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프란치스코 성인 일대기


총 50 페이지로 구성된 프란치스코 성인 일대기입니다. 딱딱한 글로만 접하는 것과 달리 쉽고 간결하게 그 분의 생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자료는 한국 재속프란치스코 형제회 홈페이지(http://www.ofskorea.org/)에서 가져와 재구성했습니다. 글 밑에 있는 페이지 번호를 클릭하여 열람하시면 됩니다.


출생과 소년시절 1

그리스도교 역사상 참으로 위대한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태리 아시시의 부유한 포목상 베르나르도네 베드로와, 삐까부인이라 불리는 프랑스 출신 요안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출생과 소년시절 2

세례자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포목상 관계로 프랑스를 좋아하게 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인" "프랑스를 좋아하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프란치스꼬라고 불렀다. 자부심이 강하여 집안의 위신을 대단히 중시한 그는 자신의 사업에만 몰두하였지만 아들에게는 관대했고,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충실히 계승해주리라고 기대했다.

출생과 소년시절 3

삐까부인은 아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신앙교육에 힘썼고, 어린 소년의 마음 안에 기사도의 모험정신과 영웅적인 위대한 사랑을 심어주려고 십자군 기사 이야기들을 자주 들려주곤 했다.

출생과 소년시절 4

성당 학교에 다녔다는 것 외에 프란치스코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프란치스코가 열 다섯살이 되자 아버지는 공부를 중단하고 장사를 가르쳤다.

출생과 소년시절 5

어느날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가게에 와서 구걸하는 거지를 냉정하게 쫓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즉시 그 거지에게 달려가 사과한 뒤 많은 선물을 주고 돌아왔다. 그후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이들을 거절하여 그냥 돌려보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청년시절

부자의 아들인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돈을 물쓰듯 낭비하곤 했다. 상인계급의 기질을 드러내며 자본주의적 야심과 기사도의 꿈에 젖어있었던 활달한 성격의 그는, 늘 축제의 주인공이 됐으므로, 그의 친구들은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이며 친절한 그를 무척 좋아했고, 아버지는 고상한 친구들과 사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포로생활

그때 아시시 시민들과 뻬루지아의 귀족들간에 전쟁이 터졌다. 프란치스코도 기꺼이 참전했다. 그러나 아씨시 군대가 패배하여 그는 일년간의 포로생활로 중병이 들어 결국 그의 아버지가 몸값을 지불하여 석방되었다.

內的인 변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그는 내심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시골길을 산책하면서 그토록 아름답던 산과 들, 광활한 대지의 모습들이 전처럼 충만한 기쁨을 주지 못했고, 지난날의 그 아름답던 기억들은 일종의 공허감이나 환멸처럼 변해버렸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길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의 시작임을 아직은 깨달을 수가 없었다.

아시시로 돌아오다

그는 자신이 군인이 되는 것을 주님께서 원치 않으심을 깨닫고 즉시 아시시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호탕하게 먹고 마시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갑자기 마음 안에서 기쁨이 온통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됐다.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그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는 먼훗날 자신의 배필이 될 거룩한 가난의 귀부인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 성지를 순례하다

마침내 프란치스코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로마로 순례여행을 떠났다. 그는 사도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성인의 도움을 간청하였고, 귀중품들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회랑에서 거지를 만나자 그는 가난을 체험하기 위해 옷을 바꿔 입고 구걸하면서 며칠을 함께 지냈다.

나환자 모습의 그리스도를 만나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말을 타고 시골길을 가다가 한 흉측한 나병환자를 만났다. 당장 달아나고 싶었지만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말에서 내려 나환자에게 다가가서 포옹하며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갖고 있던 돈을 한 웅큼 집어 주고는 다시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다 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뛸듯이 기뻐하며, 그때까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던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고통받는 형제의 모습으로 숨어계시는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귀의했다.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어느날,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동남쪽 비탈에 거의 다 허물어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성 다미아노 성당 근처를 걷고 있었다. 그가 기도하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십자가 앞에 경건하게 엎드렸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당시에 흔히 사용되던 비잔틴 양식의 십자가상에 그려진 에수님의 입술이 움직이면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

그는 몹시 놀라 성당을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쓰러져가는 이 성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 명령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하며, 복종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명령을 완수하려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다.

