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이르러 사회는 특별하게 어느 곳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거의 대부분 도시화되었고, 나머지도 급속하게 도시화로 치닫고 있는 과정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추세로 말미암아 교회 역시 도시들이 가지는 특징들을 안고 있다. 즉, 대형화를 비롯하여 익명화 현상이 거의 전반적으로 교회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사회에서 누리던 관계나 인간적인 친밀감, 그리고 소속감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실정이다. 수원교구 역시 몇 년 사이 괄목할 만한 교세 성장을 이루었지만 성장 자체가 본당의 비대화와 교회의 내적 공동화를 초래하여 사목자들과 신자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어렵고, 신자들은 유대감을 상실하여 공동체로서의 교회 정체성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는, 과연 ‘세상이 교회를 통해서 복음화 되고 있는가? 신자들이 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교회가 오히려 세속화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우려를 끊임없이 갖게 된다.
이미 시대의 징표를 읽은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현대 세계로의 적응’ (Aggiornamento) 이라는 주제로 교회 전반에 걸친 변화와 쇄신을 주창한 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복음적 삶을 통해 세상을 성화시켜 나가는 일은 점점 힘겹게만 보인다. 더구나 삶의 자리 도처에는 그리스도에 반하고, 교회전통을 위협하는 사고와 동향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고개를 들고 있다. 교회와 그 신자들이 이러한 시대의 변화와 유혹에 맞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은 자신이 먼저 뼈를 깎는 쇄신의 과정을 겪음으로써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 말씀에 비추어 삶을 반성하고, 복음의 빛으로 스스로를 정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 세상을 복음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화에 속수무책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노력해 온 모든 것(예비자 입교, 성사생활, 단체활동 등)이 복음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방식에 수동적이 측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더 나은 복음화, 즉 ‘새로운 복음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신자 공동체의 삶이 주체가 되는 보다 능동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하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그토록 부르짖는 복음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신자들이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자.
1. 복음화란 무엇인가?
1) 복음서에 나타나는 ‘복음화’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고 말씀하시며 당신 친히 나자렛 회당에서의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 졌다”(루가 4, 21)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실제로 묶여있고 눈먼 이들을 만났다. 세리였던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를 따랐고, 악령 들린 이가 예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어 예수를 따라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절름발이와 나병 환자들과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어드렸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곳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는데,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소외받고 억눌린 이들에게까지 전해지도록 하는 모든 것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복음화’이다.
이처럼 복음서에서 언급되는 ‘복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복음화’라는 것은 ‘복음을 통해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 안에서 내 삶과 가정이, 내 이웃과 나라가 복음을 통해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화인 것이다.
2) 복음화의 정의
‘복음화’(Evangelizatio)라는 말은 1960년대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공식적으로 수록되었고, 1974년 10월 “현대 세계의 복음화”라는 주제로 로마에서 개최된 제3차 주교대의원회의를 기점으로 교회의 본질적 활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되기에 이른다. 이 주교대의원회의에서는 복음화를 “복음 안에 선포된 그리스도 신비에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하는 모든 활동을 통틀어 복음화라고 한다. 그러므로 애덕의 증가와 성사 집행 없이는 온전한 의미에서 복음화를 이룰 수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께 대한 기쁜 소식의 선교 없이는 복음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신약 성서에 의하면 복음화의 중심점은 그리스도 신비의 선포인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이렇게 규정된 “복음화”의 개념은 1975년 12월 8일 반포된〈현대의 복음선교〉를 통해서 정착된다. 즉 “복음화는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2고린 2,17)라고 한 것과 같이 그 힘으로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화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화 활동을 펼친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이다.
