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체 신학원리 - 곽승룡 신부

소공동체 신학원리 - 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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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소공동체 역사

1장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

1. 기초 교회 공동체(B.E.C) 운동의 기원

1. 라틴 아메리카 공동체들은 1956년 브라질에서 시작되었다. 라틴 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주된 원인은 억압, 가난, 사제 부족이었다. 교회에서는 자발적으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났는데, 먼저 교리 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소공동체가 부상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브라질에서 칠레, 혼두라스, 파나마 결국 라틴 아메리카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의 모임도 공동체 성장에 촉진자 역할을 하였다. 1968년 Columbia의 Medellin, 1979년 Mexico의 Puebla, 1992년 Santo Domingo에서 발생한 공동체 운동의 기색은 이전의 그 어느 모임보다 더 적극적이며 교회 전승에 기초를 두었다. 라틴 아메리카 공동체들의 주요 관심사는 정의, 평화, 가난한 자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었다.

2. 라틴 아메리카 공동체 운동에 있어서 적지 않게 장애를 격었던 교회적인 요인은 해방신학에 대한 로마교회와 라틴 교회 사이의 긴장이었다. 이러한 긴장은 당연히 소공동체 운동에 어려운 환경을 제공하기도 했다. 메델린과 푸에블라의 선언들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일부 주교들은 대부분의 백성을 압도하는 심각한 고통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낮은 단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사목 위원회들도 소공동체 운동의 전략들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하였다. 소공동체 운동은 다분히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1995년 상 파울로에서 ‘이상의 효소와 에너지와 희망’이라는 주제로 소공동체 회의가 열렸다. 소공동체는 브라질의 중요한 국가적 모임으로서 언젠가 만나게 될 그들의 과정을 1997년까지 준비하도록 요청되었다.

3. 라틴 아메리카 소공동체 역시 그 기원이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개신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개신교파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도전도 받았다. 1970년대 군주 독재시절에 소공동체는 홀로 반체제 목소리를 위한 공개토론장을 제공하였고 교회는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오늘날에는 저항하고 행동하는 많은 길들이 있다. 노동당들, 노동조합, 학생운동들 등이 그것이다. 결국 소공동체가 형성되는 곳에서 예언운동이 이루어지고 현장교회가 발생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룹들은 유기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직이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유기체로서 소공동체는 백성을 위한 봉사를 하고, 공동체들의 자치를 고려해야한다. 결국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는 해방신학과 함께 억압의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기존 사회체제 안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에서 발생한다고 구티에레즈가 말하였던 것처럼 비인간 실존으로 몰아가는 삶의 환경에서 새로운 삶의 실천을 위한 장으로서 기초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4. 이와 같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의 발생은 다분히 복합적인 것이다. 극심한 가난의 사회적 상황과 사제의 부족, 본당 구조의문제 등 종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60년대 초 브라질에서 처음 발생하였다. 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는 바라 도 피라이(Barra do pirai)교구의 공동체복음화운동, 나탈(Natal)교구의 기초교육운동, 그리고 전국사목5개년계획(1965-1970)의 실시 등이다. 공동체 복음화 운동은 바라 도 피라이 교구의 로씨 주교에 의해 1956년 실시되었다. 이 운동의 계기는 사제의 부족현상을 타계하기 위한 노력에서 생겨났는데, 로씨주교는 사제가 자주 찾아갈 수 없는 지역의 농부, 노동자들 가운데 얼마간의 교리교사를 선발하여 공동체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는 훈련을 시켰다. 훈련받은 지도자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공동체에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하였다. 또한 나탈(Natal)교구에서는 라디오 방송에 의해 의식화교육을 실시하였고 이런 교육에 의해 생겨난 공동체들을 기초공동체라고 부르고 이 안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아울러 1962년 브라질주교회의에서는 기초교회공동체의 육성의 일환으로 3개년비상계획을 발표하였고 1965년에 기초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제1차 전국5개년 사목계획(1965-1970)을 수립하였으며 주교회의에 의해 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초공동체는 브라질을 위시(爲始)로 전(全) 남미로 확산되었다.

이에 메델린 회의에서는 기초 교회 공동체를 하나의 완전한 교회적 실재로 인정하였고 푸에블라 회의에서는 기초 교회 운동체 운동이 기본적인 복음화의 길임을 선언하였다.

위와 같은 발생과정 안에서 교회와 사회 안에서 복음화의주체로서 성장한 라틴 아메리카의 소공동체 운동은 작은 교회의 세포로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기초 교회 공동체 운동의 특징

5. 라틴 아메리카 기초 교회 공동체 형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몇 명의 주교들에 의하여 시도되었던 “복음화 캠페인”, “기초교육운동”들이 새로운 교회적 공동체들을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공동체들은 평신도들에 의해 스스로 브라질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이와 같은 확산 과정에 대해 주교회의가 정책적으로 지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시작된 기초공동체는 스스로 라틴 아메리카에 퍼져나가는 하나의 운동 형태로 확산되었는데 여기에 대해 메델린 주교회의는 사목적, 신학적 반성과 함께 기초공동체를 하나의 완전한 교회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려준 것이다. 그러므로 기초공동체는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서 발생한 가운데 주교회의에서 정책적으로 인정하고 강화함으로서 “교회안의 기초공동체”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6. 이후 메델린 주교회의의 결정은 세계가 기초공동체의 형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1974년 제3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의해서 공식적인 복음화의 유효수단으로 인정됨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는 크게 4가지로 구성되는데 그것은 성서, 공동체, 현실, 전례이다. 이 가운데 성서가 생명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있다. ‘Relectura'(새로운 눈으로 읽는다 라는 뜻)라 일컬어지는 성서 읽기를 통하여, 기초 공동체에게 말씀은 그들의 삶의 터전 아에까지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하느님의 촉구요 위로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2장 아프리카의 소공동체

1. 소공동체(S.C.C) 운동의 기원

7. 아프리카에서 전개된 소공동체 운동은 일차적으로 신자들을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교육하기 위한 사목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교회 지도층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하면 라틴 아메리카가 민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공동체였다면 아프리카의 소공동체는 교회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지는 위로부터의 공동체적인 모습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8. 동부 아프리카 주교회의 연합총회(AMECEA)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서 기초공동체가 아프리카 지역 문화의 특이성과 다양성이라는 현실 속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노력하였다. 1973년 동부 아프리카 주교회의 연합총회는 나이로비에서 “1980년대의 동부 아프리카교회를 위한 계획”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작은 공동체로 모으는 일에 교회가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교회가 진정‘지역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서구교회를 옮겨 심는 다는 것도 아니며, 아프리카 문화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본질을 변형시키자는 단순한 적응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교회들은 1974년 세계주교회의를 전후로 하여 ‘기초공동체' 모델을 발견하게 되고 1976년 동부 아프리카 주교회의 연합총회의 주제를 “동부아프리카에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건설”로 정하였고 소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첫째 사목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9. 소공동체 건설은 아프리카 민족의 생활 기초가 되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들을 수호하는 최상의 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소공동체가 가정 다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진정한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 소공동체들은 교회 공동체와 각 신자들의 생활의 중심으로서 삶의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동부 아프리카 주교회의 연합총회는 아프리카 교회발전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서 소공동체를 제시하면서 소공동체 확립을 위한 현실적인 지침으로 제시하였다.
말라위의 패트릭 칼라롬베 주교는 소공동체 구성을 동부 아프리카 교회의 사목방침으로 정한 데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공동체의 채택은 사목방침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이며 기본적 투신이다. 이는 사목적 제도, 정책, 실천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개편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2. 소공동체 운동의 특징

10. 이런 배경 하에서 아프리카 교회의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 내 신자들이 부락 중심으로 모여 소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독려하는 한편, 모임을 이끌어갈 구체적인 프로그램 마련에 주력하였는데 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주도적인 공헌을 한 기관이 ‘룸코연구소’(Lumko Institute)이다. 룸코 연구소는 공동체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고 복음적인 삶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판단하였다. 아프리카의 소공동체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현실과 문화의 토양 위에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구축하여,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기초공동체를 그들의 새로운 교회형태로 받아들이게 된다.

11. 이에 Harry Hoeben은 아프리카의 소공동체에 대해 세 가지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다. 먼저 심리적,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소공동체를 통해서 그들은 개인적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곧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상호간의 가치와 동일함 그리고 공동 결속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소공동체는 아프리카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모순 없이 서로의 유대를 강화하게 되었다. 둘째로 교회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소공동체를 통해서 모든 이들이 참관자(參觀者)가 아닌 참여자(參與者)의 입장이 되었다. 참여의 입장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 공동체적 차원에서 볼 때 지역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 비전을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소공동체는 그 특징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장 아시아의 소공동체

1. 소공동체 운동의 기원 및 전개

12. 아시아 주교회의(FABC)에서 소공동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제5차 인도네시아 반둥 아시아주교회의에서였다. 최종성명서에서 밝히듯이 아시아의 많은 문제와 불의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표지는 바로 “공동체에 대한 갈망”, “기초공동체의 성장”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 아시아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공동체들의 친교’(communion of communities)"라고 천명(闡明)하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함께 불리었고 이 말씀은 그들이 소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끌어 주며 그곳에서 그들은 기도하고 복음을 다함께 나누고 한마음 한뜻으로 결합되어 서로를 도와주고 함께 일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일상생활 안에서 복음을 생활화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13. 특별히 2000년 타이 샴프란에서 열린 제7차 아시아 주교회의에서는 ‘아시아 교회의 쇄신과 사랑과 봉사의 사명’이란 주제로 아시아 교회 쇄신의 전망과 의미를 제시하고 사랑과 봉사의 사명 수행에서 부딪치는 문제와 도전들에 대해서 다루는 가운데 소공동체의 육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래서 사랑과 봉사의 사명을 위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공동체들의 공동체가 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나타내야 하며 그러한 사명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교회 기초 공동체, 복음에 바탕을 둔 소공동체 그리고 교회 단체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2. 소공동체 운동의 구체적 전개-AsIPA 총회

14.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FABC) 평신도 사무국 산하에 AsIPA(Asian Integral Pastoral Approach) 즉 ‘아시아사목을 위한 통합적 접근’은 아시아교회 안에서 소공동체가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총 3회의 총회를 통해서 소공동체에 대한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였는데 1996년에 있었던 1차 총회가 AsIPA의 소공동체 기초를 익히는데 머문데 반해서 2차 총회부터는 통합사목방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혔다.

제2차 총회에서 이해된 소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방법이며, 이 안에서 모든 이들이 새로운 교회의 구성원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며 특별히 가정교회를 활성화 할 수 있다고 밝힌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소공동체는 변화하는 세상의 복잡한 체제를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 놓고 변모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선포방법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된 소공동체에 대해서 몇 가지 과제가 부여되는데, 그것은 소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강생하신 하느님에 대한 토착화와 소공동체의 영성, 사회복음화,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은 요청되어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5. AsIPA 제2차 총회에 이어서 제3차 총회에서도 역시 소공동체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AsIPA 3차 총회는 아시아 각 지역의 소공동체가 공동의 비전과 관심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토의를 하였는데 동시에 AsIPA 2차 총회에 이어진 소공동체 운동의 여정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졌다. 그래서 가정, 영성, 지도력, 직무와 관련된 사목활동 나눔이 이루어졌고, 참여하는 교회, 공동책임, 교회비전의 실현과정과 결실에 대한 숙고를 통해 미래의 아시아 사목을 위한 방향성과 계획을 모색하였다.