돈을 마련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값진 포목들을 골라 말에 싣고 아시시 남동쪽의 폴리뇨시장으로 가서 그것을 팔아, 그 돈을 사제에게 갖다 드리면서 성당수리비로 써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제는 그의 아버지가 이를 알면 대단히 분노하리라고 생각했고, 프란치스코의 행동이 약간 이상하다고 판단하여 그 돈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인양 그 돈을 성당의 문틈에 던져 놓고는 유유히 성당을 떠났다.

박해와 감금

프란치스코가 한 일을 모두 알게 된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화가 나서,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즉시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달려 왔다.

그러나 그는 어느 토굴로 피신하여 한달 가까이 지냈으나, 다시 아씨시로 돌아왔을때는 당장 심한 욕설과 학대에 부딪쳤다. 절친했던 그의 친구들은 굶주림으로 초췌해진 얼굴과 누더기 옷을 걸친 그가 이미 미쳐버렸다고 생각했으며, 아이들은 돌을 던지며 조롱과 모욕을 해댔다. 그의 아버지를 그를 보자마자 당장 지하실에 감금시켜버렸다. 그러나 틈을 타서 그의 어머니가 그를 풀어주었다.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을 선언하다

아들의 미치광이 같은 짓에 격분한 그의 아버지는 유산 상속권을 포기시키기 위한 재판을 받으려고 강제로 그를 아씨시의 귀도 주교 앞으로 끌고갔다. 이 광경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교가 프란치스코에게 말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주기 위해 그대 아버지의 재산을 손실하여 마음을 상하게 한 후로 아직도 만일 아버지의 돈을 갖고 있다면 모두 아버지께 돌려 주시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즉시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모든 것을 이제 그에게 되돌려 줍니다." 하고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고 있던 값비싼 옷을 속옷까지 모두 벗어 그의 아버지에게 주며 말했다.

"아버지의 것을 모두 드립니다. 돈과 의복,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제부터는 아버지도 없고 아들도 없습니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나를 보게 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하느님만을 섬기거로 작정한 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주교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알몸인 프란치스코를 가려 주었다.

참 자유인, "위대한 왕의 使者"

이제 그는 모든 애착과 소유의 속박에서 해방된 참 자유인이 됐기에 유일한 소유인 다 떨어진 부대옷을 입고 아시시를 떠났다. 그러나 마음만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가 프랑스어로 주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가는데 느닷없이 강도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네 놈이 누구냐' 고 험하게 묻자 프란치스코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위대하신 하느님의 使臣이오."

그러자 그들은 프란치스코를 두들겨패서 눈 속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
"하느님의 이 촌스러운 사신아, 거기누워 있거라!"

강도들이 사라지자 그는 눈을 떨어버리고는 껑충껑충 기뻐 뛰면서 큰소리로 주를 찬미하며 자기의 길을 갔다. 1207년 4월 몬떼 수바시오 숲속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굽비오에서의 사도직 1

프란치스코는 굽비오 마을로 가다가 베네딕도 수도회의 성 베레꾼도 수도원에서 수사들의 일을 도와 주면서 며칠간 빵과 야채를 조금 얻어 연명했으나, 헌옷가지 하나 얻을 수 없게 되자 겸손히 그곳을 떠나 굽비오 읍내로 갔다.

굽비오에서의 사도직 2

한때 친구였던 스빠다룬가 백작에게서 옷을 얻어 입고 나병환자들을 치료 해주는 일을 거들면서 지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 일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내가 죄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 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낮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노동을 하고 밤이 되면 동굴이나 건초장에서 기도로 밤을 새웠다. 그는 이렇게 굽비오에서 처음으로 사도직을 경험하였다.

몇개월 후 그는 혹독한 멸시가 기다리고 있는 아시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성당을 수리하다 1

아시시로 온 그는 혹독한 모욕과 조롱을 견뎌내면서, 쓰러져가는 성당을 재건하라는 명에 따라, 건축자재들을 모아 성 다미아노 소성당으로 운반하고, 몇사람의 도움을 받아 성당 재건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그는 1206년 부터 2년간 성 다미아노 성당, 성 베드로 성당, 뽀르찌웅쿨라의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 등 세개의 성당을 수리하였다.

