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이 부활하고 있다
[심층진단] 한국 가톨릭이 부활하고 있다
‘맑은 영혼’에의 목마름인가?
조용한 대약진, 가톨릭의 힘
20년간 신자 증가율 175%, 10년간 74%. 가톨릭이 지금 한국에서 소리없이 부활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가톨릭을 바라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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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헌신에 감동했어요”
일산의 주부 K(43)씨는 새내기 가톨릭 신자다. 2006년 초 입교했다. 시아버지의 죽음이 계기였다.
“상을 당하면 누구나 경황이 없잖아요. 마침 시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세요. 성당 연령회(煉靈會)라고, 장례를 도맡아 치러주는 분들이 있다면서 새벽 3시쯤 연락을 했는데, 4시가 안 돼 그분들이 찾아왔어요. 병원에서 성당 영안실로 운구해 빈소를 차리고는 발인까지, 정말 모든 일을 다 해 줬습니다.”
그 과정에서 K씨 가족은 연령회원들의 성심(誠心)과 신심(信心)에 감동했다.
“발인 전까지 이틀 밤새 연령회원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기도해 주시는 거예요. 더욱이 병사하신 시아버님 시신을, 그 분들 중에는 제 나이 또래 젊은 여자분도 있었는데 자기 가족처럼 염해 주는 거예요. 맨손으로 거리낌없이 시신을 정성스럽게 닦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고 놀랐어요.”
더욱이 장례비용 또한 염가의 실비(實費)만 들었다. 수고를 아끼지 않은 연령회원들은 그 어떤 사례도 받지 않았다. K씨 가족이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가톨릭도 기독교인데 우리 전통 방식의 장례를 존중해 주는 거예요. 개신교보다 가톨릭이 더 엄격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연령회의 헌신적 도움에 감동한 K씨는 물론 남편과 두 아이 등 온 가족은 두말없이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K씨는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왕 종교를 가질 거라면 가톨릭을 택하라고 권유한다”고 말한다.
“사람들과 마주치고 어울리고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아파트 반상회조차 나가기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시아버님 일을 겪고 나서 처음 성당 미사에 갔는데 제가 생각했던 그런 분위기,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고 하는 분위기가 아닌 거예요.”
“정말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다”고 K씨는 기억했다.
“뭐랄까, 묵직한 바윗돌 같은 것이 제 마음을 꾹 눌러 진정시켜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미사 도중 몇 차례나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이 좀 우습게 생각됐지만 웅장한 오르간 소리, 다 같이 기도문을 읽는 소리, 신부님의 말씀 등이 이어지는데, 여기는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구나, 내가 지금 뭔지는 몰라도 거룩한 곳에 와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성스럽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제가 말로 표현은 잘 못하지만, 정말 성스러웠어요.”
그러면서 K씨는 “다른 사람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덧붙였다.
“누가 미사에 나오고 안 나오고 하는 것에도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각자의 신앙과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는 조용한 분위기여서 너무 좋았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에서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나 경쟁할 일도 없고 눈치볼 일도 없다는 거, 그 점이 정말 좋아요. 오래된 신자분들 중에서는 그것이 가톨릭의 문제라고 하는 분도 있던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야말로 가톨릭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미사에 참석한다고 해서 곧바로 성당의 등록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K씨는 정식 등록신자가 되기 위해 6개월 넘는 교리공부 기간을 거쳐 지난해 가을에야 교적(敎籍)에 이름을 올렸다.
“남편은 한 번에 교리문답을 통과했는데 저는 창피하게도 한 번 떨어지고 재수해서 붙었어요. 그 과정도 지내고 보니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정식 등록신자가 됐다는 것이 뭔가 뿌듯하다, 내가 정말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성당에 소속되는구나 하는 소속감이 생기는 거예요.”
“거룩하고 성스러워 좋아요”
K씨가 성당에 나가면서 특별히 과외로 하는 활동은 없다.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배우는 단계여서 선뜻 어떤 다른 일을 맡아 하기가 겁난다”면서 “그러나 최소한 일요일 하루만은 성당에서 생활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성당 안에 들어서면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왠지 깨끗한 기분이 되는 것 같거든요.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껴요. 그분들은 항상 편안한 말투에 어떤 경우든 흥분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으세요. 모든 사람을 애정이 담긴 진지한 눈빛으로 공평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좋아요. 말 그대로 성직자 같아요.”
영화에서만 혹은 남들이 하는 것만 보던 고해성사를 직접 할 때는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
“미사 때 빵을 떼어 나눠 먹는 성체(聖體)의식이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해(告解)성사도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죠. 내가 정말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한 번, 이웃과 언짢은 일로 다투고 나서 또 한 번 고해성사를 했거든요. 제 마음속 죄를 밖으로 꺼내 드러내는 것인데도, 그렇게 하고 나니 오히려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함이 드는 거예요. 놀라울 만큼 마음도 차분해지고요.”
“딱 잘라 가톨릭의 어떤 점이 좋다고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열정보다 냉정, 마음속에 어떤 부담감도 갖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가톨릭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며 K씨는 정말 편안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종교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영혼의 안정을 구하는 것 아니겠어요? 헌금도, 선교도, 봉사활동도 내 형편대로, 내 마음 내키는 만큼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잖아요? 세상살이에 찌들고 마음 고생이 심한 분들에게 이왕이면 가톨릭을, 성당에 한번 다녀 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K씨는 곧 남양주시로 집을 옮긴다. 이사하면 그쪽 지역 성당에 나가게 된다. 교적(敎籍)도 일산에서 전출(轉出)돼 남양주성당으로 전입(轉入)된다.
