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9/5 연중 제22주간 금요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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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루카 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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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루카 5,33-39)


<물의 영성>

언젠가 아이들과 생태환경교육을 받으면서 물의 흐름을 따라가며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물은 심산유곡의 한 옹달샘에서 시작되더군요. 그 작은 양의 물들이 다른 샘물들과 합쳐지면서 계곡물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내려가니 작은 시냇물로 바뀌었습니다. 내려갈수록 물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강폭이 넓어지면서 유유히 흐르는 멋진 강으로 태어났습니다. 마침내 그 강은 또 흐르고 흘러 큰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순리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돌변하는 나란 인간과는 물은 참으로 다르더군요.

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이 흘러내려가다가 경치가 ‘끝내주는’ 곳을 발견한다하더라도 절대로 거기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갈 뿐이었습니다.

물이 흘러가다가 큰 바위를 만났을 때, “너 왜 거기 서서 내 앞길을 가로 막는 거야? 당장 안 비켜?”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물살의 흐름을 가로막는 큰 바위를 만나면 아무 말 없이 옆으로 비켜서고, 그 바위를 피해서 계속 내려갑니다. 때로 깊은 웅덩이에 잠시 머무르는가하면, 수십 미터도 넘는 폭포수를 타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은 조금도 거기에 연연치 않습니다. 그저 쉼 없이 밑으로 밑으로만 내려갑니다. 오늘 비록 계곡 안에 박혀있는 수많은 돌들로 인해 조금은 소란스럽고, 굴곡 많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좀 더 내려가면 훨씬 편안한 강의 흐름에 합류될 것이고, 더 나아가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손짓하고 계시는 광대한 바다로 나아갈 것을 희망하며 유유히 흘러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자연스러우셨습니다. 마치 물과도 같으셨습니다. 한번 뿐인 삶, 하느님께서 수학여행 차 보내주신 당신의 삶 자체를 즐기셨습니다.

위엄과 거룩함으로 가득한 메시아, 천사와 같은 메시아를 잔뜩 기대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이 컸습니다.

잔치 집에 가면 나오는 음식마다 마음껏 드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포도주도 양껏 드시면서 콧노래까지 부르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팍팍하게, 까칠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너무나 평범한 모습, 너무나 자연스런 모습에 화가 잔뜩 난 그들은 이렇게 따졌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루카 복음사가 표현은 아주 점잖은 표현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먹보’ ‘술꾼’이란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러운 예수님, 자연스러운 물, 우리 인간이 배울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을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을 가로막는 장애물들 앞에서도 마음을 활짝 열면 모든 것은 감사와 경이로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고통 앞에서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창조주께서 표현하시는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보다 자연스러울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기꺼이 자신을 변형시키듯이 말입니다. 나 자신의 불쾌한 점이나 유쾌한 점, 사랑스러운 점이나 고약한 점으로 뒤섞인 나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한결 여유로워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해도 우리에게는 얼마나 과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니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즐기면서 할 줄 알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전지전능한 하느님 자비에 맡기고, 그 신비 속에 풍요롭게 살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개혁할 일이 참 많습니다. 타인의 행동 가운데 바로 잡아줘야 할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교정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나부터 먼저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때로 남을 가르치려는 노력을 그만둘 때, 나 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보다 큰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적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과,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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