성당을 수리하다 2

성당을 수리하면서 그는 성당의 사제가 제공하던 음식을 겸손히 사양하고 문전걸식으로 연명하면서 인내로 굴욕감을 극복했는데, 이로써 그는 지금껏 맛없던 음식이 점점 더 감미로운 음식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1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미사중에 프란치스코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았지만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 못한 그는, 미사가 끝나자 사제에게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사제는 주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대목으로, 복음을 전하러 길을 떠날 때 금이나 은, 돈을 소유해서는 안되고, 식량자루나 돈주머니, 빵이나 지팡이, 신발도, 두벌의 옷도 가져서는 안되며, 오직 하늘 나라의 복음과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2

그러자 그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3

그는 주께서 이 말씀으로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다고 생각하고, 즉시 신발을 벗고 지팡이도 치워버리며 거친 통옷에 새끼줄로 허리를 동이고 아시시 거리로 나갔다.

회개의 설교

프란치스코는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사람들을 주님께로 초대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여, 하시시 거리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모든 이에게 큰 열정과 믿음과 기쁨으로 회개의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친근하고 소박한 말로 "주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하고 인사한 후 설교하였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의 설교를 경청하고는 감명을 받아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생활을 개선하였다.

첫 동료들

프란치스코를 몇번 자기 집에 맞아준 적이 있는 귀족 출신 뀐따발레의 베르나르도라는 부유한 상인이 있었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화려한 자기 집에 초대했는데, 프란치스코가 밤잠을 자지 않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라는 말만 반복하며 기도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는 감명을 받아, 다음날 그는 즉시 자기 재산을 다 팔아 아시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프란치스코를 따랐다.

첫 동료들 2

법률가인 까따니아의 베드로도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준 뒤 같은 날 그들을 따랐다.

에지디오라는 청년도 모든것을 정리하고 그들을 따랐다. 그들은 뽀르찌웅쿨라의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 근처에 움막을 짓고 함께 지냈다.

첫 동료들 3

프란치스코가 리에띠 거리를 지날 때 안젤로라는 기사를 만났다. 프란치스코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 낯선 기사에게 "당신은 전쟁을 위해서 태어났군요. 당신의 말과 칼과 창대신 누더기 옷과 띠로 바꿔 입으시오. 그리고 주 에수 그리스도를 따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형제들과 함께 하여 거룩한 수도자가 되었다.

첫 동료들 4

교황의 구두인준(口頭認準)을 받다

시리아 선교여행

1211년, 선교를 열망하던 프란치스코는 형제들과 함께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시리아로 선교여행을 떠났으나 강한 역풍을 만나 아시시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글라라입회, 2회 글라라 관상 수녀회 설립 1

1212년 사순절,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대성전에서 회개의 설교를 하였다. 대단한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회심자도 많았다.

청중 속에는 귀족 가문에 속하는 글라라 라는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프란치스코보다 열 두살이나 어린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마음 깊은 데서부터 울려나오는 히개의 설교에 완전히 매료되어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글라라입회, 2회 글라라 관상 수녀회 설립 2

3월 18일 예수 수난 성지주일 밤에 글라라는 가장 좋은 옷을 갖춰 입고, 자기의 고모와 함께 집을 뛰쳐 나와 형제들이 있는 뽀르찌웅쿨라 소성당으로 달려왔다.

제단 앞에서 값진 옷을 벗고 프란치스코가 준 거친 고복(苦服)으로 갈아 입고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듯이 아름다운 영혼을 얻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다. 프란치스코는 글라라 가족의 분노가 잠잠해질 때까지 그를 바스띠아의 베네딕도 수녀원에 숨어 지내게 했다.

얼마 후 글라라의 동생 아녜스와 다른 처녀들 몇이 그녀를 따라 그들은 1253년 8월 11일 글라라가 임종할 때까지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고행과 청빈의 생활을 했다.

탈혼에 빠진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언젠가 글라라가 프란치스코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천사의 성 마리아성당에 온 일이 있었다. 늘 하던 대로 그들은 마루바닥에 앉아서 하늘나라와 그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관한 생각 때문에 탈혼상태에 빠져 음식을 먹을 생각을 잊고 있는 동안 휘황찬란한 불꽃이 성당과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꽃이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것을 목격했다.

