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신앙교리성, 교회에 대한 교리의 몇 가지 측면에 관한 문서 발표


교황청 신앙교리성,
교회에 대한 교리의 몇 가지 측면에 관한 문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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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0일 교황청 신앙교리성 문서 “교회에 대한 교리의 일부 측면에 관한 몇 가지 물음들에 대한 답변”이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신앙교리성 장관 윌리엄 레바다 추기경과 차관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의 서명과 함께,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폴란드어로 발표되었다.

※ 전문에서 언급되는 교회 헌장 8항 ‘subsistit in’에 관한 신학적 논의와 해설은 [사목] 2006년 9월호(170-227면)의 "현대신학 동향"을 참고할 수 있다.

신앙교리성 교회에 대한 교리의 일부 측면에 관한 몇 가지 물음들에 대한 답변

서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 「동방 교회들」(Orientalium Ecclesiarum)을 통하여 가톨릭 교회론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하였음은 누구나 주지하는 바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 6세의 회칙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 1964)와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를 통하여 교황들도 통찰과 실천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론의 다양한 측면들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려는 신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 분야에서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실제로 이 주제는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때로는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잘못을 바로잡아 설명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신앙교리성이 (교회에 관한 현대의 오류를 반박하는 가톨릭 교리) 선언 「교회의 신비」(Mysterium Ecclesiae, 1973), (친교로서 이해되는 교회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친교의 개념」(Communionis notio, 1992),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일성과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2000)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목적에서였다.

이 주제의 광범위함과 관련된 여러 주제의 새로움은 지속적인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이 분야에서 새로 발표되는 수많은 글 가운데 일부는 오류가 있는 해석에 물들어 있어서 혼란과 의혹을 낳고 있다. 신앙교리성은 이러한 여러 해석들에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교회에 관한 가톨릭 교리의 보편성을 고려하여 교회론과 관련하여 신학 논쟁에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교도권의 몇몇 표현들의 진정한 의미를 밝힘으로써 이러한 물음들에 응답하고자 한다.

첫 번째 물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이전 교리를 바꾸었는가?

답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바꾸지 않았고 그러한 의도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를 발전, 심화시키고 더욱 완전하게 설명하였다.

이는 요한 23세가 공의회를 시작하며 한 연설에서 분명히 밝힌 것이다.1) 바오로 6세는 이를 확인하였고,2)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을 반포하며 이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러한 반포가 전통 교리에서 실제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적합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라셨던 것을 우리도 바랍니다. 과거의 것이 지금도 여전합니다. 교회가 수세기 동안 가르쳐 온 것을 우리도 가르칩니다. 한 마디로, 추정되던 것이 이제 분명해졌고, 불확실하던 것이 이제 명쾌해졌으며, 숙고하고 토론하고 때로 논쟁하던 것이 이제 하나의 분명한 교의 정식으로 종합되었습니다.”3)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이러한 뜻을 여러 번 표명했고 또한 실현했다.4)

두 번째 물음: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답변
그리스도께서는 단 하나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시고” 그것을 “가시적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5)로 제정하셨기에, 이 교회는 처음부터 수세기 동안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그 안에서만 그리스도께서 몸소 제정하신 모든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이며,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7)

‘교회 헌장’ 8항에 나오는 ‘존재한다’는 말은, 이 변함없는 역사적 지속성과 가톨릭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세워 놓으신 모든 요소의 항구함을 의미한다.8)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가톨릭 교리에 따라, 가톨릭 교회와 아직 온전한 친교를 이루지 않은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있는 만큼,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들 안에도 ‘현존하고 활동한다’(adesse et operari)고 올바르게 말할 수 있다.9) 그러나 ‘존재한다’(subsistit)는 표현은 가톨릭 교회에만 쓸 수 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신경에서 고백하는(“하나인” 교회를 믿나이다) 일치를 가리키며, 이 “하나인” 교회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10)

세 번째 물음: 단순히 ‘이다’(est)라는 표현 대신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온전한 동일성을 가리키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교리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이 표현은, 교회 조직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들”이 발견되지만 이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고유한 선물로서 보편적 일치를 재촉하고 있다.”11)는 사실에서 비롯되며, 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비록 결함은 있겠지만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수단의 힘이 가톨릭 교회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12)

