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9/22 연중 제25주간 월요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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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루카 8장 16-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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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카 8,16-18)


<추억의 등불>

등불,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물건이지요. 등불, 말만 들어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전기보급률이 그리 높지 않던 시절, 해가 넘어가면 집집마다 등잔에 불을 붙였습니다.

기름 냄새를 배경으로 라디오에서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오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그렇게 어린 시절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요즘은 그 용도가 사뭇 다릅니다. 피정 집에서, 카페에서, 분위기 잡는데, 아니면 묵상기도 프로그램 진행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전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예수님 시대에 등불은 야간생활에 가장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등불을 사용해보신 어르신들 기억나실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바닥에 두지 않았습니다. 등불을 켜서 서랍 속에 감추어놓지 않았습니다. 침대 밑에 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행동했다면 살짝 맛이 간 사람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등불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높이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올려두는 등경(등잔걸이)이란 것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칭하는 등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하실 때 비밀리에, 비공개석상에서, 끼리끼리, 속닥속닥, 그렇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언제나 타당하고 보편적이었기에, 진실하고, 공정했기에 늘 거침없고 당당했습니다.

이런 그분의 가르침은 속성상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너무나 은혜로운 생명수 같은 가르침이기에 내 안에, 우리 안에만 갇혀 있기에 너무나 아깝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세상 이편 극단에서 반대편 극단까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전해져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상향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좀 더 많은 급여, 좀 더 높은 지위, 좀 더 안락한 생활, 좀 더 많은 권력, 좀 더 풍요로운 인생...

그러나 예수님 삶의 특징은 우리와는 반대로 ‘하향성’입니다.

“높은 곳에서 맨 밑바닥으로, 승리에서 패배로, 부유함에서 가난함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움직이셨습니다.”(칼 바르트)

예수님의 사목의 정점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 그 무력함 가운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곳으로 계속 내려가시고, 그곳에서 끊임없이 탄생하십니다. 아직도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사람이 있는 한 편히 계실 수 없으셔서 끊임없이 하향하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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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눞이 올려져야 하는 '등불'은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제와 함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말씀을 듣느냐 하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알아 들어야 새기고 그리고 또 새겨야 이 말씀을 제 일상의 삶 속에 녹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만 주님의 말씀이 아래로 흘러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오늘 하루...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