새들에게 설교하다

어느날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평원을 걸어가다가 새들이 떼지어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설교하였다.

“나의 새 자매들이여! 주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만드신 분을 많이 도 찬미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니도록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특별히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여러분을 보살피십니다.”

그러자 새들은 그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의 본성대로 목을 늘이거나 날개를 빼고 입을 벌려 기이한 몸짓으로 흥겨워하며 그를 응시했다. 그는 수도복 자락으로 새들을 스치며 새들의 한가운데를 오갔다. 그리고는 십자성호를 그어 새들을 축복하자 새들은 기쁜 듯이 몸짓을 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평화의 전달자

프란치스코가 시에나로 가던 어느날, 시가지가 온통 소란에 휩싸이고 두 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려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때 프란치스코가 즉시 달려가서 그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화해하도록 설득하여 시가지는 다시 평화를 회복하였다.

라베르나 산을 기증받다.

1213년, 프란치스코는 영주 올란도 백작으로부터 라베르나산을 기증받았다. 그는 11년 후 이 산에서 기도중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오상(五傷)을 받게 된다.

이 무렵 프란치스코는 베르나르도 형제화 함께 모로코 선교를 위해 스페인까지 갔으나, 중병을 얻어 꼼뽀스텔라의 성 야고보 성지를 방문한 후 아시시로 돌아왔다.

성 도미니코를 만나다

1215년, 로마에서 열린 제4차 라떼라노 공의회에 프란치스코도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를 옹호하기 위해 참석했다. 여기서 그는 당대에 유명한 성인 도미니코를 만났다.

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성령의 비추심으로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들은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216년, 프란치스코는 뻬루지아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임종과 그 후계자인 호노리오 3세의 교황 선출을 지켜보았다.

회교도의 술탄을 만나다

1217년의 총회 선교방침에 따라, 순교의 열망에 불타던 프란치스코는 1219년 세례 요한의 축일에 일루미나또 형제와 함께 이태리 동쪽 안꼬나항에서 십자군의 배를 몰래 타로 이집트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2개월 후 그들은 십자군에 포위된 이집트의 다미에따에 도착해 오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십자군의 비참한 패배를 목격했다. 성지를 차지하기 위한 이슬람교도들과 성기회복을 위한 그리스도교 십자군 사이의 전쟁은 이곳에서 치열하게 계속되다가 1219년 8월 29일 평화조약으로 한달간 평화의 시기를 맞았는데, 프란치스코는 이 무렵 동료 한명과 함께 사라센 진영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사라센 병사들에게 잡혀 “술탄! 술탄!”하고 외쳐 겨우 목숨은 구했지만, 곧 이슬람교의 군주인 술탄(Sultan) ‘멜렉-엘-까멜’ 앞으로 끌려갔다.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묻자 프란치스코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대답했다.

“저는 사람이 보내서 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각하와 각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드리고, 하느님의 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전하러 왔습니다.”

술탄은 겸손과 용기를 갖춘 프란치스코의 특이한 인품에 감명을 받았는지 말을 주의 깊게 다 듣고는 “우리와 함께 지내시오. 당신 좋으실 대로 당신들의 신에게 기도할 자유도 주겠소.”하고 말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고맙습니다만 각하께서 백성들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술탄은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금과 은, 융단 등 훌륭한 선물을 주었으나 프란치스코가 선물을 정중히 사양하고 떠나려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당신의 기도중에 나를 잊지 마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자 프란치스코는 즉시 그곳을 떠나, 약탁과 살육으로 날뛰는 다미에따도성의 함락을 뒤로하고 아끄리로 돌아와서, 시리아의 술탄이 허가해준 통행증을 가지고 회교 추장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고도 성지를 순례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집트를 나와 시리아까지 선교여행을 한 그는 1220년 초에 성지 예루살렘으로 갔다. 깊은 신심으로 베들레헴, 골고타, 무덤성당 등을 두루 순례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때부터 성지에도 형제회가 조직되어, 현재까지 180개의 성소와 성당, 78개의 수도원과 58개의 본당, 그 밖에 많은 학교, 진료소, 숙소, 사회사업기관 등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관리, 보호, 운영하고 있다.

