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양승국 신부님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 요한 1,6-8, 19-28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요한 1,6-8.19-28)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절한 고정희 시인의 시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유고시집의 표제시를 읽다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 구나
쓸쓸함이 또한 여백이 로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 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어떻습니까? 이 시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어쩔 수 없이 쓸쓸했던 사람, 그 누군가를 위해 기쁘게 사라진 사람, 그래서 여백 같던 사람…
저는 세례자 요한이 생각났습니다.
한 그룹의 신자들과 마주앉아 차를 한잔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자 자신들이 소속된 본당 신부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습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경쟁하다시피 칭찬들을 하시는데, 제가 샘이 다 날 지경이었습니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신자들이 겪는 고초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함께 눈물 흘리는 사제, 겸손하게도 신자들에 앞서서 먼저 인사하는 사제, 본당 재정적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홀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제, 미사 시작 1시간 전, 가장 먼저 성체 앞에 앉아 기도하는 사제, 조금의 돈이라도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 찾아나서는 사제,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의 돈도 쓰지 않는 사제, 신자들에게 민폐 끼치기 싫다며 죽기 살기로 축일행사를 마다하는 사제, 전철 잘 운행되는데 자가용은 무슨 자가용이냐며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제, 인사이동 때면 모든 것 그냥 두고, 모든 것 나눠주고 손가방 두 개만 챙겨서 바람처럼 떠나는 사제, 세례자 요한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는 사제…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은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가장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신은 누구요?”란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습니다. 자신은 조연에 불과하고 주인공은 자기 뒤에 서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시는 예수님이 더욱 높이 올라가도록, 더욱 빛을 발하도록 자신을 최대한 낮춥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인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의 삶의 준비가 부족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 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의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인 연극에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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