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5월 21일 연중 제 7주간 수요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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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연중 제 7주간 수요일-마르코 9장 38절 – 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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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8-40)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 4,13)


<연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수용하기 힘든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교리 상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강"이라고들 하지만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죽음입니다. 특히 죽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일 때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참으로 죽음은 베일에 싸인 신비입니다. 뚜렷했던 한 존재가 자취도 없이 침묵과 영원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죽음은 단절 중에서도 가장 큰 단절이자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입니다.

사랑했던 사람과 사별한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 음성, 체취, 미소를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슬픔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긷든 의미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리는 죽음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수렴하는 신비로운 해결사란 것입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서곡입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삶의 연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일종의 이별이지만 막연한 떠남이 아니라 재회를 전제로 한 떠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희망합니다. 결국 죽음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도 있고 죽음이 있어야 영광스런 부활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250년을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삶을 마무리 짓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죽음입니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건너가는 하나의 다리와도 같은 것이 죽음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음의 열쇠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보다 자주 그분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고 일상 안에서 작은 죽음을 거듭할 때 죽음은 우리에게 보다 의미 있는 삶의 한 부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진실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삶에 철저하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이미 최선의 삶을 살았기에 조금도 생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꽃피어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순간마다 과감하게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자아를 획득하게 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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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음 묵상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일상의 삶을 살아오면서,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면서,
언제고, 어디서나 '줄 서기'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줄 서기를 시켜서도 안 되고,
줄 서기를 해서도 안 된다고 배워서 알고 있고 공감도 합니다.

그러나 줄 한번 잘 못 서서 뜨거운 맛을 보고 나면
이것저것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줄을 서지 않으려고 해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줄이 세워져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누구누구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한번 당하고 나면,
스스로 적극적으로 줄을 찾아 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적어도 신앙공동체에는 줄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나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의 잣대로 남을 심판하지 말자.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