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글라라 - 김찬선(레오나르도) OFM
I. 성녀 글라라의 생애
1-1. 글라라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글라라는 1193년 또는 1194년에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아씨시는 지정학적으로 두 세력의 경계에 위치하였는데, 신성로마제국의 왕권과 교황권이 마주하고 충돌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비록 작은 도시이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그리고 다른 데에 비해 일찍 자치도시(Commune)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는 다른 데에 비해 상공업이 일찍 발달하면서 신흥세력이 귀족들에 대항하는 민주의식을 키웠다는 표시이다.
글라라가 태어났을 때는 아씨시가 신성로마제국의 왕권 밑에 있었고, Conrad가 아씨시를 위임통치하고 있었는데, 1190년 글라라가 태어나기 직전에 신성로마제국의 Frederik 1세가 죽고 그의 아들도 1195년 죽으면서 교황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옛 교황령인 아씨시를 되찾고자 하였고, 이에 Conrad는 아씨시를 뜨게 되었다. 이 통치의 공백기에 아씨시의 평민세력은 그동안의 불만으로 귀족들을 몰아내고 성곽을 파괴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씨시의 귀족들은 옆 도시 Perugia로 피난을 갔고, 페루지아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아씨시 평민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이 바로 아씨시-페루지아 간의 전쟁으로서 프란치스코는 평민군대로 이 전투에 참전을 하였고 글라라의 가족은 귀족이었기에 1200년부터 1205년까지 Perugia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글라라의 가족 관계는 아버지 Favarene와 어머니 Ortolana 사이에 세 자매가 있었는데, 글라라가 첫째 딸이다(다른 두 형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음). 가문은 황족이었다는 주장과 높은 귀족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아무튼 아버지 Favarone는 기사였다는 간단한 기록 외에는 전기상에는 별 언급이 없다. 어머니 Ortolana는 매우 신심이 깊었고(성지순례를 많이 하였고 이스라엘 성지순례까지 하였음) 자선행위를 많이 한 분으로 글라라에게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극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섬기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찍부터 복음적 생활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글라라가 수녀원을 창설한 다음에는 다른 두 자매와 함께 Ortolana도 글라라 수녀원에 입회하여 일생을 마쳤다. 글라라의 어린 시절은 모든 증인들이 그의 기도생활과 자선활동과 성덕을 칭송할 정도로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하였다. 그래서 어른들이 어린 글라라를 존경하였다고 증언하기까지 한다. 그의 영향력으로 피난시절 소꿉동무였던 두자매(필립바, 벤베누따)가 후일 글라라 수녀가 되었고, 가문, 미모, 성품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청혼을 받았지만 그는 끝내 수도생활을 선택하였다.
1-2. 입회와 프란치스코와의 관계
글라라가 Perugia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벌써 프란치스코가 복음적 생활을 시작하였고, 글라라가 아직 어렸지만 당시의 다른 수도생활을 택하기 보다는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생활에 마음을 두었다. 이것이 가족들의 심한 반대를 받은 이유였는데, 귀족의 신분을 누리면서 안정되게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기존의 수도원 대신 신분이 낮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하고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Franciscan의 삶을 선택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1212년 성지주일에 글라라도 성지주일 전례에 참석하였지만 왠지 글라라는 성지가지를 나가서 받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주교님이 몸소 글라라 있는 곳까지 오셔서 성지가지를 주었다고 전기는 기록하고 있다. 왜 글라라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주교는 어떻게 그것을 보고 직접 성지가지를 주었는지 전기는 설명하지 않지만 이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을 보면 무슨 뜻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 나가지 않아도 주교님이 성지가지를 몸소 주시면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글라라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 날 밤 글라라는 시체들이 드나드는 문을 통해서 집을 나와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이 있는 뽀르지웅꿀라로 가 봉헌을 약속하며 삭발례를 거행하였다.
글라라가 프란치스코를 따르기에 앞서 글라라의 4촌인 Rufino가 프란치스코를 따르기 시작하였고 글라라에 이어서 아녜스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어머니 오르똘라나까지 프란치스코를 따르게 되었는데, 왜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프란치스코를 따랐는가? 글라라가 만일 그 당시의 분도 수녀원에 입회를 하였다면 집안에서 오히려 집안의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고, 아마 하녀와 지참금까지 딸려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글라라는 그것이 참다운 복음적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극단적인 가난의 생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삶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부터 글라라는 한 편으로는 프란치스코의 제자로서(글라라는 자신을 프란치스코의 작은 가지라고 여겼음), 한 편으로는 프란치스코의 동반자로서 프란치스칸 가족을 이끌었고 특히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로 돌아간 후에는 상당한 혼란 가운데 있는 1, 2, 3회 프란치스칸 모두 가족에게 버팀목이 되었고, 영적 지도자였다.
