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체를 위하여 : 제1강 하느님의 공동체 계획
앞으로 수차례에걸처 소공동체 활성회에대한 우수한 글/ 좋은강의를 서울교구 자료실에서
이곳으로 옯겨 보겠습니다. '"공동체를통한 복음화"에 대한 개념확립에 도움이 되도록 하느님께 기도합니다.(권혁윤 세례자오한)
1부. 공동체라는 개념
1. 공동체라는 말의 의미
1) 우리말
공동체라는 단어는 혈연 또는 지역, 나아가 정신적으로 연대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혈연은 가족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가족 공동체이며 지역은 일정한 지역 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이다.
본당은 일정한 본당의 지역 안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집단을 본당 공동체라 한다. 같은 신앙을 통하여 모인 공동체를 신앙공동체라 한다.
2) 한자말
공(共)은 한가지 공의 의미뿐만 아니라 법될, 공경할, 무리 공의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을 법으로 공경하는 무리의 하나된 모습이라는 뜻이다.
동(同)은 같을 동의 의미뿐만 아니라 한가지, 무리 동의 의미도 있다. 모여서 화합하는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체(體)는 몸이라는 의미와 함께 지체를 뜻한다. 따라서 공동체(共同體)란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을 마땅히 공경하여야 할 지체로서 한 무리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3) 서양말
영어로 공동체는 Community이며 이 Community는 Communion(친교, 사귐, 영성체)과 Unity(일치)라는 의미의 합성어이다. 친교와 사귐을 통하여 일치를 이루는 모습을 공동체라 하며 우리가 미사 중에 영성체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바로 Communion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과의 사귐의 극치를 말하고 있다.
2. 심리학적인 면
공동체라는 의미는 심리적으로 다음의 4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화, 사귐, 목표, 활동이다. 공연장이나 야구장, 극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공동체라고 하지 않는다. 공연이나 야구, 영화를 보러 온 것이지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사귐은 반드시 대화를 필요로 하고 또한 대화가 깊어져서 사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인 이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있거나 그 목적이 다르면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목표를 가졌으면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수단이나 도구가 같아야 하는데 그것을 활동이라 한다. 활동을 함께 해야 공동체로 느끼게 된다.
요사이 우리의 본당들은 규모가 커지면서 대중화되어 가고 있다. 이처럼 본당의 모습이 공동체이어야 하는데 대중화되어 간다는 것은 공동체로서 본당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본당에서 이웃과 대화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또는 본당의 사목 목표를 아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화를 하지 않거나 사목 목표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동체로서 함께 알아야 하고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당에 적을 두고 있는 신자로서 아무런 소속감도 없이 본당 신자들과 사귐이 없거나 함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활동이 없다면 결코 그 집단은 공동체가 아니다. 단지 대중화에 빠져 있을 따름이다.
3. 신학적인 측면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고린 12,12-13)
몸은 여러 지체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 한 공동체도 여러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여러 지체들은 모두 똑 같은 지체가 아니라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을 바로 공동체라 하는 것이다. 본당이라는 개념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분의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모두가 아버지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하여 삶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며, 우리 각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2부 하느님의 공동체 계획
“하느님은 세상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인간이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공동체 계획을 완성하신다.”
“하느님은 구원시초부터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지 않고 공동체의 지체로 뽑으셨다.” (사목헌장 32항)
1) 공동체이신 하느님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창세 1,26)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은 창조하시고 이 인간의 모습을 당신을 닮게 만드셨다고 표현하신다. 당신의 모습을 복수로 표현하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구나.” (창세 3,22)
아담이 범죄한 후 동산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동산을 거닐다 숨어 있는 아담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역시 당신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삼위일체의 모습을 구약에서 이미 다 표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삼위일체의 온전한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사랑의 공동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외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태초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었다.” (사목헌장 12항)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깊은 본성으로부터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인간의 창조는 플라스틱 용기를 만들 때 뜨거운 사출기(밀어내는 기구)를 통하여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것처럼 하느님에게서 뜨거운 사랑이 분출하여 나오는 것을 연상하여 보라.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강조하신다.
부부가 서로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면 어딘지 모르게 닮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부자지간에도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눈에 나타나지 않는 마음씀이 닮는다고 한다. 그것은 같이 생활하고 함께 이해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서로 닮아 가는 것처럼 하느님은 공동체적인 삼위일체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통하여 부부가 되게 하시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다. 새 가정은 세상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게 하셨다. 아담에게 필요한 짝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잠자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 하나를 뽑아 만드셨다는 표현은 바로 서로에게 긴밀한 관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도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도록 하셨다. 하와의 창조에 아담이 얼마나 기뻤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
이렇게 애타게 고대하던 바를 얻은 모습의 표현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사랑의 공동체를 축복하셨다.
3) 공동체의 분열
사람이 낙원에 머물 때는 하느님과 사람이 공동체로 살았다. 하느님과 더불어 낙원에 머물며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고 나서는 알몸이라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져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의 눈길을 피해 몸을 숨겼다.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창세 4,8)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었다. 죄가 들어와 두 형제를 갈라놓았다. 죄는 부끄러운 것이며 자연히 숨기고 감추게 된다. 이렇게 죄책감이 드러나는 결점을 감추게 하며 숨기게 한다. 이것은 분열과 단절의 시발점이 되었고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낙원에서 추방당하여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죄로 인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죄로 인한 이기심으로 싸우게 되고 다투게 된다. 결국 죄는 모든 단절의 원인이며 또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요인이다.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였고 하느님께 대립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지만 하느님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지 않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흐려져 창조주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섬겼다.” (사목헌장 13항)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로마 7,24-25)
4) 예수님은 화해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자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제시하신 분이시다.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고 이기심으로 인하여 화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다. 희생제물이란 바로 화해를 위해 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파견하셨다. 이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죄로 분열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오신 화해자임을 드러내셨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후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해주시려고 오셨다.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화해의 삶을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 12,50)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고린 3,16)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1고린 6,19)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교회를 전파하게 하신다. 또한 교회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임을 드러내게 하시며 이끌어 주신다.
공동체라는 의미를 살펴보면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공동체이시고, 우리가 각자 개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공동체를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을 성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알게되었다.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잘 인식하고 우리가 세상 안에서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소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분열된 공동체를 재건하여야겠다.
이용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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