마지막 총회에서 결의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참여적 교회건설을 위해서는 특별히 지도력의 영역에서 평신도의 능력을 계발해야할 것이며 또한 지도자와 교육팀을 지속적으로 양성함으로써 봉사하는 지도력을 증진하고 봉사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소공동체를 통하여 가정과 혼인을 풍요롭고 견고하게 하여 가정 안에서 교리교육의 중요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 셋째, 본당사제에 대한 훈련과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소공동체 교육프로그램이 신학교와 수도회의 교육과정에 있어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공동체의 성장을 위한 국가 간 네트워크, 교구 내 및 교구 간 정보교류 증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3. 각국의 소공동체 현황

16. 이하에서는 필리핀과 인도의 소공동체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두 나라는 각국이 가지는 문화적 토양의 독특성의 바탕 하에 소공동체 운동을 이끌어 나갔는데 주교회의를 중심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펼쳐나간 필리핀의 사례와 교구를 중심으로 소공동체를 이끈 인도의 현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필리핀

450여 년의 긴 식민지 생활, 7,000여개의 섬, 100여 개의 언어, 여러 부족 등은 필리핀이 가지고 있는 열악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건에서 필리핀이 소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지연이나 혈연으로 작게 뭉쳐 사는 모습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혈연이나 지연 안에서 복음을 읽고, 생활을 나누고, 공동관심사에 관심을 보이는 삶을 살게 된다. 필리핀에서의 소공동체 운동은 위와 같이 필리핀만이 가지고 있는 가정공동체적인 조건과 결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교회 공동체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중반부터 태동하였으며 1992년 필리핀 주교회의 제2차 총회에서는 소공동체야말로 교회 쇄신을 위한 살아있는 표현이라고 하면서 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작은 모임의 특성에 따라 BEC(기초 교회 공동체), BHC(기초 인류 공동체), BCC(그리스도교 기초 공동체) 등으로 불리운다. 더군다나 오늘날 문제시 되고 있는 훼손된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결성된 ‘기초 피조 공동체’(Basic Creature Community)는 필리핀인들의 시의 적절한 토착화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인도-망갈로르 교구를 중심으로

17. 인도는 소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요인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본당 관할 지역 내에 구역을 설정하고 'Gurkar'이라고 부르는 지도자가 끌어 나가고 있는 조건은 지도자를 계승시키지 않고 선출하도록 제도가 바뀌면서 소공동체를 설립하는데 더욱 큰 도움이 되는 조건이다. 1960년대에 각 구역의 소공동체 회원들을 가려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본당사목협의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1989년 교구 사제 사목협의회의 주제는 평신도 지도력에 관한 것으로 모든 본당은 적어도 삼년 이내에 하나의 소공동체를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 후 사목연수원장을 비롯한 다섯 명의 사제가 Goa에서 열린 Lumko식 복음 나누기 공동 개발자 오스왈드 히르머(Oswald Hirmer)주교가 지도하는 10일간의 전국단위 Lumko 복음 나누기 훈련과정에 참가하였고 다음 해에는 망갈로르 교구 사목연수원 주최로 공동개발자 Oswald 주교가 실시하는 7일간의 Lumko 양성 과정을 개최하였으며 1998년에 소공동체 전담 사제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도교회 안에서 망갈로그 교구는 소공동체가 비교적 잘 운영되는 교구로 보여지고 있다. 그렇지만 평신도들의 지도력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고 이미 성숙된 소공동체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완의 과제가 남아있다.
18. 망갈로르 교구 소공동체 운동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복음 나누기 7단계 방법을 모든 소공동체 모임의 기본으로 만들었다. 둘째, 사제들이 평신도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늘 소공동체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셋째 평신도 지도자 수는 현재 약 8000명으로 본당 사목위원 또는 본당 단체 회원으로 활약하는 사람들의 왕성한 활동이며 넷째 각 본당에는 사목협의회 산하에 소공동체위원회가 있어서 상당히 많은 본당에서 소공동체를 주요 안건으로 다루고 있다.

현재의 망갈로르 교구장 ‘알로이시오 폴 디 소자’주교는 소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소공동체 전담 사제를 임명하고 각 지구 소공동체 대표 사제를 임명하고 소공동체 운영 점검을 위한 본당 사목방문 등 사제들의 관심과 협력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소공동체가 활성화되었다고 말하면서 소공동체야말로 21세기 교회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하였다.

4. 한국 ‘소공동체’ 뿌리의 역사적 이해

1) 초창기 한국천주교회 신앙 교우촌

19. 조선 후기 마을문화의 핵심은 혈연과 지연중심으로 정신문화와 노동문화의 두 가지 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마을 굿이 전자의 예이고 두레굿이 후자의 예이다. 조선 후기의 마을 공동체의 문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민중생활의 공동체성은 보편적 평등성, 공동체적 참여정신, 두레굿의 공동체적 참여정신 그리고 축제의 문화로서의 마을의 공동체 문화의 특징을 보여졌고 특히‘대동(大同)’이라는 말속에서 쉽게 이해되어지고 있었다.
김영호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공동체적 특성은 종교성과 연관이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 민족은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생활을 해왔다는 점과 조선 후기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특성은 초창기 한국천주교회 신앙 교우촌이 존속(存續)하기 위한 바탕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교우촌의 형성

20. 대표적인 교우촌은 배티 일대의 교우촌을 꼽을 수 있다. 1830년부터 형성된 교우촌은 자연스럽게 촌락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들은 가정을 통해서 신앙 교육을 시키고 대를 이어 신앙을 증거한다. 교우촌 신자들에게는 기도와 신앙공부, 친교의 나눔이 제일차적인 과업이었다. 교우촌 공동체의 모습은 자율공동체, 성사공동체, 소공동체, 가족 공동체, 운명 공동체, 초대 교회적인 이상 공동체, 수행공동체, 비밀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초대 교우 공동체는 가족과 촌락 중심의 공동체, 수행을 위주로 하는 신앙인의 모습, ‘천주 신앙’에 기초한 친교와 사랑의 공동체, 참된 고향에 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

(2) 교우촌 삶의 모습

21. 초대교우촌의 삶의 모습은 신앙과 생활공동체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초대 공동체는 먼저 함께 기도하는 곳이었다. 선조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둘이나 셋이 모이면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드렸다. 기도는 자발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기도가 끝난 후 마을일 등 생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로 초대 공동체는 함께 공부하는 장소였다. 함께 모여 성서를 읽고, 교리를 공부할 필요에 의해교회의 올바른 지식을 익혀서 삶의 현장에서 같이 나누게 되었다. 셋째로 초대 공동체는 함께 나누는 곳이었다. 선조들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함께 친교를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교우촌의 삶의 모습과 연관해서 권혁주 주교는 신앙과 생활의 공동체로서 그 삶의 모습을 모델로 소공동체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22. 박해 시대에 교우촌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신자와 성직자의 친교는 인상깊다. 신자는 목숨을 걸고 신부를 영입하고 보호하며, 목자는 양떼를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다. 교우촌 문화의 맥은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의 와중에도 신앙촌을 형성하였고 그를 통해 대를 이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성직자들이 교우촌의 중심을 이루는 목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 촌락 공동체의 전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최양업 신부님으로 그분의 서한 을 살펴본다면 교우촌의 삶과 영성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교우촌 공동체는 좁게는 가정공동체, 나아가 기초구역공동체인 소공동체의 전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밥을 굶을지언정 가정 기도를 궐하지 않았던 열성이 소공동체 안에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교우촌 문화의 맥을 이음으로써, 초기 한국교회의 역동성이 소공동체 안에서 쇄신되고 새로운 복음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4장 서유럽의 소공동체

1. 미국과 캐나다

23. 미국에서 소공동체는 영어권과 스페인어권의 많은 교파에서 발견된다. 영어 사용권의 공동체들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라는 과제가 차분하고 효과적인 길들을 모색하는 행동들과 함께 부상하고 있으면서도 그 구성원은 대부분 중산층 사람들이다. Michael Cowan은 변화하는 사회에 헌신적인 유기체들, 공동체의 다양성과 함께 연결되어있는 작은 신앙 공동체 네트웍들의 연합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소공동체는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 변화를 위한 기초를 창조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민족인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는 크게 상관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 경제적 사업에서 행해지는 길들을 바꾸고 있다고 믿고 있다.
작은 공동체들에 관한 상황은 미국 정신에 깊이 베어든 개인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서 존경받고 있는 또 다른 기억들은 공동체의 전통인데, 뉴잉글랜드 17세기에 John Winthrop 치하 초기 청교도 정착자들 사이에서 통합된 생활 부분이었다. 캐나다의 작은 공동체들은 Ontario, Quebec, Alberta, British Columbia, Manitoba에 존재한다. 작은 공동체들은 미국과 동일한 많은 문제들을 함께 지니고 있다. 스페인계 공동체는 영어사용권 보다 구체적인 사목계획을 세우고 소공동체, 새로운 본당, 젊은이 사목, 가정사목, 스페인 문화에 기초한 지도자 양성 등 5가지를 추진하였다.

2. 유럽

24. 유럽에서 소공동체는 많은 그리스도교 교파들에서 볼 수 있다. 서유럽에서 소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동유럽에서는 또 다른 문제이다. 유럽에서 소공동체 문제는 그리스도교 역사 뿐 아니라 유럽의 역사를 통해 진행해왔는데, 그 가운데, 1,2차 세계대전, 공산주의 치하, 베를린 장벽 붕괴, 동서독 통일과 러시아와 소련 연방 국가들의 독립 등과 같은 많은 사건들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편 유럽을 종교 사회의 측면에서 관찰해 보면 1948년 제네바에서 세계 교회 회의 (World Council of Churches) 개최와 평신도 부처의 설립 등이 눈에 띠었고,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1962-65)로 교회비전에 대한 삼위일체 공동체의 교회 모델을 선언하였다. 1969년-70년 유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작업에 대한 실현을 갈망했던 그룹들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협력과 네트워크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에서 소공동체가 지역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모이고 있었다. 이러한 종교 사회적 현상들로 인해 결과적으로 83년 Amsterdam, 85년 Turin, 87년 Bilbao, 91년 Paris에서 유럽평의회가 열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유럽 평의회는 동유럽 대표들도 함께 초대하였다. 물론 이러한 작업들은 종교일치 차원의 움직임이었다.

25. 가톨릭교회에서 소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더블린 대교구는 사목발전과 대교구 그룹 양성에 힘을 주는 쇄신을 위한 팀을 형성하였다. 작은 공동체를 성장시키는데 좋은 작업은 역시 성인 교육인데 이를 위한 센터를 마련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지원은 늘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위한 시작과 도움을 위해 지역 네트워크를 이루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무엇이나 관계가 없지만, 그 방법과 기술을 적용하거나 그에 따른 구조들을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험을 진실 되게 나누는 것이다.