삭발례 후 분도 수녀원들에서 잠시 머물다 집안의 반대가 잠잠해진 다음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고, 수리를 한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253년 임종하기까지 1212년부터 41년간을 그 좁은 공간에서 절대적인 가난을 고수하며 살았고, 41년간을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만을 관상하며 살았으며, 거의 일생을 병중에서 살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관상으로 병고와 가난의 삶을 기쁘게 살았다. 그는 자매들에게는 따뜻한 어머니였지만 외부의 온갖 어려움에 대해서는 여장부처럼 수녀원을 지킨 분이었다. 교회의 계속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난의 이상을 고수하였고, 사라센이 침입하였을 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 하나로 침입자들을 물리쳐 수녀원 뿐 아니라 아씨시를 구해내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의 여성주의자들은 글라라를 가부장적 교회와 사회에 대항하여 싸운 자기들의 선구자로 여기며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글라라는 교회에 순종하였고 프란치스코를 지극히 사랑하며 순종하였다. 글라라는 그의 유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연인이요 모방자인 프란치스코가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에게 가르쳐 주었음을,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이끄셨음을 누누이 얘기하고 있다. 이런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글라라는 끝까지 충실하였으며, 그래서 마침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쓴 회칙을 가슴에 안고 생을 마칠 수 있었다.
Ⅱ. 성녀 글라라의 영성
글라라의 영성을 한 마디로 얘기하라면 지극히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극단적으로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라라는 그의 유언에서 프란치스코를 예수 그리스도의 연인이요 모방자라고 아주 분명히 얘기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글라라는 프란치스코 못지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자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의 글자 그대로 닮는 것이요, 그러나 그 모방의 이유가 다른 무엇에 있지 않고 어머니와 정배로서의 사랑에 있었고 방법도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방의 동기도 사랑이요, 닮는 방법도 사랑이다. 사랑을 하면 그를 한 치도 떨어지지 않고 따를 뿐 아니라,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며 자연스레 그를 닮아갈 것이며 결국은 그와 하나가 된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에게서 이러한 점을 보았고 그도 그렇게 했고, 그답게 또 그에게 맞게 하였다.
2-1.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난
글라라의 가난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다보니 그를 따라나선 나그네의 가난이요. 그를 너무 사랑하다보니 다른 것들이 너무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 가난이다. 글라라는 유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 주셨습니다.”하고 얘기한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로 가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였다. 즉 그분이 하신 대로,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만 하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오시고, 그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가난이 하느님께 가게 하는 확실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발견하였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 가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로 틀림없이 갈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이다. 주님 스스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시며 떠돌아다니셨고, 제자들에게도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다니며 복음을 선포케 하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하늘에 정주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으로 오시고, 오셔서는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시는 것을 보고 그 사랑에 너무도 감동하여 그대로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발견하고는 순례자와 나그네 삶을 선택하였다. 가난은 이러한 선택의 결과이고 이러한 선택-순례의 삶-을 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이에 비해 글라라는 봉쇄의 생활을 택하였다. 외형적으로 정반대가 되는 생활에 있어서 일치점은 무엇인가? 순례자와 나그네 삶의 근본적인 목적과 본질적인 방법에 있어서 일치점이 있다. 첫째로 순례자와 나그네 삶의 목적은 단순히 이 세상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로의 순례이다. 이것을 다르게 얘기하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로 가기 위해 이 세상에 안주하지 않음이다. 따라서 가난이란 이 세상에 맛들이고 안주케 하는 것들의 포기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에게 공통적인 점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안주의 포기, 곧 복음적인 불안정성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불안정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들 가난의 중요한 화두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을 위한 직접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순례자와 나그네 생활양식을 택하였고, 글라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안주의 형태를 취하지만 극단적인 가난을 통해 복음적 불안정을 살아가고자 하였다. 즉, 가난의 특전을 통하여 안정적인 수입이 전혀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봉쇄란 가난의 측면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은 자들이 사는 궁궐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이었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좋으심과 도우심에만 완전히 또는 온전히 의지하게 하였다.
