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3)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나(3)

3. 종교개혁의 종교적 원인

종교개혁의 종교적 원인을 고찰하는 데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적환경 즉 정치적 상황, 경제적 상태, 그리고 사상적 배경 등을 무시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주된 이유가 된 종교적인 면 - 교회의 상태 - 에 제한하여 취급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교 사상

1) 유명론(唯名論)

14 세기부터 유럽 중부 지역과 영국은 신학의 쇠퇴기에 들어섰다. 중세 후기의 신학자들은 토론의 枝巧(지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기법은 대부분 순전히 외면적 문제에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 후기의 신학은 실재적이 될 수 없는, 즉 교회생활을 외면한 단조롭고 표면적인 장황한 말마디로 격하된 스콜라 사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참된 신학이 교회생활 특히 그의 성사적 생활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라면 이 시대의 신학은 죽은 신학이었다.

중세 말기의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는 유명론(唯名論)을 내놓은 영국인 William of Occam이있다. Thomas Aquinas 사상의 舊方法(구방법)은 희미한 옛 모습일 뿐, 여기에 유명론의 新方法(신방법)이 대치되었다. 그런데 Occam의 신학체계는 근본적으로 非가톨릭적이었다. Thomas와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에 반대하여 자연계와 초자연계, 인간이성과 신의 계시 사이의 조화를 거부하였다. Luther는 그의 스승인 유명론자 Gabriel Biel을 통해서 Occam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을 Occam에 의한 신과 자연과의 내적 연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 자연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을 거부하였다. 인간은 오직 신이 자신을 계시할 때에만 신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Occam의 인간이성과 자연에 대한 主義(주의)는 계시에 대한 굳은 신뢰와 대응하였다. 오로지 계시된 聖事(성사)만이 신앙의 원천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Luther의 聖事唯(성사유)의 사상은 이런 견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아울러 Occam은 인간의 이성을 무력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오직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인식케 하고 인간의 구원을 이룩해 준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Luther의 信仰唯(신앙유)의 원칙이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Occam은 인간의 본능 자체는 무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신의 은총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Luther는 후에 이러한 恩寵唯(은총유)의 교의를 끌어들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따라서 가톨릭 입장에서 볼 때에 Luther의 이단은 Occam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세 가지 唯(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있다.

2) 그리스도신적 인문주의는 14세기에 이태리에서 발단하여 15-16세기에 유럽 지역에 번진 지성적 운동이다. 인문주의란 명칭은 이 운동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의 앙양에 관심을 두는 데에서 나왔으며 또 이는 다른 인문주의 운동들과 구별하기 위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운동은 고대 희랍과 로마 문학에 대한 심미적 태도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국가주의적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태리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들의 조상인 로마인들의 고대 문화의 재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울러 이들은 객관적, 스콜라적, 체계적 사상을 경시하고 주관주의, 개인주의와 인간 각자의 경험에 치중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새로운 과학적 방법, 즉 역사적, 철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법은 원천에 비판적 탐구 및 복귀를 뜻하고 있다.

그런데 북부 및 서부 유럽의 인문주의는 그 개인주의적 성격에 종교적 의미를 적용하여 각 인간은 '성령의 궁전'으로 존중하였고 고대 원문, 원서로의 복귀에 있어서 고대적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적 원천, 즉 신약성서 - 특히 희랍어 신약성서 - 와 신부들의 저서를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란 용어가 나왔다. 한편, Luther가 성서를 강조하고 종교개혁을 사도시대로의 복귀로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는 종교개혁과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의 길을 마련한 원인(遠因)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들은 내적 생활을 강조하면서 교회개혁을 주장하였지만, 혁명적인 인물들이 아니었으며, 후에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단결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톨리시즘을 떠나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2. 교회 상황

1) 중세적 일치의 약화를 초래한 역사적 사실들 중의 하나는 교황청의 Avignon, 즉 교황의 Avignon 생활이다. 이는 1305년 새로 선출된 프랑스인 Clement 5세가 당시에 이태리의 불안한 정정으로 인하여 교황청을 Avignon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어 Gregory 11세가 1377 성녀 Catharine of Siena의 독책으로 로마로 환도하기까지 70여년간 계속되었다.

6명의 Avignon의 교황들과 교황청 성직자의 대부분이 프랑스인이었고 그 사고방식도 프랑스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보편적 영신 지도자들이기 보다는 프랑스의 국가주의로 여겨져 다른 지역, 특 히 독일 지방에서 교황권의 세 력의 상실과 그 종교적 보편주의의 소멸을 갖고 왔다. 아울러 이들은 세력 증강에 집착하여 세속적 권한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교회세제를 확장시켜 교회생활의 어느 부분에도 돈과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교회세금의 미납은 성사수여 금령이나 교회의 공공 전례참석 금령 등 영신적 처벌의 대상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황들의 지나친 중앙 집권화와 교황청 재정정책에 대한 악감은 유럽 전체에 번지게 되었다. 마침내 대사부의 논의는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는 마지막 불꽃이 되었다.