자기를 돌아보는 ‘默想의 종교’
“아, 내가 이제야 정말 거듭났구나, 저는 지금 그렇 게 느끼고 있습니다.”
서울 잠원동성당에서 만난 P(여·45)씨는 자리에 앉으면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핸드백에서 두 번 접은 A4 용지를 꺼냈다. 1, 2, 3…. 번호를 매긴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P씨는 먼저 자기의 신앙 이력부터 들려줬다.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을 가리켜 자기를 성찰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은 주요한 신앙행위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한 신자.
“친정 어머니가 개신교 권사이고,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일찍부터 피아노를 배워 중·고교 시절을 거쳐 대학에 다닐 때까지 교회 피아노 반주를 맡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신이 없어요. 내 신앙이 부족한가, 그렇게만 생각했죠.”
그러다 가톨릭 신자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서로 종교를 인정했고, 특히 남편이 가톨릭 신자이기는 해도 흔히 말하는 ‘나이롱(가톨릭에서는 ‘냉담자’라고 일컫는다)’이어서, 가정 내 종교갈등은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이따금 남편과 함께 성당 행사, 나아가 주일미사에도 참석하게 됐다.
“같은 기독교인데도 다가오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미사에 몇 번 참석한 뒤 그는 개종을 결심했다. 무엇이 그를 결단하게 했을까? 그는 메모 내용을 짚어가며 이야기했다.
“제가 ‘묵상(默想)’이라는 말을 자꾸 쓸 텐데, 바로 거기서 가톨릭의 진수를 느꼈다고 보면 됩니다. 처음 미사에 참석했을 때 피아노가 아닌 오르간 소리를 듣는데 가슴에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새로운 힘을 주는 것 같은 울림이 전해지는 거예요. 세상의 그 어떤 악기도 따라갈 수 없는 전율을 일으키는 소리랄까, 그런 거였죠. 피아노와 달리 오르간은 그야말로 제 속으로 파고드는 깊이, 심오함이 있더군요. 저는 개신교가 열정적인 표현의 종교인 반면 가톨릭은 고요 속에서 자기 신앙을 돌아보는 묵상의 종교라고 생각해요. 교회에서는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부흥회 같은 때는 큰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거든요. 반면 가톨릭은 상대적으로 조용합니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어요. 교회의 부흥회나 수양회처럼 열정이 가득한 모임과 달리 ‘피정(避靜)’이 있죠.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에요. 그런 차이가 있어요.”
성당의 엄숙함과 고요함, 미사 분위기에서도 종교적 진지함을 느꼈다고 한다.
“말을 잘 못하는 저는 예배 때나 행사 때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왠지 거북했어요. 뭔가 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하고, 남들 앞에서 ‘막힘 없이 기도를 줄줄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거든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는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하나님 쪽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는 어색함도 느꼈고요.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상황에 따른 기도와 기도문이 대개 정해져 있어요. 기도하기보다 기도문을 읽는다는 표현이 맞겠죠. 수천,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내려온 기도문이랍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정말 하느님에게 기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가족도 재산도 없이 묵묵히 성직에 봉사하는 수도자들의 모습도 P씨는 보기 좋았다고 한다.
“사람 속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신부님이나 수녀님들 생활하시는 모습은 세상의 인간적인 욕심을 다 버린 것같이 성스러운 모습이에요. 자기 것을 쌓아 놓는 일도, 쌓아 놓을 필요도 없어 보여요. 2년, 4년 하는 식으로 임지(任地)가 바뀌기 때문에 무리하게 어떤 업적을 쌓을 욕심도 없어 보이고요. 그런 가운데 자신이 부여받은 일을 성실하게, 특히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해 나가는 모습에서 ‘아, 저분들은 확실히 일반인과 뭔가 다르구나. 종교인은 바로 저런 모습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된 지 2년, P씨는 “충만한 기쁨 속에 성당에서의 각종 활동과 봉사활동에도 열정적으로 나선다”고 말했다.
無宗敎 47%, 종교의 블루오션 한국
종교인들 사이에서 한국은 두 가지 종교적 특수성을 띠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나는 세계 200여 국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비신앙인이 많다는 점이다.
2005년 통계청 센서스 결과를 보면 전체 인구 4,800만 명 가운데 절반을 좀 넘는 53%가 종교 혹은 신앙을 갖고 있고, 47%는 그렇지 않다.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과 남미, 개신교가 지배하는 미국, 이슬람이 지배하는 중동, 가톨릭과 이슬람이 혼재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주요 종교, 그 나라 국민의 절대다수가 신앙하는 종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지배적 종교가 없다.
다른 하나는, 그런 가운데 역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세계 거대종교로 일컬어지는 개신교와 가톨릭, 불교가 공존(共存)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평화 속의 공존, 곧 정치적 압박이나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화롭게 정립(鼎立)하면서 (선의의) 교세 확장 경쟁을 벌인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서 그렇지, 세계에서 이 같은 종교적 무풍지대 혹은 거꾸로 종교의 개척 여지가 많은 블루오션도 드물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한국에서의 특정 종교의 부침(浮沈)은 곧 그 종교와 현대인의 관계를 가늠해 볼 중요한 척도가 된다. 오늘, 메마른 현실에 지치고 각박한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이 그 마음의 안식처, 영혼의 쉼터로 삼고 싶어 하는 종교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 질문의 해답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 답은 무엇인가?
