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과 관련있는 역사
성모님과 관련있는 역사
30년/ 50년 사도들의 설교(사도2,14-21, 3,12 13,15이하)들은 마리아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또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 대한 내용도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마리아는 팔레스티나의 모든 신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2) 예수의 생애에 끼친 마리아의 주요 임무는 이미 탄생과 유년 시절부터 끝났다. (3) 일반적으로 유대 여인의 역할은 항상 과소평가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인 특성이 사도들의 설교에서 마리아와 예수의 지상생활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54년/ 57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적 설교 가운데에서 마리아를 처음으로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갈라4,4).
65년 성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를 묘사한다(3,31 이하, 6,3).
70년/ 80년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 성서의 예언 말씀에 따라(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포함하여) 예수께서 탄생하셨음을 말하면서 마리아를 소개하고,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는 마리아임을 설명한다(1,16-23;2,11).
70년/ 80년 복음사가 루가는 주님의 종, 시온의 딸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가장 충실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마리아를 묘사한다(1,38,48;2,19,51,11;28).
90년/ 100년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삶과(2,1-11) 죽음에서(19,25) 일치되어 있는 마리아, 그리고 당신의 제자에게 맡겨드린 마리아를 묘사한다(19,26-27).
90 년/ 100년 묵시록은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이미지를 그녀의 굳은 신뢰심, 깊은 믿음, 교회적 임무, 그리고 특별한 은총에 집중하여 묘사하고 있다. 마리아는 어느 누구도 받지 못한 은혜를 받았고, 예수를 낳은 위대한 종이다(12,1-17).
100년/ 200년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에서 발굴된 어느 묘비명에는 죽은 사람의 중재자와 보호자로서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110년/ 115년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는 마리아를 동정녀이자 어머니라고 다섯 차례나 언급하였다.
120년 솔로몬의 송시(訟詩)는 아기를 낳은 동정녀를 언급하고 있다.
145년 아테네의 아리스떼네스는 마리아를 신경(信經) 형태로 인용한다.
150년/ 200년 히에로폴리스의 주교 아베르치오의 비문에는 마리아의 동정, 성성 그리고 성체와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150년 순교자 성 유스티노는 사상 처음으로 마리아께 대한 글을 썼다. 그는 하와와 마리아를 비교하는 예표론(豫表論)을 사용하였다.
150년 야고보의 원복음서는 마리아께만 독자적인 관심을 보이는 첫 번째 과업이다. 이것이 소위 "마리아의 복음서"라고 불린다.
150년/ 202년 리요의 성이레네오는 마리아가 구원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기록하였다.
162년 시빌의 예언은 마리아를 격찬하며 언급한다.
200년 이전 처음으로 그린 마리아 성화가 등장했다. 이 성화는 까따꼼바에 그려져 있었다.
200년/ 300년 기록된 마리아 기도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SUB TUUM PRAESIDIUM)가 사용되었다.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를 강조한다.
200년/ 300년 희랍, 히브리, 아라마이어,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이나 언어로 발견된 묘비명을 보면 마리아 신심이 그 당시에 이미 실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00년 "동정녀의 죽음"이란 책이 나왔다. 이것은 마리아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내용으로서 시리아어로 기록되었다.
217년 뜨라스떼베레의 산따 마리아 성당이 로마에 세워졌다.
250년 카르타고의 성 치쁘리아노는 신자들이 마리아께 대해 가져야 할 신뢰심을 역설하고, 마리아의 동정을 찬양하였다.
300년 "아카티스토스 찬미가"가 동방 교회 안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350년/ 400년 콘스탄티노블에서 가발라의 세베리아노 주교가 마리아께 기도하라는 공식 서한을 발표하였다.
350년/ 370년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가 성모송의 원형이 되는 마리아 기도를 중동 전역에 전파시켰다. 또한 그는 성 그레고리오 기적 행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성모의 첫 번째 발현기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350년/ 370년 성 에프렘은 마리아의 중재자적인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간구하라고 하였다.
