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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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묵상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마르코 2장 1-12절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마르 2,1-¬12)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

오랜 세월 치매로 고생하시는 아버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기로 소문난 한 효자가 한적한 바닷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온 종일 맥없이 자리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겠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최근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어부셨기에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는 것이 기억났습니다. 태풍이 불어 고깃배가 뜨지 못하는 날조차 방파제로 나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던 모습도 기억났습니다.

아들은 우선 아버지와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담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담이 있던 자리에 예쁜 꽃들을 줄줄이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님은 담 허무는 공사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셨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힘겹게 마루로 나오셨습니다. 고개를 바다로 향했습니다. 굳게 잠겨 침울했던 그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가던 마을 사람들도 마루로 나와 앉은 아버님을 향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아버님께서는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보였습니다.

노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는 자녀분들 계실 텐데, 특히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들, 병고에 시달리고 계신 부모님들 모시느라 정말 고생들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인에 앞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그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까? 그분들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 행복을 이제는 우리가 돌려드려야 할 때입니다.

몰론 점점 연로해져만 가시는 부모님들 바라보는 시선이 꼭 곱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때 그렇게 위풍당당하셨던 분, 태산 같은 분이셨는데, 이제 완전히 노쇠해지시고, 저리 쫀쫀해지시고, 저리 구차스러워지시고, 마음으로부터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노화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약화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육체는 시들고 영혼도 시듭니다. 그저 부족하고 안쓰러운 한 존재, 측은한 한 인간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건강할뿐더러, 인생의 황금기를 구사하고 있는 자녀들께서는 부모님과의 관계 설정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 이제는 우리가 보호해드리고, 동반해드리고, 기도해드리고, 감싸 안아드려야 할 연약하고 측은한 존재인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 더 많은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약자인 것입니다.

노화와 더불어 즉시 다가오는 감정이 서운함입니다. 허전함입니다. 무대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서 오는 쓸쓸함입니다. 이런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은 위로자요, 치유자, 동반자요 격려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가족들의 지극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이 오늘 보여준 행동은 상식을 크게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어야지요. 아무리 절박하다 하더라도 이게 뭡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갑자기 지붕이 열리고, 열린 지붕 사이로 끈에 매달린 중풍병자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병해왔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그 적극성, 능동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가장 약한 사람을 가장 많이 배려하길 바랍니다. 구성원 가운데 가장 약자를 공동체의 중심이 놓길 바랍니다. 끝까지 약한 사람을 포기하지 말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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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더우기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남인 이웃을 어찌 사랑할 수 있으리오?
오늘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처럼,
늙고 힘없는 부모님을 한번 더 돌아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멀리 계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네분 중 모두 하느님이 거두어 가시고,
이제 어머니 한 분만 계십니다.
떠나 오면서도 못내 아쉬웠는데...
지난 여름 다니려 오셨을 때...
기력이 예전 같지 않으셨는데...
.
.
.
오늘은 전화를 드려야 겠습니다.
안셀모

나의 복음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예수님 치유 기적 사화인지라 여러번 대하왔지만 대할 때마다 달리 다가옵니다.

오늘은 이 복음 말씀 중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살펴봅니다.
5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복음을 전하시려 애쓰시는 예수님,
두번째, 혹시 좋은 것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모여든 구경꾼들,
세번째, 중풍이 걸린 환자,
네번째, 중풍이 걸린 환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가기 위하여 노고를 안은 가족 아니면 친구들,
다섯번째, 뭔가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하면서 살피는 율법학자들 입니다.

저는 어느 부류에 속할까 생각해 봅니다...
딱히 어디다라고 할 수는 없고...
첫번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류를 왔다갔다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서 못 벗어나는 환자이고,
어떤 때는 환자를 돌보겠다고 노고를 나누는 봉사에 땀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주님께 의심의 눈초리를 돌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냥 방관자적인 삶을 살아 갑니다.

주님, 네번째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도 주님 은총입니다.
몸도 따라 살 수 있도록 더 큰 은총 주소서...아멘.

이제민 신부님 글이 너무 좋아 두레박으로 길러 왔습니다.

♤-매일미사-♤

우리가 매일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때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에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이 생이 끝난 다음 천국에 가서 행복하게 살게 해달고 빌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건 나중의 문제이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가 매일 미사에 참여하는 당장의 까닭은
오늘 하루를 당신을 느끼며 평온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서이다.
내 쉬는 숨에서 당신의 숨을 느끼며 살게 해달라고,
가정에 직장에, 내가 숨 쉬며 보내게 될 시간과 공간에
당신 평화의 숨결을 느끼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을 천국에서처럼 평온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제 오늘 내일의 세상에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 내게 쉼 없이 일어난다.
예수님에 의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루카 17,1)
이런 세상에서 회개하고 용서하며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렵다.
용서와 화해의 이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용서하고 화해하려는 내 뜻이 오히려 내게 부담만 더 해 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신다.
믿음은 단순히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믿음은 사람이 죽은 다음 천국에 가게 될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다.
믿음은 그런 정도의 지평이 아니다.
믿음은 이 힘든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가 사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주는 싸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회개와 용서는 이런 믿음의 바탕에서만 가능하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미사를 드리기 위해 내가 성당에 와 앉아 있다면
오늘 하루 그런 믿음이 내 마음에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하루 사람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고,
그렇게 천국 같이 평화로운 하루가 내게 펼쳐지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주님 오늘 내게 이런 믿음을 주소서.

- 이제민 신부님 -

허준과 유의태가 생각납니다..

전에 허준이란 드라마를 유익하게 본 기억이 납니다. 이 말씀의 구절을 볼 때마다 유의태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허준 전체 드라마를 열번 정도 본 것 같습니다. ^^;)

(물론 드라마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허준이 병든 어머니를 고치려 유의태를 찾아가 부모를 고치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새치기를 무릎쓰고 모여든 군중사이를 헤치고 들어갔을 때 유의태의 아들과 다른 제자들은 순서를 기다리라고 냉정하게 대했지만, (위 성서 구절과 상황이 매우 흡사합니다.)

유의태는 허준의 기특한 효심과 환자의 상태가 위중함을 보고 먼저 치료를 해줍니다. 이에 허준은 감명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밑에서 의술을 배워,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조선 최고의 의원이 되고, 은퇴 후 유의태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일생을 바치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나온 조선 최고의 명의서 '동의보감'은 오늘날에도 민간치료의 교과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전 허준의 효심을 가상히 여긴 유의태의 배려가 결국 허준이란 인물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치료를 받은 중풍병자들의 뒷얘기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여생을 살았을 것으로 믿습니다.

만약 당시 유의태가 다른 사람들처럼, "줄서, 너만 급하냐" 라고 냉정하게 대했다면, 과거의 허준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허준이 의술을 배워도 세상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돈벌이와 출세에만 급급한 의술을 펼쳤을 것이고, 그는 우리 기억속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일수록 우리 모두에게 '유의태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내가 그 같은 배려를 베풀면, 그로 인해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에 의로운 한 사람이 탄생할 수 있다는 행복한 기대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