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관점에서 본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에 대한 논찬 - 윤민구 신부(수원 교구)
‘실천적 관점에서 본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에 대한 논찬
윤민구 신부(수원 교구)
참고로 이글은 "실천적 관점에서 본 한국 천주교 소공동체" 곽승룡 신부님에 대한 글에 대한 논평입니다.
발제자는 “한국 천주교회의 사목은 대부분 가정과 공동체보다 개인과 단체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가정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말씀과 영성을 중심으로 모이고 기도하고 선포하는 사목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로 발제자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지닌 사명인 복음화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복음화는 결국 삼위일체적인 친교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위해 탈조직적인 친교를 소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또한 발제자는 삶을 중심으로 모이는 본당의 구역․반과 직장 공동체 그리고 신심과 사도직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가 통합적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회 내의 단체나 운동과 소공동체가 서로 연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이미 각 교구에서 본당 사목 구조를 소공동체 사목 형태로 조정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이런 방향에 동의를 표하였으며 아직 조정되지 않은 교구에서도 소공동체 사목 형태로 조정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본당 사목 구조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각기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소공동체 봉사자 선발과 양성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에서도 평신도에게 독서직, 시종직, 종신 부제직을 수여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3-5년의 양성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봉사자들만 교육할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소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앙 공교육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성서와 신앙 진리 공부 그리고 기도 등을 삼 단계로 나누어 공교육하자는 의견도 제기하였다.
한편 발제자는 신심이나 활동 단체들의 특성을 살려 선교 학교, 신앙 복음화 학교와 공동체 학교 그리고 기도 영성 학교를 만들자는 주장도 하였다. 이어서 공동체 사목을 위해 본당 내에서 단체와 사목 협의회 및 소공동체가 네트워크를 이루어야 할 뿐 아니라 전국적인 네트워크도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전국적이거나 교구 단위의 소공동체 연구소를 개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필자는 발제자의 이와 같은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특히 봉사자나 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 본당 사목 구조 조정, 평신도에게 독서직, 시종직, 종신 부제직 등의 직분 수여, 소공동체 사목을 위한 전국적 네트워크 형성 및 소공동체 연구소 설립 등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발제자는 소공동체를 다루면서 매우 중요한 점을 간과한 것 같다. 그것은 소공동체의 내적인 문제로서 어떻게 보면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말하고 발제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려 한다.
먼저 한국 천주교회에서 소공동체 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소공동체 운동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각 나라는 소공동체 운동을 해야 하는 자기 나름의 이유와 목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미나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소공동체 운동을 해야 할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공통적인 것을 살펴 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오늘날 사회-심리적으로 공동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대중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서의 삶을 극복하려 한다.
② 영성적으로 볼 때 얀세니즘(Jansenism) 등의 영향으로 개인주의화되었던 신앙관을 수정하여 구체적 삶 안에서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여 복음의 증거자가 되고 교회의 생명력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생겼다.
③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따라서 신앙 안에 성숙한 삶들을 조직화할 필요가 생겼다.
④ 서품된 사제들의 부족을 들 수가 있는데 특히 전교 지방은 더욱 강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공동체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중에서 ①,②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본당의 대형화로 인해 신자 상호간 교류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타인이나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많고 또 개인 구원에만 몰두하는 신자들도 많다. 그러나 ③,④의 경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는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그 어느 나라 보다 활발하며 서품된 사제가 부족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소공동체 운동을 해야 하는 독특한 이유와 소공동체 운동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원화된 교회론의 극복일 것이다. 이원화된 교회론이란 마치 학교에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듯이 교회 안에서도 성화시키는 자가 있고, 성화되는 자가 있으며, 다스리는 자가 있고,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있다는 식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격히 구별해서 생각해 왔던 과거의 교회론을 말하는 것이다.