아무도 생각 못한 가톨릭의 약진
앞의 K씨, P씨의 사례는 이미 그 답을 던져주고 있다. 바로 가톨릭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서 더욱 조용히 가톨릭의 지평이 확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른 땅으로 빗물이 스며들 듯 그 신자는 줄곧 늘어났고 교세는 다른 종교보다 훨씬 빠르고 넓게 확장됐다.
앞의 개인적 경험과 사례를 넘어 공식적인 큰 통계자료가 제시됐다. 그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이 다른 종교보다 좀더 가톨릭을 받아들였거나 혹은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는,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현실을 드러나게 했다. 2006년 5월 정부(통계청)가 발표한 주택-인구총조사 결과다.
이 조사에서 가톨릭 신자는 10년 전에 비해 74.4% 증가한 514만6,000명으로 응답됐고, 불교 신자는 3.9% 늘어난 1,072만6,000명이었다. 반면 개신교는 10년 전보다 오히려 1.6% 줄어든 861만6,000명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통계 결과는 개신교 측이나 가톨릭 측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의외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20년간의 신자 증가율에서도 의미 있는 수치들이 도출됐다. 가톨릭 신자는 20년 전보다 175.9%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불교는 33.1%, 개신교는 32.3%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1,000만 성도를 넘어섰다’는 얘기가 나오던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의 선교 방식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그 행태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덜 적극적인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럼에도 오히려 가톨릭 신자가 20년 전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나 그 증가율에서 다른 종교를 앞지르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통계청, 2005년 종교지도).
이 같은 통계 발표는 우리 종교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가톨릭은 가톨릭대로, 개신교는 개신교대로 ‘왜 개신교 신자는 줄었는데 가톨릭은 늘어났는가’라는 제목을 놓고 분석과 연구, 반성과 대책에 부심했다. 그런 과정에 가톨릭 쪽에서는 신자의 증가라는 양적 측면을 뛰어넘는 또 다른 두 가지 특성이 새로 발견됐다. 먼저 하나는 공식 등록신자든 아니든, 일반인이 가톨릭에 대해 호감(이미지)을 갖고 있다는 추론이다.
“정부의 통계 발표를 계기로 한국천주교협의회(가톨릭 교회의 한국총본부 격)에서도 실제 등록신자 호적조사를 면밀히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470만 명이 안 돼요. 그러니까 정부의 조사치보다 48만 명가량 적은 거죠. 등록신자도 아닌 사람들이 ‘나는 가톨릭 신자’라고 응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배영호 신부는 이런 분석과 함께 계속 말을 보탠다. 그의 분석을 더 들어보자.
“정부 통계에 그런 사람들까지 대거 포함된 결과 실제 우리 등록신자보다 숫자가 부풀려졌다고 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등록신자도 아니면서 그런 대답을 했을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심정적으로는 가톨릭에 기울어 있다, 가톨릭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질적 특징은 타 종교 신자의 가톨릭 개종 현상이다. 이어지는 배 신부의 분석.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혹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옮기는 것은 어차피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 한 형제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왔습니다. 마침 이번 정부의 통계를 계기로 그 부분도 따져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신자로 등록할 때 입교 경위를 밝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가톨릭에 들어오게 됐는지, 전에 갖고 있던 종교는 어떤 것인지 소명하는 내용입니다. 이번에 등록신자 수를 세어보면서 그 입교 경위를 더불어 살펴보니 개신교 쪽에서 천주교 쪽으로 옮기는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국에서의 가톨릭 3대 役事
단순히 신자 수가 증가했다는 결과만으로 덮어놓고 ‘가톨릭이 일상과 현실에 지친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고 비약적으로 단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가톨릭이 한국인의 눈길과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세계 메이저 종교들이 공존하며 경합을 벌이는 한국에서 ‘얌전하고 조용한 줄만 알았던’ 가톨릭이 뜻밖에 다른 종교보다 활발한 확장세를 보이며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쨌든 이번 정부의 통계조사 결과는 한국의 가톨릭이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 어느 쪽에서 보든) 획기적인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톨릭 역사에서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고 자체 학습과 선교를 통해 가톨릭의 복음화가 이뤄진,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축복의(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땅이라고 이야기 된다. 그것이 첫 번째 역사(役事)로 꼽힌다.
두 번째 역사는 지난해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이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된 일이다. 196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서임된 이후 두 번째다. 가톨릭이 국교도 아니고, 전통의 불교와 개신교의 교세가 훨씬 앞선 나라인데도 추기경이 2명이나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가톨릭 세계에서 갖는 위상과 영향력을 상징한다.