첫 순교자 형제들

1220년 1월 16일, 모로코에서 선교하던 다섯 형제들이 거룩히 순교했다. 이 소식을 듣고 프란치스코가 외쳤다. "이제야 나는 진실한 형제 다섯명을 갖게 되었구나!"

제3회, 재속 형제회를 설립하다

1221년에 프란치스코는 제3회라고도 불리우는 재속 형제회를 설립했다.

이 회는 이미 결혼을 했거나 세속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세속 안에 살면서'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생활양식과 정신을 따라 겸손한 표양, 사랑의 자선, 가난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회칙에 따라 살아가는 단체로, 호노리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와 형제회 보호자인 우고리노 추기경이 함께 작성한 회칙을 기꺼이 인준해 주었다.

첫 회원은 포기본서 지방에 사는 상인 루케치오와 아내 보나돈나였다. 루케치오는 대단히 완고하고 인색하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으나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화되어 재산을 팔아 자선사업에 헌신했고, 환자들에게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의 아내 보나돈나도 남편의 자선과 봉사를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회개하여 훌륭한 회원으로 살다가 1260년 4월 28일, 같은 날 불과 몇시간 간격으로 두 사람은 영원한 행복이신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들은 현재 복자로 추앙받고 있다.

첫 회칙은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인준한 것으로 "회개의 형제 자매회" 라고 불리웠으나, 그동안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일만 명 가까운 회원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고 있다.

이 회의 정식명칙은 1978년 6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인준한 회칙상의 "재속 프란치스코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거룩한 가난

어느 축일날 형제들은 평소보다 더 좋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마음이 아팠다. 거룩한 가난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 불쌍한 거지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식당바닥에 앉아 빵부스러기를 먹었다. 나중에 형제들은 그의 교훈을 이해하고 즉시 겸손하게 용서를 간청했다.

단식, 고행, 기도, 선교여행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프란치스코는 형제회 총봉사자 즉 총장직을 겸손히 사임하고 까따니아의 베드로를 총대리로 선출했으나, 그 이듬해인 1221년 3월 10일에 사망하자 5월 성령강림 총회에서 엘리아 형제를 총대리로 선출하고 첫 회칙을 개정, 24장으로 된 제1회칙, 즉 "인준받지 않은 회칙"을 작성했다.

굽비오의 늑대를 회개시키다

제2회칙을 작성하다

마지막 회칙을 작성하기 위해 프란치스코가 폰떼 꼴롬보산에 가서 지내던 어느날, 몇 명의 형제들이 찾아와서 너무 엄격한 회칙을 작성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프란치스코가 쓴 회칙을 그대로 지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형제회로부터 떠나가도록 내버려 두시오.”

이 신비로운 음성을 듣자 그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말없이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제2회칙을 인준받다

1223년 11월 29일에는 봄에 프란치스코가 폰떼꼴롬보산에서 작성하고 보호자인 우고리노 추기경이 수정한 회칙을 교황 호노리노 3세가 형제회의 회칙으로 공식 인준해주었다. 이 회칙을 “인준 받은 회칙” 또는 “제2회칙” 이라고 부른다.

그레치오에서의 성탄 축일

프란치스코는 1223년 말, 레아띠 골짜기의 작은 마을 그레치오의 움막집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는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순례 떼 느낀 아기 예수의 탄생과 주님 생애의 신비를 생각하고는 성탄 날 밤에 다시 태어나실 아기 예수께 대한 극진한 정이 솟구쳐서, 후에 재속회원이 된 요한 빌리따 형제의 도움을 받아 성당 옆 동굴에 건초와 집으로 말구유를 꾸미고, 구유 옆에는 소와 당나귀를 매어 놓았다. 새 베들레헴이 꾸며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거룩한 모습을 보려고 달려왔고, 동굴은 그들이 가져온 밀초와 횃불로 대낮같이 환히 밝았다.

프란치스코는 조그만 아기 예수 석상을 안고 와서 소와 양 사이에 있는 말구유 위에 정중히 모셨다. 그리고는 참석자들에게 아주 열정적이고 신심 깊게 설교했다.

그때 이 성탄 구유를 꾸민 요한 빌리따 형제는 예식 중에 놀라운 환시를 보았다. 그는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인 프란치스코가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우듯, 생명 없이 누워있는 석상의 아기 예수님을 소생시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 교회에서 성탄구유를 꾸미는 풍습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베르나산에서 오상을 받다

1224년 여름, 프란치스코는 성 미카엘 축일을 준비하기 위해 라베르나산으로 올라가 40일간 단식과 기도와 고행으로 은거생활을 시작했다.