본당은 이미 공동체이다. 교회법에서는 “본당은 그 사목이 교구장의 권위 아래 고유한 목자로서의 본당 주임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 내에 고정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이다”(제515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공동체인 본당 안에 다시 소공동체를 두어야 하는 이유는 본당이 비대하다는 외적인 요인 때문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본당 공동체가 수직적이고 중앙 집권적이며, 가부장적이고 획일적이며, 평신도 위주의 공동체이기 보다 성직자 중심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소공동체를 통하여 수평적이고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평신도들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교회 삶을 통하여 성령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공동체를 위하여 발휘하고(1고린 12,9 참조) 교회 안에서 사귐과 나눔과 섬김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냉담자 증가와 미사 참례율 저하 등 한국 천주교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소견으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소공동체 운동을 전개하면서 숲은 보되 나무는 보지 않는 우를 범하는 것 같다. 개별 소공동체가 별로 건실하지 못하고 왕성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잘 살릴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본당 사목 구조 조정을 실시하였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멀리서 보는 숲은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각 나무는 병들어 있는 형상이 되기 쉽다. 개별 소공동체가 건강해야 전체가 잘 되는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교구나 본당에서는 본당 내에 구역과 반을 거주지 중심으로 나누어 놓고 그 반이 소공동체로 바뀌어갈 것을 기대하며 물도 주고 거름도 주는 등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렇게 거주지 중심으로 소공동체를 만들고 그것에 정성을 기울임으로써 그 씨가 잘 자랄 수 있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소공동체는 원초적으로 몇 가지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① 모일 수 있는 시간보다는 사는 곳을 먼저 고려하였기 때문에 우선 모일 수 있는 공통의 시간조차 찾아내기 힘들다.
② 신자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인다고 해도 결국 흥미를 잃게 되기 쉽다.
③ 자발성이 결여되기 쉽다. 그래서 구성원들이 소극적이다.
이 밖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데도 소공동체를 그냥 이런 식으로 지속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소공동체를 조직으로 보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일사불란한 피라미드식의 조직을 생각하다 보니 이렇게 되는 것 같다. 또한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본당 자체도 공동체로 보지 않고 구역으로 보려는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이 구역 중심의 사고에 익숙한 탓일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 해 오던 성직자 중심적 구조를 갖고 획일화하거나 중앙 집권화하려는 성향 때문에 소공동체를 수직적 하부 구조로 보고 이를 통해 신자들을 움직이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성직자들의 조급함 때문일 것이다. 소공동체는 생명이 있는 영적 유기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명을 키우는 데는 기다림이 필요한 법이다. 동물을 보아도, 식물을 보아도 한 번에 자라거나 번식하지 않는다. 소공동체도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하나씩 하나씩 키워가며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번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대부분의 교구나 본당에서는 하루아침에 본당 신자 모두를 구역 즉 주소지 중심으로 나누어 구역 또는 반을 만들고 구역장과 반장을 임명하고는 구역장이나 반장을 중심으로 소공동체를 만들라고 신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조급함은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낳고 소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데 일조하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한 번에 본당의 모두 신자들이 소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인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단번에 소공동체를 이루려고 쏟은 시간과 정성을 소공동체를 서서히 하나씩 둘씩 만들어가는 데 쏟았으면 상당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잠시 공동체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상호 인격적인 수락에 근거하여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그리고 때로는 신앙적인 유대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는 구성원들이 연대 의식을 갖고 동질성, 개방성, 친교, 사랑을 느끼며 연합하고 다른 구성원을 위하는 마음이 깊이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공동체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앙과 거주지가 같은 것 외에는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을 본당에서 일방적으로 묶어 소공동체를 이루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기는커녕 구성원이 모두 함께 모이기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는 가정에서조차 모든 구성원이 한 자리에 함께 모이기가 무척 어려운 법인데 일방적으로 정해진 소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모이기가 어렵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소공동체 구성원 중 한 가정의 한 명씩 대표들만 모여 반 모임을 하는 데도 모이기가 어렵다. 또 어렵게 한 자리에 모인다 해도 공동체 의식을 갖고 마음을 열고 생활을 나눈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소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자발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발성이 결여된 채 타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공동체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 그냥 어떤 모임일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발제자의 말대로 참된 “교회 살기 운동”을 위해서는 소공동체가 중요하고 긴요하다는 것을 알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때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구역(거주지)이 아니라 모일 수 있는 시간이다. 우선 함께 모일 수 없다면 소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슷한 환경이나 신앙 안에서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지 등을 고려하여 소공동체를 이루어 정기적으로 모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먼저 생각하고 난 다음에 거주지를 고려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느 본당이 구성원이 너무 많으면 구역을 넓게 넓게 나누어 그 안에서 앞에서 말한 점들을 고려하여 소공동체를 구성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소공동체에 참여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소공동체가 점차 발전하고 확대하여 나가면서 참여 못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면 될 것이다. 