유럽 평의회는 93년 Innsbruck, 95년 Geneva에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95년 Geneva에서 이뤄진 주제는 다음과 같다. 유럽 상황에서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새로운 길, 불의한 세상에서 신앙을 증거 하는 새로운 길, 삶에서 영적차원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작은 크리스챤 공동체는 유행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서 전진할 것이다. 곧 폭력에 대하여 비폭력 문화, 탐욕에 대하여 경제적인 나눔의 문화, 독단에 대하여 참여의 문화, 파괴에 대하여 환경을 소중히 하는 문화 등이다. 유럽의 작은 공동체들은 고르바쵸프의 하나의 건물 비전 곧 ‘모두를 위한 유럽의 한 가정’을 깊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 오세아니아

26. 오세아니아에서 소공동체(Small Christian Community)의 역사는 짧게는 15년 길게는 50년을 걸어왔다. Newman Societies와 Christian Life Movement, 가톨릭의 Adelaide와 Melbourne 대교구가 이러한 길을 걸었다. Canberra에 개신교 자립의 집 교회들도 초기 70년간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많은 가톨릭 교구들 곧 Melbourne, Canberra, Brisbane, Rockhampton, Townsville, Adelaide, Perth, Bunbury도 그룹 양성을 활동적으로 촉진하는 사목 팀들을 가지고 있다. Canberra 팀은 사목 구성에 있어서 교회일치의 성격을 띠었다. Adelaide 대교구 Leonard Faulkner 대주교는 1989년 ‘Vision for the World'라는 대교구 비전을 선언하였다. 이는 소공동체들의 양성으로 소공동체를 지원하며, 세상의 일들 안에서 증거 할 리더쉽을 말하고 있다. 1994년 사목교서 “Community for the World"(세상을 향하는 공동체)는 대교구에서 소공동체의 형성을 촉진하고 있다. Queensland의 Townsville 교구의 Benjamin 주교는 교구민을 위한 ”The Townsville Experiment"라고 부르는 미래의 전망을 내어놓았다.

27. 교회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질적 향상을 위한 특별한 축복을 두드러지게 받았다.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젊은 크리스챤 일꾼들과 40, 50, 60명의 학생들 그룹으로부터 주로 선발되었다. 첫 번째 소공동체 국가회의가 1989년 가톨릭 평신도 운동단체 Paulians의 협력으로 시드니에서 개최되었다. Leonard Faulkner 대주교의 후원으로 1994년 국가 모임이 시드니에서 열렸다. 호주의 모든 교구들과 41명의 참관자들이 대표자들로 초대되었다. 이 모임의 관심은 소공동체들 간의 연대와 네트워크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 가였다. 너무 광활한 호주이기에 지역적 문제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현안이었다. 1995년 7월29일 “Small Christian Community in Australia" 주제의 회의가 열렸는데, 이 모임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양한 소공동체의 자발적인 주도권들을 알리고 소공동체를 대표하는 주요 백성들을 함께 모으는 일이다. 둘째 호주에서 발생하는 넓은 세상 사건들을 접하는 일이다. 셋째 특별한 일과 일반적인 인자들을 수집하는 일이다. 넷째 소공동체에 대한 어떤 것도 평가를 하고 마지막으로 관련되어 보이는 어떤 요청들도 함께 관심을 갖는다.

28. 소공동체에 대한 최종적인 반성은 생명력 있는 현안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현안들은 언젠가는 만나게 될 공동체들의 기억들을 훈련해야 할 것이다. 그 현안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떻게 다양한 상황에서 협력하고 서로 본받을 것인가? 둘째 어떻게 통합된 현상을 발전시키도록 처리할 것인가? 셋째 어떻게 소공동체에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가?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에 참 예수님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이다.

호주에서 소공동체을 건설하는데 어려운 점은 물질주의(materialism)에 직면해 있고 가난한 자를 찾아 볼 수 없는 복지국가로서 미국이나 캐나다 그리고 유럽과 같은 것이다. 이들은 결국 문화의 다양성과 우리 모두를 깨우칠 수 있는 노력들을 통해 어려운 조건을 극복해야 한다.

제2부 소공동체 개념과 필요성

1장 소공동체 용어

1. 소공동체 관련 용어들의 의미 - BCC, BEC, SCC 등

29. 소공동체에 대한 명칭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크리스찬 기초 공동체”(Basic Christain Community=B.C.C),“교회적 기초 공동체”(Basic Ecclesial Community=B.E.C), “작은 크리스챤 공동체”(Small Christain Community=S.C.C) “작은 공동체”는 “소공동체”(Small Community=S.C)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호칭하는 소공동체 용어는 ‘Small Christian Community’에서 왔다. 소공동체가 우리나라에 사목의 용어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은 1993년에 서울 대교구가 공식적으로 이 용어를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80년대에는 기초 교회 공동체와 소공동체를 혼용하여 쓰다가 소공동체라는 용어가 현재 일반화되었는데 사실 기초 공동체나 소공동체는 용어가 주는 개념에 있어서도 거의 같은 의미와 지향을 가지고 있다.

소공동체의 ‘소(small)’는 규모면에 있어서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 즉 소수이기에 상호 친밀감을 느낄 수 있고 누구나 공동체의 주체로서 체험되게 하는 것, ‘소(small)’가 표현하는 의미처럼 작은 이들, 보잘 것 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을 놓치지 않고 공동체의 중심에 두는 것, 하느님 앞에 작은 자들, 가난한 자들임을 고백하는 아나빔(anawim)의 공동체라는 것, 그리고 가장 작은 단위 공동체 즉 가정 공동체 이웃 공동체를 세포 조직으로 하여 이를 우선적으로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소공동체는 그 용어적 의미로 볼 때 가난한 이들을 복음적 실재로서 공동체에 중심에 두고 모든 이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삶의 자리를 복음화를 시켜 나가는, 하늘나라를 이루어가는 ‘가능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초 공동체나 소공동체 모두 작고 보잘 것 없는 풀뿌리와 같은 이들을 공동체에 중심에 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각자가 가진 다양한 은사에 따라 누구나 인격적 주체이며 책임자로서 참여해야하는 복음적 성찰에서 생긴 공동체를 말한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 소공동체를 기존 교회의 단위인 본당의 작은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인 듯하다. Joseph.G. Hilly가 조사한 소공동체에 관련된 명칭이 무려 2,846개나 됨을 감안한다면 소공동체는 하나의 살아있는 현실로서 시대적, 상황적 여건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출현하고 명명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명칭과 용어들이 대단히 많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소공동체가 사람들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함을 가리킨다. 그래서 많은 명칭과 용어는 교회내의 새로운 것, 활기에 찬 것, 생명력 있는 것, 역동적인 어떤 것에 대한 추구와 모색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어떤 것이란 그리스도교 소공동체를 “교회가 되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0. 문자적인 의미의 소공동체에 대한 기원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그 기원을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서 기원하고 있다.(사도2,42-47; 4,32-37) 그렇기 때문에 소공동체는 교회의 새로운 체험이면서 동시에 어느 면에서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기원을 신약성서에서 나타난 초대교회의 공동체에까지 소급할 수 있고, 친교와 선교가 강조되는 교회의 핵심그룹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면모를 갖기에 현대에 있어서 교회의 새로운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공동체가 가지는 친교의 공동체성은 이미 초대교회 안에서 형성된 역사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 소공동체- 교회가 되는 새로운 방식

31. 한국 가톨릭 대사전에 나와 있는 소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공동체란 “현대에 교회의 본질과 복음을 실현하기 위해 채택된 새로운 교회형태”를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이다. 공동체란 그 구성원이 서로 인격적인 사귐과 나눔을 실행하며 생활 전반에 걸쳐 긴밀한 유대 관계 속에 사는 것을 말한다. 소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교회적 실체로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현대 가톨릭교회에 주어진 선물이며,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으로 이루어지고 퍼져 가는 새로운 교회형태”라고 말하고 있다.

소공동체를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공동체, 교회, 기초의 구성요소로 나누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소공동체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이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교류를 통해서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와 평등한 참여를 특징으로 한다. 둘째 소공동체는 교회적 공동체이다. 말씀을 중심으로 모여서 교회와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셋째 바닥(Base)에 기반 한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사회 밑바닥에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그 하나이며 교회의 기초이면서 지금까지 소외되어온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 그 의미이다.

2장 교회 문헌의 소공동체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4. 9. 10. 11. 12항)

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모습을 신선한 공동체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갈라4,6;로마8,15-16.26)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에페4,11-12;1고린12,4;갈라5,22참조). 복음의 힘으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자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 주신다. 성령과 신부가 주 예수님께 오소서! 하고 말씀하신다(묵시22,17 참조) 이렇게 온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으로 나타난다.”(4항)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9항)

33.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 신자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한다.”(10항)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불린다. 하느님 백성을 돋보이게 꾸며 주는 이 보편성은 바로 주님의 선물이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는 온 인류가 그 모든 부요와 함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분 성령의 일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고 힘껏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13항)

2. 교황문헌의 소공동체

1) 현대의 복음선교

34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는 1968년에 있었던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가 발표한 메델린 문헌이 처음으로 기초 공동체 관해 인정한 이래 교황청에서 나온 최초의 공식적인 가르침이다. 「현대의 복음선교」에서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기초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복음선교에서 특별히 밝히고 있는 소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해서 대도시화로 인하여 발생하는 ‘익명화’와 ‘집단화’를 주요인으로 꼽고 있다. 기초 교회 공동체들이 번창하고 교회와 그 사목자들이 일치하고 있지만, 몇몇 공동체에서 제도 교회를 비판하는 성향으로 잘못 전개될 우려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 기초교회공동체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인정하면서, 보편교회와의 친교를 항상 확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58항에서, “기초 공동체는 교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를 더 강화하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한 새로운 교회형태”라고 지적한다. 교황 바오로6세께서 강조하는 소공동체의 중요성은 바로 소공동체야 말로 확실한 교회의 세포라는 것이다.

2) 교리교육 일반지침서

35. 1971년 로마에서 국제 교리교육 대의원회(International Catechetical Congress)가 개최되었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71년 3월18일에 ‘교리교육 일반지침서’(Ad normam decreti)를 최종승인 하셨으며 4월11일 공포하셨는데, 이 문헌은 소공동체(Small Community)를 인용하면서, 소공동체가 신앙을 전하는데 매우 적당한 환경임을 역설하였다.

3) 현대의 교리교육

3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인 「현대의 교리교육」은 1977년에 열렸었던 주교 시노드에서 제안되었던 안건인 “공동체들의 공동체를 만듦으로서 본당을 쇄신하는 것”에 대한 결과였다. 다시 말하면 거대화되어져가는 본당을 하나의 구조로 계속 운영해나가야 한다는 것보다는 이보다 작은 공동체들로 구성해서 좀 더 본질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현대의 교리교육」에서 다루어진 가장 중심적인 주제인 ‘교리교육’이 오늘날 각 본당에서 효과적으로 신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로서 “기초교회공동체”를 꼽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 1980년 Brazilian Basic Ecclesial Communities의 연설문에서 소공동체는 교회이며 사목자들과 친교를 이루는 평신도 지도자(활성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

4) 교회의 선교사명

3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소공동체’를 “교회적 친교의 진정한 표현이며 복음선포의 중심”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회칙「교회의 선교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 교황은 소공동체를 “그리스도교 교육과 선교추진의 좋은 중심터”로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소공동체란’ 소수의 가정이나 인근 신자들이 기도와 성서 독서와 교회 공부와 인간적, 교회적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고 공동 책임을 도출해 내는 소수 신자의 집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들은 교회의 활력의 표지이며 신자 양성의 복음화의 도구이며 ‘사랑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인 동시에 이 안에서 각자의 구성원은 능동적인 역할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성사 안에서 복음적인 공동체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회칙을 통해서 바라보는 점은 교회 자체가 친교인 만큼 소공동체가 교회와 일치한다면 교회생활에 크나큰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을 말하고 있다.

5) 아시아 교회

3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아시아 교회」는 소공동체 대해서 1998년 주교대의원회의에서 이미 언급되어진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즉 교회는 ‘공동체들의 친교’임을 신자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소공동체 건설은 신자들의 ‘친교’체험에 필수적이며 신앙생활을 발전시키고 활성화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시아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견해를 적극 받아들여서 소공동체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언급한다.