간혹 복음 선교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는 복음화의 풍부하고, 역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 또는 단편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3) 새복음화
1980년대에 들면서 “새로운 복음화” 내지 “새복음화”라는 용어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사용되었다. 즉 라틴 아메리카 복음전래 500주년을 경축하는 행사 준비의 일환으로 1983년 3월 9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 토 프랭스에서 제 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정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정기총회에서 행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연설문에 “새 복음화”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새복음화는 복음화가 일단 이루어진 지역에서 반복하여 복음화를 시도하는 재복음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새복음화는 과거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현실을 새롭게 분석하며,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역사를 동시대인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복음적 언어로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리킨다. 때문에 ‘새복음화’는 ‘새로운 열정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나아가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해방을 선포하는 ‘새로운 표현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 뜻하는 ‘새로움’은 “시대의 뜻”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교회의 새로운 자세를 의미한다.
2. 복음화의 요소
1) 말씀의 선포(예언직)
복음화에 있어서 복음을 해설하고 교리를 설명하는 말씀의 선포는 그 기본을 이룬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 14-17)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신앙은 말씀을 통한 복음 선포를 전제하고 있다. 즉 복음을 내 삶의 기반으로 삼아 생활하고 소공동체 모임 안에서 복음 나누기를 통해 삶과 신앙의 일치를 이뤄,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
2) 생활의 증거(왕직)
말과 일치된 생활은 언어로 표현된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선포하는 사랑은 추상화되고 말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라고 외쳐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고린 9, 27)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바오로 사도처럼 성실히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해야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왕다운 자유의사로 성부께 순종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했듯이, 제자인 우리도 왕다운 자유로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님께 봉사하는 겸손과 인내로써 우리의 이웃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3) 성사생활(사제직)
말씀과 생활의 증거로 비신자들을 신앙에 귀의시킨 다음에는 성사를 통하여 초자연적 생명으로 인도하고 이 생명이 더 풍부해지도록 해야 한다. 즉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거룩한 삶을 살아서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모든 일 - 기도, 사도직 활동, 결혼생활, 가정생활, 노동, 심신의 휴식 등 - 을 성령 안에서 행하며 생활의 번민을 잘 극복해 낸다면,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영적 제물이 되어, 미사 때 혹은 다른 전례를 통해 정성되이 성부께 봉헌된다.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해설하는 말씀의 선포를 복음화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성사로 말미암은 내적 변화와 새 생활은 그 도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선포(예언직) → 생활에서의 증거(왕직) → 성사생활(사제직) → 내적변화와 새생활
3. 복음화 과정
일반적으로 복음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복음 말씀을 들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분께서 외치신 기쁜 소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가 복음화 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먼저 접해야 한다. 처음으로 교회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접하게 되며, 기존의 신자들은 복음말씀을 지속해서 듣고 묵상하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 두시오”(1베드 3, 15)라는 말씀처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해서 확신에 찬 태도로 이야기 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믿는 바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교리도 알고 있어야 한다.
2) 복음적 삶을 증거함
복음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삶의 증거로써 선포되어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을 전해 듣고서 감명을 받기 보다는 자기가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감명을 받는 경우가 많다. 복음적 삶 또한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스스로가 그 기쁜 소식대로 살 때 자신이 복음화 될 수 있고, 우리 주변의 이웃들-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 영세는 했으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 고통 중에 어떤 절대자를 찾는 사람, 타종교를 가진 사람 등-은 우리의 삶을 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돼, 그들을 신앙에로 모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스스로가 복음적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삶을 각자의 생활로써 구현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고 신앙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3) 믿지 않는 이들을 신자들의 공동체에 초대함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사회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 삶의 모습에서 부분적으로 복음을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이들 중에 기쁜 소식을 부분적으로 체험해 보았거나, 또는 체험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신자들의 공동체에 초대해야 한다. 즉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와 소공동체로 그들을 초대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이끌어 주고, 성사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한다.
4) 사도직에 참여
신자들의 공동체로 초대 받은 사람들은 입교식과 세례성사를 통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나아가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복음을 맛본 사람들이 이 복음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의 삶 안에 맑게 투영함으로써 참된 복음적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제 복음의 선포자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며,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자신의 주위를 복음화 시켜야 할 책임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신자들의 활동을 ‘사도직’이라 부른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으로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사도직으로 부여받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효과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신자 전체에 맡겨진 사명과 개별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교회와 세상안에서 수행해야 할 사도직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복음화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도록 노력하는 실질적인 사도직을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다.
