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성지 - 성 다미아노 성당
프란치스칸 성지 - 성 다미아노 성당
(출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www.ofmconv.or.kr)
아시시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난 성문을 벗어나면 아래로 올리브 나무 밭이 이어진다.
평화로운 햇살 아래 흔들거리는 올리브 나무를 바라보며 그 가운데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래서 정감이 어려있는 집처럼 정겹게 맞이해 주는 다미아노 성당을 발견하게 된다.
다미아노 성당의 기원 및 역사
의사로서 순교한 동방의 두 성인 고스마와 다미아노에게 봉헌된 이 성당은 9세기 또는 10세기에 처음으로 건축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성당은 처음에 베네딕토회 소유였다. 그러다가 1212년 말 또는 1213년 초에 클라라와 아녜스 및 몇몇 동료 자매들이 이 성당으로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1260년 클라라의 자매들이 성녀 클라라 대성당으로 옮겨가고 이 성당은 아시시 주교 참회의 소유로 남게 된다. 다시 1380년에는 바올루쵸 트린치의 옵세르반티 형제들에게 양도되었다가 1604년 개혁파 형제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관구 중심 수도원으로 남게 된다. 16세기에는 수도원 혹장 및 수도원 마당의 건축, 임구 현관 건축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18660년 이탈리아 정부 소유로 넘어갔고 1867년 월 일 형제들은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폐쇄된 기간에는 단 두세 명의 형제들만이 수도원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1879년 리폰의 후작이며 인디에의 총독인 로빈슨 경은 이 성당을 매입하였고, 같은 해 4월 15일자 계약을 통해 개혁파 형제들의 복귀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소유자였던 로티안의 푸작 피터 케르 경은 1983년 9월 22일 이 성당과 수도원이 "기도와 피정의 장소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형제들에게 넘겼다.
프란치스코의 회개 삶의 시작
오상을 받은 라베르나 산이 그의 영적 여정의 마지막이라면 그의 영적 여정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 곳, 다미아노 성당이다.
1205년 늦가을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에서 가까운 폴리뇨에서 돌아오던 중 이 성당에서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하는 도중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영적 투쟁의 길을 시작하게 되는 곳이 바로 이 다미아노 성당이니,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는 뿌리가 닿아 있는 곳이 된다고 할 수 있다.[첼라노 제 2생애 10]
프란치스코는 이제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어느 날 거의 다 허물어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성 다미아노 성당 근처를 걷고 있었다. 그는 성령의 이끄심에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려고 십자가 앞에 겸손하고 경건하게 엎드렸다. ... 십자가에 달리신 고상이 입술을 움직이면서 말을 하였다. 고상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였다.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가서 수리하여라."....
그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대한 애처로움이 그의 거룩한 영혼에 뿌리를 내렸고, 아직 살에는 찍히지 않았지만 경이로운 오상이 그의 마음 속 깊이 찍혔음을 경건히 추측할 수 있다.
성당에 얽힌 이야기들
이 다미아노 성당은 또한 클라라의 자매들의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한 곳이며, 사라센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미 쇠약한 클라라 성녀가 자매들의 부축을 받으며 성체를 모시고 회랑까지 나아가 기도하면서 아시시를 구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포르치운콜라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시신이 죠르죠 성당을 옮겨가는 도중 글라라 성녀가 머물고 있는 이 성당에 멈추어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곳이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지만 1228년 어느 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청으로 클라라가 빵을 축성하자 모든 빵에 십자가가 새겨진 사건을 표현한 두 폭의 프레스코화가 지금도 식당의 벽면에 남아 있다.
"피조물의 노래"가 지어진 곳
오상으로 인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인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세주를 사랑으로 따르는 길에서 오랫동안 단련되어 많은 병과 고통에 신음하는 자기 육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이 멀게 되어 성인은 형제 태양의 빛을 못보고 있었다. 오히려 태양의 빛이 그의 눈에게 아픔을 주었고, 주위의 소리와 소란 그리고 피조물 모두가 그를 괴롭히기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밤을 지내고 나서 성인은 형제들을 불러모은 후에 사랑과 기쁨의 무아경 속에서 그들에게 태양의 노래를 가르쳤을 것이다.
이 곳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러니까 아마도 1225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눈병 치료를 위해 리에티로 떠나기 전까지 이 곳에 머물면서 태양의 찬가의 일부 11-9절 "피조물의 노래"를 썼던 것이다.
[완덕의 거울 100]
그 이튿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기 동료들을 보고 "나는 내 질병과 고통 때문에 기뻐해야 하고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령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언제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큰 영광을 허락하셨고 당신의 보잘 것 없는 종인 나는 아직 이 현세에 살고 있는데도 당신의 왕국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송하며 우리의 위안을 얻고 이웃을 제도하기 위하여 나는 새로운 <피조물의 노래>란 것을 짓고 싶습니다..... 잠시 후 그는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자비하신 주님..."하고 중얼거리더니 그 말에 멜로디를 붙여 자기 동료들에게 암송하여 부를 수 있도록 가르쳤다.
다미아노 십자가
다미아노 십자가는 오랫동안 이 다미아노 성당에 걸려 있었기에 성 다미아노 십자가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십자가는 세기에 시리아 수도자에 의하여 그려진 비잔틴 양식의 이콘이다. 풍요로운 의미가 담긴 이 이콘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과의 모든 신비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이 이콘에는 가시관 대신에 영광의 관을 쓰고 있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영광으로 변모되어 있다.
1205년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주님으로부터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하는 음성을 들었다(2첼라노 10). 그는 즉시 이 성당의 보수에 착수하였고, 이후 성 베드로 성당과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도 보수하였다. 주님의 이 말씀이 교회 재건을 의미함을 그는 나중에 깨닫게 된다. 따라서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에 있어 중대한 전기를 마련해 준 이 십자가는 타우 십자가와 더불어 프란치스칸들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이 십자가는 1260년 성 다미아노의 클라라 자매들의 이전과 더불어 성녀 클라라 대성당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성 다미아노 성당 1층 경당
성 다미아노 성당 1층 식당
성 다미아노 성당 1층 식당 성녀 글라라성녀 자리
성 다미아노 성당 2층 침실
성 다미아노 성당 성녀 글라라의 침실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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