3. 지역교회주교회의 문헌의 소공동체

1) 메델린 문헌

39. 라틴 아메리카에서 소공동체는 정치적, 사회적 질곡으로부터 해방과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아래로부터’ 움터 싹을 틔웠다. 라틴 아메리카의 소공동체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메델린 문헌(1968)은 소공동체를 “교회구조의 일차적인 세포이고, 복음화의 초점이며, 현실적으로 인간다운 성장과 발전의 원초적인 요인”이라고 묘사한다.

2) 푸에블라 문헌

40. 푸에블라 문헌에서 소공동체 대해서 정의한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소공동체를 교회와 세상의 임무 수행을 위한 “구체적 기회 제공”과 “투신과 참여의욕 부여”로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서 교회의 사명 수행을 촉진하는 공동체요, “공동체를 복음화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복음화의 동력”이며, “항구적인 구성체”로서 “비교적 적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묘사하고 있다.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는 몇 년 간의 좋은 결실을 정리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날로 증가 일로에 있는 ‘공동체 교회’가 교회의 기쁨이며 ‘교회의 희망’이라고 재천명한다. 이와 함께 소공동체가 교회의 모든 성원들과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사회적인 비중도 막중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에게는 하나의 스캔들이요 모순”이 아닐 수 없는 “사회적인 죄악”의 상황에서 점점 많은 이들이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힘을 받아” 가장 힘이 없었던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3) 아시아 주교회의 -반둥, 1990년

41. 아시아의 교회는 평신도,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들이 서로를 형제 자매로서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공동체의 친교가 되어야 한다.

4) 인도 주교회의 성명서

그리스도인들의 소공동체는 어떠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든 간에 이러한 사명감을 조성하는 강력한 수단의 역할을 한다. 그 이유는 소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그들이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의 확고부동한 복음화의 욕구를 파악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소공동체는 이르테면 어떤 유기체의 활성세포와 같은 것으로 몸 전체의 안녕을 위하여 활발히 움직이고 공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본당에 소공동체를 세우고 커나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바라나시 제3.2항)

3장 소공동체 4가지 요소

1. 삶의 자리

42. 소공동체는 협의적 의미로서 기본 구성단위가 가정, 구역․반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셨다. “기초 공동체란 소수의 가정이나 인근 신자들이 기도와 성경 독서와 교회 공부와 인간적 교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고 공동 책임을 도출하는 소수 신자들의 집회를 말하는 것이다.”(51항) 메델린 문헌(1968)은 소공동체를 “교회구조의 일차적인 세포이고, 복음화의 초점이며, 현실적으로 인간다운 성장과 발전의 원초적인 요인”이라고 묘사한다. 이에 대해서 J. O'Halloran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핵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 즉 작은 규모이면서 보다 큰 교회와 인간 공동체의 중심에 위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관을 전제로 한 것으로 그 중심에 있는 지역 단위 소공동체로부터 동심원적 파문이 점점 커져 가는 일련의 공동체들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어떠한 공동체들도 교회의 모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각자의 위치에서 고유한 독자성을 유지하는 핵으로서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메델릴 문헌의 사목지침은 소공동체를 일컬어 “교회 구조의 핵심 세포요, 복음화의 원천이며 현실적으로는 인간성 구현과 발전의 기간(基幹)”이라고 역설하면서 소공동체의 역할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2. 복음

43. 소공동체 안에서 복음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일치와 사랑과 친교를 이루는데 중심을 이룬다. 복음나누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초대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 모임과 소공동체가 구별되는 점이다. 그리고 신자들이 모여 복음을 나누는 것은 우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외롭고 병들고 궁핍한 이웃에게 가까이 가서 만나시고 어루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소공동체’를 “교회적 친교의 진정한 표현이며 복음선포의 중심”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아시아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견해를 적극 받아들여서 소공동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초 교회 공동체들(Basic Ecclesial Communities)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믿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들로 살아가도록 신자들을 도와줍니다. 그들은 형제적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복음에 따라 살도록 그 구성원들을 도와주는데 목적을 두며, 결과적으로 사랑의 문화의 새로운 표현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확고한 출발점인 것입니다.

3. 실천(활동)

44. 소공동체 안에서 실천(활동)의 중요성은 그리스도교 윤리 실천, 이웃과의 일치와 친교를 촉구한다. 소공동체는 그 지역 안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활동한다. 이런 사도직 활동을 통해 공동체는 세상과 만나게 되고 세상을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곧 우리의 삶이 복음화 될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우리의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복음이 선포된다. 사실 삶의 현장과 복음이 결합 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소가 소공동체이다. 그것은 삶의 현장 곧 우리가 사는 세상, 가정이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 모임을 갖기 때문이다.

푸에블라 문헌은 소공동체를 교회와 세상의 임무 수행을 위한 “구체적 기회 제공”과 “투신과 참여의욕 부여”로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서 교회의 사명 수행을 촉진하는 공동체요, “공동체를 복음화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복음화의 동력”이며, “항구적인 구성체”로서 “비교적 적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묘사하고 있다.

4. 보편 교회와의 일치- 본당과 일치, 교회와 일치

45. 소공동체는 마치 우리 몸의 세포처럼 소공동체와 소공동체가 상호 유대를 맺고 본당 사제들과는 물론 교구장과도 일치하여 신앙인들 전체가 하나인 교회로 나아감을 뜻한다. 위로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아래로는 세상에서 소외된 불우한 이웃과 일치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공동체들이 일치할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서 교회는 세상의 일치를 위한 표지요 도구가 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는 기초 교회 공동체들이 번창하고 교회와 그 사목자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지만, 몇몇 공동체에서 제도 교회를 비판하는 성향으로 잘못 전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기초교회공동체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인정하면서, 보편교회와의 친교를 항상 확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58항에서, “기초 공동체는 교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를 더 강화하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한 새로운 교회형태”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기초 공동체들이 오로지 자기들 나름대로 하느님 공경과 믿음에 관한 깊은 연구, 형제적 사랑의 실천, 기도 생활, 사목자들과의 일치 등 종교적, 영성적 문제에 관하여 적은 사회단체나 마을 같은 단위에 확대해 나갈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과 성사배령, 사랑의 일치를 위하여 연령, 교양, 직분 혹은 사회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인 부부, 청소년, 직장인의 단체를 집합시키려고 한다. 또한 정의를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인간발전을 위해서 뭉쳐진 사람들을 결속시킬 뿐만 아니라 사제가 부족하여 정상적인 본당 생활 운영이 잘 안되는 경우 신자들을 결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교회가 인준한 공동체 안에서 더욱 특수한 교회나 본당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말하는 교회의 공동체적 지향은 교회의 공동체가 바로 “복음 선교의 못자리”가 되어야 하고, 보다 큰 공동체, 특히 지역교회의 도움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이것은 바로 “보편교회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소공동체 모임은 가정, 직장, 상가에서 모인다.
복음 읽기, 쓰기, 나누기, 기도를 한다.
선교, 봉사, 병자. 쉬는 양 방문등 활동한다.
소공동체들과 본당과 연대한다.

4장 소공동체의 필요성

1.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체 - 삼위일체 신비, 친교

46. 차동엽 신부는 소공동체의 필요성을 먼저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 원리라는 관점에서 성서신학적 관점을 말하고 있다. 주님과 영이 공동체의 머리이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공동체의 기초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의 공동체는 결코 자체 목적이나 자기존립을 위한 제도가 아니고, 본질적으로 사람들,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위타(爲他) 공동체이기 때문에 변화된 사회 속에서 유동성과 다원성이 증가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종래의 속지 공동체를 직장, 범주 공동체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소공동체는 구원공동체의 고유성에 입각하여 형성된 공동체로서 구조가 독립성, 개방성, 인간성, 소규모성, 범주 공동체 및 직장 공동체 등의 특성을 지녀야 ‘세상과 내일을 위한 공동체 구조가’가 될 수 있다고 클로스터만은 말한다. 이러한 성서신학적 관점의 본질은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드러나는 친교이다. 따라서 소공동체의 필요성은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고 실현하는데서 드러난다.

47. 삼위일체 안에 세 위격들은 한 하느님이지만, 각자는 완전한 위격이다. 이렇듯 삼위일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도 역시 다양한 인간들이 완전한 인격으로서 있으며 각자는 손상되지 않으면서 하나로 통합되어있어야 한다. 삼위일체 세 위격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 상대방 안에 계시면서 각자의 뜻이 아니라 상대의 뜻에 따라 움직이시기 때문 탈자아적 사랑의 친교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교회의 하느님 백성 역시 서로 상호 친교의 본성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를 친교의 공동체로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 가톨릭 교회가 친교의 교회론을 실현하고 증거 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는 자유와 권위 사이의 충돌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친교와 일치는 존재하지만 획일성과 전체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성을 의미하는 가톨릭은 하느님 백성 곧 여러 신자들이 친교와 일치의 삶을 살아간다는 다양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48. 삼위일체의 모습으로서 교회를 생각할 때 교회의 모습은 먼저 삼위의 위격들이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다양성 안에 하나로 친교와 일치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교회 또한 다수의 교회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삼위일체 모습을 닮아야 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세 위격들이 동등하듯이, 교회 속에서 하나의 주교는 모든 나머지 주교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휘두를 수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안의 성부는 신성의 원천과 기원으로 탁월성을 나타내고 있듯이, 교회 안에서 교황은 ‘동등한 자들 가운데 첫 번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삼위일체 모습으로서 교회에 대한 관념을 드러내었고 친교의 교회론을 이해하도록 선언하였다. 공의회는 삼위일체적 본성의 표현이다. 삼위일체의 모습에 따른 다양성 속에서 친교와 일치는 공의회 속에서 모인 주교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공통된 정신에 도달함으로 행동 속에서 보여 질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인 신비체로 말하고 있다. 하느님 백성은 다양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친교 공동체로서 교회이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친교와 일치와 참여가 특징으로 드러난다. “사막을 여행하던 혈육의 이스라엘을 이미 하느님 교회라 불렀던 것처럼 현세를 여행하며 미래의 나라를 찾고 있는 새 이스라엘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른다.”

2. 공동체가 너무 크고 단조롭다.

49. 차동엽 신부는 현대 사회 구조가 공동체를 요구하는 사회학적 요청을 소공동체의 필요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라이나커 이론을 원용하면서 사회의 유동성과 역동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속지적 원칙을 기능적인 원칙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사회학적 연구를 통하여 현대 도시 사회의 복잡 다양한 구조와 다원적인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종래의 거대하고 단색적인 존재방식에서 지역적 특색과 다양한 직능을 반영한 ‘공동체 교회’로 탈바꿈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복음선교에서 특별히 밝히고 있는 소공동체의 필요성도 대도시화로 인하여 발생하는 ‘익명화’와 ‘집단화’를 주요인으로 꼽고 있다.

서울교구 등 몇 교구가 한국에서 소공동체를 시작한지 벌써 10여 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적지 않은 수도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소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가 더욱 요청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현 사회와 교회 그리고 가정 상황이 소공동체 사목과 모임을 위해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곧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남성 신자들의 참여의 부족이 급격히 발생하였다. 더욱이 본당 주임신부의 열성으로 소공동체 모임이 빈번해지다보면 기존의 신심 사도직 단체(레지오 등)들과 마찰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것도 본당 공동체의 현실로 나타난다.