네 번째 물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친교에서 갈라져 나간 동방 교회들을 가리키면서 ‘교회들’(Ecclesiae)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공의회는 이 용어의 전통적인 사용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 교회들은 비록 갈라져 있지만 참된 성사들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사도 계승의 힘으로 사제직과 성찬례를 지니고 있어 아직도 우리와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13) 따라서, 그들은 “개별 교회들(Ecclesiae particulares) 또는 지역 교회들(Ecclesiae locales)”14)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으며, 개별 가톨릭 교회의 자매 교회들(Ecclesiae sorores)로 불린다.15)

“각 교회에서 거행되는 주님의 성찬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난다.”16) 그러나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를 가시적인 수장으로 삼는 가톨릭 교회와 이루는 친교는 개별 교회에게 외적인 보완이 아니라 내적인 구성 원리의 하나이며, 이들 존경할 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개별 교회라는 조건에서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17)

다른 한편, 그리스도인들의 분열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는 교회 고유의 온전한 보편성은 역사 안에서 아직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다.18)

다섯 번째 물음: 공의회 문헌과 공의회 이후 교도권 문서들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생겨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교회’(Ecclesia)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이 공동체들은 성품성사에서 사도 계승을 보존하고 있지 않으므로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들은 특히 직무 사제직이 없는 까닭에 성찬 신비의 참되고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고 있지 않으므로,19) 가톨릭 교리에 따라 고유한 의미에서 ‘교회들’이라고 불릴 수 없다.20)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께서는 아래에 서명한 신앙교리성 장관 추기경에게 허락된 알현에서, 신앙교리성 정례회의에서 채택한 이 답변을 확인하고 승인하셨으며 그 발표를 명령하셨다.

로마 신앙교리성 사무처에서
2007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신앙교리성 장관 윌리엄 레바다 추기경
차관 안젤로 아마토 대주교
교황청 신앙교리성 문서
“교회에 대한 교리의 일부 측면에 관한
몇 가지 물음들에 대한 답변”에 대한 해설

이 문서에서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와 교회일치에 관한 가르침에서 부각된 전반적인 교회관에 관한 여러 물음들에 답변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교회의’ 이 공의회는 바오로 6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신부의 참 면모를 더욱 완전히 고찰하고 밝히는” “교회를 위한 새 시대”21)를 여는 표징이 되었다.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바오로 6세 교황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주요 문헌과 신앙교리성 문서들은 모두 교회 자체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고, 그 가운데 다수는 공의회 이후 눈에 띄게 쏟아져 나온 신학 문서들이 모두 오류가 없다거나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을 명백하게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이 문서도 유사한 영감으로 작성되었다. 바로 오늘날 일부 신학 연구에 오류나 모호함이 있기 때문에, 신앙교리성은 교회론에 관하여 교도권이 표명한 일부 진술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연유로, 신앙교리성은 물음과 답변(Responsa ad quaestiones)의 양식을 활용하기로 선택하였다. 이는 그 본성상, 개별 교리를 증명하려고 논쟁을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도권의 이전 가르침의 범위 안에서 구체적인 문제들에 확실하고 분명한 답변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첫 번째 물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관한 이전 교리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물음은 앞에서 바오로 6세가 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된 교회의 ‘새로운 면모’의 의미와 관련된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가르침에 근거한 답변은 매우 명료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이전에 갖고 있던 교회에 관한 교리를 바꾸려는 의도가 없었고 따라서 바꾸지 않았다. 공의회는 단지 이 교리를 깊이 있게 하고 더 유기적으로 설명하였다. 실제로 이는 바오로 6세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을 공포하는 연설에서 밝힌 바 있다. 그 연설에서 그는 교회 헌장이 교회에 관한 전통 교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정되던 것이 이제 분명해졌고, 불확실하던 것이 이제 명쾌해졌으며, 숙고하고 토론하고 때로 논쟁하던 것이 이제 하나의 분명한 정식으로 종합되었다.”22)고 단언하였다.

