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장 조물주를 얻기 위하여 조물을 천히 봄
1. 제자의 말: 주여, 어떤 사람이든지 조물이든지, 나를 방해하지 못할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어야 한다면 내게는 많은 은총이 아직 필요하옵니다. 내가 어느 조물에 얽혀 있게 되는 때는 반드시 당신께로 자유로이 나아갈 수 없나이다. "비둘기처럼 날개라도 있다면 안식처를 찾아 날아가련만."(시편 55,6)하고 부르짓던 그는 자유로이 주께 향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나이다. 순직한 눈보다 더 고요한 것이 무엇이며, 세상의 것을 조금도 탐하지 않는 그 사람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이 다시 있겠나이까? 그러므로 모든 조물을 초월하고 자아(自我)를 완전히 떠나 탈혼 상태에 이르러, 만물의 창조주이신 당신은 조물과 같은 점이 없는 줄을 깨달아야 되나이다. 어느 조물에 아직도 얽혀 있는 이는 하느님의 사정에 자유롭게 착심하지 못하나이다. 그로므로 조물을 전혀 떠나고, 헛된 사물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많지 않으므로 관상(觀想)적생활을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무옵나이다.
2. 여기에서 영혼을 울리고 자기 자신을 초월케 하는 많은 은총이 필요하나이다. 사람이 영신으로 높이 오르고 모든 조물을 떠나 완전히 하느님과 화합치 아니하면, 그 안다는 것이나 그 가진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옵나이다. 홀로 하나이시오 무한하시고 여원하신 선(善)외에 다른 무엇을 귀하게 보는 그 사람은 오랫동안 약한 사람이 될 것이요, 땅으로 기울어져 있나이다. 하느님이 아닌 그 모든 것은 다 헛것이오며, 또 헛것으로 여겨야 하나이다. 천상의 빛을 받으며 신심 있는 사람의 지혜가, 유식한 학구적(學究的)인 성직자의 지식과 매우 다르다 하겠나이다. 하늘로부터 하느님 친히 영혼에게 내리시는 그 지식은, 사람의 지력으로 얻은 그 지식보다 더 존귀하나이다.
3. 많은 이는 관상 기도를 사모하지만, 그에 필요한 것은 아니하려드나이다. 여기에 제일 크게 방해되는 것은 표적과 감각물(感覺物)에만 정신을 몰두하고, 자기를 완전히 이기는 일에 진실히 마음을 쓰지 아니하는 것이옵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천한 세상 사물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더 많은 걱정을 하면서, 우리 내적 행동을 겨우 생각하고, 혹 생각할지라도 매우 드물게 오관을 완전히 수습하여 생각하니, 이는 무슨 일인지, 어떠한 신으로 우리가 인도되는지, 영신적 인간이라는 우리가 무엇을 주장 하는지 나는 모르나이다.
4. 슬프게도 정신을 조금 집중하다가 외적 일로 쏘다지고, 또 우리 행동을 세밀히 살펴보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나이다. 우리 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우리가 살피지 않고, 또 모든 것이 어떻게 더러 운지 생각하고 탄식하지 아니하나이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땅위에 냄세를 피우고 있었다"(창세 6,12). 그래서 큰 홍수가 왔나이다. 내적 감정이 썩었으니 자연히 여기서 나오는 행동이 썩은 것이었나이다. 이는 내적 능력이 없는 것을 드러나게 하나이다. 깨끗한 마음에서 착한 생활의 열매가 나오나이다.
5. 사람들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나, 어떠한 덕을 가지고 하였는지 별로 상관치 아니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무개가 용맹한지, 재산이 있는지, 아름다운지, 재주가 있는지, 글을 잘 쓰는지, 노래를 잘하는지, 일을 잘하는지 알려고 하나, 마음으로 어떻게 가난하지, 어떻게 잘 참는지, 어떻게 온순한지, 신심이 얼마나 있는지, 내적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그런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나이다. 본성대로 행하면 외적 것만 상관하고, 은총대로 행하면 내적 것으로 생각을 돌리나이다. 본성대로 행하는 자는 가끔 속고, 은총대로 행하는 자는 속음을 면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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