50. 그러면 왜 소공동체가 필요한가? “지금도 문제없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신앙생활 잘 하하고 있는데! 왜 소공동체를 해서 본당에서 더 어려움을 일으켜야 하나?”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다. 소공동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와 신앙생활의 본질을 살아가자는 운동 곧 교회다운 교회 살기 운동, 새로운 교회로 있는 존재방식이다.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형교회가 만들어진다. 그 맘모스 교회에서는 교회 형제 자매들이 서로 서로를 알지 못하고, 안다 해도 신자 단체 곧 레지오, 성가대, 안나회, 자모회... 구성원들끼리만 알고 친목을 나눈다. 영세 입교한 새 신자들에게 교회와 소공동체의 따듯한 환영이 필요하다. 한국천주교회의 고질적인 냉담율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주일미사 참례자수는 신자수의 30%, 수계생활자는 40%정도에 멈추어있다. 하느님 백성의 나머지 50-60% 잃은 양, 쉬는 양들은 어디에 있고 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가?
51. 차동엽 신부는 신앙 및 인격의 정체성 형성과 유지에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심리학적 요청을 소공동체의 필요성으로 말하고 있다. 교회는 공동체를 위한 친교 마당을 제공하면서도 사회를 위한 인격적인 대화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고 디터 에마이스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그는 이런 요청을 실현하기 위해 교회 학습 공동체와 공동생활 공동체들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곧 익명성에서 탈피하여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여 소그룹으로 만나 새로운 신앙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인식시켜줄 수 있다면 시간적을 제한된 만남이라도 괜찮다. 제도교회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소그룹을 조직해야 한다. 협조자들의 양성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신앙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위기와 복잡다단한 병적 증세를 극복하며, 건강하게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기나 보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격적 친교의 마당인 소그룹 조직, 곧 소공동체가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이 집단 심리학의 결론이다.

52. 우리가 삶과 복음을 온전히 융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교회는 머지않아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곧 우리의 주변은 날로 비인간화 되어가고 물질주의로 더욱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 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가 이런 현실을 복음화 하는 데 소홀히 한다면 신자들의 냉담율이 날로 증가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삶의 가운데 복음을 심는 데 소극적이고 미혼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우리의 과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것이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소공동체 모임은 우리의 삶을 복음화 할 수 있도록 한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공동체가 모이기만 한다고 복음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공동체 모임의 기초는 복음나누기이다.

3. 위임과 책임을 나누는 교회의 주체, 평신도의 위상

53. 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교회 안에 직분상의 교계제도를 언급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제를 채택하여 모든 믿는 이들의 ‘일반적 사제직’이 ‘특수 사제직’에 우선함을 천명하고 있으며(제2장), 고유한 ‘평신도’부분의 장을 할애하여 평신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삼중직무를 가진다고 밝힌다(제4장).

또한 공의회는 평신도 교령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면서 평신도의 사명에 대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평신도 사도직은 그리스도 신자로 불렸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교회 안에서 고유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교회 헌장은 그러한 평신도 사도직이 교회의 구원사명 자체의 한 부분임을 설명하면서 이 사명에 주께서 친히 성세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고 밝히고 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는 “친교의 신비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이 드러나며, 평신도들의 근본 존엄성이 밝혀진다.”고 전제한 후 평신도의 신원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본 문헌에서는 평신도들이 교회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로 교회임을 더욱 분명히 의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다른 신분의 구성원들과 함께 교회의 친교와 구원사명에 대한 참여의 목적이며 주체들이며 그들 나름대로 사제이시고 예언자시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삼중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54.「평신도 교령」에서 역설하였던 것처럼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도 평신도의 사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계 안에서 그 구원사명을 위하여 직무와 은사를 부여하신다. 성령께서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교계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은혜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며 각기 개별적으로 능동적인 공동책임을 지도록 그들을 부르신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세례를 받은 신분과 그 고요한 소명으로 말미암아 각자의 능력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적, 예언자적, 왕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기 받은 소명의식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고 각자가 받은 고유한 소명을 수행해야만 하는 공동체성안에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직무와 친교와 구원활동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55. 레오나르도 보프는 소공동체에서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 “기초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평신도 운동이다. 평신도는 소공동체 안에서 복음의 목적을 수행하고 교회의 향방과 현안의 결정 과정에서까지도 매체와 수단의 역할을 한다”라고 말하였다.

최덕기 주교는 본당의 소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평신도가 교회 생활에 협조자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게 해 주기에 교회의 주체 확립이란 차원에서 본당의 소공동체화가 요청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우선 과제 중 하나가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인으로서 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목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교회의 기초공동체를 통하여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평신도들은 소공동체 안에서 신앙과 삶을 연계하는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이로 인해서 교회와 사회를 개선하고 변화시킬 힘을 얻을 것이다.
56.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의 특성을 세속성에 두고 평신도의 사명을 ‘세상을 성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각기 공동체에서 평신도 사도직이 구체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공동체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소공동체가 결성이 되어 자신들의 삶을 말씀 안에서 정화하고 결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나 수도자로만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그 공동체는 자생력이 없어지게 된다. 실제적으로 그들의 역할은 공동체 안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러한 면에서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부각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공동체를 이끌어나갈 평신도지도자를 양성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 즉 평신도들의 역할이 새롭게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럴 때 현재의 소공동체 운동이 생활 안에서의 공동체로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4. 인간 속성이 공동체를 원하고 있다.

57. 차동엽 신부는 파울 베스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서구 정신사에서는 ‘관계’보다 ‘하나됨’에 뚜렷한 우선권을 두고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곧 인간존재 이해를 ‘고립된 존재’로 파악하고 인간 ‘상호관계’를 소흘히 취급한 정신사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베스는 ‘관계적인’ 존재 이해 및 인격 이해라는 전형적인 그리스도교적인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그는 상호 인간적 관계성과 신앙적 관계성, 말하자면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삼위일체 신앙에서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베스는 ‘상호간의 신앙적, 인격적 사랑’을 교회의 내적 본질이라고 본다. 신적인 사랑이 형제자매적인 나눔을 통해서 실현되도록 하는 장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다.

58. 교회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삼위일체 신비의 원리 곧 다양성(위격들)과 일치성(본성)의 신비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학적 영성적 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기비움(kenosis, self-emptying)으로 드러난다. 삼위일체 신비의 영성은 하느님의 자기비움, 성자의 자기 비움, 성령의 자기비움으로 들어난다. 자기비움은 또 따른 표현으로 ‘사랑의 역동성’(dynamical Agape)이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부터 줄곧 인간을 향한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며,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기비움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탈자아’ 곧 사람이 되신 강생사건으로 드러난다. 성자의 자기비움은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스스로 받으시고 결정적으로 세상의 죄를 위해 수난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드러난다.

59. 성령의 자기비움이야 말로 교회론의 원천으로 삼위일체의 신학적 원리와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는 구세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령은 세상 창조 때부터 종말에 이르기 까지 성부와 성자의 뜻에 따라 하나가 되는 통합의 원리로서 결코 성부와 성자를 앞서 나가지 않으며 오히려 성자를 구약에서부터 준비하고 신약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성자와 동행하면서 하느님 구원을 역사(役事)하였으며 성자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시며 이제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인간들과 함께 하면서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온전히 사람들에게 내어주신다. 성령의 자기비움은 항구하게 하느님의 사랑의 역동성을 삼위 안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실현하게 통합하는 삶으로 자신을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내어 주셨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서 자기비움의 삶이 실현되는 사랑의 역동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사랑의 역동성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기비움의 영성으로 모아지는데, 삼위는 먼저 상대에게 스스로 내어주시는 삶(self-giving)으로 나고, 결국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줌은 상대의 입장에서 스스로 받음(self-receiving)과 관련되어 풍요로움으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공동체는 삼위일체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 서로간의 사랑이, ‘의식’과 ‘구조’의 필수적인 일치 안에서 자기실현을 하는 구체적인 장소이다. 하느님과 이웃과 더불어 사랑과 인격의 친교를 나누는 것이 신앙과 본질의 요청이라는 새로이 각성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새로운 구조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알고 개인적으로 사귀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 건설에 힘써야 한다.

제3부 소공동체 신학과 영성

1장 소공동체 신학

1. 초대 교회 공동체

1) 신약성서의 공동체

60. 누가 크리스찬 소공동체의 창설자인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어떤 점에서 미래 공동체의 모습은 설계사가 새롭게 설계하고 아름답고, 실용적이며 다 기능적으로 단장해서 개점한 백화점과 같은 느낌일 수 있겠으나 지금까지는 구닥다리 복음과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새 공동체든 옛 공동체든 성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순례하는 공동체 안에서 그 기원을 지니고 있다. 그 순례하는 공동체는 예수님과 함께 팔레스타인의 먼지 길들을 밟아왔으며, 성령강림 사건이 있은 다음 예루살렘에 첫 크리스챤들이 모여들었다.(사도2,42-47;4,32-37)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전교활동으로 다른 넓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에페소, 필립비, 고린토 등에 포진되어 있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Raymond Brown은 신약성서 시대 교회는 자체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목서간(디도, 디모데오)에 따른 바오로계 공동체는 잘 조직화된 교회의 모습이었으나, 불안전한 시대였기 때문에 직무의 권위가 중요했으며, 장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골로사이 사람들과 에페소 사람들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모습은 사랑에 기초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러난다.

61.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교회와 영’으로서 공동체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교회는 영의 현존과 활동이 강조된다. 베드로1서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모습은 하느님 백성으로 나타난다. 이 형태의 공동체 모습은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인격체들을 형성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전승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모습은 예수님 안에 인격적인 친밀함이 드러나고 있는 제자들 공동체로서의 백성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파라클리토 영에 의해 인도된 인격체들의 공동체를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이 개종한 마태오 공동체는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신약성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교회 모습은 두 가지 특징 곧 공동체와 하느님 백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권위 또한 전혀 지배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봉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형제자매 공동체의 원리는 권위와 힘의 오만을 금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실천하며 서로 도와주는 데 있다.

62. 바오로 사도가 제시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1고린12,37)과 공동체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오로사도가 이해한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 함께 존재한다. 바오로가 제시하는 공동체들 곧 초기 크리스챤 그룹들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은 백성이고, 조직과 건물은 두 번째이다. 신앙인들은 가정에서 만났으며 교회가 없었다. 베드로 사도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고 요한과 마르코의 집에서 함께 모였으며(사도12, 12), 바오로 사도는 프리스카와 아퀼라의 집에서 만난 교회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기도 한다.(로마16,5. 11-15) 이렇게 초기 크리스챤들은 가정에서 만났는데 이는 그들이 친밀한 그룹 곧 친교를 경험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동체들의 친교를 중요하게 경험하는 해가면서 소공동체들을 이루어 가는데 역시 걱정거리도 존재하였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공동체, 초대 교회 공동체의 정신

63.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고 만드신 공동체는 먼저 회개에로 초대된 공동체로 나타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1,14-20)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당신 곧 하느님께서 원하신 공동체의 모델로 선포하시고, 이를 실현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신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 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신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마르1,16-17) 예수께서는 당신이 원하신 공동체를 전하고 만들어 가기 위해 제자 공동체를 구성하신다.

