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유감’
‘선교유감’
[가톨릭신문 2008-11-16]
지금도 거리에 나가면 목울대를 세우며 ‘예수를 믿으시오’ 하거나 ‘예수천당 불신지옥’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감동도 받지만 대개는 실소한다. 얼마나 절박하면 저럴까 감동할 법도 하지만 이내 뻔한 쇼에 진저리를 친다. 그러니 요즘은 ‘선교’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럽다. 그 말이 자꾸 ‘선전’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최근 감소하는 개신교 신자수에 화들짝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이 연일 원인규명을 위해 다양한 분석을 내놓는다. 이제 좀 바뀌려나, 아니면 적어도 자중하려나했더니 그게 아니다. 묘하게도 문제의 원인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고 있다. 남의 집 일을 뭐라 말할 권한은 없지만 그게 어디 남의 일이기만 한 것인가. 우리도 같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닌가 말이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오늘과 내일의 선교는 좀 달라야 한다. 선교에 대한 개념부터 바꾸어야 한다. 선교를 마치 선전으로 아는 그릇된 발상이 일을 그르치게 한다. 일부 개신교의 선교 자세는 예수라는 그럴듯한 상품을 팔아 이득(?)을 보겠다는 것이어서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한다. 더는 ‘십일조’를 들먹여가며 선량한 신자들을 공포로 몰아넣거나 우롱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축복이 헌금 액수에 달려 있다는 빗나간 자세부터 교정해야 한다.
자꾸 이러다간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갈고 치를 떨 날이 오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아니 벌써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질 않는가. 최근 10년간 개신교의 신자수가 증가는커녕 감소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물불 안 가리고 선전하더니 꼴사납게 되었다.
아무리 목표가 중요하다고 해도 과정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으며, 세속적 권모술수에 다름 아니다. 값비싼 보석을 거리 한 복판 아무데나 내놓고 파는 상술은 우직하다고 하기엔 너무 우매하다. 그것이 진정 보석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내다 팔 순 없다.
진정 귀한 것이라면 더 소중하게 더 의미 있게 다루어야 한다. 헐값으로 매도해선 안 된다. 적어도 세상을 구원하고자 오신 예수님을 전달하는 방식은 그래야 한다. 선교는 로또 하듯이 단번에 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고민 없이 선교하는 방식은 역효과를 부를 뿐이다.
‘바오로 해’다. 우리는 어떻게 바오로처럼 선교할 것인가?
사실 선교열정이 뜨거운 개신교인들에 비해 가톨릭신자들은 지나치게 미지근한 것이 문제다. 자기의 신앙에 대한 자신감부터 찾아야 한다. 나를 믿고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을 삶의 중심으로 되돌린다면 우리의 열기는 충만할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선교사가 되었음을 자랑삼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경을 통하여 선교사 예수님을 배우고, 기도를 통하여 선교적 삶을 청하자.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인 만큼 사랑을 먼저 실천해야 한다.
믿고 안 믿고는 그 다음 문제다. 사랑 빼고 그분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믿으라, 마라 할 자격이 있을까? 우선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사랑부터 실천하자. 그 마음으로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살가운 대화를 건네고,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
과정이 생략된 선교는 마치 에베레스트 산을 걸어서 올라가기보다 리프트로 등산하겠는 것과 같다.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하는 선교는 일시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훗날 독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교회역사가 누누이 가르치고 있다.
일대일 선교도 거리선교도 좋지만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선교는 실천이지 말이 아니다. 가까운 주민과 호흡하는 선교라야 한다. 소외된 이웃은 없는지, 우리만의 전례축제를 넘어 주민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선교는 모두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고, 모두와 함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누는 것이다.
유희석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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