여기에 통계조사 결과도 실제 가톨릭 신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종교 또한 다양한 오늘의 한국인에게, 다른 종교를 제치고 다름 아닌 가톨릭이 ‘영혼의 쉼터’로 받아들여지거나 최소한 그렇게 인식된다는 점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한 줄로 엮어, 우리는 그것을 ‘한국에서의 가톨릭의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오래전 자기 부패와 타락으로 털썩 쓰러졌던 가톨릭이 이제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한국 땅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톨릭을 부활하게 하는가? 가톨릭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요인은 무엇일까? 애초 이 글은 그 질문의 답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그 답을 찾기에 앞서 먼저 ‘가톨릭의 부활’이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부활인가 생각해 보자.
가톨릭의 탄생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이 글에서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표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가톨릭을 다루는 글이므로 특별한 경우 외에는 하느님으로 표기합니다-편집자). 그것은 라틴어 ‘에클레시아(Ecclesia)’로 표기된다.
이 표현처럼 초기 교회는 어떤 특정 건물이나 고정된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드리는 곳, 혹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곧 교회였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이 같은 ‘모임’이 처음 시작된 것은 서기 30년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그 제자들에 의해서였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만큼 당시 갈수록 신격화되던 로마 황제의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그에 대한 로마의 박해 또한 당연했다. 그런 로마의 박해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은 주로 로마의 외곽 속주(屬州)를 떠돌며 복음을 전파하러 다녔다.
그러면서 교회의 조직과 교리가 서서히 정비돼 나갔다. 그것을 ‘가톨릭 교회’라고 해서 처음으로 이름과 의미를 부여한 이는 카르타고 지역의 교회 감독이던 키프리아누스였다.
교회사 측면에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두 가지 중대한 체계를 세웠다. 하나는 교회만이 지상에 세워진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며, 교회를 책임지는 성직자(主敎)가 곧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적 권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가 하나요, 진리가 하나인 것처럼 전 세계의 교회 또한 한 몸임을 주장했다.
여기서 ‘가톨릭(Catholic)’이라는 어휘가 쓰였다. 그리스어 ‘카톨리코스(katholikos, 전체-보편이라는 뜻)’를 사용해 세계의 교회가 하나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란 곧 ‘전 세계의 하나 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가 서기 2세기였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박해가 심해지는 와중에 가톨릭 교회는 탄생했고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교황 체제도 초기교회부터 세워졌다. 예수의 제자들을 계승한 성직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베드로여, 네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울 것이다)에 따라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추대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고, 로마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만큼 교황은 곧 로마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동시에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수장을 의미하게 됐다. 이후 교황은 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현재의 베네딕토(제265대) 16세에까지 이르렀다.
3세기 들어 가톨릭 교회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극심해졌다. 제국이 쇠퇴하자 황제의 권위를 더더욱 강화한다며 반대 세력을 몰아친 것이었다.
짠맛을 잃은 소금, 중세 가톨릭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퍼져나가는 잔디처럼 교회(하느님의 백성)는 늘어만 갔고, 로마가 무시할 수 없는 (저항)세력으로 커졌다. 결국 4세기 들어 점점 힘을 잃어가던 로마(황제)는 가톨릭 교회에 힘 빠진 손을 내밀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치적 회유에 나선 것이었다.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칙령을 발표해 가톨릭 교회를 승인했다. 여세를 몰아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 때 가톨릭 교회, 곧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國敎)가 됐다. 언뜻 그것은 기독교의 끈질긴 투쟁 끝에 얻은 승리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1,000년 뒤 찾아올 비극의 시작이었다.
“권력과 맞서 자기 신앙을 지켜갈 때 가톨릭은 순수했습니다. 그렇지만 권력에 의해 인정받은 후 가톨릭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권력에 의해 인정받자 가톨릭은 권력과 손을 잡는 단계로 나아갔어요. 권력은 권력대로 교회를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저항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다분히 정치적 목적이었습니다. 국교로 인정할 정도가 됐으니까요. 그런 과정을 통해 이제 드디어 가톨릭 교회 자신이 무소불위,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나는 그래서 그때 교회가 로마와 손잡은 것, 로마 정권의 지원을 받은 것이 바로 교회의 화근(禍根)이 됐다고 봅니다. 교회가 교회로 남지 않고 권력과 손잡고, 곧 자신도 권력에 젖고, 부패에 찌들고, 타락하는 길을 가게 됐으니까요.”(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 오경환 신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신념, 특히 종교는 세상의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고 무섭다. 권력화한 가톨릭 앞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로마의 국교가 된 가톨릭은 곧 세계의 종교, 정치권력 위의 종교로 군림했다. 사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종교, 사람을 지배하는 종교로 변질돼 갔다.
가톨릭의 막강한 힘과 권력은 중세 1,000년을 풍미하며 인간세계를 지배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가톨릭 교회 역시 그 길을 걸었다. 로마의 국교가 되고 1,000년의 ‘춘풍세월’을 구가하던 가톨릭 교회는 16세기 들어 ‘노골적인 타락상’을 보인다.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천국행 티켓을 파는, 오늘날로 치면 사이비 종교 장사를 서슴없이 해댄 것이다. 제217대 교황 레오 10세 때 자행된 이른바 ‘면죄부’의 판매다.
교회에 내는 헌금의 액수에 따라 구원이 좌우된다는 이 해괴한 논리는 한마디로 절대권력의 부패와 타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톨릭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썩을 대로 썩고, 병이 깊어진 회생 불가능의 환자가 됐다.
가톨릭, 쓰러지다
거기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대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교회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섰다.