레오 형제와 함께 조그만 바위동굴에서 기도와 고행으로 지내던 어느날 저녁 프란치스코는 하늘나라의 기쁨이 어떠할 것인가 하고 깊은 묵상에 잠겨 있는데, 바이올린을 든 아름다운 천사 하나가 발현하여 활을 당겨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감미롭고 아름다운 음악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던지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점점 인간세계에서 멀어져 하느님께로 가까이 감을 느꼈다.

성모승천 대축일 저녁, 그는 자기 움막에서 40일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형제들에게 40일 동안은 절대 자신의 처소에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백사제이자 비서였던 레오 형제만은 그에게 성무일도를 읽어주고 약간의 빵과 물을 가져올 수 있도록 출입을 허락했다.

십자가 현양축일인 9월 14일 동틀 무렵, 프란치스코는 움막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여섯 날개를 가진 세라핌 모습을 한 신비로운 한분이 강렬한 빛을 발하며 하늘로부터 자신에게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두 손을 뻗고, 두 발은 모아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날개 둘은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고, 두 날개는 날려는 듯이 펼쳐져 있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는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같았다.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 환시가 사라진 후 프란치스코의 두 손과 두발, 옆구리에는 주님의 다섯 수난상처가 그대로 뚜렷이 새겨졌다. 창끝에 찔린 것처럼 생긴 옆구리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스며 나와 속옷과 수도복을 적셨다.

바로 그때 산 주변 마을의 주민들은 라베르나산이 불붙는 듯한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년간 그는 몸에 주님의 오상을 지니게 되었다.

시월 말, 피가 흐르는 오상을 수도복으로 감춘 채, 그는 고통 중에도 뽀르찌웅쿨라로 돌아와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의 여러 마을과 촌락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눈병 치료, ‘태양의 노래’를 짓다

1225년 봄,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 머물면서 위장병과 심한 눈병 치료를 받았다. 그는 이 눈병 때문에 늘 두건 같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다녀야만 했다.

그는 치료나 특전을 한사코 마다하였지만, 엘리야 형제는 네 명의 형제를 정하여 그를 보살피게 하였다. 그는 이에 순명하는 뜻으로 폴리뇨의 유명한 안과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우고리노 추기경도 소식을 듣고 리에띠의 유명한 안과 의사를 주선해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눈치료를 받으면서, 유명한 ‘태양의 노래’ 일명 ‘피조물의 찬가’를 지었다.

이 시는 이태리 문학사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의 하나로, 눈병으로 인하여 한낮의 태양도, 밤의 불빛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데서 나온 영감의 결실이었다.

태양의 노래

비할 데 없이 높고 전능하시고 착하신 주님이시여!
찬미와 영광과 명예와 모든 축복은 당신의 것이오니
이것들은 모두 당신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
진실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에 어울리는 자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어.

인하여 찬미 받으소서 내주님
온갖 피조물 가운데
그 중에도 내 형제인 태양 안에서.
태양은 낮을 만들고
주님에 의하여 우리를 비추나니
그는 그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 얼마나 크나큰 광휘를 발하고 있는가.
참으로 높으신 주님이시여!
그는 당신의 소식을 예고하나니.

찬미받으소서 내 주님
자매인 달과 무수한 별로 하여,
당신은 그것들을 하늘에 뿌려
빛도 밝고 고귀하고 아름답게 해 주셨거니.

찬양하라 내 주를
형제인 바람 가운데,
또한 공기와 구름과 맑게 개인 하늘과
당신의 피조물 온갖 것을 떠받치는
일체의 날씨 가운데

찬미 받으소서 내 주님
자매인 물로 하여
물은 이로우며 겸손하며 고귀하고 맑은 것

소리 높여 찬양하라 내 주를
형제인 불로 하여
당신은 이 형제로 밤을 밝혀 주시나니
불은 지극히 아름답고
즐거우며 힘세며 늠름하여라

찬미 받으소서 내 주님
우리들의 자매 어머니인 땅으로서
땅은 우리들을 기르고 가르치며
무수한 과실과 색색의 풀과 꽃을 낳게 하나니

오오 찬양하라 내 주를
당신에의 사랑을 위해 서로 용서하고
병과 고통으로 참는 자로 하여
행복하여라
끝까지 평안하게 참아내는 자
그들은 당신으로부터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며
당신으로부터 영원의 관을 받으리라