또한 그 이후에 공의회가 가르친 교리와 이 교리를 받아들여 심화시킨 교도권 문서들의 가르침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서, 그 자체로 어떤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를 들어, 신앙교리성의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은 단지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의 가르침들을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재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이러한 분명한 천명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본성에 관한 전통 가톨릭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 그러하다. 곧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일종의 ‘획기적인 변혁’을 기대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측면들은 거의 제외하고 일부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깊은 취지는 분명히 교회에 관한 담론을 하느님에 관한 담론 안에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다루려는 것이었고, 따라서 참으로 신학적인 교회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려져 왔다. 흔히 개별적인 교회론을 표명하기 위하여 이를 상대화하고, 또 흔히 이 동일한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한 편파적이나 편중된 이해를 부추기는 특정 단어나 구절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교회 헌장’의 교회론과 관련하여, 일부 핵심 개념들은 교회의 인식 안에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곧,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 교황의 수위권과 더불어 주교 직무에 대한 재평가인 주교들의 단체성, 보편 교회 안의 개별 교회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교회 일치의 측면에서 교회 개념의 적용과 타종교들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경에서 말하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 Ecclesia Catholica)는 정식으로 표현된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에 관한 문제가 그러하다.
이어지는 물음들에서, 이 문서는 이러한 개념들을 일부 검토하고 특히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과 이에 대한 이해가 교회 일치의 측면에서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고 있다.

두 번째 물음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제라르 필립(G. Philips)이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는 표현 때문에 ‘수많은 글들’23)이 쏟아져 나왔다고 기록하였을 때, 아마도 그는 신앙교리성이 이 문서를 발표하게 될 정도로 이에 대한 논의가 그토록 오랫동안 강렬하게 지속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의회 문헌과 공의회 이후 문서들에 근거한 이 문서의 발표는 교회의 일치와 단일성을 수호하려는 신앙교리성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하나 이상의 실체를 지닐 수 있다는 제안은 교회의 일치와 단일성을 손상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교회에 관한 현대의 오류를 반박하는 가톨릭 교리 선언 「교회의 신비」(Mysterium ecclesiae)에서 제시했듯이, 우리는 “현재 분열되어 있지만 다소의 일치점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이나 교회 공동체들의 총합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상상하거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늘 현재 아무 데에도 없고 다만 모든 교회들이나 공동체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하도록”24) 강요받을 수 있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대화를 통하여 희망하고 성취될 수 있는 여러 자매 교회들의 통합이나 미래에 있을 어떤 의견 합의로 나타나는 어떤 이상적인 형태 안에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 보프의 저서에 관한 신앙교리성의 공지에는 더 분명한 입장이 나타난다. 하나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 안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보프의 주장에 대하여, 이 공지에서는 “공의회는 참된 교회가 하나의 ‘실체’만 가진다는 것을 정확하게 명시하려고 ‘존재한다’(subsistit)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교회의 울타리 밖에는 ‘교회의 요소들’(elementa Ecclesiae)이 존재할 뿐이며, 이 요소들은 같은 교회의 요소들로서, 가톨릭 교회를 지향하고 거기에 이른다.”25)고 말한다.

세 번째 물음은 ‘이다’(est)라는 동사 대신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바로 이러한 용어의 변화가 특히 교회 일치 분야에서 매우 다양한 해석들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공의회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고유한 교회의 요소들이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단순한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이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톨릭 교회와 동일시하여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가톨릭 교회 밖에는 교회의 요소들이 전혀 없다는 의미, 곧 ‘교회 없는 공백 상태’라는 말이 아니다. ‘안에 존재한다’는 표현을 참된 맥락에서 곧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이다’에서 ‘안에 존재하다’로 바뀌었다고 해서 특별히 신학적으로 예전부터 간직해온 가톨릭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교회가 실제로 가톨릭 교회 안에 계속 존재하기(subsistit in) 때문에, 실체의 이러한 지속성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공의회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톨릭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적 주체로 만나도록 가르치고자 하였다. 따라서 실체가 어느 정도 여럿일 수 있다는 생각은 ‘존재하다’(subsistit)라는 용어를 선택한 취지를 표현하지 못한다. 공의회는 ‘존재하다’는 말을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다존재성’이 아닌 단일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곧 교회는 유일한 역사적 실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 없는 많은 해석들과는 반대로, ‘이다’에서 ‘존재하다’로 바뀐 의미는 가톨릭 교회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 교회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들’(plura elementa sanctificationis et veritatis)이 있기 때문에 그들 안에서 참다운 교회의 특성과 차원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더욱 열린 교회의 바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의 유일한 역사적 주체 안에 ‘존재하는’ 교회는 단 하나뿐이지만, 눈에 보이는 교회 울타리 밖에도 참다운 교회적 실재들이 존재한다.