350년 성녀 유스띠나가 성모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최초의 기도문으로 기도하였고, 훗날 이 내용을 성 요한 크리소스ㄸ이 기록에 남겼다.
352년/ 366년 산따 마리아 마죠레 성당이 교황 리베리오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370년 최초의 마리아 전례가 시리아에서 완성되었다.
370년 성 암브로시오는 마리아를 여성의 모델이요 교회의 원형이라는 신학 이론을 정립하였다.
392년 교황 성 시리치오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옹호하였고, 이를 아니시오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역설하였다.
394년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지 않았음을 선언했고, 동정녀이자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신분을 찬양하였다.
400년/ 500년 프랑스의 소와쏭에 있던 이시스 신전이(에집트의 여신을 모시던 곳) 복되신 동정 성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400년/ 500년 동정 성 마리아 기념 축일이 유럽의 여러 지방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400년/ 500년 성모 영보 축일이 콘스탄티노블에서 거행되었다.
400년/ 500년 그리스도와 시메온의 만남(히빠빤떼) 축일이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400년 "마리아의 죽음"(TRANSITUS)에 대한 최초의 책이 기록되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께 "천주의 모친"(테오토코스, THEOTOKOS) 칭호를 드렸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의 공로가 컸었다.
432년 로마의 산따 마리아 마죠레 성당을 복구하면서 더 크게 확장하여, 교황 식스또 3세가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440 년/ 461년 마리아가 미사 경본 속에 도입되었다. 레오 예식서에 보면 성 레오 교황이 미사 전문 부분에 마리아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천주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를 모시고 공경해야 한다..."
451년 칼체돈 공의회는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호칭하였다.
451년 비쟌시움의 황녀 뿔케리아는 마리아의 유품을 수집토록 하였다.
470년 살로니카 대성당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500년/ 600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파르테논 신전이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500년/ 600년 로마의 산따 마리아 안띠그마 성당이 봉헌되었다.
520년/ 556년 시리아 시인 성 로마노 멜로디스타가 마리아 찬미가 4개를 지었다.
534년 요한 2세 교황은 콘스탄티노블 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마리아는 "참으로 좋으신 모친"이시다고 선언하였다.
543년 예루살렘의 성 마리아 성당이 봉헌되었다.
550년/ 600년 리비아스의 주교 테오테크노스가 마리아 몽소승천에 대한 믿음을 역설했다.
550년 성모 성탄, 에수 봉헌 그리고 성모님의 서거 축일을 비쟌시움에서 거행하였다.
550년 희랍 철학자 에쿠메니우스(UECUMENIUS)가 묵시록 12장을 마리아적으로 주석한 최초의 인물이다.
553년 콘스탄티노블 제2차 공의회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 교의를 재삼 확인하고,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역설하였다.
600년/ 800년 위 마태오 복음서가 서방에 출현하엿다.
600년/ 700년 마리아적인 응송인 "아베 마리스 스텔라"(AVE MARIS STELLA, 바다의 별이여)가 등장했다.
600년/ 650년 봉헌 축일(2월 2일)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는데, 마리아적인 성격보다는 그리스도적인 축일로 지냈다.
600년/ 636년 서방 교회의 마지막 교부인 세빌레의 성 이시도로가 마리아에 대한 것을 세밀히 기록하였다.
610년 비쟌틴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마리아 성화상을 자기 함대의 상갑판 큰 돗대 아래에 모셨다.
649년 라떼란 회의(만국 공의회가 아님)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선언하였다.
650년/ 675년 성모 영보 축일(3월 25일) 이 로마에서 거행되었으나, 마리아적인 성격보다는 그리스도적인 축일로 지냈다.
650년 성모 몽소 승천 축일(8월 15일)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이때부터 마리아적인 주요 축일로 변화되었다.
675년/ 700년 성모 성탄 축일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다(이 축일은 5세기 이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모 성탄 성전 봉헌에서 유래한다).
