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2월 3일 연중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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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연중 제4주일 - 마태오 5,1-12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12ㄴ)

<행복한 삶의 비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봤습니다. 어머니 품에 포근히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 얼굴, 그보다 더 행복한 얼굴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복함과 평화로움이 아기 얼굴에 묻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상 전체가 자신의 장난감인양 쥐락펴락 거드름을 피우는 몇몇 야심 많은 정치인들 표정에서는 행복함이나 편안함보다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 두려움의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가난함ㆍ소박함ㆍ온유함ㆍ수용성ㆍ작음…. 이런 단어들은 이 시대에 다들 꺼려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교 수행생활에서 아주 긍정적 색조로 바뀝니다.

돌아보니 수도원 입회 초기만 해도 제 각오는 대단했습니다. '궂은 일은 내가 먼저'라는 구호 아래 '시켜만 주면 뭐든 다 한다'는 굳은 각오로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 어떤 일이든 고분고분 다 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생각하고 위만 쳐다보며 모두를 우러러보며 살다 보니 마음이 그리도 편했습니다. 내 견해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 의견에 따르다 보니 다툼도, 의견 차이도, 스트레스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 완벽한 평화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서원을 하고, 종신서원을 하고, 서품을 받고, 책임자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초심은 슬슬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이제 내가 뭔가 좀 해봐야겠다. 이제야말로 내 포부를 마음껏 한번 펼쳐볼 때다'는 생각이 슬슬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로 마음의 평화라든지, 행복한 생활은 끝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부딪치는 상처투성이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내 계획과 내 주장만을 내세우다 보니 사사건건 이웃들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충돌로 입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상처 부위는 곪아터지고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돌아보니 그 모든 괴로움은 결국 '내가 무엇인가 한번 해보겠다' '내가 주인공이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마음에 '내'가 가득 참으로 인해 가난함, 소박함, 온유함, 작음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 어렵지만 행복한 삶의 지름길임을 언제나 체험하며 삽니다. 아쉽지만 내 의견을 접고 이웃 뜻에 따른다는 것, 서운하지만 내 의지를 접고 공동체 결정에 순응한다는 것, 정말 괴롭지만 내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을 추구한다는 것, 그것이 행복의 보증수표이자 평화로운 수행생활의 본질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수도자로서 가장 행복할 때는 내 뜻대로 뭔가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품에 온전히 안기는 때라는 것을 요즘에야 깨닫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히 접고, 바보처럼 이웃 품에 안길 때 상상할 수 없는 천상 평화와 내면에서부터 진정한 행복이 어느새 소리 없이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 손 안에 노는 것, 그분 품에 안기는 것, 그분 선택에 따르는 것, 그것이 때로 서운하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신앙인들 본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 그 안에는 묘하게도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아직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역경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깨치는 순간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신앙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하실 때, 그분께서 우리 중심에 살아계실 때, 우리는 그 어떤 세찬 역풍 앞에서도 보란 듯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그리스도 그분께서 형성돼 있다면 세상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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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참으로 역설적을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해야 행복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합니다요...

성경 속의 불행한 청년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나라의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시자
그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참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눔에서 온다는 것이 아닐런지...
가진 것을 나누면 나눌 수록 마음이 가난해지고,
마음이 가난해진 만큼 행복해질 것이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습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볼리비아에서 테오도라 수녀님께서 1년만에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지금 현재 나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나눔에 대한 가르침을 기대해 봅니다.
아멘.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