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5/18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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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 - 요한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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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3,16-18)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

몇몇 아픈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 제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앓아누워 있던 제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해주시던 모습 말입니다. 용돈에는 꽤 인색한 '짠순이'였던 어머니께서 아픈 순간만큼은 앞뒤 재지 않고 팍팍 쓰셨습니다. 고열에 시달리던 제 머리맡에 앉으셔서 당시 구경조차하기 어려웠던 달걀 프라이라든지 복숭아 통조림을 먹여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꾀병을 앓게 됐는데 그런 때 어머니는 꾀병인지 아닌지를 귀신같이 알아맞히셨습니다. 그런 날 복숭아는커녕 단단히 기합만 받았지요.

저희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 그간 세상에서 받아온 상처가 만만치 않은 아이들입니다. '짠한' 마음에 저희들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그들의 상처입은 날개를 치료해주고 싸매주고자 노력하지만 한계를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이 아픈 순간, 외로워하는 순간, 괜찮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해지는 순간, 그래서 만만한 저희에게 무례함을 느낄 정도로 맹렬히 반항하는 순간에는 저희보다 어머니의 그 섬세함, 부드러움, 따뜻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주어도주어도 더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시 뭔가 아쉽고, 뭔가 모자라는 것만 같아 허전해 합니다.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가련한 우리 인생을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너무나 안쓰러운 나머지 조금이라도 더 사랑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십니다. 그 결과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하느님께서 성삼위(聖三位)로 존재하시는 이유는 보다 완벽하게, 보다 진하게, 보다 강하게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랑이 보다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통합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성과 모성, 인간성과 신성이 잘 조화된 통합된 사랑이 요구됩니다. 결국 그 사랑은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삼위께서는 통합된 사랑, 충만한 사랑의 가장 좋은 모범이지요.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하느님이신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 성삼위께서 동시에 존재함은 결국 우리 인간을 보다 확실하게 구원하시기 위해, 보다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최첨단 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정복하지 못할 신세계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난해한 이치라도 명명백백하게 세상 앞에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삼위 신비는 이를 정의 내리기 위한 숱한 시도들이 계속돼왔지만 아직도 베일에 감추어진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연구할수록, 심사숙고할수록 더욱 애매모호해지고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부족한 인간의 필설로는 도무지 명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비입니다. 인간들이 마련한 잣대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너무도 크신 하느님, 인간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풀지 못할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그 존재가 다 알려지고, 모든 사람들 의식구조 안에 뚜렷하게 형상이 포착된 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겠지요. 더 이상 신앙의 대상도 안 되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해 대상이 아니라 신앙 대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느님, 비록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대상이시지만, 그리고 아무리 기를 써도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시지만, 언젠가 우리 신앙이 더욱 깊어진 그 어느 날, 보다 명료하게 우리 앞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보이실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고 희망하며 우리 부족한 신앙을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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