680년/ 681년 콘스탄티노블 제3차 공의회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재확인하였다.
700년/ 749년 동방교회의 마지막 교부인 성 요한 다마스체노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당대 최고의 가르침으로 역설하였다.
700년/ 740년 크레타의 성 안드레아는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 간구하였다.
700년/ 733년 오세르의 성 제르마노는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을 찾는다"(SEEK GOD THROUGH MARY)는 사상을 확립하였다.
705년/ 707년 교황 요한 7세는 "천주의 모친의 종"이라고 불렸다.
750년 "테오필로의 전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는 마리아 성화상에 드리는 공경을 인가하였다.
800년/ 900년 성녀 안나의 잉태 축일이 비쟌시움에서 제정되었다.
800년/ 900년 마리아의 잉태 축일이 서방 교회 안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800년 성모 성탄 복음서가 출현하였다.
804년 이전 베네딕또회 수도자인 알퀸이 토요일에 성모 미사를 드렸고, 875년에 미사 경본의 일부로 수록되었다.
845년/ 860년 성 빠스카시오 라드베르또는 동정 출산, 승천(영혼만) 그리고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지지하였다.
851년 이전 "마리아의 탄생 이야기"가 나왔는데, 성 빠스카시오 라드 베르또의 공로인 듯 하다.
869년/ 870년 콘스탄티노블 제4차 공의회는 "마리아 성화상에 드리는 공경" 승인을 재확인하였다.
876년 까를르 볼드가 마리아의 성의로 믿어지는 옷을 획득하였다.
900년/ 1000년 응송 "레지나 첼리"(천상의 모후여, REGINA CAELI)가 나왔다.
900년/ 1000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소성무일과"가 나왔다.
900년/ 1000년 마리아께서 이 세상을 지나 승천하셨다는 내용의 책인 "뜨란시뚜스"(TRANSITUS, 통과 혹은 죽음이란 뜻)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945년 "자비의 어머니"란 호칭이 서방 교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살레르노의 요한이 "오도의 생애" 속에 언급한 이후부터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975년 토요일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976년 몽세라 대수도원이 스페인에 건설되었는데, 이곳이 차츰차츰 유명한 마리아 경당으로 변모하였다.
1000년/ 1100년 마리아의 공동 수난 축일(MARY'S COMPASSION)이 도입되었다.
1000년/ 1100년 "아베 레지나"(AVE REGINA, 하늘의 영원한 여왕)가 나왔다. 이 찬미가는 중세 신자들의 마리아 신심을 가장 올바르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000년/ 1100년 노틀담 드 ㅅ트르 대성당이 착공되었다.
1000년 베네딕또회 수녀인 간데르샤임의 흐르스비다가 "테오필로의 전설과 야고보 복음서"에 대한 시를 썼는데, 그녀는 마리아를 하늘의 강력한 여왕으로 묘사하였다.
1050년/ 1150년 응송 "알마 레뎀또리스 마뗄"(ALMA REDEMPTORIS MATER,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이 나왔다. 헤르만 불구자의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1050년/ 1093년 켄터버리의 성 안셀모가 성목게 관한 감동적인 글을 썼는데, 이 책속에는 유명한 기도문이 세 개 들어 있었다. 이 책은 중세 시대의 크리스챤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050년/ 1072년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미사 성제와 마리아의 합일점을 모색하였고, 소성무일과를 만들었다.
1080년/ 1124년 에아드밀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를 저술했는데, 교리의 구성이 당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1100년/ 1200년 "마리아의 생애"가 서방으로 퍼져나갔다.
1000년/ 1200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호칭 기도(LITANY)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100년/ 1150년 성모송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제2부(천주의 성모 마리아여...)는 15세기에 추가되었다.
1100년/ 1150년 가장 큰 마리아 모자이크가 이탈리아의 또르첼로 대성당에서 제작하였다.