그리고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일치를 약화시킨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서구의 대분열 즉 교황청의 분규(1378-1417)였다. Gregory 11세의 서거(1378년) 이후, 16명의 추기경들은 프랑스인 교황의 선출을 저지하려는 로마 시민의 우려와 군대의 위협하에 타협하여 半프랑스인 Urban 6세를 새 교황으로 뽑았다. 그는 원만한 성격을 갖추지 못하여 교황청 성직자들 및 추기경들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갔다. 곧이어 프랑스와 스페인의 추기경들은 교황선거가 강압에 의한 것이기에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또 하나의 교황 Clement 6세를 선출하였다. 이에 두 교황을 가진 교회의 혼란시대를 수습하기 위해 주교들과 추기경들은 Pisa에서 집회를 열어 두 교황을 파직시키고 Alexander 5세를 선출하나 이 교황은 곧 사망하였다. 다시 회의에서 John 23세를 선출하나 물러났던 다른 두 교황들과 그 추종자들이 승복치 않았다. 따라서 교황은 다시 세 명이 되었다. 이에 이러한 교회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Constance 공의회(1414-1418)에서 세 명의 교황을 면직 또는 강제해임 시키고 Martin 5세를 교황으로 내세움으로 교황청의 대분규는 끝났다.

이 사건은 교회를 부실성 시대로 이끌었다. 이제 대중은 진짜 교황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또한 이 분규는 교회 안에 불신과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각 교황의 지지자들은 사방에서 - 교구, 수도원, 본당, 그리고 가정에서까지 - 충돌하였다. 교황들은 각자 반대파들을 파문하여 모든 그리스도 교회는 파문상태하에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공의회주의, 즉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학설을 발생케 하였다. 이 사상은위에서 언급한 Constance공의회에서 주창되어 Basle공의회(1431)에서 재확인되었다. 이 주장은 교황의 정치적, 영신적 권위는 약화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한 Luther의 종교개혁을 더욱 쉽게 해주었다.

2) 종교개혁의 외침

12세기 말 이후로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사도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교회인들 사이에세도 일어났다. 즉 제4차 Lateran공의회(1215)는 교회개혁에 대해 취급하였고, 성인 Francis of Assisi(1118-1226)의 주요한 임무 도 교회개혁이었다.
개혁의 요구에는 교회의 악폐에 대한 비난도 들어있었다.

성 녀 Catherine of Siena와 성인 Bridget of Sweden은 당시의 교회 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5세기 말에는 개혁의 외침과 교회 악폐에 대한 불만은 일반화되어 갔다. 당시의 개혁의 대상은 고위성직자들과 교황청의 자본주의였다. 이 성직자들은 사치생활을 하면서 순박한 신도들을 착취하는 폭군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3. 성직자

1) 르네상스 교황들

르 네상스 교황들은 Nicholas 5세에서 시작하여 Leo 10세에 이르는 10명의 교황들을 말한다. 이들의 시대적 사명은 교회의 개혁과 회교도들과의 논쟁을 위한 서구의 단합이었으나 실천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주로 르네상스 교황들의 두 가지 역사적 과오에 있다. 첫째는 족벌주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교회의 재산, 영토를 사유화하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자기들의 가족에게 분배하는 가족정치를 감행하였다. 둘째는 배타적 자기중심주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르네상스 교황들은, 비록 그들의 개인적 취미의 소산인 문화적 업적에 대한 호평을 받고 있지만, 당시에 그들의 본래의 종교적 사명인 교회개혁에 身하기를 소홀히 하였고 안일한, 더 나아가서는 비도적적 생활을 하였다. 아 울러 몇몇 교황은 증회의 방법을 통해서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러한 성직판매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묵인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교황은 교회의 영신적 지도자이기보다는 세속적 군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Nicholas 5세(1447-1458)는 탓할 데 없는 인문주의자였고, Vatican 도서관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회교도를 대항하여 방어전선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Callistus 3세(1455-1458)도 역시 십자군운동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정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으로 인하여 자기의 조카 두 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족벌주의적 과오를 범하였다.

Pius 2세(1458-1464)는 매우 유명한 인문주의자로서 40세까지는 나태한 생활을 하다가 뉘우치고 곧 신부, 주교가 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회교도와의 충돌로 인하여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Paul 2세(1464-1471)는 선임 Pius 2세와 마찬가지로 족벌주의를 행사하지 않고 그의 교황 재위 기간을 보냈다.

Sixtus 4세(1471-1484)는 방지거회의 전직총장으로 그의 수도원에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서 교회행정에 족벌주의 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는 두 명의 조카를 추기경단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예술사에 있어서 Sixtus는 Vatican의 Sistine성당의 건립자로 기억되고 있다.

