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2008년 4월 16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카테고리:


2008년 4월 16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12,44-50

그때에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요한 12,44-50)


<배려>

여행길에 ‘배려’(한상복, 위즈덤 하우스)라는 책을 한권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잘 썼더군요. 한번 책을 펼치니 도저히 손에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결국 부드러움이 강함을 능가한다는 것, ‘배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극단적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경청, 진심, 상생, 최소한의 예의, 조용한 대화, 합의점의 추구,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려는 마음... 이런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자는 상대방의 무례한 행위조차도 우리의 행실을 바로잡게 해주는 스승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배려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찌감치 깨달은 ‘인도자’는 주인공 위차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건 사람에게 다가서는 첫 번째 예의기도 합니다. 진심을 담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그릇부터 비워놓아야 하는 겁니다.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상대방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또 바바 하리다스란 사람이 지은 이런 일화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걸었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물었다.

“정말 어리석군요.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도 배려의 달인이셨습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차대한 일은 한 인간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역시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배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갖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악령 때문에 죽을 고생하고 있던 사람들, 죄의 사슬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던 사람들, 어둠 속에 갈팡질팡하던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강생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큰 배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때 그 때 우리 인간의 죄를 물으신다면, 우리의 악행 때문에 진노하시고 벌을 내리신다면, 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있을 사람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막가는 세상,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실 텐데도 끝까지 참아내십니다.

결국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행을 끝까지 참아주시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심하게 배려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첨부파일크기
img_2750958_1363644_11(0).gif106.21 KB
a20080207.jpg133.72 KB

댓글

아스퍼거

이번 소공동체 워크샵에서 나온 테마중의 하나가 '섬기는 봉사자'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지만, 몸에 베기에는 누구에게나 쉽지않은 주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과 변화를 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직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인터넷을 대충 찾아보니 '배려'란 책에 대해 평가가 상당히 좋습니다. 회사생활을 배경을 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현실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네요.

그 책 내용에 재밋는 단어가 나오는데, '아스퍼거'란 말입니다.

아스퍼거란 자기 안에 갇혀 남의 입장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일종의 장애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자폐와도 다르며, 이기적인 사람과 그 의미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을 알면서도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만 아스퍼거는 상대방의 입장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과 행동에만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 그것만을 인식할 수 있는 뇌를 가진 사람처럼 남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른다고 하네요.

돌이켜보면, 저 역시 가족과의 대화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공동체안에서 아스퍼거와 같은 행동을 한 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산업사회가 낳은 장애라는 생각도 듭니다. '섬기는 봉사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배려'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에 감사드리며, '배려'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루 하루를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저도...

한참을 아스퍼그 환자로 살았네요.

냉담을 풀고 주님 품으로 돌아 왔을 때
제일 먼저 주님께서 이끄셨던 것이
다른 사람이 나와 성격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고쳐가고 있습니다.

녜,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배려'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안셀모

나의 복음 묵상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정말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지난 것의 잘못을 가려 심판한다면
부끄럽기 그지 없고,
더 이상 버티면서 살아갈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런 저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그래도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알고 따라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롯이 저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의 선택의 기준...
하느님의 말씀이겠지요.
그리고 제가 살아가야할 구체적인 길은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의 가르침을 알고 따름에 있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멘.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