1100년/ 1135년 독일의 베네딕토 회원인 루페르또가 아기를 성모 마리아께 적용시켜 해석한 첫 번째 인물이다.
1120년/ 1130년 에버샴의 도미니꼬는 "복되신 동정녀의 기적"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1120년 안셀모(젊은)는 마리아께 대한 기적 이야기들을 집대성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적"이란 대중적인 책을 펴냈다.
1130년 잉글랜드의 월싱햄에 성모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1140년 베네딕또회 역사가인 윌리암 말메스부르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적"이란 책을 저술했다.
1150년/ 1164년 쇼나우의 성녀 엘리사벳은 마리아께서 임종하는 장면이기 보다는 하늘로 올라가는 환시를 보았다. 그 이후 중세의 화가들은 성모 승천을 힘차게 그려내었다.
1150년 서방 최초의 성모 승천 그림이 프랑스의 상리스 대성당에 걸렸다.
1150년 마리아를 기리는 라 마르또라나 성당이 팔레르모에 세워졌고, 아름다운 성모 승천 그림을 전시하였다.
1160년/ 1205년 리옹의 노틀담 성당에 세워졌다.
1163년/ 1235년 빠리의 노틀담 성당이 세워졌다.
1194년/ 1220년 샬트르 성당이 세워졌다.
1200년/ 1250년 꾸탕스 성당이 세워졌다.
1200년 망트이 노틀담 성당이 세워졌다.
1215년 라떼란 제4차 공의회는 마리아의 신적 모성과 동정모성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알비파 이단과 기타 다른 이단들을 대항하여 가톨릭 신앙을 재확인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1920년 아미앙의 노틀담 성당이 세워졌다.
1223년/ 1224년 하이스텔바하의 체살은 "기적들의 대화"속에서 말하기를 마리아께서 당신의 망토로 씨토 수도자들을 보호하신다고 주장했다.
1230년/ 1280년 성 알베르또(대)는 마리아께 관한 놀라운 책을 펴내고, "교회의 어머니"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1250년/ 1300년 익명의 책인 "마리알레 수미쑤스 에스트"는 마리아의 영적, 현세적 선물에 대하여 엉뚱한 주장을 하고 나섰다.
1250년/ 1274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마리아께 대한 신학적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과장되고 조잡스런 모든 내용들을 제거하였다.
1250년/ 1274년 성 보나벤뚜라가 마리아께 드리는 공경을 상경지례(히뻬르둘리아)란 단어로 표현한 첫 번째 인물이다.
1251년 성 시몬 스톡크가 마리아로부터 스칼폴라를 받았다.
1260년/ 1306년 야꼬뽀네 다 또디가 마리아적인 가르침이 풍부한 찬미가를 썼고, 특히 스타발 마뗄(STABAT MATER, 십자가길의 성모) 찬가를 노래햇다.
1260년 샬트르의 노틀담이 봉헌되었다.
1260년 치마부에가 플로렌스이 산따 뜨리니따를 위해 마돈나를 그렸다.
1265년/ 1308년 복자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확립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첫 번째 인물이다.
1269년 안젤루스(삼종기도)가 대중적인 신심으로 널리 퍼졌다.
1274년 리용 제2차 공의회는 천주 성자가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셨다고 선언하였다.
1278년/ 1350년 플로렌스의 산따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 세워졌다.
1280년/ 1300년 5월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관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7세기-9세기에 있었던 동방 교회의 관습이었다.
1296년 "거룩한 집"(마리아의 생가)이 로레또에서 발견되었다.
1296년 플로렌스의 산따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이 착공되었다.
1300년/ 1400년 마리아의 봉헌 축일이 제정되었다.
1300년 마리아의 띠에 대한 전설이 서방에 퍼졌다.
1314년/ 1321년 단떼는 자신의 신곡에서 마리아 신학을 노래했는데, 특히 그는 성모님께 특별한 영예와 영광을 드렸다. 그는 과연 "마리아의 최고 시인"이었다.