잘 알려진 것처럼 1517년, 그는 교회를 향해 ‘95개 조의 반박문’을 쏘며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것은 1,000년을 지배해 온 중세 교회의 부패한 지배에 대한 저항(protestant)이었다. 이를 신호탄 삼아 세계(유럽 대륙) 곳곳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중세를 지배해 온 가톨릭 교회에 대항한 이런 움직임을 통틀어 프로테스탄트(저항)라고 부르게 됐다. 가톨릭은 구교(舊敎), 프로테스탄트는 신교(新敎)라는 선도 그어졌다. 특히 신교도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은 영국의 정치·종교적 박해를 피해 저 유명한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신대륙(아메리카)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들이 건너가 뿌린 신앙의 씨앗은 나중에 미국의 강대한 힘과 함께 전 세계에 신교를 퍼뜨리는 기폭제가 된다.
어쨌든 종교개혁과 신교의 확산은 전통의 절대종교 가톨릭에는 치명타가 됐다. 신교가 득세해 기존 가톨릭 신자가 얼마나 줄어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가톨릭이 더 이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제할 종교가 아닌, 부패한 종교라는 점을 세상에 드러낸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더 치명적이다.
사람들의 영혼 구제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구제해야 할 세상의 영혼들보다 훨씬 더 타락한 한낱 세속적 권력이요, 탐욕스러운 권력자의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힌 셈이었다. 짠맛을 잃은 소금, 종교라고는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 자격도 가치도 없는 종교, 범죄자 중에서도 파렴치범으로 찍혔다.
속으로는 푹푹 썩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번드르르 회칠한 무덤, 그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가톨릭 자신이 그 무덤 속에 묻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곧 가톨릭의 죽음이었다.
물론 이후 가톨릭은 내부적 혁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인간세계에 군림하고 지배했던 시간 못지않게 긴 세월 동안 숨을 죽이고 회개하고 고행하며 재기의 때를 기다려야 했다.
종교의 명맥은 이어갔지만 그 지배력과 전파력은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신대륙을 중심으로 세계에 확산하던 신교를 따라잡지 못했다.
개신교 교세에 가려진 한국 가톨릭
중세 가톨릭이 종교개혁을 내세운 신교에 의해 가위눌리듯, 한국에서도 가톨릭은 긴 시간 동안 세속의 박해와 개신교의 약진에 떼밀려 한걸음 뒷전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가톨릭이 우리 땅에 처음 전래된 것은 1784년(중국 베이징에 건너갔던 학자 이승훈이 그곳에서 프랑스 신부로부터 세례받은 때)이었다. 개신교보다 100년이나 앞서 한국 땅에 들어왔지만, 그렇게 먼저 들어온 100년은 한마디로 ‘순교의 세기’가 되고 말았다.
그 시기 동안 가톨릭은 조선 왕실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받았다. 무려 1만여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그런 박해 속에서도 가톨릭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지만 교세 확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톨릭이 우리 왕실에 의해 인정받은 것은 1882년,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이후다.
이때부터 가톨릭은 본격 선교에 나서 교세를 확장하고 따뜻한 날을 맞아…. 그렇게 됐으면 좋았겠지만 이번에는 후발주자인 개신교의 교세에 가렸다. 조선 왕조에 의해 가톨릭이 인정되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인 1885년, 미국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의 선교사업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가톨릭의 역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탄탄(?)한 길을 걸었다.
개신교는 전래 초기부터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평등 이념을 펼치며 서민층을 급속히 파고들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해방과 6·25,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는 반공이념, 미국식 근대 물질문명과 한국의 기복(祈福)신앙이 결합한데다 개신교 특유의 맹렬하고 열정적인 전도 방식에 힘입어 실로 폭발하듯 교세를 확장했다. 급기야 개신교가 전래된 지 100년 만인 1995년 개신교계는 ‘1,000만 성도’에 도달했음을 선포했다. 국민 네 사람 중 한 명은 개신교 신자로 볼수있는 셈이다.
그런 개신교의 대약진에 가려 정작 100년이나 앞서 이 땅에 들어오고, 1만여 명의 순교자를 낸 가톨릭은 일반인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외치는 자 많은’ 개신교의 목소리에 비해 그 목소리도 작아 일반인에게는 그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가톨릭은 한국에서 신흥 개신교, 그리고 전통 불교보다 주목받지 못하는 종교에 머물러 왔다.
‘오랜 주눅’ 으로부터의 탈출
가톨릭의 부활은 바로 그런 ‘오랜 주눅’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세계사에서 신교의 반격을 받아 파렴치범으로 몰려 무너진 가톨릭, 한국에서는 숱한 순교자를 내고 박해에 시달리다 개신교의 그늘에 가렸던 가톨릭이 되살아남을 뜻한다.
그러면 이제, 질문의 답을 찾아보자. 과연 오늘 가톨릭을 부활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가톨릭이 사람들의 눈길과 마음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연구한 오경환(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 신부는 가톨릭의 큰 힘 가운데 하나로 ‘종교다움’을 든다.
