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 2월 8일 연중 제5주일…양승국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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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연중 제5주일 - 마르코 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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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마르 1,29-39)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수도회 인사발령에 따라 최근 새로운 소임지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수련소로 왔습니다. 어떤 수녀님의 권고대로 ‘수련 한번 다시 받는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나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또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솔직히 ‘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진하게 정을 주고받았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뒤고 하고 떠나야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은 정말 큰 것이었습니다. 개구쟁이 꼬맹이들의 그리운 얼굴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형제들, 선생님들, 후원자들, 지인들과의 이별도 아쉽기만 합니다. 그간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바꾸는데서 오는 부담감 역시 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남’을 통해서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6년간의 지난 사목을 정리하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제 삶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 결국 떠남의 순간은 영원한 떠남인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행위이기에 삶의 여러 순간 가운데 아주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떠남은 슬픔과 아쉬움의 순간이기보다는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보다 자주, 보다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며 새로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떠남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언제까지나 한 자리에 집착한다면, 언제까지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언제나 제자리일 것입니다.

떠남의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안주와 편리에 길들여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금 과감히 길 떠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일의 작은 희생과 양보, 기쁘게 물러남, 십자가의 수용 등을 통한 일상적인 떠남에도 보다 익숙해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 역시 ‘길 떠나는’ 구도자이자 선교사로서의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어제와 결별하고, 익숙한 곳과 작별하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운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일손이 필요한 곳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인 떠남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해나가셨습니다.

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엄마 품에 안겨있던 한 갓난아기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았습니다. 저 연약한 것이 이 풍진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걱정도 앞섰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명의 눈부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누군가의 표현이 생각납니다.

“어른들이 지닌 것은 목숨이고 아기들이 지닌 것은 생명이다. 시간과 욕망의 때가 묻어 낡고 비루해진 냄새가 나는 헌 목숨, 연둣빛 잎사귀와 이슬과 대기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햇살이 녹아있는 생명…

그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기 위해 그 누군가의 떠남이 있었음을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난 세대의 물러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결국 지는 것이 다시 피는 것이고 잎을 피우는 것이 또한 지는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기에 정녕 아쉬운 일이지만 떠남의 순간이 있어야만 낯선 것과의 새로운 만남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떠남이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계속 떠돌이 생활만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때로 마음에 드는 훈훈한 가정, 고향 같은 집, 정겨운 가족들을 만나셨을 때 어찌 안주의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보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보다 더 큰 강을 만나기 위해,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 또 다시 길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머물다 가시면 어떻겠냐는 사람들의 간청에 예수님은 언제나 단호하셨습니다. 또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또 다시 새로워지기 위해, 또 다시 길 떠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습관과 아픈 추억을 버려야만 합니다. 다시금 쇄신되기 위해서는 익숙해진 따뜻한 아랫목과 과감하게 결별해야만 합니다.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난’(蘭), 박목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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