네 번째 물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 교회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은 동방 교회들을 가리키면서 ‘교회들’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분명히 단언했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교회의 울타리 밖에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들”26)이 발견된다고 인정한 것은 비가톨릭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이 비록 다양하기는 하지만 교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교회들과 공동체들은 모두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기”27) 때문이다.

이 문서는 무엇보다도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에 있지 않은 동방 교회들의 현실을 숙고하고, 공의회 문헌의 여러 본문을 참조하여 동방 교회들을 ‘개별 교회 또는 지역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또 개별 가톨릭 교회의 자매 교회로 부른다. 동방 교회들은 사도 계승과 유효한 성찬 거행을 통하여 가톨릭 교회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찬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난다.”28)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에서는 그들을 분명히 “진정한 개별 교회들”29)이라 부른다.

그들이 ‘개별 교회들이고’ 구원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이 명백한 인식에도, 이 문서는 그들이 특히 개별 교회로서 지닌 결함(defectus)을 간과할 수 없었다. 성찬례 거행을 통하여 주교의 지도 아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합된 개별 교회의 실재를 강조하는 그들의 성찬례적 교회관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개별성 안에서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30) 결국, 모든 개별 교회들과 그 교회를 다스리는 주교들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을 생각하여, 그들은 각기 어떤 내적 자치를 요구하는데, 이는 가톨릭 신앙에 따라 개별 교회의 존재 자체의 “내적 구성 요소”인 수위권 교리와 분명히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31) 그러므로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의 수위권은 단순히 개별 교회 주교들의 권한과 그저 동등하거나 외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는 하느님 법에서 그리고 계시에 담긴 교회의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구조에서 비롯된 한계 범위 안에서 신앙의 일치와 친교의 일치를 위해 봉사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한다.32)

다섯 번째 물음은 종교개혁에서 생겨난 교회 공동체들에게 ‘교회’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이 문서는 “사도 계승과 유효한 성찬 거행을 보존하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교회 공동체들 안에는 이러한 상처가 더욱 깊어진다.”33)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라”34)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의 가르침에서 밝힌 대로 “교회 공동체들”35)이다.

이 가르침이 해당 공동체들에게 그리고 일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도 많은 슬픔을 자아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가톨릭 의미에서 교회의 신학적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근본 요소들이 부족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들을 ‘교회’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란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른바 이들 교회 공동체들도 그들 안에 실제로 있는 성화와 진리의 다양한 요소들 덕분에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적 특성과 따라서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신앙교리성의 이 새 문서는 본질적으로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교도권의 가르침을 간추린 것으로 교회에 대한 가톨릭 교리를 분명히 재천명하고 있다. 이 문서는 안타깝게도 가톨릭 세계에 퍼진 받아들일 수 없는 특정 견해들을 다룰 뿐만 아니라, 교회 일치 대화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지침들을 제시한다. 베네딕토 16세께서 2005년 4월 20일 교회에 보낸 첫 메시지에서, 그리고 특히 터키 사도 방문(2006.11.28.-12.1.) 때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확인하셨듯이, 교회 일치 대화는 가톨릭 교회의 우선 과제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러한 대화가 참으로 건설적인 대화가 되려면,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이 서로 마음을 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여야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교회 일치 대화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요한 10,16)가 되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하여 나아가고,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가 역사 안에서 자신의 보편성을 완전히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는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 일치 운동은 처음에는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두 가지 교리적 진술을 조화시키고자 ‘안에 존재한다’는 문구를 사용하였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로지 가톨릭 교회 안에만 온전히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에 있지 않은 개별 교회든 교회 공동체든 눈에 보이는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밖에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은 ‘일치의/보편성의’(unitatis/catholicitatis) 충만(fulln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특별히 다소 역설적인 이 상황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고자 하였다. 가톨릭 교회가 구원의 수단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세례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 자녀들에게 그 고유의 충만한 보편성을 실현하는 데에 장애가 되고 있다.”36)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이미 충만하게 존재하지만, “천상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영광을 충만히 받아 누릴 때까지”37) 아직 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있지 않은 형제들과 또한 죄인인 그 구성원들 안에서 이 충만함은 계속 자라야 한다. 충만함에 이르는 이 과정은 그리스도와 이루는 역동적인 일치의 지속적인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든 사람과 이루는 일치이기도 합니다. 나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그리스도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거나 될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그분께 속할 수 있습니다. 친교는 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분을 지향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과 이루는 일치를 지향하도록 해 줍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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