“중요한 것은 가톨릭이 다른 종교보다 더 종교답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다른 종교에 비해 가톨릭이 일반인의 눈에는 좀 더 종교답게 비칠 구석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선 그런 종교다움이 청렴성, 특히 성직자들의 청렴성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것은 가난하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죠. 가톨릭에서는 신부와 수녀의 청렴한 생활, 청빈한 생활을 대단히 중시합니다.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되는 오랜 훈련기간에 그 같은 영성(靈性)훈련을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 성직자들은 주택을 소유하거나 개인 재산을 모으는 일이 없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각 교구에서 곧바로 조치를 취한다. 신부는 헌금에 손대지 못하고 신도들에 의해 중앙으로 모여 규정대로 다시 일선에 나누어지는 규율이 적용되고 있다. 성직자의 생활비와 활동비도 규정에 따라 지급된다. 당연히 신부들은 그렇게 지급받는 생활비와 활동비에 대해 소득세를 납부한다. 그것이 성직자의 기본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신자 개인의 헌금에 대한 철저한 비밀 유지도 가톨릭에서 중시하는 덕목이다.
“어떤 경우든 헌금은 자발적으로 하게 합니다. 누가 얼마를 헌금했는지는 절대 공개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헌금액을 공개하거나 헌금경쟁을 유발하는 어떤 행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세워져 있습니다. 모든 이가 자기 형편대로 헌금하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 대해서도 종교다운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가톨릭의 힘”이라면서 오 신부는 설명한다.
“가톨릭에서는 선교와 복음화를 기본 사명으로 삼습니다. 선교와 복음화에는 사회정의활동과 인권활동이 필수사항으로 포함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초반 가톨릭노동청년운동이 시작된 이래 주요한 정치·사회적 사건이나 인권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가톨릭 교회가 나섰습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을 주장했습니다. 명동성당은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수많은 개별 성당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위상과 존재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가톨릭은 물론 우리 양심의 상징처럼 자리매겨져 왔습니다. 그런 점들이 가톨릭의 정의로움, 나아가 종교다움을 강화했을 것입니다.”
‘나부터 열려야’ 남의 마음을 연다
그러나 종교다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오 신부는 “종교가 높은 자리에서 숭고함만을 강요하면 일반 대중과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간파한다. 그러면서 그는 “가톨릭의 유연함, 열린 태도가 일반 대중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가톨릭교회는 주요 정치 인권사건이 불거질때마다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을 주장했다. 명동성당은 그러한 가톨릭의 위상과 존재의미를 상징한다. 서울 명동성당.
“가톨릭은 자기반성을 잘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자기 잘못은 먼저 파악해 고쳐나가야 한다는 전통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국의 선교 방식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가톨릭 교리와 방식을 강요했지만(이를 식민주의적 선교라고 한다) 이제는 각국과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중시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는 제례(祭禮)문제로 갈등이 심했는데 1939년 이후 교황이 이에 대해 관대한 태도와 조치를 취했고, 실제 우리 한국 주교단에서도 1958년 이후 금지하는 항목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우리 전통 제례를 용인해 왔다. 그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을 열어가는 중요한 열쇠가 됐던 셈이다.
나아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가톨릭은 대단히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종교라고 해도 제각기 옳고 성스러운 것이 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공식 선언한 상태다.
다시 그의 말을 듣자.
“그 같은 태도는 유대교·이슬람교·힌두교·무신론자의 경우까지 포함됩니다. 개신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개신교를 ‘(한 기독교 안에서) 갈라진 교회’라고 해서, 그곳을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열린 태도야말로 종교가 추구해야 할 자세라고 봅니다. 그런 점이 또한 일반인들에게는 가톨릭을 더 종교다운 종교로 인식하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언뜻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 곧 가톨릭이 한편으로는 종교다움을 유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해 열린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배경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은 가톨릭이 흔들림 없이 유지해온 전통적 결속력에 있습니다. 가톨릭이라는 말 자체가 세계 교회(성당)가 하나,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황과 세계주교회의의 결정이 일선 성직자와 교회에 비교적 순조롭게 받아들여집니다. 성직자와 신자들은 또 그들대로 상부 기관의 결정을 존중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원칙을 유지하는 일도, 또 예외를 허용하면서 상황에 따라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일도 가능합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고쳐보자’ 하면 단합이 잘 되거든요. 그런 점에서 중간에 굴곡도 많았지만 어쨌든 2,000년을 면면히 이어온 가톨릭의 전통, 거기에 바탕한 일체감과 결속력이 가장 큰 힘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개종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해온 종교사회학자 정재영(실천신학대학원) 교수는 독특한 시각으로 천주교의 강점을 분석한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를 과거 박해 시대처럼 어떤 중대한 결심이나 결단을 하고 찾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종교와 신앙을 선택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거죠. 혹은 자기 인생을 내던져가며 종교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다수는 마치 우리가 연예인들을 보면서 대중문화를 소비하듯, 종교 또한 그렇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을 맡기고, 내 마음의 위안을 얻고, 내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종교를 선택해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죠.
