은 예사였다. 영수증도 현금보관증도 각서도 없이....
성당, 교회, 불당, 점보는집, 굿하는 집을 찾는 사람들 마음은 한결같다. 하느님, 하나님, 부처님, 성황님, 맥아더귀신... 이름이야 어떻든 하늘에 있는 분과 통하고 싶어 한다. 영험있는 무당한테 복채 두둑히 바치면 소원성취하고 만사형통하여 부귀다남하고 장수출세한단다.
그런데 예수님 가르침은 정반대였다. 쉽게 말하자면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당신 아내나 남편과 화해하지 못하면 하느님과 화해는 없소! 시어머니, 며느리를 봐주지 못하면 하느님 섬긴다는 말은 헛것이오! 직장에서 성실하게 살지 못하면 성당 가서 벼라별 정성을 들여도 소용없소! 눈에 보이는 가난뱅이를 못 본체 하면 하느님 사랑한다는 말 거짓말이오!"
<본당의 날>은 교회가 곧 친교, 사귐임을 깨우치는 날이다. 금주간에 거행되는 우리 본당의 날 행사는 <하느님과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이라는 표어를 내세운다. 십자가는 통나무 두 개로 되어 있다. 땅에서 하늘로 솟은 나무와 좌우로 뻗은 횡목으로 되어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 그리스도께 가까이가게 된다. 십자가 기둥처럼 높이높이 솟는다. 교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가 사귀고 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간다. 통나무 횡목처럼 사랑의 폭이
넓어진다. 다만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고 그냥 통나무다. 구원은 통나무에서 오지 않고 십자가에서 온다.
[53회]
모래사장의 할머니
<다섯 식구가 해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백사장에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자그마한 할머니가 나타났다. 머리카락은 잿빛이었고 옷은 더럽고 남루했다. 할머니는 백사장에서 무엇인가를 연신 주어 가방에 담는 것이었다. 부모는 놀고있던 아이들을 급히 불러 그 늙은이 가까이 가지 말라고 타일렀다.... 며칠 뒤 그 부모는 할머니가 아이들의 발이 상하지 않게 해변 모래밭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줍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하는 노인임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 드 멜로, <맷돌>에서 [출판사: 타임기획])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은 하느님이 태초의 벽두에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사람의 삶도, 선익도, 행복도 혼자서는 안되게 되어 있다.
1905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부합하게 각 사람의 선은 필히 공동선과 결부된다. 그리고 공동선은 인간 개인과 결부시키지 않고서는 달리 규정할 수 없다. 외따로 살지 말고, 벌써 의화된 것으로 확인받기나 한 것처럼 자기 생각에만 잠겨서 살지 마시오. 그대신 함께 모여서 모든 이의 선에 도움이 될 것을 찾도록 하시오.
그렇다면 유식한 사람들이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공동선(共同善)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좀 어렵지만 교회는 이렇게 가르친다.
1906 공동선이라고 하면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보다 완전하고 보다 용이하게 자기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생활상 여러가지 조건들의 총체를 말한다."
[54회]
구역반의 아낙네들
덕성 여대 운동장을 우리네 친교로 가득 메우던 지난 주일, 우리 눈에 새삼스럽던 진실이 하나 있다. 신앙은 설혹 남성이 전파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보존하는 것은 분명 여성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두레상을 차리며 울긋불긋 한복을 바쳐입고 또아리에 음식바구니와 술독을 이고 춤추며 들어오던 아낙네들, 가장행렬을 주도하며 여복으로 남장으로 줄지어가던 부인네들, 춤사위 흥겨울 제 노소를 막론하고 흥겹게 어우러지던 여인네들....
우리 자매들의 저 발랄한 정열과 솜씨와 재능을 어쩌다 교회는 하얀 미사수건으로 꼭꼭 뒤덮고 새까만 머리수건으로 가려두고 말았을까? 스무명에 가까운 본당 사목위원중에 자매가 겨우 두 분이요, 지금 교황님은 어째서 죽어도 여자에게는 사제 서품을 안 주시겠다고 우기실까?
1907 공동선은 인격을 인격으로서 존중함을 전제한다. 공동선의 이름으로, 공권력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사회는 구성원 각자가 자기 소명을 이룩하도록 허용할 본분이 있다.
1908 공권은 각 사람이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에 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니, 음식과 의복, 건강, 일, 교육과 문화, 적절한 정보, 가정을 이룰 권리 등이다.