64. 하느님 나라로서의 공동체는 자비와 용서가 주어지는 하느님 은혜의 나라이며, 또한 밭에 뭍힌 보물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나라이다. 곧 하느님의 나라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잃었던 은전을 찾는 기쁨의 나라이며 동시에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집 앞에서 늘 기다리시는 열린 나라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제자들과 늘 어울려서 함께 음식을 먹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0-13) 이와 같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그 원형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으로서 그 나라는 자비와 용서가 드러나는 공동체이다.(루가15,11-32)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비와 용서의 공동체 모습은 결정적으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식사와 회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잔치 그리고 죄와 마귀와 병에 걸려 고통에 빠져있는 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베푸시는 치유와 이적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65. 예수님이 원하신 하느님 나라로서의 공동체는 최후의 만찬의 성체성사와 세족례에서 그 정신이 드러난다. 성체성사와 세족례야 말로 히브리인들의 파스카 축제 즉 출애굽 기념제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파스카 정신을 담고 있다. 세족례의 정신이야 말로 새 파스카이며 그리스도 새 모습이고 새로움의 잔치이다. 우리는 오늘 새로운 이 파스카 잔치 안에 앉아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구약의 파스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유대인들이 형식적으로 마음에도 없이 매년 기념하던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옛 파스카 잔치에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주님께서 벌이시는 마지막 최후의 만찬 새 파스카 잔치에 앉아 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13,4-5;14-15)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35) 결국 예수께서 원하신 공동체는 역사의 예수님 삶과 성체성사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고 있는 사랑(agape)의 공동체이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공동체의 모습은 선교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9-20)

66. 로핑크는 초대교회에서 지향해야 하는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공동유대, 화합된 사회로 바라보았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에서 어느 누구도 거부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1고린12,12) 서로 함께 지내야할 타당성의 제시된다는 점이다. 한 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 자매적 유대 안에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통치권으로 드러나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마르10,42-45) 하느님 백성 안에서 존재하는 권위는 오로지 예수의 권위뿐이다. 하느님에 의하여 선사된 공동유대의 새로움에 드러나는 원초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아가페’, 곧 사랑이다.

67.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2,42-47) 초대 교회는 말씀을 증거(martyria)하는 공동체(필립1,28), 전례거행과, 기도를 하는 공동체(liturgia)(신명10,12), 친교와 일치가 드러나는 공동체(koinonia)(로마12,15), 봉사, 나눔이 이루어지는 공동체(diakonia)(마태9,13)로 나타난다.

68. “그러면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1고린 14,26-27)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히브 10,24-25)”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상-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체, 친교교회-

69. 이제 역사적 변천과정에서 교회이해의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며, 특별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에 바탕을 두고 하나로 일치한 백성이 된다.”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공동체는 친교를” 의미하므로 ‘친교’라는 중심개념을 통하여 교회공동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도 밝힌 것처럼 친교의 교회론은 공의회의 중심개념이고 기본개념이라고 밝히고 있다.

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교회의 신비적인 요인을 부각시켰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우선적으로 “신비”, “일치의 성사”, 즉 하느님과 인간, 또는 인간사이의 일치를 위한 성사로 서술하였다. 언어의 표현은 달리 하고 있지만 한스 큉은 교회를 일컬어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피조물’로 묘사하였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친교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탄생의 기원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교회가 가지는 신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친교의 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친교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마음의 관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70. 교회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이 친교라고 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의 가장 친밀한 친교를 나타낸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가장 완전한 친교는 그리스도의 강생이며, 교회는 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연장 내지는 모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생활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바탕을 두고 모인 백성”으로서 삼위일체인 하느님의 친교 안에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성화하여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친교의 신비로서의 교회론을 표명함에 있어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교회를 구분하면서 성삼의 교회론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교회는 성서의 삼위일체 신비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출발하는 친교 교회론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삼위일체 신비는 친교 공동체 영성이며 이를 기초로 친교 교회론이 실천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으로 나타난다. 교회는 높은 곳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나의 인격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다양한 인격과 각자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목적으로 초대하셨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친교신비이다. 친교 교회론은 삼위일체와 자비의 신비 안에서 나눔과 섬김을 통한 화해를 살아가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대해 성서에서 출발하는 친교 교회론으로서 세 가지 모습과 형태를 말하고 있다. 친교 교회는 하느님 나라로서 선포되고, 그리스도 몸 신비체 그리고 성령의 궁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결국 종말론적인 삶을 향하여 가는 화해의 신비를 실현하는 것이다.
7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은 삼위일체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친교의 교회론으로서 삼위의 탈자아적 사랑의 친교가 구체적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조직과 운영 그리고 교회 평신도 봉사직에도 그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두가 살아 숨쉬는 연대와 협력의 유기체적 공동체이다. 이는 사람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는 다양성 안에서 일치와 친교를 의미하는 연대성과 통합성을 강조한 것이다. 200주년 사목 의안도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 교회구조와 운영에 있어서 보조원리를 구체화 하고 있다. 교회의 구조와 운영에서 보조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계 제도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적용의 문제는 성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한 신학적인 보완이 필요한데 이는 바로 삼위일체의 친교의 신비로부터 적용되어야 한다.

3. 하느님 나라로서의 친교교회

72. 거룩한 교회의 신비는 그 창립에서 드러난다. 주 예수님께서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하시며 오래 전부터 성서에서 약속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 교회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교회와 하느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교회 정체성 문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회 사이에 큰 물음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역시 지나간 과거의 좋지 않은 점을 서로 극복할 수 있도록 열려있고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하느님 나라로서 친교교회론의 방향을 세상과 형제 그리스도교를 향해 여전히 열어 놓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친교교회는 두 가지에서 특징을 두고 있다. 첫 째 하느님 나라로서의 친교교회는 공동체적 인격의 나라이며, 둘째로 하느님 안에 모두가 하나 되는 공동체적 친교성이 들어난다. 하느님 안에 하나 되는 공동체적 친교성은 예수님에 의해 설교되고 교회 공동체가 살아온 나라인데 이는 개인이 하느님 안에 불리고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교회의 영적현실로 드러나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의 하느님으로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이며, 죄에서 용서받은 인간 존재의 충만을 드러낸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열린 친교 나라의 모습으로 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는 교회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은 아버지의 신비로부터 오는 성사성에서 진행된다.

73. 하느님 나라는 아들과 함께 하는 아버지만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미’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영광의 나라와 함께 죄인들에게도 항상 열려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정의하지 않았으며 오직 선포하고 소개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느 누구와 무엇에 대항하여 설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와 그 무엇을 위하여 선포된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인간, 인류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늘 예수님의 인격 안에 남아 있다. 하느님 나라의 계시는 늘 누군가에게 집중되어있다. 그리스도는 주님 하느님의 총체적인 선물 안에서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 사이의 내적 연관을 강조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전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한 해방으로 나타난다.

해방은 신약성서에서 새로운 인간으로서 최고의 인간성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는 종말론적 새로움이며 복음적 인간성의 역동성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하느님의 해방은 인간의 해방에 기초한다. 이 해방은 주님의 초대이며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초대하는 구체적인 응답의 가능성이며 근본적인 선물이다. 하느님의 해방에서 인간 해방이 나오는데 이는 인격화된 해방의 유토피아적인 전망에서 나타난다. 이 유토피아에서 하느님 나라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근본적인 해방이 시작되고 진실한 인간존재가 발견된다.

74. 하느님의 나라는 회심에로 모든 이가 초대되는 곳이다. 회심은 마음의 근본적인 돌이킴이며 하느님의 선물이다. 회심은 하느님 자비의 신비에로 들어가는 인간의 선택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하느님 존재와 인간의 인간존재 사이의 친교로 요약된다. 이 하느님의 나라로서의 교회가 바로 친교의 교회로 증거 되어야 한다. 하느님 백성 공동체에서 쇄신을 위해 교회는 친교의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마음으로 기도드리는 교회의 모습이며 인간에게 봉사하고, 사랑의 부드러움으로 세상과 인간에게 가까이 있는 친교 교회의 모습으로 증거 되어야 한다.

4. 그리스도 신비체; 그리스도의 몸, 성체성사의 친교교회

75.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교회의 신비로 드러난 것은 바오로 서간의 신학을 뛰어넘어 정착된 주제이다. 그리스도 신비체가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해방 곧 교회의 구원론과 직결되어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유대가 존재한다. “우리도 여럿이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저마다가 서로 지체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o) 역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보편교회가 있다.”고 말하였다. 교회는 강생의 확장이며, 강생이 영원히 지속되는 거룩한 장소이다. 그리스 신학자 크리스토스 안드로트소스(Christos androtsos)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의 중심이며 기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직, 사제직, 그리고 왕직의 연속과 성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교회와 그 설립자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결합되어 있다...... 교회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 몸, 구원의 보편적 성사 곧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으로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성체성사를 영원히 지속하셨다. 그리스도 신비체는 교회 여정에서 성령께서 이루시는 방법으로 실현하고 계시하는 친교교회이다. 그리스도 신비체는 주님의 몸과 거룩한 백성들 사이의 연대 관계를 실현한다.

76.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 모여 함께 사는 친교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몸 신비체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의 몸 사이의 신비롭고 실제적인 친교를 예고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교회를 몸에 비유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교회는 단순히 그리스도 주변에 모인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 안에서, 그분 안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세 가지 측면, 곧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이루는 모든 지체간의 일치,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77.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친교와 일치성은 무엇보다도 전례를 통해서 성취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땅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태어난다. 그리스도 신비체는 그리스도와 관련되는 그 무엇이거나 성찬례가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해 성체성사로 나타나는 그리스도 자체이다. 교회의 유기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내적 삶과 생명의 열매이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하느님 백성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몸을 받는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하는 동시에 그들 서로 서로를 하나가 되도록 하신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와 친교를 창조한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 사귐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친교를 창조한다. 교회는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자체의 충만성 속에서 존재하는 성찬례의 공동체이며 거룩한 전례의 유기체이다. 세례와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의 인격체로 변화하게 하는데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친교 공동체의 실현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세례와 성찬례를 통해 새로운 삶의 원천과 진실된 충만성이 드러나는 친교 공동체 구성원이 된다.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은 성인들의 친교와 거룩한 것들의 공유 곧 거룩한 전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78. 그리스도 신비체는 교회를 영적 현실로 인도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내적 형태의 특별한 삶을 증거 하는 것을 발견한다. 만일 성령께서 창조되지 않은 영으로서 나타난다면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성령 또한 그리스도와 충만히 함께 하신다. 삼위일체의 역동성이 구원의 신비 안에서 친교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위격적 확인과 충만히 연관된 현존 그리고 다른 위격들을 향한 선물의 국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워지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주셨으며, 머리와 지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한 분이신 똑같은 성령께서는 온 몸에 생명을 주시고 온 몸을 일치시키시고 움직이신다. 그래서 거룩한 교부들은 성령의 임무를 생명의 원리인 영혼이 인체 안에서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비체로서 교회는 성령 안에서 같은 성자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 숨쉬게 하는 가시적인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표현하고 있다. 이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충만을 향하여 완성을 이루는 것을 증거 하여야 한다. 이렇게 교회는 그리스도를 널리 알리고 확장하는 것이다.

79. 성체성사로서 교회는 안정된 체계와 조직 안에서 진리개념을 담아 낸 정확한 구조가 아니라, 공동체 곧 하느님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생명의 유기체이며 신비체를 살아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적인 몸으로 살아가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동시에 성체성사의 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된다.” 성체성사의 친교 교회관은 공동체의 일에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받아들여지는 진정한 만남으로 드러난다. 나눔과 섬김, 사랑의 성체성사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서로가 하나인 친교로서 드러낸다. 성체성사로서 친교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존재 안에서 그리스도 신비가 시작되고 그리스도와 성령이 충만하게 드러난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 안에서 살아 숨쉬는 충만한 연대와 협력 관계로서 드러난다. 성체성사 안에서 교회는 친교의 본질을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친교가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성체성사 안에서 만나는 친교는 항상 하나 된 몸, 사귐, 참여의 충만 또는 전반적인 연대와 관계성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백성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보증해야 한다. 교회의 구조와 제도와 운영도 역시 성체성사의 진실성 기준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다. 교회의 직무는 친교의 현실, 성사적 표현에 따라 구성될 것이며, 이러한 시각에서 사도적 계승이 이해되어야 한다. 역사라는 시-공간과 교회가 상호 인격적으로 연결되어 만나는 역동성은 전승(傳承)을 탄생하도록 한다. 그것은 폐쇄가 아닌 여정이며, 조화이지만, 과다하게 닫힌 모든 조직화는 거절하게 될 것이다.

