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이겨야 하는 이유 /서울교구 사이트에서 옮김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입니다.
사순 제 1 주일 - 자신을 이겨야 하는 이유
초등학교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세상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째는 베짱이와 같은 사람, 즉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부류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개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랍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베짱이가 배고픈 것은 그들이 일을 하지 않은 탓이라 하며 나누기를 거부합니다. 사회에서 있거나 없거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과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꿀을 만들지만 꿀을 먹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초등학생에게나 적합할 이 이야기를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비유가 단순하지만 옳은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이 세 단계의 과정을 차례로 거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고 부모로부터 받기만 합니다. 그 어린아이들은 세상에 큰 도움을 줄 수 없고 오히려 다른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베짱이와 같은 단계입니다.
조금 크면 공부를 하고 일도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직장을 얻고 집 사고 결혼하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이 강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느냐?’, 뭐 그런 삶이죠. 이것이 바로 개미의 삶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숙하면 슈바이처나 마더 데레사 등과 같이 남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단계까지 다다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위인들은 바로 꿀벌과 같은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사실 세상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삶을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비길 만큼 세상에 좋은 것을 남기고 떠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남겨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짧은 삶 안에서도 베짱이-개미-꿀벌로의 삶의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완전하신 분이셨지만 인간이 거쳐야하는 이 단계를 무작정 뛰어넘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베짱이의 삶을 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다른 많은 아이들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란 이름만으로 세상에 피해를 준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 땅에 가서 숨어 살게 됩니다. 부모까지 고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식을 치르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는 혼자 사라져서 부모가 삼일 밤낮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는 정말 세상에 피해만 주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인식을 거치고 서른이 되기까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면서 집에서 조용히 지냅니다. 아마 아버지 요셉의 일을 도와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올만하게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일은 열심히 하셨지만 자신과 가정을 위해 사신 것입니다. 나이가 서른이 될 때까지 당신과 가정에 충실한 개미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꿀벌의 삶을 사셨던 것인 불과 3년이 되지 않습니다. 가정을 떠나서 세례를 받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온전하게 꿀벌의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란 죽고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개미처럼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죽이고 꿀벌처럼 사랑을 자신의 밖으로 향하게 하는 이타적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있어야합니다. 베짱이로 살던 개미로 살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에게마저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아주 어리석인 예가 될 수 있겠지만 하나 들자면, 제가 어렸을 때 한 친구가 사탕을 먹으면서 약을 올리기에 저도 좀 달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저에게 나누어주지 않아서 제가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워낙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동네에는 사탕을 사 먹을 가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사탕 하나가 가장 큰 보물일 수도 있었습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치아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치아가 다 썩어서 한 번에 열 몇 개의 치아를 치료해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어린이처럼만 사셨다면, 또 당신 가정을 위해서만 사셨다면 하느님나라 문은 지금까지 꼭꼭 닫혀있을 것이고 예수님도 어떠한 기쁨과 영광도 받으실 이유가 없으실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뭐 예로 들고 싶지 않지만 굳이 들자면 연쇄 살인범 강호순을 보면 쉽기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종교도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해 통제 불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들도 원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을 자주 경험하기도 합니다.
세례는 사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서 교만과 육체와 욕심과 싸웠습니다. 그 무기는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이렇게 육신을 괴롭힌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짱이의 이기적인 마음은 모든 사람의 세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육체를 죽이다시피 하지 않으면 베짱이의 욕망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기도와 단식으로 자신을 죽인 이후에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실 수 있는 힘이 생기셨습니다. 이 말은 이제 이기적인 인간형에서 이타적인 인간형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유혹은 자꾸 배짱이와 개미형 인간으로 만들어 이기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참다운 자유이고 온전한 자아실현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과 기도로 자신과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복음은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복음이란 바로 당신 자신이 체험하신 자유와 행복이 이 세상에서 이미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처럼 자신을 이기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나라라고 선포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순은 바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예수님처럼 40일간 광야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새로 부활한 우리의 모습은 우리 안에 감추어져있는 참 사랑일 것입니다. 다만 나의 욕망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이번 사순 기간 동안 싸워 이기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만큼 덜 이기적이 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더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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