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기독교,예수교

천주교,기독교,예수교
예수교인가, 천주교인가?

우리 나라에서 그리스도교를 나타낼 때 천주교·예수교·기독교 등 여러 이름들이 쓰이고 있다. 이 이름들에는 어떠한 뜻이 담겨있고, 왜 우리 신앙을 주로 천주교라는 낱말로 부르게 되었는가? 우리 교회사에서는 천주교라는 낱말말고 다른 칭호는 없었는가?

1.천주와 천주교
종교신앙 이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신앙이든지 현지 문화의 그릇 속에 담겨지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현지의 종교문화적 요소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앙과 합치될 수 있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수용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16세기 동양에 진출한 예수회의 선교론이었던 보유론(補儒論)이다.
보유론은 그리스도교와 동양사회의 유교가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상통한 면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유교의 신관에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적 교리가 보충될 때 동양의 유교문화는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완성될 수 있다고 파악했다.
그 런데 16세기 당시 동아시아 삼국의 보편적인 신앙의 대상은 ‘하늘’〔天〕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하늘’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상징성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유론적 입장에서 이 낱말이 그리스도교의 신인 데우스(Deus)와 동일하게 견주어진다고 판단했다.
특히 그들은 신앙의 대상인 데우스, 곧 하느님을 한자어로 옮기려고 고심했다. 그 결과 선교 초기에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로 천제(天帝), 천존(天尊), 천리(天理), 천명(天命), 천운(天運), 천도(天道) 등의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천주(天主), 천(天), 상제(上帝), 상주(上主) 등과 같은 낱말도 함께 나타났다. 이 가운데 ‘천주’라는 말마디가 점차 널리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천주라는 한자어를 처음으로 창안해 낸 이는 일본에서 선교하던 발리냐노(1539`-1606년) 신부였다. 그는 중국에서 유교적 적응주의 선교를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던 마테오 리치(1552-1610년)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발리냐노가 일본에서 개발했던 ‘천주’라는 낱말로 그리스도교의 신앙 대상을 번역하기로 확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양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에게 큰 이질감이나 거부감 없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 대상이 ‘천주’로 번역됨에 따라서, ‘천주교’라는 명칭도 나타나게 되었다. 천주교의 천주는 동아시아의 보편적 신앙 대상이었던 ‘천(天)’과 그리스도교의 데우스 개념이 한데 어우러져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수용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텍스트는 동아시아 문화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창조적으로 재해석되어 갔다.

2.천주교란 낱말의 수용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앙은 이웃 나라에서 간행된 한문 서적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곧, 17세기 초에 우리 나라에 천주교의 존재를 알려준 유몽인(1559-1623년)의 경우에는 기리단(伎利檀)이란 새로운 종교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천주교를 가리키는 일본어 기리시당[切利支丹]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그는 일본 경로를 통해서도 천주교에 관한 정보를 얻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마테오 리치가 지어 1603년에 중국에서 간행했던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중국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포함하여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일으킨 학문을 서학(西學)이라 불렀다. 사변적 경향이 강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의 알맹이가 천주학(天主學)에 있다고 생각했다.
19세기 박해시대에 천주학이란 낱말에서 ‘천주학쟁이’라는 낮춤말도 나타났다. 천주학쟁이라는 낱말은 1880년에 간행된 「한불자전」(韓佛字典)에 수록되었다. 이를 보면, 조선후기 사회에서 천주학이란 낱말이 보편적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박해시대 조선사회에서는 천주학이란 말과 함께 ‘천주교’라는 낱말도 사용되었다. 천주교의 천주는 삼위일체적 개념으로서 성부·성자·성령을 포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3.예수학과 예수교에 대한 인식
한 국교회사의 초기 신자들도 하느님 아버지만을 공경했던 것이 아니라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임을 고백했다. 한문 서학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음이 비슷한 야소 기독(耶蘇基督, yesu-jidu)이라는 말로 옮겼다. 여기에서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예수교 또는 기독교로 부를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한편, 한국 초기 교회에서는 자신의 종교를 ‘예수교’〔耶蘇敎〕로도 지칭하고 있었고, 예수학〔耶蘇學〕이란 낱말도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주문모 신부의 신문기록을 통해서 확실히 드러난다. 그는 ‘예수학’은 ‘그릇된 가르침’〔邪學〕이 결코 아님을 주장했다. 그는 ‘예수교’를 전하려고 국경을 넘어왔고, 예수를 공경하여 자기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교에서는 정결을 제일 중요시하고, 예수교의 십계에서는 나라에 대해 충성하기를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초상을 걸고 미사를 집전했던 그는 신앙의 중심을 이처럼 예수님에게 두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반 신자들도 자신의 종교를 ‘예수교’로 불렀던 경우가 많았다. 1801년에 순교한 장덕유는 서울의 남대문 밖 이문동에 살면서 망건 장사를 하고 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수교를 믿고 있다고 말했고, 예수는 교주라고 규정했다. 김경애와 같은 아녀자도 자신은 “예수를 위해서 죽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 초기 천주교회에서 예수는 중요한 존재였고, 예수교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따르던 자신들을 ‘그리스당’이라고 불렀다. 이는 ‘크리스티안’(Christian)이란 낱말을 한국식으로 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당’이란 낱말에서 마지막 음인 ‘당’은 무리를 뜻하는 ‘당’(黨)으로 연상되는 효과가 있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당’이라 부르면서 ‘그리스도당’ 내지는 ‘기독당’으로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당시 쓰이던 예수교는 곧 천주교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리스당은 천주교도임을 자칭하던 용어였다. 그러나 점차 교회 안팎에서 ‘예수교’보다는 천주교라는 낱말이 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기독교도’라는 말 대신 ‘천주교 신자’라는 말이 보편화되어 갔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천주교라는 용어와 기독교 또는 예수교라는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곧, 천주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뜻하는 말로, 그리고 기독교나 예수교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뜻하는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기독교라는 낱말에는 천주교와 동방교회 그리고 개신교가 모두 포괄되는 개념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전통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예수교로 불렀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천주교가 기독교나 예수교라는 이 좋은 말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우리도 예수교도이고 기독교도이며 천주교도인 까닭이다.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