그런 소비 심리가 지향하는 것은 역시 명품(名品)입니다. 종교의 명품. 곧 더욱 종교다운 종교를 추구하고 원하게 됩니다. 각박해지는 세상과 인간관계 속에서 종교다운 종교, 명품 종교를 통해 마음을 위로받고 영혼의 안식처로 삼는 거죠.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오랫동안 종교적 전통과 원칙을 지켜오는 종교가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가톨릭이라고 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사의 고요함과 엄숙함, 겉으로 보이는 제복(uniform)부터 일반인과는 확실히 뭔가 달라 보이는 신부와 수녀의 모습,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는 무게감이 어우러져 가톨릭을 명품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나아가 그는 “명품성만 갖고 있다면 일반 서민이 그것을 ‘소비’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있기 때문에 명품성과 동시에 실용성도 갖고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가톨릭은 종교적 명품성, 곧 종교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헌금이든 선교든 봉사활동이든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해 열린 관용적 태도를 유지합니다. 세상에서 험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솔선해서 자기들이 맡아 해 나가는 것도 일반 대중에게 접근하는 데 대단히 유용합니다. 또 가톨릭 스스로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계속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명품은 명품이되 실용성과 접근성까지 가진 명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종교에서 어떤 영혼의 만족을 구하려는 현대인의 취향에 가톨릭이 잘 맞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1969년 서임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과 2006년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 ‘2명의 추기경’은 세계 가톨릭계에서 한국 가톨릭이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력을 상징한다.
종교는 청정해야 할 영혼의 上水源
앞에서 본 K씨와 P씨의 사례, 그리고 앞서 전문가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통해 오늘 가톨릭이 한국 땅에서 왜 다시 영혼의 안식처로 부활하는가에 대한 답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6월1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산하 한국사목연구소에서 발표한 ‘정부의 통계조사 결과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설명문’에는 그 같은 답변이 잘 요약돼 있다.
“최근 각종 언론과 여론조사기관에서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반 국민의 긍정적 인식이 유효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서 교회의 역할, 사회봉사와 사회복지분야에서의 헌신, 타 종교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적 자세, 성직자들에 대한 신뢰도 등에서 신뢰할 만한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가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소리없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해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헌신적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한국사회 안에서 가톨릭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내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분들의 소박하고 힘 있는 삶은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과 물질주의에 맞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나눔과 섬김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 오늘날 가톨릭은 한국인이 영혼을 위탁할 종교로 바라볼 만큼 성장하며 부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톨릭의 부활이 종교적 의미를 넘어 세속의 세계에 던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오경환 신부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한 방울의 썩은 물을 정화하는 데는 대충 그 300배 이상의 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썩어 넘어지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되살아나는 데는 너무도 힘든 과정,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종교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종교가 오염되고 부패해 타락한 뒤 그것이 다시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오 신부는 “부패한 가톨릭이 신교의 반격을 받은 지 이제 500년입니다. 그 긴 시간의 회개와 자숙, 고행과 순교를 거친 오늘에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영혼을 파고들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며 “가톨릭이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영혼의 상수원(上水源)으로서 부족한 점은 없는지, 오염된 곳은 없는지 스스로 늘 두려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배영호 신부
“가톨릭은 다만 ‘어제의 가톨릭’과 경쟁하려고 합니다”
― 가톨릭 신자가 늘어났다는 정부 통계조사 결과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첫 느낌은 ‘어,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라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가톨릭은 다른 종교에 비해 조용하고, 외부에서 보면 주눅 든 상태였습니다. 반가움보다 두려웠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도 두렵고 사실이 아니라도 두렵고….”
― 왜 두렵습니까?
“사실이라면 가톨릭의 책임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뻥튀기로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요. 미처 우리가 어떤 입장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 통계 결과를 놓고 언론에서 좋은 이야기들을 앞서나가면서 많이 써줘서 정말 곤혹스럽기도 했습니다.”
― 가톨릭 신자가 증가했다는 것은 뜻밖이라고 합니다. ‘뜻밖에 증가했다’는 것은 가톨릭이 그만큼 선교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신자가 늘어났다는 의미일 텐데요. 가톨릭은 선교에 힘쓰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와 복음화가 첫째 사명인데, 그럴 리는 없고요. 다만 그 방식이 개신교 등에 비해 조용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은 유럽식 선교 방식이어서 개별적·내면적으로 선교해 나갑니다. 반면 개신교의 전도는 처음부터 교육사업·계몽사업·의료사업 등과 맞물리면서 공개적·대중적·적극적으로 이뤄진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선교 방식에서 이미지상 차이가 생겼으리라고 봅니다.”
― 가톨릭이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해 교리와 원칙을 넘어 지나치게 관용적인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에 대해 혹은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갖게 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선교와 복음화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바깥’을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해서 가톨릭이 곧 세속화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의 문화와 뿌리를 존중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자세이며, 결국 그것을 통해 선교와 복음화가 효율적으로 이뤄지리라는 것이 가톨릭의 시각입니다.”
― 가톨릭이 더욱 공격적이고 열정적인 선교활동에 나서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적인 선교 실적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선교전략, 그러니까 기업으로 말하면 더욱 세련된 판매전략, 새로운 브랜드 전략 같은 것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 되겠죠. 하지만 종교는 소금입니다. 짠맛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세상이 변할수록 종교는 고유한 자기 정체성, 자기 뿌리를 확고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에서 사람들의 영혼은 위안받는다고 믿습니다.”
― 가톨릭이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의 눈길과 마음을 잡아끄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의 지난 반세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근대화와 발전으로 요약되는 그 시간은 정말 숨가쁘게 뛰어온 나날들입니다. 물질과 돈은 많아졌습니다. 정신이 따라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고갈, 거기서 모두 영적으로 지친 것 같습니다. 종교 또한 성숙의 길보다 성장의 길을 택해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 흐름에 맞춰 정신없이 뛰었고요. 그나마 가톨릭은 느려서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자기 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정신의 세계에서 원칙을 지켜온 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 통계조사 결과를 보면 무신앙이라고 응답한 국민이 47%에 이릅니다. 이들을 놓고 종교 간에 어차피 경쟁해야 할 텐데요.