1326년 오리엘 대학이 옥스포드에 세워지고,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1340년/ 1373년 스웨덴의 성녀 브리짓다는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다. 이 사건은 그 당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55년 누렘부르그의 산따 마리아 성당이 건립되었다.
1372년 봉헌 축일이 서방에서도 제정되었다.
1376년/ 1383년 마리아의 스카폴라 축일이 제정되었다.
1379년 산타 마리아 대학이 옥스포드에 세워졌다.
1384년 5세기 내지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님의 성화상이 폴란드의 체스토코바에 안치되었다.
1389년 성모 방문 축일이 승인되었다.
1400년/ 1500년 메모라레(MEMORARE) 기도문이 작성되었다.
1400년/ 1450년 요한네스 헤롤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적"을 썼다.
1409년/ 1411년 요한 리드게이트가 "성모의 생애"를 저술하였다.
1410년/ 1444년 토마스 아 켐피스는 "준주성범"에서 강조하기를, 영성생활에서 마리아께 의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썼다.
1420년/ 1447년 꼬르비의 성녀 꼴레뜨가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다.
1423년 마리아의 통고 축일이 제정되었다.
1438년/ 1445년 플로렌스 회의는 천주 성자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사람이 되셨음을 굳게 믿는다고 선언하였다.
1439년 바젤 공의회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정의했다(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이 공의회를 거부한 뒤부터는 다만 암시적인 의미만 있었다).
1440년 마리아께 봉헌된 이튼 대학이 세워졌다.
1457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소성무일과"가 인쇄되었다.
1470년/ 1471년 마르띠노 숑가우어가 마리아의 일생을 조각하였다.
470년 도미니꼬회원인 알란 루포는 "마리아 시편 기도서"를 펴냈는데, 마리아께 드리는 로사리오의 힘을 지지하였다.
1475년 첫 번째 로사리오회가 창설되었다.
1492년 신세계의 신자들, 곧 콜럼부스와 산 살바돌호의 승무원들이 맨 처음으로 기도드린 것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여왕이시며)이다.
1495년 로사리오 기도가 교황 알렉산델 6세로부터 승인되었다.
1496년/ 1501년 미켈란젤로가 최고의 걸작 삐에타를 완성하였다. 임종하신 아들 예수를 당신 팔로 안고 계시는 어머니 마리아는 모든 고통의 상징이었다.
1500년/ 1510년 알브렉트 듀러가 그리스도의 일생 목판화를 제작하였다.
1507년 로레또 경당의 순례가 승인되었다.
1518년 띠시아노가 베니스의 프라리에서 성모 승천을 그렸다.
1531년 복되신 동정녀가 과달루페에서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셨다.
1538년 월싱헴의 성모 경당이 파괴되었다.
1543년 마르틴 루터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긍정하였다.
1547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마리아와 관련되는 교리를 재확인하였다. 특히 마리아는 본죄까지 없다고 하였다.
1550년/ 1617년 프란치스코 수아레스가 마리아론을 최초로 체계화시켰으며, 자신의 전집(OPERA OMNIA) 9권에 수록하였다.
1555년 바오로 4세 교황은 당신의 사도적 헌장 "꿈 궈룸담"에서 마리아의 동정은 그리스도 탄생 전, 후에도 계속되었음을 선언했다.
1558년 로레또의 성모 호칭기도(LITANY)가 발간되었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마리아의 성화상 공경 허가를 재확인하였다.
1563년 성모송이 성무일과에 도입되었다.
1567년 교황 성 비오 5세는 마리아의 무죄하심을 확인하였다.
1573년 동정녀의 대망 축일, 승리의 모후 축일, 그리고 로사리오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577년 성 베드로 가니시오가 "비길 데 없으신 동정 마리아"를 저술했는데, 소위 말하는 종교 개혁 이후에 나온 최초의 마리아론적 작업이다.
1600년/ 1700년 통고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600년/ 1629년 "프랑스 영성 학원"의 창설자 피에르 드 베률이 마리아 신심을 일신시켰다.