Innocent 8세(1484-1492)는 증회(주: 뇌물공세)의 방법을 통해서 교황에 선출되어 성청 행정의 타락, 교회개혁의 무관심 등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자기 친척인 13세의 소년을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Alexander 6세(1492-1503)는 교리상 오류는 범하지 않았으나 그의 직무수행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Alexander의 재위 기간은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 시대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25세에 그의 삼촌인 Callistus 3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후, 많은 성직록을 소유함으로 치부하였다. 그는 증회의 방법을 통해서 교황에 선출되었고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Alexander는 족벌주의의 정영(政榮)을 실천하였고 가족들에게 정략적 결혼과 이혼을 감행하였다. 한때에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실현하지 않았다.

Pius 3세(1503)는 Pius 2세의 조카로서 교회개혁을 약속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대관식이 있은 지 26일만에 사망하여 실천되지는않았다.

JUlius 2세(1503-1513)는 Sixtus 4세의 조카로서 증회를 수단으로 하여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성직매매에 의한 교황선출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Julius는 교황으로서 윤리적으로 탓할 것이 없었으나 성격이 횡폭하였고 그리스도의 대사제로 보다는 왕 또는 장군으로 처신하였다. 그는 교황령의 회복과 확장에 성공함으로써 교황권의 세속적 명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교황은 예술 애호가로서 유명한 미술 작품들의 제작을 명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Michelangelo의 Sistina성당의 천장화(天障畵)와 San Peitro 성당의 모이세의 석상(石像)과 Raphaaelo의 바티칸 궁전의 천장화 등이다. 그리고 새로운 베드로 대성전의 건설을 계획하여 이를 위한 대사부의 판매는 Luther의 95개조가 나오게된 동기가 되었다.
Leo 10세(1513-1521)는 그의 권세가인 가정의 배경으로 13세에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윤리적 잘못은 없었으나 인생을 향유하는 데에 빠졌고 책임감이 없었다. 그의 책임감의 결여는 Luther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볼 수 있다. 이 교황은 Luther를 시시한 언쟁이나 좋아하는 수사로 여겼고, Luther의 항의 속에 내포되어있는 뜻이 무엇인지는 알 능력이 없었다. 그는 Julius가 시작한 제5차 Lateran공의회를 속개하여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약간의 사소한 개혁에 그쳤다.

2) 재속성직자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의 고위성직자들은 중세 말기에 세 가지 입장으로 처신하였다. 즉 봉건영주, 문인들과 학자들의 후원자, 그리고 자신들의 교구를 보살피는 영신 지도자로 분류될 수있다.

그 러나 일반적으로 주교직이란 하나의 세속적 직업과 같은 평범한 인상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영신적 사명을 망각하고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주교들은 신학이나 사제양성및 교육에 관심이 없었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이런 생활을 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의 정상적 수입으로는 부족하여 여러 성직록을 취득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임지 재(任地 在)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 이런 악 들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주교직이란 거의 독점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고위성직자들의 부조리한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다.

하급성직자들인 신부들은, 당시에 신학교가 설립되어 있지 않아서, 소수를 제외하고서 대부분이 신학교육이나 성직자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하였다. 품(品)에 요구되었던 것은 기초적 교리지식과 독서능력이 전부였다. 그러나 라틴어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부들이 많았다. 또 성직자로서 비도덕적 생활을 하거나 사목적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신부들이 목자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실행하였다는 점도 고려해야겠다.

3) 수도원

일반적으로 수도원들도 병폐가 있었다. 이들은 입회자가 돌봄이없이 방종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휴식처로 보였고, 참다운 수도성소자가 거의 없었으며, 지원자는 누구든지 엄격한 심사없이 입회할 수 있었다. 이는 수도원들의 폐단의 중요 원인이 되었다. 귀족들이든 평민들이든 수도생활을 부양할 수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도피구로 생각하였다. 아이를 수도원에 보내려는 부모들은 그의 의향이나 자질은 아랑곳없이 마음대로 하였다.

소수의 새로운 수도원들이 창립되었지만 영향을 크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공동생활의 형제회', '공동생활의 자매회'와 'Windesheim 회'는 예외였다. 이들은 당시에 그리스도 중심의 내적, 개인적 신심을 강조하고 교회의 악폐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쇄신을 주창하던 '현대의 신심'이란 신앙운동의 대표자들이 었다. Luther는 공동생활의 형제회가 경영하던 Magdeburg의 교회학교에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던 형제회원들과 어느 정도의 정신적 내지 영적 교술을 갖게 되며, 이 신앙부흥운동은 Luther의 영성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때때로 수도원의 성직자들은 재속성직자들과 충돌을 하였고 14-15세기 동안에는 다소간의 성공적인 개혁을 하기도 하나, 일부 수도원에서는 내분을 일으키키도 하였다. 한 예로 Luther가 속해있는 Augustine은수사회를 들 수 있다.

사목 67호, 1980년 1월, 14-25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