구역․반으로 나누어 소공동체를 이루면 모든 신자가 모두 소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허구이다. 어차피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리고 그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 될 수 있다.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는 소공동체 운동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 단체나 신심 단체 그리고 신심 운동들과의 구별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단체는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공동체 운동이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공동체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활동․신심 단체와 운동 등을 소공동체와 동일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본당 사목이 단체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소공동체가 자발적으로 구성되어 그 삶과 활동이 왕성해지면 자연스레 단체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본연의 모습이란 그 단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본당 공동체를 위해 제대로 발휘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 우선 먼저 해야 할 것은 여러 운동들이 post movement를 최소한으로 줄여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Legio Mariae는 단원의 정예화를 통해 양적 보다 질적 성장을 꾀해 강한 성모님의 군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례 받은 후 얼마 안 되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나가지 못하고 냉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그들이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예비자일 때부터 소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이런 점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각 본당의 현실은 거주지 중심으로 반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이웃에 사는 사람이 전교한 경우가 아니면 예비 신자나 새 영세자가 자신을 성당으로 안내한 사람과 같은 반에서 모임을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소공동체를 구성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 공동체에 들어와 처음부터 공동체 신앙 생활에 익숙하게 되므로 냉담자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적을 관리할 때 모든 가족을 함께 관리하게 되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한 소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소공동체 모임에는 가족 중 대표 한두 사람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교적을 개별적으로 관리하도록 한다면 가족 구성원이 서로 다른 공동체에 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는 것이 된다. 따라서 마땅히 교적을 개별적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거주지 중심으로 소공동체를 구성하고 교적을 관리하게 되면 가족 구성원이 모두 하나의 소공동체에 속해야 된다는 문제점 뿐 아니라 성당에도 나오지 않는 냉담자나 영세는 하였지만 교회를 떠난 사람들까지도 함께 소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문제점도 생기게 된다. 그러나 공동체의 특성상 이런 교회 소공동체는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모든 점에 대한 각별한 연구나 검토 없는 본당 사목 구조 조정이나 전국 네트워크 형성은 소공동체에 많은 것을 무리하게 강요할 수도 있어 자칫 소공동체의 자발성을 더욱 손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소공동체는 아래에서부터 자발적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것이지 위에서 한꺼번에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면 우선 소공동체 모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교재를 개발하는 것이 시급할 것이다.
이와 같은 필자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발제자의 고견을 듣고자 몇 가지를 질문하려 한다.
첫째, 소공동체를 나타내는 용어들은 상당히 다양하다. 세계 주교 시노두스(Synodus)의 주제 발표나 분임 토의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소공동체”, “기초 공동체”, “교회 기초 공동체”, “원초적 공동체”, “그룹”, “자생 그룹”, “교회 그룹”, “소그룹”, “기초적 소그룹”, “크리스챤 기초 공동체”, “교회 소공동체”, “크리스챤 소공동체” 등이다. 그런데 그 용어들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닌 것 같고 소공동체 운동의 배경이나 이유 그리고 목표와 관계되어 그 나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용어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발제자는 “한국 천주교회 소공동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런 용어를 선택한 것인지 설명하여 주기 바란다.
둘째, 이것은 첫째 질문과도 통하는데 한국 천주교회에서 소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소공동체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기 바란다.
셋째, 소공동체 운동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나름의 이유와 목표가 있다면 한국 천주교회형 소공동체 모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이르기 위해 지녀야 할 원리는 무엇이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프로그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좋은 의견 있으면 알려 주기 바란다.
넷째, 거주지 중심으로 신자들을 구역과 반으로 나누고 그 테두리 안에서 소공동체를 이루라고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현재의 소공동체 구성 원리에 대한 발제자의 의견은 무엇인지 밝혀 주기 바란다.
다섯째, 소공동체 봉사자의 양성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당에서 보면 신자들이 봉사자가 되는 것조차 꺼려하는 실정이다. 상명하달식으로 주어지는 일은 많고 신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부족하니까 중간에서 봉사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봉사자들을 잘 교육시킬 수 있는 교육 방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알려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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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Schuster, "Pastoral Theology", in: Sacramentum Mundi Vol. 2, pp. 365-368 참조.
2)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교회 법전을 번역하면서 본당(paroecia)을 “본당 사목구(本堂 司牧區)”라는 말로 의역하여 본당을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사목 지침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본당 사목구는 교구 내에 상설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일정한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교구장의 권위 아래 본당 사목구 주임 사제가 고유한 목자로서 사목하는 지역을 말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 158조).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고 소공동체 운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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