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신문 2006. 06. 18발행 [876호]
잃어버린 '은총' 되찾기
오늘날 선교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40대 이상 연령층에서는 '선전', 40대 미만 연령층에서는 '부진'으로 결론 내려진다. 최근 2005년 인구조사 결과가 발표돼 지난 10년간 의외로 불교와 개신교 측보다 가톨릭 신자증가율이 높게 나타난 것이 고무적으로 느껴지지만, 40대 미만 연령층에서는 가톨릭의 부진이 어제 오늘 관찰된 바가 아니다.
우리는 한시도 자만하지 말고 언제나 겸허하게 부족함을 메우려는 노력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왜 가톨릭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일까? 필자는 그것을 가톨릭의 의무신앙 또는 율법신앙 분위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늘날까지 가톨릭 신앙은 '의무' 신앙이었다. 이 '의무' 신앙은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제2의 물결' 곧 산업혁명 시대, 나아가 모더니즘 시대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중심 덕목이 의무(duty)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자(worker)로 규정하던 이 시대 사회에서는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 성공하고 존경받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제3의 물결 곧 정보혁명의 시대,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중심 덕목은 이제 의무가 아니라 재미(entertainment, joy)다.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를 '일을 즐기는 자'(player)로 여긴다. 의무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고자' 또는 '즐기면서' 일하는 것이다. 이 성향은 특히 본격적 포스트모더니즘 세대라 할 수 있는 40대 미만에게서 강하다.
요컨대,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40대 미만 젊은층에게 버림받는 이유가 바로 '의무' 신앙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가톨릭', '성당'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부담', '엄격함', '딱딱함' 등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가 미래에 살아남고자 한다면 이런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제는 '성당'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신바람 나는', '즐거운', '웃음이 가득한'이라는 이미지가 돼야 한다. 종래의 '의무' 신앙이 '신바람' 신앙으로 틀바꿈, 탈바꿈을 해야 한다.
21세기 종교가 이미 시장논리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피터 버거가 말하는 '종교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가톨릭교회가 살아남으려면 신자를 '소비자'로 대접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소비자 구미는 까다롭고 냉정하다. 이것은 종교를 선택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족과 감동이 없는 종교에 그들은 남아 있지 않는다. 과감히 버린다.
우리는 이 사실을 40대 미만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가톨릭교회는 신 고객(=예비신자)에게 6개월~1년의 딱딱한 강의식 교리, 의무 중심, 형식과 행위 중심의 교육으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은 젊은층을 대상으로 해서 행복클리닉, 평화프로그램, 행복한 가정, 치유, 상담프로그램 등으로 21세기 소비자 욕구와 취향을 정확히 인식하고 준비해 왔다. 가톨릭교회도 변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신앙 아이템을 개발해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신바람을 일으키려면 신자들 '속'을 알아야 한다. 어디를 건드려야 신바람이 날지를 알아야 한다. 신자들이 어디를 아파하고 어디를 가려워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꼭 당부하는 말이 있다.
"강론을 준비할 때 소재를 구하려고 책을 뒤지지 마라. 대신에 꼭 읽어야 할 것이 있다. 읽어야 할 것은 신자들이다. 신자들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좌절시키는지, 그들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을 읽어라. 그리고 그 답을 그날 복음에서 찾아주려고 노력하라."
요즘 신자들이 마음으로 원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지역마다 다를 것이다. 본당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 사람마다 제 각각일 것이다. 이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속에 신바람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신바람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길은 '은총'을 재발굴하고 중재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거저' '공짜'로 주어진 영적 선물을 말한다. 이 은총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을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모체격인 유다교의 경전 구약성경에서 발견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물과 젖을 사서 마셔라"(공동번역 이사 55, 1)
그렇다. '돈없이', '값없이' 누리는 구원의 선물,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관점에서 신앙을 새롭게 조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여기에 물이 있다」이다. 이 책에서는 '의무'라는 단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의무라는 단어를 '은총'이라는 단어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좀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의무를 뒤집으면 거기서 은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이 책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해 줬다. 나아가 전국의 많은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위한 교재로 사용해 주고 있다.
이후 필자는 교회생활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던 은총을 다시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우리가 매일 무덤덤하게 대하는 미사에서, 성경에서, 기도에서, 성사(聖事)에서, 십계명(十誡命)에서 빛나는 '은총'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밭에 뭍힌 보물」이다. 읽어본 이들은 신앙의 재미와 신바람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고들 한다.
곳곳에서 희망을 본다. '은총'이라는 명약이 듣는다는 확신을 얻는다. 필자는 신부님들께서 강론시간에 '의무'라는 용어 대신에 '은총'으로 신자들을 위로해 주었으면 한다.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교무금이 늘고, 교회 헌신이 좋아진다는 기적을 체험하셨으면 한다. '은총'에 눈을 뜨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알아서 바르게 살고, 사회에서도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으셨으면 한다. 충정이다.
희망은 있다. 이제껏 놓쳐왔던 '은총'에 눈뜨는 신자가 하나 둘 늘어간다면 교회 밖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나씩 둘씩 다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