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
故 金壽煥 樞機卿
김수환 (金壽煥, 1922년 5월 8일-2009.2.16)은
대한민국의 성직자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 최초의 추기경이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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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수환 추기경
인생 덕목 (人生 德目)
一.말 (言)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 번 생각하고 열라.
二.책 (讀書)
수입의 1%를 책을 사는데 투자하라.
옷이 헤어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三.노점상 (露店商)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四.웃음 (笑)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하고...젊은이를 동자(童子)로 만든다.
五.TV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게 마비 된 바보가 된다.
六.성냄 (禍)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七.기도 (祈禱)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 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기도는 자성(自性)을 찾게하며 만생을 유익하게 하는 묘약이다.
八.이웃 (隣)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 한다.
九.사랑 (慈愛)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는데 칠 십년 걸렸다."
[편집] 유년시절과 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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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그의 부모는 8명의 자녀들이 전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형 김동한(가롤로)와 김수환만이 그 꿈을 이루었다.
김수환의 나이 5살때 경상북도 군위군로 이주하였고 군위보통학교
(지금의 군위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5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김보현은 천주교를 믿다가
무진박해때 충청도 연산에서 잡혀 순교하였을 만큼
집안이 대대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의 집안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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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로 편입하여
계속 학업을 하였다. 1941년 4월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독립투쟁에 더욱 관심을 갖게되었다.
1944년 일본 학병으로 강제 징집 당하여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상지대학에 복학하여
1946년 1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하다가
1951년 9월 15일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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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수환 추기경. 사제품을 받고 난 후 김수환 추기 경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김수환 천주교 추기경의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수록.동아일보 자료사진.
[편집] 사목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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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상북도 안동성당
(지금의 목성동 주교좌성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 천주교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경상북도 김천성당(지금의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 겸
성의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아울러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가톨릭 시보사
(현재 가톨릭신문)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1년 8개월을 활동하는 동안 김 신부는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노력한 결과,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통해
가톨릭 언론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 1969년 4월 추기경 서임식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서
추기경 반지를 받는 모습(로마 베드로 대성전).
(사진=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조선일보 DB)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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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15일, 44세의 김수환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1일 성지여자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김수환 주교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써 아무것도 없었던 마산교구에 발판을 만들었다.
1967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은퇴하자,
1968년 4월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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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상태가
엉망이었으나 김수환 대주교는 혼란을 혁파하고 안정된 행정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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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추기경으로서의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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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7세였고 당시 추기경중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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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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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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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김수환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이래
미국 노틀담 대학, 일본 상지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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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75세가 되던 1997년 김수환 추기경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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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한다고 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쓰여졌다.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되지만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빈민사목위원회를 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재임기간 중에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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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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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서리를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에게 물려주었으나 많은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아직도 사회 곳곳에 그의 영향이 끼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재임 추기경으로서도 명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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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수환 추기경, 86번째 생일잔치. 사진 제공 평화신문
[편집] 최근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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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으로 인하여 고령의 나이에 심신이 쇠약해져
강남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 때,
호흡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했으나 지금은 정상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언제 다시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12분 선종(善終)하시다.
[편집]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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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이시다》(분도출판사, 1981)
《평화를 위한 기도》(1981)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
부디 天國에서 永生을 누리소서
▲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16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김 추기경 시신이 유리관에 안치된 가운데 장례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
◇ 애도문 전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16일 오후 6시 12분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 안에서 선종하셨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통해하는
모든 분들께 위로의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서 김수환 추기경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받아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항상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빛과 희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오셨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김 추기경님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않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치셨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였습니다.
평소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고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대의 성자인 김수환 추기경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친히 주님의 일꾼 김수환 추기경을
거룩한 교회의 목자로 세우셨으니인자로이 굽어보시어,
말과 모범으로 신자들을 보살피다가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이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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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말씀을 가슴에..
남겨주신 말씀을 가슴에 되새기며 살아가는 길잡이로 삼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