군더더기 한 마디 : 남편이 아직 입교를 않거나 냉담중이라 서러워들 마시오. 자매님 끈질긴 열심과 기도는 그이에게 "우리 마누라의 하느님"을 뵈드릴 날 있을 테고, 아무렴 그이에게 설마 막차표라도 못 끊어주겠소?
[55회]
<페리호는 거대한 관(棺)이었다!>
페리호 침몰로 인하여 한국 해운사상 두번째 큰 참사가 빚어졌다. 시신이 인양된 사망자만도 270여명이 되는 저 비참한 사고를 두고 천주교 믿는 우리 교우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뭣 하러 집에나 있지 혼자 놀러갔다가 참변을 당해 처자식 과부 고아로 만들랬나?"(= 죽어서 싸다!). "쯧쯧, 되게 재수없는 사람들이지... 수십년 바다 낚시를 다녀도 나처럼 풍랑 한번 안 만난 사람도 있다구..."( = 난 살았다!). "당신도 배 가지고 있어봐. 170명 정원대로 태운다면 당신들 굶어 죽는다구. 머릿 수가 돈이야 돈!"(= 돈이 하느님이야!). "어쩔수없어. 당신도 항만청에 있어봐. 돈먹고 눈감아 주지 않을 사람 없다구. 우리나라 여객선 다 그렇구 그
렇다구"(직장은 직장이구 신앙은 신앙이라구!). "철도에서, 비행기에서, 배에서 대형참사가 일어났으니 이제 지하철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 떼죽음 구경이 최곱니다!).
방금 꼬집은 우리의 속말 그대로들 한다면, 저 엄청난 참사가 죽은 사람 죄값이거나 재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 뜻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돈욕심과 사회부정이 저지른 참극을 염치없이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는 손을 턴다(이럴 때는 "하느님 뜻"이라고 하는 말이나 "하느님 탓"이라고 하는 소리나 똑같다).
페리호에 탄 300명을 죽인 사람들은 선주나 선장이나 항만청 직원들만 아니다. 난폭운전, 음주운전을 무슨 자랑처럼 떠벌이는 우리 자신을 볼 때에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페리호가 들어있음을 느낀다.
[56회]
동해를 똥해로 만들다 보면
성당 주보에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우스개 한 토막 : <한밤 중 조종사가 승객들에게 방송을 하였다. "지금 우리는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 위기를 구해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승객들은 조종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보다 정확하게 알고자 사제에게 갔다. 그러자 사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종사의 말은, 희망이 없다는 소리오."> (드 멜로, [맷돌]에서)
지구상에 인구가 너무 많아져 이민갈 별을 찾는다면서, 언젠가 지구가 전쟁과 공해로 사람 못살 땅이 된다면 도망갈 별을 찾는다면서 달나라로 화성으로 그 비싼 우주선을 쏘아올릴 무렵, 어느 과학자가 계산을 했단다. 지름이 20억 광년쯤 된다는 우주 어느 구석에라도 지구처럼 생물이 살만한 별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계산을 뽑아보았단다. 그런 별이 한 개라도 있을 확률은 10-14라는 숫자가 나왔다. 아예 없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하나뿐인 지구>를 너나없이 가꾸고 지켜야만 한다. 서울시민은 한강을 통해 똥물과 공장 폐수를 황해로 흘려보내고, 러시아와 일본은 원자력발전소 폐기물을 동해에 갖다 버리다 보면 우리 손자쯤에 가서는 태평양이 방사선에 오염되어 멸치 한 마리 못 먹는 날이 올 것이다.
1911 인간의 상호 의존은 갈수록 깊어진다. 그 결속은 점차적으로 전지구상으로 확대한다. 인류 가족이 그 구성원들의 타고난 존엄성을 평등하게 향유하며 한데 결속하기 위해서는 또한 보편적 공동선을 전제한다. 여기서 국제적인 공동체가 결성될 필요가 있다. 국제 공동체는... 지역 분쟁같은 특수 상황 속에서는... 난민들의 구조, 혹은 이민들과 그 가족들에게 대한 원조 같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57회]
교무금 납부증명서
11월쯤이면 월급쟁이들 연말정산이 한창이다. 정산을 잘하면 상당액수(공돈?)를 환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인네들은 본당 사무실에도 교무금 납부 증명서를 떼러 온다. 하느님께 세금을 환불받는 증명서도 있어서 소개한다.
