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능하신 하느님이 무력해 보이는가? - 차동엽 신부님
왜 전능하신 하느님이 무력해 보이는가? - 차동엽 신부님 저서: 여기에 물이 있다 중에서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외견상의 무능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Ⅰ요한 4,7 - 10참조)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두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실 때
이미 '사랑의 모험(冒險)'을 감행하셨다는 점입니다.
자유 의지를 주실 때
이미 인간의 '거절', '거부', '배반'을 각오하고 주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 배반과 모반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무능하고 무력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자유 의지를 박탈하지 않는 한 하느님은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속앓이를 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고통을 감내하실 수밖에 벗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셔
동시에 하느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갖 고통까지 감수하고 십자가도 불사합니다.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인류와 함께 고통을 당하십니다.
이 사랑의 고통은 아무나 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하느님은 무력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그리고 근원적인 이유입니다.
둘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속성상 ' 함께아파하실 수밖에'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연민(憐憫)을 표현하는 영어의 'compassion'이나
독일어의 'Mitleiden'도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고통을 모르면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고통을 모르는 비정의 하느님, 무감각한 하느님을 우리는 인격신으로,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이를 나치 시대에 '암살범'으로 물려 처형당한 본회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겪으셨던 고통 가운데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에 동참(同參)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구원 섭리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逆說)입니다.
요컨대, 하느님의 사랑은
고통을 초래할 가능성을 예상하고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로 인해 인간이 죄와 고통과 죽음에 떨어졌을 때
스스로 인간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서
인간의 죄를 같이 아파하고 고통을 겪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행 가운데서 함께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이제 인간의 불행은 하느님의 불행이며,
인간의 울부짖는 소리는 하느님의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왜 나를 이렇게...."라고 울부짖을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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