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일생 - 운보 김기창


예수의 일생 - 운보 김기창


수태


예수의 탄생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


제자들을 만남


오천명을 먹임


물위를 걷다


죄 없는 자가 먼져 돌로 쳐라


예수의 발을 씻음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재판을 받다.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힘


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부활


승천

운보 김기창 화백에 대하여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은 7세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후천성 귀머거리가 됐다. 17세때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 지 6개월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입선해 일찌기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

1937년 선전에서는 `고담`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광복 이듬해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 아내로부터 입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 말문을 틔었다.

그 뒤 수차례에 걸쳐 부부전을 개최하는 등 금슬을 과시했지만 76년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만년을 외롭게 지냈다.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던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그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해 그린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 < 완전군장의 총후병사 > 등은 1943년 8월6일치 < 매일신보 > 에 실렸다.

운보는 6.25전란 당시 1.4후퇴로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갔다. 처가의 창고 하나를 방으로 개조해 3년간 피난살이를 했다. 그때 군산비행장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당시 어떤 큰 영감이 그를 사로잡았으리라. 그 곤궁한 시절 운보는 '예수의 일생'이란 대업을 완성했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예수와 당시 등장인물, 배경을 모두 한국인과 한국 복식, 배경으로 바꾸어서 성경의 내용에 따라 29점을 그렸다.

운보는 서울에 올라와 1954년 4월 임시로 꾸민 화신백화점 5층 화랑에서 성화전 (聖畵展)을 열어 이 작품들을 처음 선보였는데 그 독특한 '한국화' 작업이 신선한 화제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한 독일신부가 예수의 부활 장면이 빠졌다며 1점을 더 그리기를 권해 '예수의 일생'은 30점이 됐다고 한다.

운보는 타계한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이 "의지의 작가요, 정열의 뭉치"라고 불렀듯 다양한 작풍을 섭렵하며 1만5천여점(삽화.데생 포함)의 작품을 남겼다.

인물. 산수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기의 동양화에서부터 한국 산하의 정기를 힘차고 대담하게 그린 청록산수,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바보산수, 예술정신을 자유롭게 펼친 추상작품 등 그가 다룬 주제와 표현방식에는 한계가 없었다.

특히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활짝 핀 '바보산수'에서 그는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통해 우리의 민화를 계승한 자유롭고 해학적인 화풍을 보여주었다.

운보는 바보산수에 대해 "나는 작가 정신이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 죽은 것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 있어요. 바보란 바로 덜 된 것이지요. 예술도 끝이 없는 것이어서 언제나 덜돼있을 수 밖에 없지요.”라고 말했었다.

대표작으로는 '정청' '군마도' '군작도' '가을' '갓 쓴 예수' '흥락도' '문자도' '점과 선 시리즈'등이 꼽힌다.

1914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출생
1920년 장티푸스로 청신경 마비(7세)
1930년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로 입문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서‘판상도무(板上跳舞)’입선(17세)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46년 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

1947년 '운보-우향 부부전’개최.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1950년 전북 군산으로 피난.월북한 동생 기만씨 등과 헤어짐
1952년 예수 일대기 그린 작품 30점 제작

1954년 '오수’등 인물과 풍속화 시리즈 제작
1955년 대작 ‘군마도’와 ‘탈춤’시리즈 제작.홍익대 강사.섬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세종대 전신)회화과 학과장

1968년 부인 우향 도미.
1970년 청록산수 첫선
1971년 3.1문화상 수상.서울 인사동에‘운향화실’개설

1976년 우향 타계.바보산수 제작
1977년 은관 문화훈장 수상.운향미술관 성북동 자택에 건립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 취임

1981년 예술원 정회원.국민훈장 모란장.한독미술가협회 회장
1982년 예술원상 수상.농아복지회관 개관
1984년 충북 청원에‘운보의 집’완공

1985년 가톨릭으로 개종
1988년 자서전‘침묵의 심연에서`출간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서`운보전`.‘걸레수묵’발표

1993년 예술의전당‘’팔순 기념 대회고전’
1994년 전작도록 5권 발간
1996년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쓰러짐

2000년 미수(米壽)기념특별전.월북동생 기만 씨와 상봉
2001년 타계.(8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