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자발성’은 소공동체 유지 발전의 원동력 -- 장애인 소공동체 ‘밀밭모임’
‘자발성’은 소공동체 유지 발전의 원동력
장애인 소공동체 ‘밀밭모임’. 장애의 고통 속에서도 진실된 만남과 나눔이 오늘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밀밭모임은 소공동체를 통한 통합사목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김대근(바르나바.34.서울 삼성산본당)씨가 어렵게 입을 뗐지만 말소리는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한참을 입 안에서만 맴돈다.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김씨의 입에 쏠렸다. 몇 번이고 응축시켰을 말을 어렵게 내어놓았지만 그의 어머니 오영해(아가다.55)씨의 입을 다시 한번 빌어서야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남양성모성지를 다녀왔어요.…예수님상을 바라보면서…‘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 29)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얼마나 암송했던지 또박또박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풀어내는 김씨의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뇌성마비로 온몸이 뒤틀려 앉기도 힘든 김씨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발표를 하는 동안 모두들 답답해하기 보다 한결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도미영(스테파니아.33.서울 흑석동본당)씨. 한쪽 편 팔다리를 쓰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전해져오는 심오하기까지 한 성경 지식과 묵상은 거의 충격이었다.
“당신을 배신한 모자란 제자들을 주축으로 교회를 세우려하신 예수님은 어쩌면 우습기도 해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이는 누굴까 묵상했어요.” ‘장애는 조금 불편할 뿐이다’는 말조차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많이 적어 왔는데…미치겠네.” 한 바탕 웃음을 일으켜놓은 그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예수님도 나와 함께 고통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해야지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살아있는 성인은 바로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성인을 인정하고 성인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아닐까 해요.”
‘밀밭모임’이 시작된 것은 지난 1986년. 서춘배 신부(의정부교구 구리본당 주임)가 신학생 시절부터 만나오던 장애인들과 함께 한달에 한번 정기적인 만남의 장을 마련하면서부터다. 소외와 외로움 속에서 홀로 몸부림쳐야 하는 장애인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밀밭모임은 그 이름도 장애인들이 스스로 지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프라도 사제회의 정신을 따르자는 뜻에서 모임 이름을 밀밭(프라도)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밀밭모임은 지금껏 한번도 거르지 않고 회원들 집을 옮겨 다니며 월례 모임을 열고 있다. 알음알음 모임 얘기를 전해 듣고 한 두 사람씩 함께하다 보니 소속 본당도 제각각이다. 장애인들이 주축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가족과 봉사자들도 회원이 돼 그 어떤 공동체보다 끈끈한 정으로 다져진 모습이다.
지난 1997년부터 아들과 모임에 함께해오고 있는 오영해(아가타)씨는 “밀밭모임은 아들은 물론 우리 가족에게 희망의 끈이자 살아가는 힘”이라면서 “어떤 모임 보다 깊이 있고 꾸밈없는 나눔이 있기에 회원들은 물론 가족들도 하느님 사랑을 느끼며 변화되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김학목(바오로.53.서울 후암동본당) 회장은 “고해성사하듯 넋두리를 늘어놓듯 솔직하고 진실된 만남과 나눔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 같다”면서 “사제의 변함없는 자세가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밀밭모임에 함께 해오고 있는 서춘배 신부는 “오히려 고통 속에서 깊이 있는 체험과 사색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복음에 비춰 자신들의 삶을 나누고 또 변화시켜 나감으로써 오늘까지 소공동체를 이어올 수 있었다”면서 “장애인과 가족, 봉사자들까지 자연스럽게 복음화됨으로써 소공동체가 목표로 한 통합적인 사목이 가능하게 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우리 정서 현실에 맞는 소공동체 정착돼야
소공동체는 신자들의 ‘자발성’을 자양분으로 해 그것을 먹고 자라는 교회의 세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공동체 안에서 자발성이 사라질 때 신앙은 빛을 잃고 본래의 정신은 사그라질 수 밖에 없다.
이런면에서 장애인 소공동체 ‘밀밭모임’은 신자들의 자발성을 어떻게 키우고 발현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소공동체사목전국협의회 기획연구위원장 곽승룡 신부(대전교구)는 소공동체 사목이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는 현실과 관련해 “룸코 방식의 운영은 룸코에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말로 문제의식과 함께 해법을 보여준다. 지난 1990년대부터 소공동체 사목의 진원지인 남아프리카공화국 룸코연구소를 통해 도입돼 한국 교회에 뿌려진 소공동체 모델을 넘어서야 한다는 게 그간의 소공동체 경험에서 걸러낸 결실이다.
곽신부는 “소공동체 성공의 관건이 되는 신자들의 자발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성과에만 매달려 서둘렀던 면이 적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우리의 정서와 현실에 맞는 토착화된 우리식의 소공동체 지침서와 교본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개인이나 단체 차원에서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교육이 아닌 통합적이면서 전체 공동체를 아우를 수 있는 교육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나아가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한 교회 내 각 구성원과 사목 현장 및 연구소 등의 협력을 바탕으로 본당공동체를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으로 살려나감으로써 소공동체가 연착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정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일방적이기 보다 쌍방향적이고 순환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서 숱하게 부침하는 사목적 사안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善循環)을 일으킬 수 있는 핵심고리는 무엇인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사제,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시각 변화라 할 수 있다. 소공동체가 몇 몇 사목자나 지도자들에 의해 주입되는 영양제나 주사액에 그치지 않고 늘상 맛보고 건강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식탁의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 지도층을 구성하고 있는 사제부터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공동체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지듯 소공동체 비전과 교회의 사목 정책간에는 엇박자가 적지 않았다. 이는 한국 교회가 지닌 비전과 사목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현실이 해소되지 않으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교회의 역할은 더욱 축소되고 이로 인해 ‘신앙 따로, 삶 따로’식의 경향이 더욱 고착되는 악순환 구조가 강화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소공동체는 쇄신을 지향하는 한국 교회의 비전에 직결된다. 이미 소공동체라는 주사위는 한국 교회와 신자들 앞에 던져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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