복음말씀을 들음 → 말씀을 복음적 삶으로 세상에 증거함 → 믿지 않는 이들을 공동체로 초대하여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참여시킴 → 복음 선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도직에 참여
4. 복음화를 위한 노력
우리 교회 안에서 복음화를 위한 노력은 현재까지 계속되어 왔다.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게 복음화를 위해 헌신해 온 많은 신앙인들이 있다. 즉, 사회생활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가정을 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수많은 신자들이 있고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 하거나 심지어는 일생을 바쳐가며 교회와 사회에 헌신해 온 신자들이 있다. 그리고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복음을 실천해 온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도 있다. 이렇게 자기 삶의 자리와 일터에서 묵묵히 복음을 실천해 온 신앙인들이야말로 우리 교회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 이제 이들을 좋은 표양으로 삼아 소공동체를 통해 신자들 모두가 복음을 듣고 나누며 일상생활에서 복음을 실천하여 세상을 향한 복음화에 앞장서야 한다.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찬의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절정에 달한 구원의 사건이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용해되어 변화되도록 촉구하는 새로운 만남이요 생명의 축제이다. 따라서 이 신비는 우리의 삶과 생활 안에서 드러나야 하는데, 이러한 성찬의 삶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소공동체이다. 이제 우리는 소공동체를 통해 이웃과의 인격적인 사귐과 나눔을 실천하며,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향해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작은 사람들끼리 진실한 공동체를 이루어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복음화의 사명을 실천하였다. 초대 그리스도 교회는 잘 정비된 조직이나 제도도 없었고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건물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형제처럼 돌보며 사귐과 섬김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셨듯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중심으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여 그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이웃을 향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따라서 공동체는 소수였지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소공동체의 원형인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은 오랜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속 되어왔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셨듯이,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아 있는 동안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끊임없이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이 그 험난한 상황에서도 기쁘게 복음을 전하여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우리도 실망과 포기를 기쁨과 희망으로 승화시켜 새복음화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현대 사회 속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바로 소공동체를 통한 새로운 복음화 안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의 현실과 과제- 소공동체를 통한 복음화
현재 수원교구는 계속적으로 신자수와 본당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각 본당 공동체의 규모는 친교의 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는 단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다. 단기간동안 괄목할만한 교세성장을 이루면서도 성장 자체가 본당의 비대화와 교회의 내적 공동화를 초래하여 복음 정신에 입각한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멀어져 가고 있다는 우려를 부인할 수 없다.
즉 편향된 외적 성장이 지속되어온 가운데 사목자들은 신자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매우 어려워 졌고,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소속감과 유대감을 상실하여 교회 공동체는 갈수록 그 속이 비고 껍질만 두터워 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당들은 공동체 중심이기 보다는 개인적 성향에 따라 변화되는 모습이 많아졌다. 이렇게 본당의 모습이 외적으로 비대화됨에 따라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에 대한 시선의 증대뿐만 아니라,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을 돌보는 것에도 힘이 모자라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들을 타파하기 위해 수원교구는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시노두스를 개최하였으며, 이 시노두스를 통해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라는 양대 과제를 제시하였다. 이는 21세기를 살아갈 수원교구의 새로운 복음화 정책이며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지역사회와 세상 복음화의 실현을 위해서 모두의 힘을 집중시키고, 조직과 시간과 재정의 지원을 통해 시노두스의 결과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 물론 시노두스 결과문의 구현으로써 수원교구가 복음화의 모든 측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내적 성숙인 자신의 복음화와 세상 복음화를 위하여 요람의 구실을 하는 ‘소공동체 활성화’와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이룸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면, 수원교구는 앞으로 더 큰 문제들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체할 수 없이 뛰어야 한다. 개인의 복음화를 넘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목표와 방법들이 정해졌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 일어나 가자”(요한 14,31)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다함께 일어나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