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4월 3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4월 3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요한3,31-36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 3,31-36)
<우리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수도원에서 먹는 밥그릇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진하게 와 닿은 깨달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수도원은 ‘날개 없는 천사’들만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 수도원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수도원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 희망과 실망이 교차하는 곳, 그래서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이지만,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는 분쟁과 그로인한 상처, 이기심과 죄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한 지나친 기대 역시 금물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해보려고 교회에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일수록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실망도 커집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이런 뼈아픈 체험도 부지기수로 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를 바라보는 교회 공동체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해지기 시작합니다. 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뒤에서 수근 거립니다. 사사건건 딴 지를 겁니다. 왕따를 시킵니다. 다가가도 슬슬 피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성당에 나가지 인간들 때문에 나가나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그것도 한계에 도달합니다.
원인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깜짝 놀랄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주범이 다름 아닌 대자(代子)입니다. 아니면 대녀(代女)입니다. 내가 그를 하느님께로 인도했었고, 신앙의 씨를 뿌려주었으며, 그토록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야말로 하늘이 노랗게 변할 것입니다.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면서 땅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 선포의 일선에 섰었던 사도들 역시 이런 체험을 셀 수도 없이 했더군요.
저는 초대교회 복음 선포, 쉽게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 마다 신자들은 열렬히 환영해주었고, 예비자들의 수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사도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멀뚱멀뚱 소 닭 바라보듯이 관심 없이 쳐다보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겨우 복음의 씨앗을 뿌려놓았지만 때로 결실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신신당부해도 사람들은 과거와 결별하지 못했고, 우상숭배를 계속했습니다.
그중에는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을 교묘하게 이간질시키는 가라지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앞에서는 미소를 짓지만 돌아서면 갖은 험담과 중상모략을 일삼던 사람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을 가로막던 암초 같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 보여준 사도들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들을 음해하는 무리들의 사악한 행동 앞에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상처받지도 않았습니다. 복수하지도 않았습니다.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범인을 색출하고자 기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전과 같이 마음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사도들은 겸손하게 처신했습니다. 관대함과 온유함으로 무장하고 다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분노하는 대신, 슬퍼하는 대신, 실망하는 대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그들 앞에 내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을 설명합니다. 그분을 믿을 것만을 부탁합니다.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독려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사도들을 그토록 변화시켰을까요?
부활 예수님에 대한 강렬한 체험,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분이시고,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실 구원의 샘이란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들에게 있어 예수님만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사명은 스승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고, 스승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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