일제시대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 이를 갈던 사람들은 주민세 자진납부기간을 틈타서 올가미를 쳤다. 일본순사들을 동행하고서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선생님은 사람 얼굴 안봐주시더구만요. 그럼, 에, 일본 천황폐하께 주민세를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세금 내라면 친일파로 찍히고 내지 말라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제깍 수갑이 채워질 신세다.) "주민세 내는 동전 한닢 내놔봐요. 여기 누구의 모상이 새겨져 있지요?" "대일본 천황폐하의 모상올시다." "그럼
천황의 모상은 천황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모상은 하느님께 돌리시오!"
신한국, 수령동지, 옐친, 클린턴, 성당, 사찰, 교회당... 다 좋다. 거기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이, 더군다나 힘없고 돈없는 자들이 사람대접받고 살만한가? 그곳은 하느님 나라다! 가난뱅이 얼씬거리지 못하는가? 맘몬의 나라다! 결국 사람을 사람대접하면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을 환급받을 것이니 참 좋다.
1929 사회 정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초월적인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의 궁극 목적이며, 사회가 지향하는 바도 곧 인간이다. 인간존엄성의 수호와 촉진을 창조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셨다. 이 존엄성에 관하여,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남녀 인간은 창조주께 엄정하게 책임을 진다.
[58회]
죽은 이를 사랑하는 계절
노란 이파리마저 거의 벗어버린 가로수들이, 쌀쌀해지는 요즘 날씨와 더불어, 우리에게 따스하던 사람들을 생각나게 해주는 계절이다. 한 해의 자투리처럼 대접받는 이 11월에 교회는 우리더러 사랑하던 사람들, 눈 앞에서 사라지면서 마음에서 지워져가는 이들을 다시 한번 사랑하라고 일깨워준다. 그네들의 다정하던 이름을 입술에 떠올려 보라고, 그 사랑스럽고도 파리하던 얼굴을 허공에 그려보라고, 그들이 꺄르르 웃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속삭이거나 울부짓던 음성을 기억해 보라고, 그리고 저녁이면 짧은 기도를, 힘닿으면 위령미사 한번쯤 바치라고 충고한다.
우리 인간적 노력이 다할 때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 하느님의 크고 든든한 손에 맡겨 보내노라는 믿음이야 없지 않았지만 그이들은 그다지도 가난하고 한스럽던 이승, 병상의 그 혹독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 지금은 하느님 안에 살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우리는 영원(永遠)이 무엇인지 불멸(不滅)이 무엇인지 감잡는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이 한 달이나마 고요한 시간이면 하느님 안에서 말을 걸고 귀기울여 본다.
그리고 혹시 우리 양심의 무덤에 묻혀있는 생명들, 이유야 어떻든 "지워달라!"는 한 마디 주문에 의사의 손으로 살해당한 생명들, 여태까지 잊혀지지 않는(무슨 수로 잊는단 말인가?) 단 한번의 생명을 영원히 앗겨버린 아기(감히 아기라 부를 자격이 있을까?)에게는 용서를 빌어야겠다, 아직 용서를 빌지 않았다면. 그리고 생전에 내가 사랑을 거절한 이들, 다정한 한 마디, 따뜻한 미소, 도움의 손길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품는다. 하느님의 품
에 안겨 있는만큼 그들도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리라, 연민과 용서의 시선으로.
[59회]
왕중왕의 판결문
교회달력으로 한 해가 끝나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나자렛 사람 예수를 우리가 왕중왕(王中王)으로 떠받드는 하루가 오늘이다. 그리고 한 두 주일 전후해서 이 왕이 인류역사의 종말에 집행하실 공심판을 예고하신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맨꼴찌로 태어나거나 임신해 있을 아기까지 전부 두 줄로 갈라 세우고 심판을 하시고 판결문을 낭독하신단다. 그 판결문이 그 판사의 입으로 미리 공표되었으므로, 우리로서는 미리 대처하기가 무척 쉬워졌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도 여러번 들어서 줄줄 외우는 구절이다.
"에이, 요컨데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이겠죠. 남한테 잘 하라는 뜻이겠죠. 실천이야 별도 문제고요. 내가 무슨 수로 그걸 다 실행합니까?" 글쎄다. 원칙에서 그친다면 우리 모두가 편하겠는데, 만에 하나라도 저 두려운 날, 글자 그대로 집행하신다면 어찌할까나, 어찌할까나. 이천년전 미리 하신 말씀이라서 몰랐다고 발뺌을 할 길도 없고, 교회의 사회교리도 그리 가르쳤고....
1932 다른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주고 적극적으로 타인들에게 봉사하는 일은, 타인들이 어느 모로든 각별히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에는 더욱 급박하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