이러한 죽기살기의 가난은 좋으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첫째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믿음이요, 둘째 하느님은 모든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다. 모든 좋은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그 중 하나라도 소유하려는 것은 주권의 침입이요, 하느님은 모든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하면서 무엇을 확보하려는 것은 선을 베푸실 하느님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그에게 좋은 것이니 설사 이 세상에서 죽게되더라도 좋다는 자세이다. 이 세상에서 더 살기 위해 하느님께 대한 선에 의탁하기보다 다른 무엇에 의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글라라의 가난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만큼의 선의 가난이요, 병듦이요, 고통이요, 죽음이다.
글라라의 체험에서 이러한 가난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 기쁨, 풍요였다. 자기 스스로 가지려 하지 않고, 그래서 가질 수 없는 처지를 스스로 택할수록, 그리고 그가 유언과 회칙 6장에서 얘기하듯 ‘궁핍도 고생도 시련도 수치도 세속의 멸시도 그 어느 것도 피하지 않고’ 겪을수록 그는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을 사는 것과 같은 상거래, 교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환은 아주 만족스러운 교환이다. 아무도 얻는 것 아무 것도 없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거나 빼앗기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가 얻으려 한 보물은 무엇이었나? 영원한 부, 하늘나라, 영원한 영광과 복된 생명(1 아녜스).
2-2. 봉쇄, 고요, 관상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처럼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봉쇄 안으로 들어갔다. 나그네와 순례자로 산 것이 아니라 정주 안에서 산 것이다. 일단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짐이다. 글라라는 분명 세상, 특히 세속으로부터 멀어짐을 아주 강조하였다. 회칙(9,10-11)에서 그는 세속의 화제 거리를 수도원에 감히 끌어들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고, 수도원의 일도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라고 한다. 에르멘뚜르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매가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세속의 혼잡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세상은 화려하지만 기만적인 허상이기에 여기에 매료되거나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글라라가 봉쇄 안으로 들어감으로서 정말로 봉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위한 봉쇄이었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맛들이고 안주하게 할 그 모든 것들의 봉쇄였다고 한마디로 얘기할 수 있으며, 이 세상 것에 대한 철저한 가난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글라라에게는 봉쇄 역시 가난과 관상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세상의 괴로움과 번거로움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님은 물론 봉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골리노의 회칙이나 당시 다른 수녀원의 회칙에서는 창설이나 다른 수녀원으로의 이동 이외에는 봉쇄를 떠날 수 없었지만 글라라는 회칙에서 유익하고 합당하며, 분명하고 수락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수도원 밖을 나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5 명의 작은 형제들이 모로코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소식을 듣고 순교를 위하여 모로코에 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글라라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와 자매들의 수녀원이 병원 옆에 있었고, 자매들이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음을 알았지만(Nicolas Glassberger의 연대기에 의하면 프라하 수녀원을 세우는데 글라라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다. 글라라는 다미아노 수녀원의 다섯 자매를 프라하 수녀원의 양성을 위해 파견하였다) 결코 수녀원 밖에서 일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글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았고, 하느님과 백성을 위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지 않았다. 글라라가 막은 것은 하느님이 빠져있는 인간적인 도움이요, 인간적인 대화요, 인간적인 즐거움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관상하는데 방해만 되는 청각적, 시각적 소란스러움이었다.
그리고 글라라의 봉쇄는 분명 봉쇄를 동정성과 연관시키는 우골리노의 봉쇄 개념과도 약간 아니 많이 다르다. 우골리노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영성을 알고 있었고, 호노리오 3세의 명으로 그가 봉쇄 생활을 하는 수녀들의 보호자 추기경이 되고 그들을 위해 회헌을 작성할 때 그는 봉쇄를 동정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마치 과년한 딸을 시집 보내기까지 어머니가 자기 딸을 잘 간수하고, 그래서 마침내 순결한 처녀로 신랑에게 시집가게 하는 것처럼 봉쇄는 수녀들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동정녀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글라라 또한 자신과 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동정녀가 되어야 함을 얘기하고 있지만, 봉쇄를 동정성을 위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라라는 동정녀의 개념에 어머니의 개념을 더 한다.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전존재를 영원하신 거울 앞에 놓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거짓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눈먼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밀쳐버리고 그분을 사랑하라고 한 다음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작고 봉쇄된 태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키우고, 마침내는 세상에 낳아주는 존재이다. 봉쇄의 보호를 받고, 봉쇄 안에서 유일하신 신랑과 밀애를 나누는 동정녀에 그치지 않고, 동정녀+어머니 마리아, 즉 자신의 자궁이 곧 봉쇄이고 거기에 말씀이신 아드님을 받아들이고, 간직하고, 키우고, 낳아주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봉쇄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내적인 봉쇄인 것이다. 내적인 봉쇄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엄격한 봉쇄가 이루어져도 봉쇄 안의 같이 사는 자매들이 신랑과의 밀애를 방해할 것이요, 외부의 작은 소리와 영향에도 쉽게 영향을 받아 흔들려서 같이 사는 자매들을 포함해서 외부의 모든 존재를 방어하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는 폐쇄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봉쇄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글라라의 봉쇄는 어머니의 봉쇄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중에서 자라고 출산되도록 든든한 봉쇄를 내적으로 하는 봉쇄이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밖의 다른 소리를 차단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안에 가득 찬 소리들을 비어내야 한다. 나의 말이 내 안에 가득하고, 나의 주장이 내 안에 가득하여 무엇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내 말이 밖으로 터져 나올 판인데 어떻게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겠는가? 반대로 내적 고요만 있으면 어떤 소리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 안에 들어온다.