찬양하라 내 주를
자매인 물체의 죽음으로 하여
이 세상에 삶을 받는 자
그 자매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리

죄 가운데서 죽는 자 지극히 두려우며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 머무는 자
그 얼마나한 기쁨이랴
제2의 죽음도 마침내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

오오 주를 찬미하고 주를 찬양하라
주께 감사하고 주께 봉사하라
겸손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홍윤숙 역)

리에띠에서 눈 치료를 받을 때,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지은 ‘태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당시 도시 집정관과 주교 사이의 심각한 반목을 풀어 화해시켰다. 여름에는 다시 리에띠를 떠나 폰테콜롬보 은둔소에서 수술을 받았다. 당시 의술 수준은 그저 관자놀이에 뜨거운 불뜸을 뜨는 정도였는데, 그 수술은 그의 큰 인내심만을 시험하였을 뿐, 위장병, 간장염, 각혈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그의 병은 날로 악화되어만 갔다.

1226년 4월, 형제들은 다시 눈치료를 위해 프란치스코를 시에나로 모셔갔다. 그는 여기서 한 형제를 시켜 간단한 유언을 기록하였다. 아시시를 떠나기 전, 그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 들러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해 9월,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에게 자기의 병을 묻자 의사는 불침병 때문에 그 달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외쳤다. ‘어서 오시오, 나의 자매인 죽음이여!”

아시시에서 유언을 기록하다

이제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생의 마지막에 이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자신을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옮겨 주기를 청했다. 성당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형제들은 길을 멈추어 마지막으로 그가 태어난 아시시 마을을 보게 했다. 그는 아시시를 향하여 마지막 축복을 하며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온갖 선과 은혜에 대해 깊이 감사 드렸다.

9월말 경,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한 형제를 시켜 유언을 작성하였다.

세상을 떠나다

1226년 10월 3일 저녁, 프란치스코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주고 나서 자신을 침상에서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다윗의 시편 141편을 큰 소리로 읊었다.

“목소리 높이어 주께 부르짖나이다. 소리소리 지르며 주께 비옵나이다……
소리쳐 부르는 곳 주여 당신이오니, 이 몸이 피할 곳은 당신이외다.
생명의 나라에서 내 몫이외다.” (시편 141, 2. 6)

그리고는 성서를 가져오라고 하여 요한 복음의 다음 구절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요한 13, 1)

독서가 끝나자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먼지로 돌아가게 될 자신의 몸에 재를 뿌려 줄 것을 청했다. 그는 거룩한 가난을 끝까지 충실히 지킬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나서, 많은 형제들과 글라라의 자매들이 그들의 아버지요 지도자인 프란치스코의 주위에서 복된 임종을 지켜보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지극히 거룩한 영혼이 그의 육신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빛 속에 받아들여졌고, 육신은 주님 안에서 잠들었다. 그의 시편 노래는 낙원에서 끝났다.

바로 그때 아시시의 야고보 형제는 지극히 거룩한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영혼이 새하얀 구름 조각을 타고 넓은 물을 건너 곧장 하늘로 높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수많은 종달새 무리가 기쁜 듯이 노래하면서 그의 영혼을 둘러쌌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뽀르찌웅쿨라 성당으로 내려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어전으로 성 프란치스코를 모셔간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 넷! 하느님 앞에서는 이승에서 보낸 햇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이웃 형제들에게 봉사한 사랑의 생활인 것이다.

장례식

다음날인 1226년 10월 4일, 아시시를 항하여 장엄한 장레행렬이 진행되는 동안 거룩한 유해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잠시 머물렀다. 글라라와 그의 자매들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사부 성 프란치스코를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매들은 오상에 입맞추며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가버린 것에 대해 대단히 슬퍼했다. 아시시의 수많은 군중들은 횃불을 들고 장례행렬을 호위하며 따라갔다. 현재의 성 글라라 대성당인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그의 시신을 모시고 존경과 사랑을 표하면서 장례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