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6월 29일 일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양승국 신부님
6월 29일 일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마태오 16,13-19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3-19)
<삶의 재구성, 삶의 재창조>
주님께서 우리 삶에 가장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이 언제인가 묵상해봅니다. 제게 있어 그 시점은 역설적이게도 인생 곡선의 가장 밑바닥 지점, 제로 시점이었습니다.
그간 제가 지녀왔던 허무맹랑했던 기대와 뜬 구름과도 같았던 희망과 최후의 보루라고 여겨왔던 그 모든 신기루들이 다 무너지고 난 다음 순간, 삶의 가장 밑바닥을 체험한 절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주님께서는 슬슬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진, 비참할 대로 비참해진 제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하고 난 순간,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의지할 분,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주님뿐이라는 것을 절절히 확인한 그 심연의 바닥에서야 겨우 하느님 자비의 눈길을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 당대 유다 사회 안에서 촉망받던 젊은이였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앞길이 창창하던 열성 유대교 신도였던 바오로였습니다. 유다인 가운데 유다인, 바리사이파 사람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원로들은 바오로의 탁월한 언변과 출중한 학식, 대단한 문장력을 눈여겨봤습니다. 대중들은 바오로에게서 자신들의 미래를 이끌어갈 큰 지도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면에서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많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오로에게 도저히 용납 못할 일이 한 가지 발생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기고만장하던 바오로를 단칼에 내려치십니다. 순식간에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지속적으로 상승곡선만 그려오던 바오로의 생애는 인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맨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위풍당당하던 바오로,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를 달려가던 바오로, 모든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바오로는 한 치 앞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혈기왕성하던 바오로, 검투사 대회에 나가도 전혀 꿇릴 것이 없을 정도로 강건했던 바오로,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바오로는 이제 도우미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캄캄한 인생을 맞이합니다. 잠시였지만 바오로가 당시 느꼈을 처참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롭게도 바오로는 자신의 인생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바닥에서 쩔쩔매고 있는 바오로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지만 바오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저주하고 박해하던 대상이었던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자, 자신을 비참함에서 구해주실 구원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바오로는 드디어 이렇게 외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장애물로 여겨집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잘나가던 바오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바오로가 이렇게 자신을 공개적으로 낮춥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로마 7, 24).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명명백백히 드러난 자신의 비참한 현실, 그리고 그러한 비참한 현실로부터 자신 스스로 해방될 수 없음을 탄식한 바오로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로마 7,25).
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처절하리만치 견디기 힘든 바닥체험을 시키십니다. 납득하기 정말 힘듭니다.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모릅니다.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합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배짱도 똥고집도 사정없이 짓밟으십니다.
그러한 고통스런 체험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 삶의 재구성, 우리 삶의 재창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뒤틀리고 어긋난 우리 삶의 방향을 되잡아주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만이 내 생의 전부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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