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세계 병자의 날)…양승국 신부님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세계 병자의 날) - 마르코 7,2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마르 7,24-30)
<강아지라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은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육용임이 확실시됩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는 사랑의 공동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이 공동체 역시 부족한 인간들의 집단이었습니다.
부족한 인간들이 모이다보니 초대교회 때부터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심각할 정도의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성서구절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지요. "구원의 우선권" 문제로 인한 갈등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제 1순위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며, 마침내 우리 동족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이 약속된 민족이다"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염병할! 머릿속에 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잘난 체 하기는. 다들 똑같은 하느님자녀들인데…"
이런 갈등 상황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정통 유다인으로서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고, 구원사업의 제1차 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복음화 및 구원이었습니다. 유다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 구원의 보편성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한 이방 여인의 간청을 즉시 들어주시지 않고 뜸을 들이셨겠습니까?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자녀들"이란 애정 어린 표현을 사용하셨는가 하면,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강아지"라는 표현, 상당한 수치심과 모멸감이 드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상황을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자신 앞에 털썩 무릎 끓고 간절히 청하는 그 가련한 여인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오로지 한 마음뿐입니다. "즉각적인 응답", "간절한 소원에 대한 즉각적인 성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템포 늦추십니다. 여인의 신앙을 자극하십니다. 여인의 신앙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리십니다. 더욱 강렬한 것으로 만드십니다.
그 결과 여인을 간절함과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확고한 신앙고백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로워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하지만 결국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보다 한 차원 높은 신앙에로 인도하십니다.
*** 이 양승국 신부님 매일 묵상글은 가톨릭 인터넷 굿 뉴스 오늘의 묵상 방에서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방에 가시면 매일 풍성한 묵상글을 올려주시는 많은 분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로 접속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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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말씀과 삶의 자리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이제는 막다른 골목까지 왔다.
이제는 절박함이
엎드리고,
메달릴 밖에 별 다른 방도가 없다.
어떻게 엎드리고,
어떻게 매달러야 하나?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일 하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면서 하루를....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