“우리는 신자 수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신앙으로 성숙한 신자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내적 성숙이 우리의 주요한 관심사입니다. 무신앙자들에 대한 선교 때문에 개신교나 다른 종교와 경쟁해야 한다는 관념은 사실 가톨릭에는 없습니다. 우리를 반성하고 나아가야 한다, 가톨릭의 경쟁 대상은 바로 ‘어제의 가톨릭’뿐이라는 입장입니다.”
인터뷰 | ‘가톨릭 신자의 증가와 그 요인’논문 발표한 인천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오경환신부
“결국 일상에서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느냐가 선교의 관건”
― 발표 논문에서 제시한 ‘가톨릭 신자의 증가 요인’을 간추려 소개해 주십시오.
“다섯 가지, 곧 ▷가톨릭 교회의 (세계적) 결속력 ▷가톨릭 교회의 청렴성 ▷정의와 인권활동 ▷조상 제사와 장례식에 대한 유연한 태도 ▷타 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의 결속력이 가톨릭 자신의 끊임없는 혁신을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힘이 됐다고 봅니다. 그런 요인들이 시간을 두고 축적되면서 일단 가톨릭이 일반 대중에게 그런대로 괜찮은 종교, 종교다운 종교로 인식돼 왔다고 봅니다.”
― 가톨릭 신자가 늘어났다는 정부의 통계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서 가톨릭이 부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을 너무 거창하게 띄우는 표현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물론 그것이 500년 전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기점으로 잡는다면 ‘부활’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사람들의 영혼을 씻어줘야 할 가톨릭은 그때 한 번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화(淨化)돼서 이제 다시 사람들이 영혼을 위탁할 만큼 깨끗해졌다면 그런 의미에서는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제 가톨릭은, 어떤 종교든 권력과 가까워져서는 안 됩니다.”
― 가톨릭 성직자 입장에서 개신교 신자가 줄었다는 통계조사 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개신교 쪽에서 더 많이 생각하실 테니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친한 목사님이 ‘개신교 신자가 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는데, 제가 딱 잘라 말했죠. ‘사람은 누구든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하는데, 목사님과 교회가 신자 개인에게 너무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주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하하 웃더군요. 아무래도 신자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종교든 뭐든 일단 마음이 편해야 하거든.”
― 개신교의 열정적 선교 방식에서 본받을 점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있겠죠. 개신교의 열정은 분명히 좋은 점입니다. 또 가정방문선교다, 지하철선교다, 거리선교다 하는 것들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그것보다 좀 더 일상적이고 장기적이며 올바른 종교적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것이 일반인들의 마음에 호감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선교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좀 더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자, 그러한 선교 방식은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인터뷰 | 경기도 산본성당 연령회장 이상환
“연령회 봉사는 온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
― 연령회(煉靈會)가 일반인에게는 생소합니다. 소개해 주십시오.
“본래 ‘연령’이라는 말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머무르고 있는 영혼을 깨끗이 정화해 천국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가톨릭 신자 자신이나 가족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차를 밟아 의식을 거행하고 수발을 들면서 일을 모두 처리해 주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자원봉사죠. 빈소에 모여 앉아 고인을 위한 연도(煉禱,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도 드립니다. 연령회는 성당마다 구성돼 있습니다.”
― 시신을 운구, 안치하고 조문객을 맞을 빈소도 있어야 할 텐데요?
“영안시설은 성당의 기본 시설로 다 마련돼 있습니다. 우리 성당의 경우는 동시에 3구까지 안치할 수 있는 냉동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빈소도 다 준비돼 있습니다. 미세한 부분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죠.”
― 가톨릭 신자여야 연령회의 도움을 받습니까?
“가족 중 신자가 있으면 신자가 아닌 분도 저희가 수습합니다. 또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분들도 사회봉사 차원에서 저희가 장례 절차를 대행합니다.”
― 궂은 일인 만큼 사례도 좀 받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일절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장례용품과 접대음식도 모두 실비(實費)만 내면 됩니다. 대단히 합리적인 가격입니다. 연령회가 그 과정에 단 한 푼도 이익을 보는 일도 없고, 나중에 수고비 같은 것도 1원 한 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을 큰 죄악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령회라고 하면 아는 분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입니다.”
― 장례를 치르는 것은 상(喪)을 당한 가족에게도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도맡아 나서는 이유가 있겠지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 봉사할 일이 많지만 특히 장례 절차는 대단히 당황이 되고 힘든 일입니다. 가장 궂은 일 가운데 하나죠. 그런 일을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한다, 그것이 곧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일을 당한 가족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된다고 봅니다. 오직 신앙심만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런 저희 모습을 보면서 감화돼 가톨릭에 입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가톨릭의 장점이 많지만, 우리 전통 장례 절차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가족 아닌 사람들이 선뜻 달려들어 일을 치러준다는 점에서 이 연령회를 통해 가톨릭이 일반인에게 쑥 다가섰다고들 합니다.”
김영현_월간중앙 객원기자 [2007년 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