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농부사제’ 정호경 신부님을 보내며

찬미 예수님

‎[가신이의 발자취] ‘영원한 농부사제’ 정호경 신부님을 보내며

연둣빛 생명이 움터 온 산들이 살아나는 봄날, 신부님은 거친 숨을 놓으셨습니다. “고맙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일흔 두해 동안 머무시던 육신을 벗고 영원한 안식처로 길을 떠나셨습니다. 가난한 사제이자 부족함이 없는 농부로서 당당하고 멋진 삶을 기쁘게 사시다가 마침내 해방하시는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정호경(사진) 신부님은 일제 말 봉화에서 금융조합에 다니던 아버지의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여섯 살 되던 해 8·15가 되자, 좌익운동을 하시던 아버님은 집을 비우셨고, 어머니마저 막내와 함께 남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가 ‘6·25 전쟁’ 5일 전, 신부님 나이 열한 살이었습니다. 그 뒤로 부모님을 만날 수 없었고 홀로 너무나 끔찍한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겪으셨습니다. 신부님이 군사독재문화, 분단과 힘의 논리를 강력히 거부하셨던 것은 어린 시절 체험과도 관계가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긴급조치로 두 차례의 구속과 투옥을 통해서, 그리고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와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일하시면서 늘 ‘더불어 사는 길-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을 보게 해주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숨막히고 암울했던 박정희 유신독재시절, 제가 민청학련사건으로 복역중일 때 신부님께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드시고 노동자·농민·양심수들을 대변해오셨습니다. 그래서 저와도 공범이 되셨고요. 신부님이 계시기에 해가 지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생면부지 낮선 마을에 깃들어 농민들과 통성명하고, 밥 얻어 먹고,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자며 얘기를 나누기를 얼마나 즐겨 했던지요. 육사 문학의 밤, 권정생 동화의 밤, 이철수 판화전, 백기완 선생 초청강연회를 열기도 하고, 장자 공부모임, 채플린 영화감상모임, 단소 교습모임 등 숨통을 트는 일도 함께 했지요. 그래서 농민가처럼 춤추며 싸우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신부님이 좋아하시던 말씀 ‘불취외상 자심반조’(不取外相 自心返照), 겉모습을 취하지 말고 내 마음을 돌이켜 비춰보라는 팔만대장경의 경구였습니다. 사람의 성숙을 막는 안팎의 장애가 있으니 바로 소유욕·지배욕·복수심·죄책감 등과 같은 내 안의 굴레와, 독점과 억압의 구조악과 같은 세상의 죄, 이런 이중굴레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안팎의 이중굴레와 대결하면서 나눔(밥을 제대로 먹고)과 섬김(참된 말을 제대로 나누자)의 공동체를 스스로, 함께,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농촌과 도시에서 생활공동체를 건설하되, 겨자씨처럼 작게, 누룩처럼 확산되게 연대하자는 신부님의 생활공동체운동은 올해 유엔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를 맞아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운동가들의 화두이자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입품 그만 팔고 몸으로 살련다’고 작심하시고는 일체 출입을 마다하시며 비나리 풍락산 자락에서 스스로 집을 짓고 낮에 농사짓고 밤이나 겨울 농한기에 책을 쓰시며 ‘돈 없이도 즐겁게 사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병철 형의 조시를 다시 한번 올립니다. ‘하느님은 농부이시다/ 그 한마디 말씀을 가슴에 씨 뿌리고/ 온몸으로 가꾸며 사신 우리들의 농부사제/ 당신의 그 마지막 이름을/ 다시 그리 불러봅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당신/ 사랑합니다.’ 정재돈/한국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한겨레> 자료사진등록 : 2012.05.03 20:19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5311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