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Baptist Church)

침례교 (Baptist Church)
가) 형성
성인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의 여러교파를 지칭하는 말이다. 침례교는 17세기 초 영국의 스미스(1552-1612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스미스는 그의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영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하였는데, 그곳에서 메노나이트(Mennonite)의 영향을 받고 유아세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스미스의 영향을 받아 유럽과 미국 등지에 많은 침례교회들이 생겨났다.

나) 분파
침례교에는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일반 침례파(General Baptist), 이에 반대하여 선택된 소수만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특수 침례파( Particulr Baptist), 신앙에 의해 극단적인 치유를 주장하는 자유주의파(Liberalist), 성서의 자구적 해석을 주장하는 근본주의파(Fundamentalist) 등이 있다.

다) 기독교 한국 침례회 연혁
- 대한 기독교회 : 188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독립선교사로 파송된 말콤 펜윅이 내한하였다. 한국에 온 그는 서울, 솔내, 원산 등지로 전전하다가 1893년에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미국 북침례교회의 목사이며 부흥전도사인 고돈 목사와 교분을 갖게 되었으며, 침례교의 신앙이 성서적이며 복음적이라 확신하고 침례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캐나다에 체류하는 동안 1894년 한국 순회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189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펜윅은 원산에 자리잡고 선교사업을 계속했다.
1901 년 재정난으로 한국에서 철수한 엘라 씽 기념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충남 공주, 강경 지방의 사업을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순회 선교회와 병합하였다. 그후 문서 전도자들을 각처에 파송하여 사업을 확장하다가 교회수가 31개로 늘어나자 교단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06년에 충남 강경에서 교단대회를 소집하고 46개조의 교규와 더불어 대한 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대한 기독교회의 조직구조는 감목정치치리에 의한 중앙집권적 권위체제였다. 전교인들은 감목인 펜윅 선교사를 필두로 한 하나의 교회로 조직되어 감목의 지도 아래 있었다. 모든 직분은 감목에 의하여 임명되고 각 지역으로 파송되었다. 어떠한 특정교단적 색체의 성향은 전혀 배제되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신약성서적 회중의 개념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 동아기독교회: 1921년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회에서 ’동아기독교회’라 변경했다. 이는 일제가 ’대한’이란 명칭을 이 땅에서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대한’의 명칭을 사용치 못하게 강압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 동아기독대 : 1933년 펜윅 선교사에 의해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대’라 변경하였다. 당시 교회는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날로 속화하여 가고 기독교 이외에도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므로 교회의 성별(聖別)을 강조하는 뜻에서 ’회’ 대신에 양무리를 뜻하는 ’대(隊)’로 변경하였다.

- 동아기독교 : 1940년에 ’대’라는 명칭이 군대를 뜻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당국의 주목을 받는다하여 ’대’ 대신에 다시 ’교’로 바꾸어 동아기독교로 변경했다.

- 교회해산 : 1944년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했다. 동아기독교의 교인들은 황궁요배를 거절하고 신사참배를 거역한다고 하여 33인의 목회자를 투옥했으며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방기금으로 헌납하고 동아기독교를 강제 해체시켰다.

- 대한기독교 침례회총회: 1946년 남한에 남아있던 소수의 교단 지도자들은 교단 재건을 위하여 충남 칠산에서 모임을 가졌다. 같은 해 9월 강경에서 다시 대회를 소집하고(36차) 교단조직을 총회제로 바꾸었다.
위적인 중앙집권적인 감목체제를 회중적인 장로회 행정체제로 변경하고 교단 명칭도 다시 ’대한 기독교회'로 바꾸었다.
임 원의 명칭도 감목을 총회장으로, 감노는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과 반장은 각기 집사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북한과 만주, 시베리아 지역의 교세를 상실한 교단은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947년 미국의 선교기관과의 제휴를 모색하게 되었다.
1949 년 교단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강경 총회에 미국 남침례회 외국 선교부의 동양 총무인 베이커 코우덴박사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코우덴 박사는 대한 기독교회의 형편과 신앙행습이 미국 남침례회와 유사함을 확인하고 협조를 확언했다. 이 총회에서 대한기독교회는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 침례회 총회로 변경했다. 이것은 교회의 성례로서 지금까지 침례의식을 행하여 온 대한기독교회가 한국에 있어서 그들의 교단색체를 처음으로 ’침례교단’으로 천명하는 침례교단 조직의 역사적 시발이었다. 이 강경 총회에서 ’대한 기독교 침례회총회’와 미국 남침례회 외국선교부 간에 이루어진 역사적 제휴는 1950년에 최초의 선교사로 에버나디 부부를 한국에 파송함으로써 한국에 있어서 본격적인 침례교 선교사업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부터 한국 침례회 총회와 교단체제와 교회 행정체제는 미국 남침례 교회의 행정체제 및 신앙원리에 따라 점차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 교단 분열(1959- 1968년) : 1960년대 한국 침례교단은 발전을 위한 여러 시련을 거쳤다.
대 거 유입된 타교단 교역자들의 신앙행습문제, 교역자들의 안수문제, 정치적 파당문제, 및 선교부와 한국 총회간의 갈등 등은 불행하게도 1959년부터 68년에 이르는 10년간의 교단 분열을 가져왔다. 이 분열은 침례교의 투철한 신앙원리의 실천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대전 총회파와 옛날의 펜윅 선교사의 동아기독교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포항총회파 간의 분열이었다.

- 기독교 한국 침례회 연맹 총회(1968-현재) : 양파로 갈라졌던 교단은 1968년 다시 통합하였다.
분 열기간에 배태되었던 교단 안의 여러 가지 불건전한 요인들은 제거되고 신앙행습과 교리행정에 있어서 시행착오의 경험과 반성은 70년대 교단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 침례교 신학대학에서 젊은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선교부, 침례회 출판사, 침례회 방송부, 침례병원, 교회 진흥원 등의 기관들을 통하여 한국 침례회 연맹총회는 70년대에 교단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비약적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라) 조직 및 교리
조직은 조합교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특별히 규정된 신앙선언은 없다.
다만 근본주의자들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원죄, 구원의 필요성,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천국과 지옥이 영원하다는 것, 성서가 신의 영감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 성서가 신앙과 행동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 등을 믿는다.

교리면에서 침례교는 가시적인 교회를 신앙으로 가지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 통치되며, 그리스도에 의해 보장된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회의 일원이 도기 위해서 신앙과 세례가 요구된다.

마) 종교의식
침례교는 세례와 주의만찬 이 두가지 의식을 인정하고 있지만 성사는 아니다.
세례는 죄를 사하는 성사라기보다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라 할 수 있고, 주의만찬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상징할 뿐이다.
또한 목사는 신자들에 의해 선출된다.

황양주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