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안드레아 형제님의 글

오늘 저녁 저희 성당에서 대림음악 피정을 하실 신상옥 안드레아 형제님의 글을 올립니다. 이글은 쿠퍼티노 4반의 김기상 베드로 형제님께서 반원들과 함께 공유해주신글입니다.

임쓰신 가시관

글 : 신상옥

내가 초등학생 때 할머니께서 원인 모를 병에 걸리셨다.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가 성가병원에서 치료하시고
미사도 드리자고 권하자 할머니는
“나는 예수고 마리아고 다 싫어. 굿 좀 해줘 굿!”
그래서 진짜 굿을 하게 되었는데 무당의 말이
손자 한명이 당제에 들어가 조상신에게 절을 하면 낫는다고 했다.
무섭기도 했고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소리 없는
반대도 있어 6, 7명 되는 손자들이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당제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사실 할머니는 “예수는 나의 라이벌이니라.” 하시며
가톨릭을 들여온 어머니를 원수같이 생각하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손자의 그 행동은 할머니에게 흡족한 기쁨을 드렸던 집안의 큰 사건이었다.
이처럼 나는 어릴적 주님보다는 무속적 신앙을,
성가보다는 유행음악을,
착하게 사는 것보다는 무섭고 힘센 사람이 이끌어가는
세상을 접하면서 살았다.
사실은 사랑을 무지 받고 살면서도 사랑이 뭔지 몰랐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아무튼 할머니는 완전쾌유 되셨고 모든 공을 나에게 돌리셨다.
그런데 그때 나는 당제에 들어가서
절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도 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하느님,
저의 할머니를 낫게 해주소서.” 라고도 기도했었다.
당제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께서 귓속말로 부탁하셨기 때문이다.

훗날 할머니는 내가 신학생이 되었을 때
‘안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셨고
나의 큰 후견인이 되셨다.
나는 이러한 세월을 통하여,
각자에게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시는 주님을 느꼈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데
나의 경우는 신학교 입학이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목청이 좋았던 나는 성가와 가요,
가곡을 적절히 구사하고 야구중계까지 하며 성당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선생님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학교에서는 음악선생님과 친구들이 음대에 진학하여 성악가가 되기를,
성당과 부모형제들은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성악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홍난파의 음악을 기념하는
‘난파 가곡제’라는 전국대회가 있었고
성당에서는 교구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성가 경연대회’가 열렸다.
그때 나는 성악가가 되기 위한 꿈으로
가득차 있던 때라 ‘난파 가곡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난파 가곡제에 앞서 열렸던 ‘청소년성가경연대회’에서
나는 합창, 독창 그리고 중창 부문에서 모두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교구의 스타가 되었다.

당시 음대에는 특차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입상 5위에만
들면 S대 음대를 갈 수 있었다.
지역예선을 1등으로 통과한 나는 성악의 메이저리그인
난파 가곡제에 도전한 것이다.
함께 가셨던 교장선생님, 음악선생님, 어머니, 형
그리고 친구들 모두 나에게 격려와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20여명의 참가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한 결과
내가 맨 먼저 부르게 되어 무척 떨렸다.
그때 무지 떨고 있었던 나에게 큰 형이
“이걸 먹으면 떨지 않고 너의 끼를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소주가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형이 왜 그리 고마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주를 들이키고 무대에 올라
첫 곡 ‘그대를 사랑해’를 분위기 있게 잘 불렀다.
마음속으로 ‘난 1등이다.
누가 나보다 더 잘 할 것인가.’ 생각하며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나의 18번이었던 두 번째 곡 ‘석굴암’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어질어질하면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타가 우승 후보라고 공인했던 나는 10등 안에도 못 들었다.
엉엉 울었다. 그런데도 형이 원망스럽지 않았고
미련이나 불만도 생겨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릴적 늘 말씀하시곤 했던
“세상은 믿을 존재가 아니라 사랑할 존재다.
누구를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사랑하고 살아라.”는
말씀 덕분이었던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머니가 원하셨던 신학교에 갔다.
그러나 신학교 생활은 나에게는 힘겨웠다.
그래서 당시 신학교 학장이셨던 최윤환 신부님을
직접 찾아뵙고 “신학교를 나가야 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왜 나가려 하느냐고 물으셨다.
“저는 확신도 없을뿐더러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여기에 묻혀서
이것도 저것도 안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최 신부님께서는 무슨 가수가 되고 싶냐고 또 물으셨다.
조용필이나 송창식처럼 인기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하느님 가수’가 되라.”고 하시며
“네가 자유롭고 싶은가 본데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부모님도 만나 뵙고
하루 실컷 놀다 와라.
그래도 힘들면 여름방학도 있으니까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서랍에서 3만원을 꺼내 주셨다.
84년도니까 꽤 큰돈이었다.
그 돈을 받아들고 나와서 어머니도 만나고
친구들과 실컷 놀고 다시 들어가서는
‘그래, 나를 이렇게 아껴주시는 신부님이 계신데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 뒤로 7년을 더 공부하게 되었다.

84년, 하한주 신부님의 시 ‘사제상’에 곡을 붙여
‘임 쓰신 가시관’이란 곡을 만들었다.
서울 가톨릭 대학 ‘낙산 중창단’의 음성으로
여러 차례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게 되었고
나도 성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신부님과 학생들의 격려 속에 ‘임 쓰신 가시관’이
음반으로 나오던 날, 침대에 들어가 감사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님이 신학교에 오셔서
“여기 요즘 돌아다니는 유명한 곡이 있다던데
나 좀 한번 들려줘봐.” 하시는 거였다.
신학생들이 다 일어나서 ‘임 쓰신 가시관’을 불렀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추기경님께서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시더니 “참 좋다.”고 하셨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저희, 방학 좀 주십시오.” 했다.
추기경님의 표정이 근엄하게 바뀌시며 “한 번 더 불러봐.” 하시고는
신학생 400명 전부에게 3박 4일 휴가를 허락하셨다.
음악은 그토록 위대한 거였다.

그러나 부제품을 앞두고도 나는 확신이 없었다.
‘그냥 신부되자. 신부돼서 또 철들겠지.
뭐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열심히 살았으니까…’하는 정도로.
1년만 더 공부하면 신부가 될 시점에서
당시 교구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 나에게 사제 성소의 꿈을 접으라고 하셨다.
신부님은 “네가 지금은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의 이 결정에 대해서 감사할 날이 올 것이다.”고 하시면서
무척 섭섭해 했던 나를 달래주셨다.
노래 절제도 안되고 성적도 나쁘고
책임감도 부족하고….
내가 나를 봐도 학교에서 잘 내보내 준 것이다.
속 시원 하기도 했지만,
사제가 된 친구들이 고뇌할 때
내가 더이상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슬프다.

현재 나는 성악가도 아니고 신부님도 아니다.
평범한 가정을 가진 성가가수가 된 것이다.
가끔 내 옆에 있는 아내와 세 아들을 보면서
성소 국장 신부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감사를 드린다.

하느님은 나에게서 이렇게 모든 것을 가져가시는 듯 했지만
나에게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전달할 성가를 만들고,
부르고, 공연할 기회를 주시며 이 벅찬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셨다.
나에게 꿈이 있다면 하느님을 더 가까이 보는 것,
내적으로 하느님을 확실히 만나는 것이다.

솔직히 “상옥아! 나 하느님이다. 악수 좀 하자.” 그러시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나에게 목이 쉬었을 때도
최선을 다해 노래 부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신다.
나는 주님께서 주신 이 목소리로
주님을 죽도록 찬미하는 ‘하느님 가수’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