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5/17 연중 제6주간 토요일…양승국 신부님
5월 17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 마르코 9,2-13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르 9,2-13)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야겠다.>
오늘 주님의 변모와 관련된 복음구절을 접하면서 ‘변화’란 주제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평생 변화와 변모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자렛 예수에서 골고타 언덕 위 수난 당하시는 메시아에로의 변화, 인간 예수에서 신성이 깃든 그리스도에로의 변화를 거듭 추구하셨습니다.
변화, 변모, 쇄신...이런 단어를 들을 때 마다 우선 찹찹한 심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그토록 변화되기를, 좀 더 나아지기를 기대해왔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맴도는 제 수도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정말 한번 보란 듯이 변화되고 싶지만 생각뿐이요, 다짐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변화를 꿈꿉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아이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소식보다 반가운 소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주거 이전’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그 메일 하나로 다 날아갈 정도였습니다.
“신부님, 저 기억나세요? 저 **예요. 가출문제로 신부님 엄청 속 썩혀드렸던 **. 돌아보니 그래도 그때가 좋았네요. 신부님, 아직도 제 걱정하시죠? 이젠 걱정 안하셔도 되요. 저도 이젠 정신 좀 차렸어요.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있어서 메일을 드립니다. 올 봄이 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려구요. 약속하신대로 공짜로 주례 서주실거죠?”
사고뭉치중의 사고뭉치, 개구쟁이 중의 개구쟁이 친구였는데, 그래도 붙임성 있고 예쁜 구석이 있던 친구여서 마음을 많이 주었던 친구였는데, 벌써 결혼을 준비한다니 정말 기뻤습니다.
아이가 보내준 메일을 몇 번이나 읽어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려 보여서, 너무 철이 없어서 ‘언제 인간 될까?’ 걱정이 엄청 많았는데, 의젓한 모습으로 변화된 친구의 모습에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변화되기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필수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다 나은 삶에로의 변화를 꿈꾸지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보다 깊은 신앙의 소유자로 탈바꿈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보다 성숙하고 영적인 인간으로 쇄신되기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변화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머물러 있던 틀에서 나온다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입니다. 어제의 나와 결별한다는 것은 여간해서 힘듭니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과거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한 대단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갈고 닦은 수행방법이나 그가 도달한 성덕은 꽤 출중한 것이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큰 뜻을 품고 인간 세성을 떠나 깊은 암자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암담했습니다. 20년 이상 기도와 수행생활에 정진했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20년 이상 노력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했던 나머지, 허송세월했던 지난날이 너무나 아까웠던 나머지 수행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깝고도 아깝도다. 금쪽같은 20년 세월 동안 헛고생만 했구나.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랴? 허망하게도 20년 세월이 물거품이 된 이 마당에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깨끗이 접고 세상으로 돌아가자.”
실망하고 상심했던 나머지 수심으로 가득 긷든 얼굴의 수행자가 막 길을 떠나려 할 때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대가 몸부림치던 그 세월이 바로 그대의 영광이 되었다. 그대가 계속 붙들고 있었던 변화에로의 갈망이 그대를 살렸구나. 이제 그대는 그대가 고민했던 그 세월, 그대가 힘겨워했던 그 세월로 인해 행복해지리라. 그대가 지녀왔던 갈등과 상처 때문에 이제 그대는 자유로워지리라. 그대가 안고 왔던 고민 때문에 결국 그대는 깨달음에 도달하리라.”
비록 오늘 우리 삶이 너무나 하찮아보일지라도 ‘변화에로의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는 우리의 마음처럼 그렇게 빨리 다가오지 않습니다. 회개 역시 전광석화처럼, 번개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랑비처럼 다가오는 것이 변화요 회개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실 주님, 우리를 한 차원 높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주님, 우리의 얼굴을 해맑은 천사의 얼굴로 변모시켜주실 주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길 바랍니다.
“바람이 분다.
운명의 책장들을 넘긴다.
다시 살아야겠다.”
(오세영, ‘책장을 넘기며’ 중에서)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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