내적 고요는 또한 보게 한다. 내적 자유와 고요가 관상케 하는 것이다. 우골리노와 다른 봉쇄 관상 공동체들은 하느님 관상을 위해 보지 않고 보이지 않게 하는 봉쇄에 그렇게 힘을 기울였는데, 글라라는 그것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지만 역시 자유로웠다. 그 이유는 내적 자유와 고요만 있으면 관상은 식은 죽 먹기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적 자유와 고요가 없으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다. 시끄러우면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안에서 분노가 들끓고, 욕망이 아우성치면 도대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한 번 고요해 보라! 밖에서 들리는 고함에서 고함치는 사람이 보이고, 고함치는 사람에게서 존재가 보이고, 존재 안에서 존재로 不二이신 하느님이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2-3. 거울 영성
거울이란 어떤 것인가? 비추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거울은 무엇을 비추어 보이는 거울인가? 글라라가 네 번째 편지에서 얘기하듯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기에 그리스도라는 거울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원한 빛을 비추어준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라고 시편 저자가 얘기하듯 우리는 광채로도 광채를 발하는 빛을 보고, 반사된 빛으로도 빛을 본다. 거울을 통하여 사각지대의 사물을 보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반사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빛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가 티 없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빛을 반사하는 존재이고 또 반사해야 하지만 종종 반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빛을 가로막는 불투명체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보다는 자기 이름이 빛나고, 하느님이 영광 받으시기보다는 자기가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알량한 선을, 그것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고이 간직하지 못하고 자랑하고, 지닌 선이 없으면 위선적으로라도 선을 자랑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왜 나보고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고 하시며 철저히 선하신 하느님을 드러내고 자신은 겸손하고 가난하셨다. 그리고 영광은커녕 십자가의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다. 글라라는 그리스도라는 거울에서 구유에 누워 계시고 강보에 싸여계신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관상하였으며 인류 구속을 위해 무수히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관상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거울에 비친 이런 겸손과 가난과 사랑은 한 편으로는 우리의 교만과 위선을 비추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 거울에 비친 덕행들을 보며 우리 자신도 단장케 한다. 거울은 현재의 우리 자신을 비추어 주며 이렇듯이 추하니 아름답게 꾸미라고 재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울도 안 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요,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기 싫거나 또는 두려워 거울을 안 보는 사람은 자신을 단장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거울을 안 보며 나는 지금 예쁘고 아름답다고 최면을 걸거나 착각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글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요, 오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지존하신 임금님의 딸과 지극히 정결한 정배가 단장해야 하는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둘러싸여 그대 안팎으로 꾸미도록 그대 얼굴을 그 거울에 자주 비춰 보십시오.’라고 권고한다.
글라라는 그의 유언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또한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단장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또 하나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스도처럼 서로에게 하느님을 반사하는 존재가 될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어주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하느님 관상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면서 하느님을 관상케 되는 것이며, 서로를 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선에 있어서 가난한지를 깨닫고 고쳐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같이 사는 형제, 자매들이 모두 거울이 될 때 우리는 위와 아래와 사면이 거울에 둘러싸인 방에 있는 사람처럼 우리 자신을 훤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외출을 할 때 보이는 앞면만 아니라 안 보이는 뒤가 걱정이 되어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보는데 우리와 같이 사는 형제, 자매들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러나 우리는 종종 나를 훤히 비추고, 나의 약점과 죄를 잘도 들추어내는 자매가 원망스럽고 밉고, 심지어는 자신과 그 자매에게 화를 내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거울은 치부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사실은 단장하라는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거울들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