1601년 복되신 동정녀의 호칭기도를 전 교회가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은 교황 클레멘스 8세의 공로이다.
1630년/ 1657년 슐피스회의 창설자 요한 쟈크 올리엘은 마리아적인 개념을 표현하는데 신비적인 언어를 사용하였다.
1644년 마리아의 티없이 깨끗한 성심 축일이 제정되었다.
1670년 마리아 데 아그레다가 쓴 "하느님의 신비스런 나라"가 그녀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1680년 성 요한 에우데스가 마리아 성심에 관한 장문의 책을 처음으로 발간했는데, 그 제목은 "훌륭한 마리아 성심"이다.
1683년 성모 성명 축일이 보편 교회로 전파되었다.
1690년 교황 알렉산델 8세가 마리아의 완전한 무죄를 옹호하였다.
1716년 로사리오 축일이 전 교회로 확산되었다.
1716년 알렉산델 드 루비이유가 준주성범을 본떠서 "마리아를 본 받아서"를 간행하였다.
1726년 가르멜산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750년 성 알퐁소 리구오리가 "마리아의 영광"을 간행했는데, 이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1754년 과달루페의 성모가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언되었다.
1815년 "신자들의 도움"이란 호칭이 성모 호칭 기도에 추가되었다.
1815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824년 가타리나 에머릭크가 에페소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에 대한 환시를 보았다.
1830년 성모님께서 성녀 가타리나 라부르에게 발현하시고, 기적의 메달을 제작하라고 하셨다.
1836년 요한 끌로드 꼴랭이 마리아 신심회를 세웠다.
1842년 루도비꼬 마리아 그리니옹 드 몽포르가 쓴 "참된 신심"이 발견되었다.
1845년 뉴만 추기경이 마리아의 올바른 신심을 옹호하였으나 다소 지나친 데가 있었다.
1846년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가 미국의 수호자로 선언되었다.
1846년 성모님이 라 살레뜨에서 발현하셨다.
1849년 비오 9세께서 마리아에 관한 최초의 교서 "우빕브리몸"을 반포하시고,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를 강조하였다.
1854년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교리가 성대하게 선포되었다. 이때 교황 비오 9세는 "이네파빌리스 데우스"를 반포하였다.
1858년 성모님이 루르드에서 성녀 베르나뎃따에게 발현하셨다.
1871년 성모님이 퐁멩
1875년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이 금지되었다.
1879년 카나다 케이프의 성모 경당이 세워졌다.
1879년 성모님이 아일랜드이 녹크에서 발현하셨다.
1883년/ 1902년 "로사리오의 교황" 레오 13세께서 로사리오와 마리아께 대한 교서를 11개나 반포하셨다. 이때 표현된 마리아의 주요 호칭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 "구원받은 자들의 어머니" "신앙의 수호자"등이다.
1883년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여"란 호칭 기도가 성모 호칭 기도에 첨가되었다.
1890년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을 표현하였다.
1900년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선언되었다.
1904년 교황 성 비오 10세는 교서 "ㅇ 디엠 일루드"를 반포하시고, 은총의 중재자이신 마리아 신학의 기초를 계발하였다.
1907년 루르드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1913년 워싱톤 D.C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경당의 주춧돌을 놓았다
1917년 성모님이 파티마의 세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다.
1918년 교령 "순트 궈"에서 성청은 마리아를 "공동-구속자"로 부르는 관습을 옹호하였다.
1918년 사도적 서한 "인뗄 소달리치아"에서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그리스도의 구원적인 희생에서 수행한 마리아의 역할을 역설하였다.
1921년 레지오 마리애가 더블린에서 창설되었다.
1923년 사도적 서한 "엑스플로라따 레스"에서 교황 비오 11세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역할을 확인하였다.
1927년 "사제이신 마리아" 신심이 금지되었다.
1931년 성모의 신적 모성 축일이 제정되었다.
