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묵상 】4/22 부활 제5주간 화요일…양승국 신부님
4월 22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요한 14장 27-31절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요한 14,27-31ㄱ)
<한쪽 문이 닫힐지라도>
두려움, 무서움, 이것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두려움은 생존본능과 직결됩니다. 앞발을 쳐들고 달려드는 맹수 앞에 사람들은 즉시 두려움을 느낍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갑니다.
그러나 개념 없는 하룻강아지는 두려움이 없기에 가만있다가 봉변당하기 쉽습니다. 어떻게 보면 두려움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두려움의 종류도 각양각색입니다. 길지 않은 이 세상 우리는 별의 별 두려움을 다 맛보며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노년기에 대한 두려움, 홀로 남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삶 자체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부분 두려움의 대상들은 정확한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두려움의 대상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연히 앞당겨 걱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괜히 안절부절못하면서 스트레스를 자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다양한 두려움 앞에 고생하며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너무 높이 올라가 있어서 그렇게 두렵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두려움은 커집니다. 너무 높이 올라가 있으니 아래로 떨어질 때 충격이 얼마나 클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 저 것 잡다한 것들을 너무 많이 쥐고 있어서 그렇게 두렵습니다. 많이 쥐고 있다 보니 그것들을 잃어버릴까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안고 끼고 지고 살아가는 두려움들, 사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정말 특별한 분이십니다. 한쪽이 꽉 막히면 다른 한쪽을 뚫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한쪽 문을 닫고 나서, 그걸로 끝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더 좋은 다른 문을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신앙인은 두려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품안에서 늘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풍요의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총을 받고 또 받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언제나 평화 속에 머뭅니다. 매일 흔들릴지라도, 매일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더라도, 매일 갖은 형태의 고통에 시달릴지라도 평화 속에 머뭅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화 속에 말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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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의 복음 묵상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즈음 제 마음은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주변 여건이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이 마음의 평화는
남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나의 것을 포기함에서부터 오는 것 같습니다.
한참 잊고 이었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생각납니다.
*** 나의 삶의 자리에 접지하기 ***
오늘부터 다시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하루에 한번 암송해야겠다.
안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