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 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진정한 인간 관계가 그리운 날」에서)
우리가 ‘그 한 사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만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이웃의 ‘그 한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만인의 ‘그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만, 동시에 사회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난 다음에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의 공기를 마시며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좋은 면에서든지 나쁜 면에서든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왜곡된 세태에 알게 모르게 젖어 있던 타성도 과감하게 떨쳐 내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지한 자세로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형제애를 키워 가야 합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할 책임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아무도 혼자 고립되어 살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 ‘인’(人)자를 둘이서 서로 기대는 관계로, ‘인간’(人間)을 사람들이 서로 기대며 좋은 사이를 맺어야 하는 존재로 풀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교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 따라, 나이나 성별에 따라 그리고 정치적 주장이나 종교적 입장에 따라 편을 가름으로써 매우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사회 혼란은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와 안녕을 해치고 결국 사회 전체에 커다란 불행을 낳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형제적 관계로 존재하며,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공동 운명체로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질서와 조화를 갖춘 인간 사회를 이루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각자가 속해 있는 가정과 학교, 직장과 단체에서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웃과 사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곧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이나 이해 관계, 이념이나 사상을 뛰어넘어 서로 협력함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도시와 농촌은 하나의 생명 공동체임을 인식하여, 농어촌 생산자는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마음으로 건강한 먹을 거리를 생산하여 공급하고, 도시 소비자는 농어민들이 적정한 가격을 보장받도록 협력함으로써 그들의 수고에 보답하고 우리 생명을 지키는 농어촌을 살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족끼리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던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 공동체임을 깨닫고, 형제적 사랑과 나눔의 정신으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데에도 한몫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과 여과되지 않은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소비 문화를 정화하여 인격을 닦고 인성을 키울 수 있는 건전한 문화 생활을 정착시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윤 추구와 능률주의와 업적주의의 그늘에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버림받은 아이들과 노인들, 미혼모와 매춘 여성들, 불의하게 천대받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펴는 데 앞장 서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 실현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는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평등이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악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병폐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엄성은 사회가 주는 것도 아니며 법률이나 관습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본성에서 흘러 나오는 모든 인간 권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유린하거나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해치는 정치 제도나 사회적 관행은 마땅히 개선되어야 합니다. 모든 정치인과 공직자가 정의롭고 공정하게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일은 우리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과 사회에 봉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현세 질서에 불어넣어야 한다는 우리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각자가 속해 있는 분야에서 공동선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가 권력자들이 하느님의 법을 존중하고 인간의 권리를 수호할 때 그 권위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당한 권력이나 인권을 침해하는 법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으며”(로마 13,3),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보다 하느님께 복종하여야(사도 5,29 참조)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애의 구현
오늘날 인류 사회는 물질 문명의 발달로 풍요로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공 위성과 언론 매체, 교통 수단의 발달로 거리감이나 시간 개념이 줄어들어 ‘지구촌 가족’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국제 관계가 밀접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빈곤 국가의 국민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으며, 국가간에는 인종 분쟁, 무역 분쟁, 군비 경쟁, 종교 분쟁 등 끊임없는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평등하여야 할 자리에 불평등이 자리잡고, 균등한 분배의 자리에 독점이 파고들어 인류 공존과 평화를 위협하고, 나아가 인류 공동체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국가들을 돕고 군비 축소와 전쟁 억제를 위하여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과 힘을 모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현대인,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입니다”(사목 헌장, 1항).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여야 합니다(야고 2,17 참조). 우리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며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13-16참조).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을 안겨 주는 교회와 함께하는 신앙인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선의의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구현하는 사회인이자 세계인이 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일원이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형제애를 키워 가도록 노력하며 사회의 각 분야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또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선의의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지역간, 계층간, 성별간, 종파간의 편견을 버리고, 부정과 불의를 부추기는 어떠한 유혹도 단호히 거부할 것을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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