1932년/ 1933년 성모님이 벨지움의 보렝에서 발현하셨다.
1933년/ 1934년 비오 11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공헌을 언급하였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뿐만 아니라 갈바리아에서도 천주의 모친으로서 모성을 수행하였다고 강조하였다.
1937년 성모님이 벨지움의 바뇌에서 발현하셨다.
1941년 아무런 의무감없이 메달을 지니고 은혜받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비난받았다.
1942년 비오 12세는 파티마에서 말씀하신 성모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온 세상을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다.
1943년 "미스띠치 꼬르뽀리스" 칙서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인간 구원에서 드러난 마리아의 역할을 설명하고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모후되심을 설파하셨다.
1944년 티없이 깨끗한 성모 성심 축일이 제정되었다.
1946년 교황 비오 12세가 교서 "데이파래 비르지니스 마리애"를 반포하여 승천을 설명하였다.
1947년 교사 "메디아똘 데이"에서 비오 12세 교황은 전례상의 마리아를 설명하였다.
1950년 마리아해(年)가 선포되었다.
1950년 성모 승천 교리가 선포되었다. 이때 비오 12세는 "무니피첸디시무스 데우스"를 반포하셨다.
1950년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 호칭이 성모 호칭 기도에 추가되었다.
1951년 비오 12세는 교서 "인그루엔시움 말로룸"을 반포하고, 로사리오의 영적 힘을 역설하였다.
1953년 시실리 시라쿠제의 무염 성모 석고상이 눈물을 흘렸다.
1954년 교서 "풀젠스 꼬로나"에서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무염시태 확장 백주년을 기념하는 성모의 해(年)을 선포하셨다.
1954년 교서 "앗 첼리 레지남"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여왕이신 마리아"를 선포하고, 축일을 제정하였다(8월 22일).
1957년 교서 "펠레리나제 데 루르드"로 비오 12세 교황은 루르드의 성모 발현 백주년을 기념토록 하였다.
1959년 교사 "그라시아 레꼬르다띠"에서 요한 23세는 마리아를 "전 인류를 위한 구원의 원인"이라고 불렀다.
1964년 바티칸 제2차 공의회는 교회 헌장 제8장에서 처음으로 마리아에 관한 공의회적인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제시하였다. 공의회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가운데 계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였다.
1965년 교서 "멘세 마요"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5월에 성모성월을 충실히 지낼 것을 권고하셨다.
1967년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 50주년을 즈음하여 바오로 6세 교황은 사도적 권고 "시늄 마늄"을 반포하시고, 마리아 신심의 의미와 목적을 재강조하셨다.
1969년 바오로 6세의 로마 미사 경본이 간행될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가운데 담당하는 마리아의 역할에 근거하여 마리아 관계 축일이 조정되었다.
1970년 시과경이 간행될 때에도 마리아 관계 축일이나 기타 기도문들이 조정되었으나, 마니피캇, 마리아적인 응송, 찬미가 그리고 독서들은 오히려 늘어났다.
1973년 미국 주교회의는 사목 교서 "당신의 어머니를 보시오"를 발표하여, 마리아의 위치를 재확인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친께 대한 전통적인 애정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197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사도적 헌장 "마리알리스 꿀뚜스"를 반포하시고, 전례적인 마리아 신심, 대중적인 마리아 신심 등을 재확인하셨다.
1975년 로마 미사경본 개정판 속에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모 성명" 미사가 기원 미사로 포함되었다.
1978년 크라코우의 대주교 카롤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라 칭하고, 당신의 교황 재위 기간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교황은 모토는 "오 마리아여, 모두 당신의 것 입니다"이다.
1980년 "천주의 모친"이란 호칭이 성모 호칭 기도에 추가되었다.
1981년 경신성성이 성모님의 새로운 호칭 기도를 반포하였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파티마를 방문하고, 온 세상을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봉헌하였다.
198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구세주의 모친"을 발표하고, 성모 성년을 반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