5. 성령의 궁전-성령강림의 친교교회

80. 성서에서는 성령이 충만한 위격의 요소로 나타나지 않으며, 분명하게 영이 위격이라고 선언되지 않는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나고가에서 희년의 해방 선포자로서의 구체적인 성령의 위격성을 즉각적으로 부르는데 이는 파라클리투스(Paraclitus)이다. 성령은 위격적 소리인데, 주님의 메시지를 충만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 파라클리투스는 말씀을 선언하고 모든 이가 그것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성령은 위격적인 친교의 원천이다. 교회가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는 복음화 사명 또는 주어진 임무수행에 즉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선포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먼저 온 마음과 온 정신으로 말씀을 듣는 데 있다. 그럴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알아듣도록 도와주신다. 성령은 영성적인 특성만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통해서 움직이시며 즉각적으로 구체화하신다. 성령은 신앙을 일어나게 하시는 믿음의 영이시다. 성령은 믿도록 하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러난 용기이다. 성령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기나긴 세기 동안 구원의 메시지를 영향력 있게 통교하는 것이다.

81. 성령에 관한 언급은 건물 곧 움직일 수 없는 성전의 이미지로부터 인격을 형성하는 역동적인 친교로 그 자리를 옮기고 있다. 교회는 매우 견고하고 밀도 있는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것을 고정하고, 분류하며 구분하는 이성과 반대로 성령은 생명의 힘이고 근본적인 운동이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누구를 위한 존재’이며, ‘무엇을 존재하도록 두는 최종 선물’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참여할 수 있는데, 성령은 신적인 삶에서 성령강림 아니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이에게 자신을 반영하는 친교적 투명성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참여성, 투명성, 현존성이 체험되는 위격이시다.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친교로 살게 하는 ‘끈’이고 ‘그물’이다. 친교 존재이신 성령은 신적인 삶을 매우 깊이 있게 하는 ‘함께’로서 표현되는 ‘우리’이시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를 하느님 삶으로 안내하는 사랑의 사랑이시다. 교회가 배워야할 성령의 모습은 바로 인간을 위한 나눔과 섬김 곧 자기비움(kenosis)의 사랑인데, 인간이 듣고, 수락하며, 응답하는 능력에 따라 성령이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취소되고 변함이 없는 선물로서 성령은 모든 이가 총체적으로 친교하도록 도우신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사랑, 자기비움(kenosis)이다.

82. 성령은 근본적으로 실천적 어려움을 뛰고 있는 모순, 다양성과 일치성 사이의 조화, 곧 다양성 안에 일치의 현존을 구하신다. 성령은 다양성과 일치성을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현실의 이중 운동의 표현을 존중하면서 다양성을 통하여 일치성(친교)을 완성하신다. 한 위격으로서 성령은 믿음과 교회적 사랑의 초월적 일치 안에서 모든 이가 많은 한계를 뛰어넘어 해방과 화홰와 친교를 살도록 도우시는 초대이며 보편적인 매력이시다.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교회는 하느님의 가족이 살아가는 하느님의 집, 건물로 표현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건물로서의 의미보다는 인격화의 깊은 요청이 드러나는 자각을 통해 친교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령은 두 위격 안에 한 위격, 많은 위격 안에 한 위격으로 알려졌다. 많은 위격들과 함께 성령의 일치와 친교로부터 출발하면서 교회와 하느님의 강생 사이에서 다른 점을 보다 명백하게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렇게 참 ‘우리’가 된다. 그곳에서 위격들의 다양성들이 획일성(uniformity)으로 사라지지 않으며 무질서하게 해체되지 않는다. 성령강림과, 보편적 예언직 그리고 교회적 ‘우리’ 사이에서 우리는 교회의 친교성을 포함하는 예언적 순환을 발견할 것이다.

83. 교회는 “세상이 생길 때부터 이미 예표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으며, 마지막 시대에 세워져 성령강림으로 드러났으며, 세말에 영광스러이 완성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전에는 성령의 언급이 없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고백되곤 한다. 그러나 구세사 안에서 성자는 성령과 함께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기 까지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이루신다.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처럼 교회가 있는 곳에 성령도 계시며 성령이 계신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또한 성령의 궁전이며,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장소이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친교를 맺게 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보증하신다. 오순절에 성령은 불혀들이 갈라지며 나타나 각자에게 내려앉았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 주어진 공동체의 선익을 위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삶은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을 제거하거나 모두를 서로 획일화 한 상태에서 엄격하고 규격화된 형태로 놓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84. 삼위일체의 모습, 그리스도의 몸, 성령 충만인 교회는 쇄신의 근본 뿌리이며, 교회는 가시적이며 동시에 비가적이며, 신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이다. 교회는 지상에서 예배하는 전례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시적이고, 거룩한 성인들과 천사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비가시적이다. 교회가 인간적이란 의미는 교회의 지상적 구성원들이 죄인들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신적인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되는가? 바로 성령 때문이다.

3장 소공동체 영성과 성사(전례)

소공동체 영성의 출발점은 성경이며, 그 영성의 체험은 성사와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소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증거 된다. 성경 전체가 하느님 백성에게 다가오는 신비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경륜으로 나타나는데, 이 삼위일체 신비가 소공동체 안에서 증거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영적 자산인 성사 안에서 그 영적 신비가 체험되어야 한다. 소공동체와 영성 그리고 성사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그 핵심요소들은 먼저 삼위일체 신비,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 믿음과 삶의 일치, 하느님 말씀-기도-성체성사-회심-화해, 새사람(갈라3,28), 문화 인식의 성숙, 인내의 영,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하느님께 속한 갈망, 이웃사랑과 미소 등이다. 이러한 영성적 요소들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그리고 성사 안에서 찾아 소공동체 안에서 증거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삼위일체와 성체성사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성 곧 친교와 비움과 나눔 그리고 다양성과 단일성의 조화로서 참여를 살펴보고, 성사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소공동체와의 관계를 찾아본 다음 간략하게 7성사의 본질을 진술하고자 한다.

1. 소공동체 영성-삼위일체 신비, 성체성사

1) 친교의 영성-이웃사랑

85. ‘친교’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그 의미가 풍부하고 복잡하다. 이 말은 라틴어 ‘꼼무니오’(Communio)에서 나왔고, ‘꼼무니오’의 뿌리는 희랍어 ‘코이노니아’(κοινω νια)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이 단어는 라틴어로 군대의 야영지나 요새와 같은 군사시설 을 뜻하는 말인 ‘Cummoenus'나 아니면 공동의 관계, 의무, 사업을 뜻하는 말인 ’Communus'에서 나온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어원 모두가 여러 사람들이 하나이며 같은 일을 위해서 나름대로 적당히 공헌함을 뜻한다는 점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이해되어진‘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 친교, 상통, 공동유대)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초대 교회 안에서의 친교의 개념과는 달리 구약에서는 그 의미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약시대에서는 친교를 의미하는‘코이노니아’의 직접적인 사용 예는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의미하는 경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Balthasar은 “초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둡고 낯선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이루는 작은 무리가 바로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지고 선사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형성되고 또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력을 취하는 ‘사랑의 친교 공동체’(κοινωνια, Communio)라는 자기 이해가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하나의 게토화된 공동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속에 자신들이 파견되었다는 확고한 의지인 “파견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86. 이러한 성서적이고 교부적인 교회개념을 근거로 하여 이미 일찍부터 교회 안에 성사적으로 정향된 교회론적 교회의 자기 이해가 자리 잡게 되고 궁극에 가서는 결국 “교회는 Communio이다”는 등식의 숙고된 확신에까지 이르게 된다.

“서로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음을 감안한다면 교회가 가지는 상호협동의 대명사인 Communio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개념이 하나가 있다. Lohfink에 의하면 그 단어는 ‘알렐론’(ἀλλήλων) 즉 “서로”라는 상호대명사이다.그에 의하면 이 조그만 낱말이야말로 초대그리스도교 공동체 신학의 중요한 대목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서로 건설하라”(1데살 5,11)라는 개념을 통해서 공동체의 특성을 설명해 나간다.

건설을 의미하는 희랍어인 ‘오이코도메’(οίκοδομή)는 사도 바울로가 지역교회 공동체를 강조하듯이 신약성서 안에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유배생활 이후에 새로운 공동체로 건설하실 분으로 생각한다면(예레 31,27-28), 바로 ‘건설’이란 일으켜 세우고 살아나게 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최대한의 과업은 바로 마지막 때에 변함없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최종적으로 달성될 하느님 백성의 집결 내지는 건설이었고 바로 그 교회는 경건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서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향했던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ἀλλήλων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바라볼 때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서로 서로 충고하고, 서로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의식을 가졌으며 이것이 바로 그 공동체에 서 보여진 친교(Communio)이고, 친교(Communio)의 교회이었음을 알 수 있다.

87. 친교(communio)의 공동체 개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서적 코이노니아(koinonia) 개념을 받아들여 교회를 표현한 새로운 개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무리가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사랑에 의해 형성된 “사랑의 친교 공동체”로 이해했다. 친교 공동체의 원천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위격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인 친교에서 연원된다.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절대 사랑은 교회 공동체의 심장이며 예형이요 모형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친교적 일치는 구원에로 불림 받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친교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교회는 형식적 권위에 의해 유지되는 제도적이고 규범적 실재가 아니라 구성원간의 온전한 신뢰와 사랑, 인격적 만남으로 삼위일체의 삶을 구현하는 친교의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88. 친교의 공동체의 삶은 하느님 안에 세 위격의 “관계”에 바탕을 두는 대화(Dialog), 상호협력(Co-operation), 연대성(Solidarity)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대화는 하느님과 인간, 공동체 구성원간의 개방과 인격적 만남과 일치에로 이끌어 준다. 이는 곧 기도이고 복음과 삶에 대한 나눔이며 하느님 현존을 드러내는 신앙 공동체의 구성 양식이다. 대화는 상호 깊은 유대와 협력의 기반을 마련한다. 대화를 통하여 여러 지체들이 상호 협력하고 실천적 삶을 이루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형성한다. 연대성은 하느님과 신앙 공동체, 그리고 신앙 공동체 상호간의 일치와 친교를 말한다. 교회는 공동체들의 친교 (Communion of Communities)를 통하여 지역 교회 더 나아가 보편 교회를 구성한다. 교회의 친교를 통한 사랑의 공동체는 교회를 넘어 이웃과 세상을 사랑의 공동체로 변화시킨다.

2) 비움의 영성-나눔

89. 삼위일체 신비와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비움의 영성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곧 구원계획 안에서 출발한다. 하느님은 구약에서 인간을 부르시고, 찾으시며, 구해주시고, 당신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시지만 인간은 자신의 길을 찾아 하느님 당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택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제 인간을 찾고, 구하고, 보다보다 못해 결국 하느님이 진실로 사랑하는 인간이 되신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육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바로 자기비움의 영성이 실현된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비움이 바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상대방으로 태어나는, 아니 사랑하는 상대방이 되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자기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을 억지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자기화 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을 포기하고 상대방 인간의 입장이 되어주는, 너로 되어주는 사랑, 육화, 사람이 되는 사랑으로 구세사가 전개된다.

90. 신약의 자기비움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인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세례,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의 파스카 사건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과 가르침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와 거룩한 변모에서 들은 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의 의미 안에 자기비움의 십자가상 죽음을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스런 아들의 의미는 인간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자기비움의 뜻을 지니기에 하느님은 아들 예수님이 사랑스럽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의 영성은 탄생과 수난 곧 성탄과 부활 영성 원리로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자기비움의 모습은 영광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는 동방박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지만 한편으로 어느 곳에서도 편히 태어날 수 없어 마굿간은 바로 성탄의 자기비움의 영성으로 나타난다. 기쁨의 탄생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세상의 죄로 돌아 가셔야하는 자기희생의 비움 영성이 바로 베들레헴 마굿간으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왕으로서 기쁨과 충만의 왕 탄생과 세상의 죄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돌아가실 자기 희생과 비움의 영성이 바로 마굿간이다.

91.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 수난, 죽음, 부활에서도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 파스카 사건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죄와 죽음과 고통 그리고 세상의 악으로부터 해방하신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해방이 충만의 영성이라면 이 충만은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철저한 자기비움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비움과 충만은 늘 동전의 양면으로서 하나의 파스카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그리스도 탄생의 베들레헴 마굿간의 비움의 영성과 신학적 맥을 함께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왕으로 태어나신 시쁨과 충만의 영성과 연관된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신약에서 영성은 비움과 충만의 조화로 드러난다. 역사적 예수의 삶 역시 구약의 하느님의 삶과 같이 나타난다. 이는 인간을 그 중심에 두고 드러나는 비움의 영성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나서시고 결국 인간이 되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찾아 나서신다. 특별히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실존들,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은 찾아 나서신다.

91.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은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의 삶과 관련된 겸손의 영성을 말하고 있다. 특히 비움 영성의 핵심은 세족례, 사랑의 새 계명, 성체성사, 궁극적으로 십자가상의 죽음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움의 영성의 성서 말씀을 다음과 같이 모을 수 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태20,27-28)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이 가운데 말째가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9,35)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5,3) “진실히 말하거니와,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3) 다양성과 단일성의 조화

92. 삼위일체 신비의 영성은 다양성과 단일성의 조화 원리로 드러난다.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서로 서로 일치하여 자율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영성으로 드러난다. 다양성과 단일성이 조화를 이루는 영성의 원리는 삼위일체 신비 가운데 특별히 성령의 역할로 드러난다. 성령이야 말로 서로 다른 다양성과 단일성을 하나로 통합된 조화의 원리이다. 이러한 조화의 원리는 교회와 소공동체 안에서 교계의 원리와 협의회의 원리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가 다양하게 통합되어 나타나도록 한다. 물론 이 원리는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소공동체 안에서 사목적 협력을 위한 친교와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92. 지금까지 살펴본 소공동체 신학과 영성은 소공동체가 한 시대의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로부터 늘 새롭게 태어나는 교회 살기라는 것을 드러내는 충분한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한편 소공동체의 영성, 친교와 나눔과 조화는 소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자율적인 참여와 역할 위임이 이루어지는 원천이 되고 있다.

2. 소공동체와 성사(전례)- 하느님이 은총을 주시는 방식

93. 소공동체를 비판하고 있는 부분 가운데 왜! 하필이면 오직 말씀뿐인 개신교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냐는 것이다. 개신교를 따라가자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자는 것이다. 제2차바티칸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에 의지하여 이 순례하는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분만이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시며, 당신 모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분명한 말씀으로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다. 교회의 모임에 완전히 합체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모든 수단을 받아들이며,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곧 신앙 고백과 성사,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로 결합된다.”

94. 따라서 소공동체는 가톨릭의 균형 잡힌 기둥인 성서와 성전 안에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이제는 소공동체 안에서 생명수를 지닌 말씀과 성사에서 넘치게 흘러나오는 신앙의 보물을 찾아야 한다. 말씀과 성사가 성직자나 수도자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의 영적 양식이 되어야 한다. 소공동체에서 성사와 말씀이 풍요롭게 증거 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로서 공동체가 실현될 것이다. 성사와 말씀을 온 하느님 백성이 증거하고 참여하며 나눌 때 소공동체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로서 드러날 것이다.

95. 7성사의 본질이 소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함께 전례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한국천주교회는 지금까지 성사와 하느님 백성의 신앙이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생활로 만나지 못하고 분산되어 성사 집전자와 받는 자와 분리되어 단지 하느님 은총을 주고받는 형식적인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는 공동체 안에서 성사와 그 은혜의 풍요로움을 하느님 백성 전체가 받고 나누고 확인해주어야 한다. 곧 소공동체에서 그 구성원들이 그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서로 성사의 은혜를 친교적으로 확인하고 나누어야 한다. 소공동체 전체 하느님 백성들이 유아세례, 첫영성체, 견진성사, 혼인성사, 병자성사, 신품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 교회의 풍요로운 은혜 선물들을 확인하고 나누어야 한다. 그럴 때 소공동체는 말씀과 성사의 은혜 공동체로 살아 숨 쉴 것이다.

1) 성사, 소공동체 영적 양식

96.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시지 않고 (요한 14:18)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요한 15:26). 예수님은 성사를 세우시어 우리를 치유하시고 먹여주시며 북돋아 주신다. 일곱 가지 성사 곧 성세, 성체, 고해, 견진, 신품, 혼인, 병자 성사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실제로 부여하는 표징이다.

실제로 은총을 부여하지 않은 구약 시대의 의식에서도 성사가 예표되었다. (예를 들어 할례는 성세의, 파스카 만찬은 성체의 예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은총의 상징들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초자연화 하셨으며 은총으로 에너지화 하셨다. 상징들을 그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키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나타내실 때 물질을 사용하셨다. 물질은 종래 악이 아니다. 우주를 창조하실 때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 (창세기 1:31). 하느님은 물질을 기뻐하시어 자신의 육화를 통해 그 품위를 더해주셨다 (요한 1:14).
97. 예수님은 진흙, 물, 빵, 기름, 포도주 등 하찮은 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먹여 주시고 북돋아 주셨다. 그런 것 없이도 곧장 기적을 행하실수 있었지만 물질을 사용해 은총을 부여하는 방식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청으로 첫 기적을 행하실 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고 (요한 2:1-11),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 치유해 주셨으며 (요한 9:1-7), 빵 몇 조각과 물고기 몇 마리로 수천명을 먹이셨고 (요한 6:5-13), 빵과 포도주를 그분 자신의 몸과 피로 변화 시키셨다 (마태오 26:26-28). 그분은 지금도 성사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고 먹여 주시고 북돋아 주신다.

2) 성세성사(교리서 1213-1284)

98. 우리는 원죄로 인해, 영혼 안에 은총이 없어 도저히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버지와 화합시키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요한 3:5) 이것이 곧 성세 성사이다. 우리는 성세 성사를 통해 육적 수준 아닌 영적 수준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씻김으로 다시 태어나며 (디도 3:5),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분의 부활에 참여한다 (로마 6:3-7). 우리는 성세 성사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과 은총을 받는다 (사도행전 2:38, 22:16). 베드로 사도는 “세례를 받으면 구원된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1베드로 3:21). 성세 성사는 교회의 입문 성사이다.

3) 고해성사(교리서 1422-1498)

99. 우리는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종종 걸려 넘어져 죄를 짓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어 은총에 찬 당신과의 친교를 회복해 주시려 하신다. 그분은 고해 성사를 통해 그렇게 하신다. (고해 성사는 화해의 성사라고도 하고 참회의 성사라고도 하는데 각각 이 성사의 다른 단면들을 표현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시키는 능력과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그들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 자신의 권한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라고 말씀 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말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2고린토 5:18-20). 우리는 하느님을 대리하는 사제에게 고백함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장래의 유혹에 저항할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

4) 성체 성사(교리서 1322-1419)

100. 성세 성사로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되면, 그분은 성체 성사로 당신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먹여주시어 굶주리지 않도록 배려하신다. 구약 시대 유다인들은 광야로 떠나기 전 하느님의 분부로 새끼 양을 제물로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뿌렸고 이에 죽음의 천사가 그들의 집을 그냥 지나갔다. 그런 다음 그들은 양고기를 먹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확인했다.
이 양은 예수님을 예표했다. 그분은 진정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요한 1:29).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루가 22:20)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된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파스카 양을 먹었지만 우리는 이제 성체이신 하느님의 양을 먹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다.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요한 6:53).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들어 축복하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흘릴 나의 피다” (마르코 14:22-24) 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 님은 이같이 성체 성사를 세우셨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 때 이 제물을 먹는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 제사가 “단 한번”의 일로서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히브리 9:28). 그리스도는 미사 때 “다시 한 번”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갈바리의 그 희생이 제대 위에서 현재화한다. 그래서 미사는 “제2의” 희생 제사가 아니라 십자가상 단 한 번의 그 희생 제사에의 참여이다.

바오로 사도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기적이라고 상기시킨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1고린토 11:27-29). 빵과 포도주가 축성된 후 제대 위에 빵이나 포도주는 남아있지 않다. 예수님 자신이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거기 계실 뿐이다.

5) 견진 성사(교리서 1285-1321)

101. 하느님은 또 다른 방법 곧 견진 성사를 통해 우리의 영혼에 힘을 더해 주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부활 이전부터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성령 강림절 날 성령께서 오시어 그들에게 힘을 더해 주시고 장차 어려운 일을 해낼수 있도록 새로운 은총을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겁 없이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했다. 그후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손을 얹어 힘을 더해주었다 (사도행전 8:14-17). 우리도 견진 성사를 통해 인생살이의 영적 도전들에 대처하는 힘을 받는다.

6) 혼인 성사(교리서 1601-1666)

102.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 생활 또는 독신 생활보다는 결혼 생활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느님은 혼인 성사를 통해 부부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시어 인생살이의 어려움에 대처하고 특히 자녀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키우도록 도와주신다. 결혼의 당사자는 신랑 신부만이 아니다. 남녀가 혼인 성사를 받을 때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 결혼 계약의 증인이 되시며 축복해 주신다. 가톨릭 신자의 경우, 하느님은 신부나 부제를 통해 그같이 하시며 이때 신부나 부제는 교회의 증인으로 주례를 한다. 성사적 결혼은 영구히 지속되며 부부중 한 쪽이 죽기 전에는 해소되지 않는다 (마르코 10:1-12, 로마 7:2-3, 1고린토 7:10-11). 이 거룩한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 살아 있는 상징이다 (에페소 5:21-33).

7) 신품 성사(교리서 1536-1600)

103.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특별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사제들의 나라 (출애굽기 19:6)이었지만 주님께서 일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사제직을 맡기셨다 (출애굽기 19:22). 신약 시대에도 교회는 사제들의 나라이지만 (1베드로 2:9), 예수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사제직에 따로 부르신다 (로마 15:15-16). 이 성사를 신품 성사라 부른다. 이 성사로 사제들이 교회에 봉사하도록 서품을 받아 (2디모테오 1:6-7) 목자, 교사, 영적 아버지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먹여주며 북돋아 준다. 그중 제일 중요한 직분은 설교와 성사 집행이다.

8) 병자 성사(교리서 1499-1532)

104. 사제들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아플 때 병자 성사를 통해 돌보아준다. 성경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신부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보 5:13-15). 병자 성사는 병을 잘 견뎌내고 영혼을 정화시키고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시키는 성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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